〈 154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갈림길을 가면 갈수록, 전체적인 통로의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그 말은 곧 적과 싸우는 주기가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 투웁 ! 휘익!
“조심하세요!”
나는 용병의 목덜미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밑에서부터 쏘아진 뼛조각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뒤통수를 스쳤다.
용병을 맞추는 것에 실패한 뼛조각은 나의 얼굴을 노리고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돌리며 공격을 흘리는 것에 성공했다.
“으어억! 고,고마워!”
“확인 사살은 하셔야죠.”
“사,살아 있는 줄 몰랐네…”
뼛조각을 쏘아낸 놈을 보니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저 작품을 만든 이 용병은 놈이 즉사했다고 판단했나보다.
허나 즉사는 아니었다.
저대로 5초만 내버려 두면 곧 죽겠지만…
놈들이 원거리 공격에 필요한 준비 시간은 3초면 충분했다.
고통도 느끼지 않으니 망설임 없이 뼛조각을 쏘았고, 덕분에 용병이 죽을 뻔했다.
몇 번이고 사죄와 감사를 보내는 그에게 웃으며 앞으론 조심하라고 대답해 주었다.
술을 한번 사주겠다고 하지만,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남자들끼리 먹는 술이 무슨 재미인가?
그저 형식적으로 기대 하겠다고만 말했다.
“하아… 하아… 차,찬영은… 도무지 지치질 않네…”
다른 용병들은 전부 돌아가면서 전투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크리스는 모든 전투의 선두에 섰다.
우리 둘은 어둠 속에서 쏘아지는 뼛조각을 쳐내야 했기 때문이다.
나와 달리 체력 회복 능력이 없는 크리스로서는 꽤나 고된 일정이 되었다.
나는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죽여서.
- 소근소근.
“…피곤하면 좀 쉬다 올까? 지구로 돌아가서.”
“…으음…”
내 제안에 크리스가 고민을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후열에서 쉬게 하고 싶다.
크리스가 없더라도 날아오는 뼛조각쯤은 혼자 전부 쳐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성격상 절대 나를 혼자 보내지 못하리라.
“너 마나도 다 써가잖아. 잠깐 다녀오자.”
“그럴까… 엇?”
“응? 왜 그래?”
“찬영… 뺨에 상처가 났어!”
“그래? 아까 뼛조각을 피하다 스쳤나 보네.”
그녀의 말에 뺨을 더듬었다.
매끈한 피부에 미세한 실선이 느껴지긴 하는데…
뺨에서 손을 떼어 상처를 만진 손가락을 봐도 피가 묻어 있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스치듯 지나간 것이다.
내 예민한 촉각이 신호를 보내지 않을 만큼.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 정도 상처면 흉도 안 진다.
그러나 크리스는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다.
“도,독이!”
“독?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설령 독이 침투했다고 한들 아주 미세한 양이다.
『자연치유』의 덕에 극소량의 독은 순식간에 중화시킬 것이다.
늪지 왕도마뱀의 독이 극독도 아니고, 특성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이 정도의 적은 양은 영향이 없다.
사람의 간은 의외로 해독을 정말 잘하니까.
그 예시로 원작 속 자넷은 뼛조각에 직격했음에도 해독약 없이 몇 주를 버티기까지 했다.
“애초에 그리 위험한 독은…”
“안돼! 빨리 해독약 먹어.”
크리스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저 굳은 얼굴을 보니 해독약을 먹는 것을 볼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듯했다.
약간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넷에게 향했다.
이런 사소한 것으로 실랑이하기 보다는, 얌전히 해독약을 먹는 것을 선택했다.
그저 나를 걱정 하기에 하는 말이니까.
해독약을 먹는 것에 내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 꿀꺽.
“으… 떫네. 좀.”
“그래도 잘했어!”
크리스가 별 반항 없이 해독약을 먹은 나를 칭찬 했다.
손을 높이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 스윽. 스윽.
“크리스. 이 손 뭐야?”
“애정표현!”
장난스럽게 웃음을 흘리며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약을 먹기 싫어서 칭얼대는 애를 다루는 것 같다.
약간 기분이 좋기도 하고, 가슴 속이 간질간질하기도 하며, 어쩐지 괘씸해지기도 한다.
보답 삼아 무방비하게 드러난 크리스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꺅!”
방금의 장난을 시작으로 약간의 장난이 오갔다.
다른 말로 연인 사이에 스킨십이 오갔다.
분위기가 은근슬쩍 바뀌기 시작했다.
약간 핑크빛으로.
“…지구로 갈래? 이어서 하고 싶은데.”
“읏!… 그… 응…”
- …끄덕.
크리스가 내 직구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의 마나를 회복하기 위해 지구로 가야 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목적은 아닌 귀환이다.
*
- 쏴아아!!
뜨거운 물이 욕실을 덥혔다.
땀과 말 못 할 체액에 젖어 끈적해진 몸을 씻어 간다.
습기가 찬 거울을 손으로 닦아내었다.
“벌써 다 아물어 가네.”
뺨에 상처가 나 있다.
다른 차원에서 입은 상처가 지구에서도 이어진 것이다.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창 내 손에 굳은살이 생기고 있을 때, 지구에서도 미약한 상처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이거 좀 문제가 되는 게 아닌가?’
이런 작은 부상은 괜찮다.
그러나 소설 속 세상에서 입은 큰 부상이 동기화된다면…
문제가 될 여지가 있었다.
마침 내게 호의가 가득 들어찬 천사도 집에 있다.
나는 대충 몸의 물기를 닦고 옷을 입으며 안젤리를 찾았다.
“안젤리. 잠깐 괜찮아?”
“찬영? 차 마시게?”
“그것도 좋지. 다름이 아니라 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얼마든지!”
나는 찻잔을 들고 온 안젤리에게 내가 떠오른 의문을 물어보았다.
다른 차원과 지구, 그리고 또 다른 차원에서 내 상처가 공유되는지에 대해.
“어라? 시스템이 알림창을 안 보내 줬어?”
“응. 못 본 것 같아.”
“와아! 대단해! 찬영은 아직 피를 많이 흘릴 정도의 부상을 한 번도 입은 적이 없구나?”
“음… 피를 볼 정도의 부상은 원숭이 한 마리랑 싸울 때 한 번 있기는 했는데, 지구로 돌아오기 전에 포션으로 치유했지.”
“아하. 그러면 알림창이 아직 안 떴을 법하네.”
안젤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이런 것은 딱히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다며, 내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건 전부 시스템 AI가 판단 하는 거야.”
“시스템 AI가?”
“응! 정말 사소한 상처나 흉터 같은 건 공유가 되는데, 정도 이상의 흉터는 공유가 안 돼.”
“그 정도 이상의 기준은?”
“대략… 병원에서 치료가 필요한 정도의 상처? 가령 손가락이 칼에 깊게 베였다든지.”
“좀 살가죽이 까지고 스친 정도는 공유가 된다는 뜻이구나.”
“맞아! 공유를 완전히 막으면,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되니까.”
안젤리의 말이 맞았다.
무술을 익히게 되면 굳은살이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다른 차원에 가야 할 때마다 새로 굳은살을 만들어야 한다니…
무시할 수 없는 패널티다.
‘완전히 공유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별개로 분류된 것도 아니다라… 오히려 더 좋은데?’
몸에 물이 묻은 건 지구로 돌아가도 똑같이 유지가 되었다.
소설에서 단련한 근육도, 손바닥에 남은 굳은살도 확실하게 지구와 동기화된다.
허나 상처나 흉터는 달랐다.
안젤리의 설명대로라면…
내가 소설 속에서 큰 상처를 입어도, 지구로 돌아가면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해진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다시 소설에 들어가면 몸이 회복되어 있는 것은 아니란다.
다친 곳은 그대로 유지 된다.
마치 게임 캐릭터의 HP 상태를 세이브·로드하듯이.
‘칼에 배가 꿰뚫려도 다른 소설로 들어가 치료하고 온다는 꼼수는 안 통한다는 거네…’
세계마다 상처가 공유되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할 조치였다.
혹시 공유가 된다 가정해 보자.
만약 내가 소설 내부에서 배가 활짝 열린 정도의 치명상을 입고 지구로 돌아갔을 때,
상처가 유지되어 지구에서 죽게 된다면?
부활이 불가능하다.
지구는 소설 속 세계가 아니니까.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 안젤리를 천국에서 봐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짬 처리용 세계를 만드는 방식으로도 악용이 가능하다.
소설을 진행하다 위기에 처해 죽기 직전, 다른 소설로 넘어가 그 소설에서 상처를 안고 죽는 것이다.
그러면 한창 진행 중인 소설에는 완결 보상이 깎이지 않는다.
부활해서 몸이 완전히 회복되는 건 덤이고.
퍼팩트 클리어의 완결 보상은 랜덤 특성이었다.
그리고 진입 가능한 소설란 하나를 소모한다면, 다른 모든 소설을 퍼팩트 클리어로 깰 수 있다.
꽤나 군침이 도는 거래 아닌가?
“좀 위험하기는 해도, 잘 써먹으면 엄청 유용 할 뻔했는데… 아쉽다.”
“그 정도의 큰 버그는 당연히 막아 놔야 하지!”
“아무리 너희들이라도 그렇게까지 구멍이 숭숭 뚫리지는 않았나 보네.”
“나,나 일 못 하지 않는데…”
안젤리가 시무룩해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식어가는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내 고정관념은 전부 네 후배 탓이니 어쩔 수 없어.”
“우으…”
몇 번이나 말하지만, 천사들의 이미지는 첫인상이 너무 깊게 박혀 들어가 버렸다.
무능하다고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허나 유능한 이미지는 절대 아니었다.
풀죽은 안젤리의 얼굴을 푸는 방법은 간단했다.
화제를 돌려 단순히 잡담을 하는 것만으로도 안젤리는 좋아했다.
가끔 말없이 손을 잡거나 눈을 맞춰주면 더더욱.
*
문양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원작의 묘사대로라면 기연이 엮인 문양은 함정과 달리 푸른색이 아니다.
유적의 사방을 두른 연금석과 정말 똑 닮은 회색의 문양인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횃불과 랜턴에서 나오는 미약한 빛 아래에선 쉽게 찾을 수 없으리라.
시력이 좋은 나도 집중해 수색을 해야 했다.
“이번에는 오른쪽.”
다시 마주친 갈림길.
자넷이 지시에 우리는 오른쪽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바닥에 새겨진 함정을 조심히 피하고,
실험체들을 처리했다.
오른쪽 벽을 살펴보아도 보이는 문양은 없었다.
이 통로도 아닌가 보네, 하고 어렵지 않게 납득했다.
미로의 끝에 도착 할 때까지 문양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한들 이상치 않았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원작에서 멜 일행이 가던 길과 차이가 날 확률이 너무나 높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점은 문양을 찾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미로의 끝에서 역으로 더듬어 가며 문양을 찾으러 가면 된다.
멜이 문양을 발견한 곳은 끝에서 멀지 않은 장소니까.
단독 행동이 되겠지만, 감수하면 된다.
‘느긋하게 생각하자.’
조급하게 행동할 생각은 없었다.
원작에서 자넷이 미로의 끝을 찾은 건 2주일이 넘게 지나서였다.
그녀를 구함으로써 많은 시간을 번 것이다.
“뭐가 있는 건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다른 용병들과 함께 실험체의 시체를 수습하던 그때.
좀 떨어진 곳에서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멜의 목소리다.
그녀 역시 정식 단원이었기에 이번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그녀를 돌아보았고,
멜의 시선이 왼쪽 벽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은…
명백히 원작에서 읽은 적이 있는 모습이다.
온몸을 소름이 더듬었다.
‘왼쪽이라고? 어째서?’
- 휘익!
내 시선이 빠르게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을 찾았다.
시력이 평범한 멜과 달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외벽과 희미한 명암의 차이를 가진 문양을.
문양?
틀렸다.
저것은 문양이 아니다.
나는 왼쪽 벽에 새겨진 저것을 문자라고 인식했다.
테라포밍에서 엘프의 언어가 그렇듯,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브리카(ˈeβrika)?…’
‘깨달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다.
저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멜의 행동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 스윽.
멜이 문양이 새겨진 벽에서 몇 걸음 떨어진다.
품 안에 있는 주머니에서 쿠퍼 한 개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세로로 주먹을 세워 손 위에 동전을 올리더니,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동전을 튕겼다.
원작 소설대로.
- 티잉!
“멜!!”
“…찬영님?”
- 탁탁탁!!
청명한 소리를 낸 동전이 문양을 향해 천천히 날아간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멜을 향해 다가갔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 사념각(邪念脚)까지 사용해 가며.
저 문양이 원작의 기연이 맞다면, 멜은 전혀 위험한 상황이 아니다.
얻게 되는 것은 이득 밖에 없을 테니까.
내가 이처럼 긴장에 찬 채 그녀를 향해 뛸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감이 맹렬히 경고하고 있었다.
나는 멜을 붙잡아야 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녀를 잃게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손!”
“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손을 잡는 것에 성공했다.
멜의 당황한 얼굴이 눈에 담겼고, 동전이 문양에 닿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리고 나와 멜은 촛불이 꺼지듯 사라졌다.
크리스를 비롯한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