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실험체 일곱 놈을 시체로 만드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굳이 포획하지 않아도 되었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돈이 안 된다는 이유였다.
독이 있는 놈들이다.
생포해 놓으면 실험체들이 얌전히 있을 리 없다.
“…적당히 시체만 주워다 팔아도 사려는 마법사나 학자는 줄지어 서 있을 거야.”
자넷은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아까부터 표정이 별로 밝지 못하다.
목소리 역시 힘없이 축축 처졌다.
항상 실실 웃으며 농담을 하는 그녀치고는 상당히 의외의 변화다.
마치…
풀이 죽은 것 같아 보였다.
그 이유에 대해 어림짐작을 해보자면…
내게 목숨을 빚졌기 때문일 수도, 아니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부상을 입은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녀 내면의 감정 변화에 대해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허나 나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종종 일렁이는 눈빛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갈색빛 동공에 한 글자로 정의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확실한 것은, 연심이나 적의는 아니었다.
“파계승 너와 크리스가 깔끔하게 처리해서 좋은 값을 받을 것 같네.”
목 뒤의 척추가 깔끔하게 잘린 시체가 넷,
두개골이 깨져 움푹 들어간 시체가 셋.
공통적으로 몸쪽에 상처는 없었다.
용병의 기준으로는 깔끔한 처리가 맞다.
이 시체를 구입 할 학자와 마법사는 손상된 머리 부분을 보고 거품을 물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신경 써줘야 할 것은 못 되었다.
새로 발견된 몬스터의 시체.
공급량보다 구매를 희망하는 자가 몇십 배나 많을 것이다.
분석하기 위해 몸이 달아오를 사람들은 그들이니까.
“…너네 둘이 해치운 놈이니까, 수수료 약간만 떼먹고 전부 줄게. 판매 대행 값으로.”
“예? 꽤 후하게 쳐주시네요? 저희는 용병단 안에 소속되어 있는데.”
견습 딱지를 벗고 정식 단원이 된 지금.
용병단 활동 중 발생하는 수익은 일부 분배를 해야 옳다.
허나 자넷은 이 분배를 감면해 주겠다고 한 것이다.
돈을 좋아하는 자넷 치고는 꽤나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경우 원래의 분배대로 가면 용병단이 절반을 먹어야 해. 어때. 네 생각보다 많지?”
“…절반이라… 아무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퇴로를 봐주고 있고, 해독약과 횃불 등등의 보급품을 대준 것을 생각해도… 좀… 많네요.”
생각보다 무거운 분배율에 깜짝 놀랐다.
2할이나 3할 사이면 크게 반발하지 않으려 했는데…
절반이나 빼앗기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놈들이 한두 푼 하는 것이 아니란 거야. 우린 뒤에서 구경만 했는데, 너 감정이 하나도 상하지 않은 채 절반이나 떼줄 자신 있어? 참고로 얘들 시체 한 구당 최소 가치가 금화 단위야.”
그제서야 납득했다.
용병단에 분배해야 하는 돈이 쿠퍼나 실버 단위라면 약간 짜증 나는 정도로 그칠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단원 역시 공통적으로 지키는 규칙이니까.
‘내가 이 세계에 처음 있던 마을에 나무를 팔고 받은 3 실버. 이걸 절반으로 나누자고 했으면, 많이 화나지는 않았을 거야. 정작 그때는 용병패를 받기 전이라 분배에서 면제되었지만.’
허나 나눠야 하는 돈이 골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처음 금화를 받은 멜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절대 흔히 볼 수 있는 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난하기 그지없는 이 왕국에서는.
“…부끄럽지만 장담을 못 하겠네요. 저는 돈을 모아야 할 필요가 있고, 아무래도 액수가 꽤나 크다 보니…”
“봐봐. 이런 큰 놈은 먹으려 들면 칼부림 난다니까?”
자넷이 나를 향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깊은 탈력감을 담은 한숨이 입에서 빠져나왔다.
‘…침울해 하는 이유가 나와 크리스에게 수익을 전부 빼앗길까 봐 그랬던 걸까?’
눈앞에 금화가 걸어 다니는… …벽에 붙어 다니는데, 자신은 손을 다쳐 줍지 못한다니?
누구라도 속이 썩을 만 하다.
하물며 금전에 관심이 많은 자넷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 높은 가설에 그쳤다.
방금전 그녀가 나를 향해 보여주었던 그 복잡한 눈빛은…
아무리 봐도 질투나 부러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장 자넷의 표정에는 출처 모를 체념이 담겨 있었다.
‘지금 칼에 찔려 죽을래, 아니면 1년 뒤에 죽을래?’라는 터무니없는 이지선다에서 어쩔 수 없이 후자를 고른 것만 같은 표정이다.
아무리 돈을 좋아하는 그녀라지만 고작 몇 골드 가지고 저런 죽상을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녀가 풀 죽은 이유는, 내가 모르는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용병단 자체가 박살 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가장 흔한 건 돈을 뜯긴 놈이 정떨어져서 용병단을 떠나는 것이고.”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방금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간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정이 떨어져 용병단을 떠나는 대부분이다’.
그것을 방지하고 싶다는 자넷의 내심이 표출된 것이리라.
‘적어도 자넷이 보는 나와 크리스의 가치가 금화 열댓 개 보다는 훨씬 값지다는 뜻인가…’
앞으로 이런 식으로 계속 분배가 면제해 주지는 않을 것이란다.
하얀 고래의 모두가 고급 인력이니, 제 몸값은 챙겨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온 해답은 간단했다.
앞으로 크리스와 둘이서 처리하는 대신에, 다른 이들과 함께 돌진하기로 했다.
나는 가장 선두에 서서 날아오는 뼛조각만 쳐내 주면 된다.
색적과 엄호, 그리고 내 손으로 끝장낼 실험체까지.
이것만으로 나는 꽤나 커다란 비율의 분배를 약속받았다.
자넷과 조율한 합의점은 만족스러웠다.
*
드디어 첫 갈림길이 우릴 반겼다.
그 말은 이제 곧 함정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뜻이 되었다.
그리고 이 미로의 끝에는 기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왼쪽? 오른쪽? 어디로 가시렵니까?”
부단장이 후방에 선 자넷을 향해 물었다.
전투가 아닌 결정까지 그가 할 필요는 없었다.
자넷은 왼쪽 통로와 오른쪽 통로를 유심히 둘러보았다.
내가 봤을 때 두 통로의 차이점은 없었다.
당연히 나는 정답으로 향하는 길을 모른다.
애초에 지금 들어온 이 통로가 원작 속 주인공 일행이 들어간 통로인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처음 실험체를 만났을 때 놈들의 숫자가 세 명인 것은 똑같았지만…
원작 속 그들은 첫 탐사에서 피해를 입었고, 급하게 후퇴를 해야 했다.
당연히 우리와 달리 통로 입구에 표식은 남기지 못했다.
다시 진입한 통로가 처음 들어간 그 통로인지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두 통로가 전혀 다른 통로일 가능성은 차고 넘쳤다.
이 기괴한 유적은 미로의 출입구만 수십 개를 넘으니까.
‘그리고 티끌만 한 우연으로 원작과 같은 통로를 거닐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의미 없지.’
앞으로 마주칠 갈림길만 스무 개를 넘는데,
그걸 소설 속에 왼쪽이니 오른쪽이니 전부 설명하는 작가는 없었다.
분량 뻥튀기라고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정답으로 향하는 길을 하나도 모른다.
그러나 걱정은 전혀 없었다.
자넷의 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택일』.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높은 확률로 옳은 선택을 내린다.
자넷의 경우 금전적인 부분에 한해서만.
이 미로는 두 개의 갈림길밖에 없었고, 끝에 있는 것들은 돈 나가는 것이 존재했다.
그녀의 특성이 발동할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원작 속, 부상을 이겨 낸 자넷이 한 번에 정답으로 향하는 통로를 찾은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왼쪽. 저 길이 마음에 드네.”
깊게 고민할 법도 했지만, 자넷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한 통로를 집었다.
시스템은 소리 없이 조용했다.
허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특성이 발동했으리라.
‘역시! 자넷을 구한 건 좋은 선택이었어!’
예상했던 결과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온다.
이대로라면 내가 찾는 기연까지 한걸음에 다가갈 수 있다.
원작처럼 어마어마한 시간을 헤매지 않아도 된다.
- 치지직…
멜이 통로의 벽에 횃불을 지졌다.
금세 시꺼먼 재가 달라붙었다.
게다가 그 위에 끈적한 송진까지 발라가며 재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자넷의 손을 희생시켜가며 깨달은 이 유적에서 표식을 새기는 방법이었다.
- 저벅. 저벅.
왼쪽. 오른쪽. 다시 오른쪽.
한번 갈림길에 들어설 때마다 다섯 이상의 실험체가 우릴 반겨주었다.
전투를 겪으면 겪을수록 용병들의 대응은 능숙해졌다.
쌓인 시체는 전부 들고 갈 수 없다.
차선책으로 하얀 고래만의 표식을 단검을 이용해 피부에 새겨 넣었다.
어차피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전부 흔적을 남겼으니, 되찾기도 편할 것이다.
“으음… 파계승아. 이 ‘데이비드슨’들은 동족의 시체를 먹을까?”
“살아 움직이는 이상 무언가를 먹겠지요. 놈들은 지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으니,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역시 그러려나… 조금이라도 훼손되지 않기를 기도할 수밖에.”
자넷은 아까운 얼굴로 쌓인 시체를 바라보았다.
나는 실험체들이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미각과 촉각이 없기에 허기와 식욕 역시 없다는 것 역시 안다.
이 시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말해서야 너무 수상하다.
수도승의 비술이란 핑계로 능력을 감추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별 도움 되는 정보도 아닌데, 굳이 밝힐 이유는 없었다.
“이번에는 왼쪽.”
어김없이 벽에 붙어 우리를 반겨주는 놈들이 보인다.
나는 소리를 내 적이 있음을 알렸다.
“좋아. 빨리 해치우고…”
“멈추세요!!”
“뭐,뭐? 왜?”
나는 달려 나가려는 용병 단원을 급하게 제지했다.
당황한 그가 나를 의문 어린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대답 대신에 손끝으로 용병의 앞쪽을 가리켰다.
내 손끝이 향한 통로의 바닥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함정입니다.”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마력 함정, 라이트닝
종류: 마법
레벨: 7
효과: 전류 방출
상세:
새겨진 문양에 일정 이상의 충격이 가해지면 발동합니다.
대상에게 라이트닝 마법을 시전 합니다.
Lv 7의 라이트닝 마법을 담고 있습니다.
Lv 5 이하의 마법 저항 술식을 무시합니다.
* 알 수 없는 이유로 마법 유지 시간이 ‘영원’으로 변경되었습니다. - 아이템 정보 확인 Lv 2
* 알 수 없는 이유로 발동이 되어도 자연적으로 함정을 수복합니다. - 아이템 정보 확인 Lv 2
=
저걸 밟는 순간 죽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재가 될 것이다.
다행히 내가 바닥을 잘 주시하고 있었기에 대비할 수 있었다.
유적 주인의 악랄함을 느낄 수 있었다.
통로를 진입 한지 한참이나 지났고,
심지어 갈림길을 몇 번이나 마주쳤음에도 함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유적에 함정은 없으리라 방심하기 딱 좋은 때인 것이다.
“그거 밟으면 죽습니다. 절대 밟지 마세요.”
“미,미친…”
내 경고에 용병이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함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함정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함정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밝혀졌다.
이들은 더이상 방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피해 가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나는 문양의 옆을 멀찍이 지나가며 말했다.
모두들 조심히 함정을 피해 돌아갔다.
- 께에엙! 투웁 ! 티잉!
실험체를 처리한 것은 그 이후가 되었다.
뼛조각은 바로 코앞에서도 용병들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벽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시발. 왜 이 새끼들이 벽에 기어 다니나 했는데,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였어?”
“그런가 보네요.”
자넷이 욕설을 내뱉었다.
굳이 벽에 붙을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바닥을 걸었으면 이미 이 유적에 살아 있는 실험체는 없었을 것이다.
함정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바닥에 깔린 문양으로 존재했으니까.
의외로 함정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함정의 문양은 전부 푸른색으로 그려져 있다.
‘연금석’의 짙은 회색과는 전혀 다른 색인 것이다.
주의만 기울인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다.
‘…내가 찾는 건 꽤 발견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시간을 들여서라도 찾아야 해.’
나와 자넷의 목표는 같지 않았다.
그녀는 미로의 끝에 있는 재화가 목표이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원하는 기연은 이 미로의 끝에 있지 않았다.
그 중간 통로에 있었다.
내가 줄곧 찾고 있는 것은 이 함정과 비슷한 문양이다.
함정과의 차이점은 바닥에 존재 하지 않는 다는 것.
원작 소설대로라면 오른쪽 벽 상단에 새겨져 있다.
그야말로 함정을 찾기 위해 바닥만 살피게 되는 침입자들의 허점을 찌른 위치였다.
‘원작에선 멜이었기에 발견 할 수 있었나 보네. 걔는 『집중』 특성 덕에 전투 시 시야가 넓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