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깊게 깔린 어둠을 횃불과 랜턴의 미약한 빛이 밀어낸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지나온 길은 앞과 마찬가지로 시꺼멓게 물들어 있다.
때에 맞지 않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게이머에게 겁을 주기 위한 삼류 공포 게임의 장치가 연상 되었기 때문이다.
이 유적에 출몰하는 놈들의 외모를 생각해 보면 공포 게임이라 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놈들의 이름이 ‘데이비드슨’이라는 무척이나 귀족적인 이름이란 것을 듣기 전까지는.
어디 멋들어진 화장대 앞에서 진중한 얼굴로 수염을 다듬고 있을 누군가가 연상되어, 긴장감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 저벅! 저벅!
수십 명의 발자국 소리와 광원에서 흘러나오는 빛.
예민한 감각을 가진 몬스터라면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우리를 감지할 만 했다.
그러나 실험체는 예외였다.
놈들은 시력도, 청력도 없다.
- 스윽.
가장 앞에 선 부단장이 손을 들어 올리자 모두가 멈추었다.
손을 들어 올린 이유는 간단했다.
앞길에 함정이 있는지 신중히 살피기 위해서다.
그의 지시는 그의 성격을 닮아 묵묵히 이루어졌다.
- 저벅! 저벅!
확인이 끝나자 다시 전진.
우리는 이 지루한 일을 일 분을 주기로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로에 함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필요한 일인 것을 인정했다.
가장 선두에 선 것은 부단장, 방패를 든 용병 몇 명, 그리고 나와 약간 뒤에 선 크리스였다.
우리 둘은 이제 막 신입 티를 벗기 시작한 단원이지만, 손에 꼽을 정도로 강했다.
적어도 크리스와 나는 기습적으로 쏘아지는 뼛조각을 쳐낼 수 있다.
어둠에 시야가 많이 가려지지 않으니까.
“이봐 파계승. 네가 강한 건 알겠는데… 정말 괜찮겠어? 너 혼자 방패도 없이.”
뒤쪽에서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만 들어도 자넷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걱정은 합당했다.
99개의 뼛조각을 전부 쳐내어도, 하나를 허용한다면 크게 다칠 테니까.
그러나 괜한 걱정이다.
“장담하죠. 괜찮습니다.”
“지금이라도 방패를 들지 그래?”
“써본 적이 없어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지랄. 그냥 들어서 막기만 하면 되는 걸 뭘 그리 고집을…”
“아까 손등으로 뼛조각 튕겨 내는 것 못 보셨습니까? 제 손이 곧 방패죠. 숨 쉬듯 사용할 수 있는.”
“…너 그러다 뒤지면 나 존나 찝찝하다?”
“감동이네요. 이러다 정분나겠어요?”
“프흐… 미친놈.”
자넷은 결국 피식 웃으며 물러났다.
생각보다 약한 반응이다.
괴짜인 그녀라면 방금의 농담을 좀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하긴, 손을 다쳐서 피곤해 보이긴 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오만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혀 아니야.’
내가 이토록 확신하는 이유가 있다.
오감이 말해주었다.
지금 지상에는,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순식간에 시야가 넓어졌다.
실험체의 사정거리보다 내 시야가 더 길 것이다.
처음과 달리, 더는 기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봐 크리스. 네 연인 저리 내비둬도 되냐?”
“…난 찬영을 믿을 거야.”
“쌍으로 꽉 막힌 놈들. 잘 어울려 아주.”
평소의 크리스라면 거리낌 없이 나를 믿는다고 말했을 것이다.
허나 약간의 망설임 끝에 나온 대답은 ‘믿고 있어’가 아닌 ‘믿을 거야’.
크리스 역시 어느 정도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내 위기 아닌 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덜해졌네. 몇 주 전만 해도 이런 위험한 짓을 한다고 하면 울상을 지었을 텐데.’
차마 말리지는 못하고 속을 한참 썩였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내 곁에 꼭 붙어 있을 뿐, 심각할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나를 향한 믿음이 트라우마를 점점 넘어서고 있다는 의미다.
매일같이 하는 대련에도 큰 영향을 받았을 테지.
크리스는 그 누구보다 나의 강함을 잘 알고 있으니까.
- 저벅저벅.
“…잠깐 멈추시죠.”
내 말에 부단장을 비롯한 모든 단원의 발걸음이 멈춘다.
그 시선은 전부 말을 꺼낸 나를 향해 있다.
“음… 무슨 일이지?”
부단장이 나를 바라보았다.
저리 무뚝뚝한 얼굴로 바라보니 위협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아닌 것을 알고 있다.
이 용병단에서 나에게 호의를 품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건 부단장 역시 마찬가지다.
두피 기름이 내려앉은 그의 대머리는 횃불의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시력이 강화되었다고 눈이 더 부시는 것은 아니지만, 좀 부담된다.
나는 슬쩍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좀 많네요. 앞에 일곱 놈 있습니다. 그… 데이비드슨이요.”
“일곱 놈이라면… 파계승 너… 보여?”
“그러니까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더이상 놈들에게 당할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자넷이 뒤에서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다른 단원 역시 다르지 않았다.
부단장마저 입을 멍하니 벌렸다.
애초에 부단장은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그들의 상식으로는 저 멀리 떨어진,
심지어 어둠에 몸을 숨긴 적을 보는 것이 그리도 신기하나 보다.
난 오히려 부단장의 그 쇠뇌술이 더 신기하던데.
“그것도 수도승의 비술? 아까 손이 단단해지는 것과 같은?”
“맞습니다.”
“이런 씹! 도대체 비술이 몇 개야? 물건 감정에, 손이 강철처럼 변하지, 이젠 어둠까지 꿰뚫는다? 네가 자라 온 수도원에는 다 너 같은 괴물만 있냐?”
“제가 특이한 겁니다.”
나는 슬쩍 몸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그런 나를 본 크리스가 나란히 곁에 섰다.
이대로 느릿하게 거리를 좁히면 놈들의 공격에 한참이나 노출된다.
근접전에 취약한 놈들이다.
이쪽에서 빠르게 다가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기연이 있는 곳까지 빠르게 다가가야 하는 만큼, 최대한 시간을 줄여야 한다.
쇠뇌는 못 쓴다.
아무리 사격 실력이 좋은 부단장이지만, 빛으로 놈들의 모습을 밝혀야 맞출 수 있다.
원작에서 그의 저격술이 빛나지 않은 이유다.
“저랑 크리스 둘이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녀도 저만큼은 아니지만 어둠을 꿰뚫을 수 있어서.”
실험체의 수는 일곱.
많아 보이지만, 뼛조각을 쏘아 내는 것에 목을 뒤트는 예비 동작이 필요 한 놈들이다.
연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유롭게 상대할만했다.
“…마음대로 해…”
한숨을 내쉰 자넷이 허락을 했다.
들어본 적 없는 무거운 한숨이다.
평소에 항상 가벼운 성격이던 그녀가 했으리라 생각이 되지 않는.
그러나 깊게 담아 두지는 않았다.
크리스가 어서 가자며 눈짓을 했기 때문이다.
- 타악!
우리 둘은 자넷을 비롯한 용병들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크리스가 놈들을 발견하고, 놈들 역시 우리를 인식 했을 때.
나는 크리스에게 말했다.
“여기선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니 써도 돼. 네 이능.”
“…좋아. 내가 찬영 몫까지 해치울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 팅!
나는 뼛조각을 튕겨내며 말했다.
그러나 이미 크리스는 아공간을 사용하며 앞서나갔다.
나 역시 뒤지지 않기 위해 빠르게 달렸다.
*
사람의 가치관은 성장기 때 겪은 일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런 만큼 자넷이 세상 모든 것을 돈으로 바라본다고 한들 이상치 않은 일이다.
모두가 배를 곯는 이 세계 기준으로도 자넷은 평범하지 않은 유년기를 보내었으니.
‘파계승… 쟤는 놓치면 안 돼.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 돈 냄새가 진하게 나고 있어…’
첫 만남부터 자넷의 감이 강렬하게 외쳤다.
이 남자를 그녀의 용병단 안에 붙잡아 놓으라고.
그러나 그녀가 권유하기도 전에, 찬영 스스로가 용병단 가입을 희망했다.
마치 보석이 저절로 그녀의 손안에 떨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처음 그가 하얀 고래의 입단식인 ‘벨데루 씨앗 농축액’을 바닥에 버렸을 때 크게 당황한 이유였고,
그를 향해 군침을 삼키며 눈을 빛낸 이유였다.
쓸데없이 했던 애인 있냐는 농담 때문인지, 그녀의 눈을 다른 종류의 눈빛으로 해석한 크리스에게 경계를 사기도 했지만.
어떻게 흘러가든 그를 용병단 안에 넣을 생각이었다.
실제로 자넷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당일에 스스로의 가치를 언뜻 내비치며 탈 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그 보석이 그녀의 손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방법이… 붙잡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그의 능력이 하나씩 밝혀지며 확실해 졌다.
눈을 뒤집고 찾아봐도 없었다.
박찬영이 하얀 고래에 남아야 할 메리트가.
- 질끈.
자넷의 이빨이 입술을 깨문다.
약간 피가 배어 나왔지만, 아픔을 느낄 새는 없었다.
그녀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수도승으로서 견문을 넓히는 것이다.
이번 보수로 인해 그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진다면…
용병단을 떠난다고 한들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
찬영은 혼자가 아니었다.
엇비슷할 정도로 강한, 그의 연인이 함께했다.
둘이라면 어지간한 위기는 도움 없이 해결할 것이다.
‘지금만 해도… 우리는 쟤들에게 짐이 되고 있어…’
용병단이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실험체들을 둘이서 가볍게 처리하고 있다.
그녀를 비롯한 용병단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없어도 전혀 무방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찬영에게 하얀 고래는 족쇄가 될 것이다.
그에게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거의 없었고, 주머니 또한 이미 풍족하다.
그렇다면 운신이 자유로울수록 좋다.
반면 용병은 의뢰에 매여있는 존재였다.
떠나는 것이 그의 입장에서 더 좋을 것이다.
머리 굴리는 것이 빠른 찬영이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할 리 없었다.
‘이제는… 파계승이 떠나기까지 시간 문제야…’
이미 자넷이 그에게 진 빚만 헤아릴 수 없다.
목숨도 한번 빚졌다.
절박한 심정으로 또다시 쌓인 빚을 조금이라도 깎아 내 보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금전 감각에 어둡던 박찬영은 이제 없다.
순식간에 자넷의 능력을 어느 정도 흡수해 버렸다.
첫 만남부터 생각해 놓았던 그를 묶어 놓기 위한 족쇄인,
‘세상 물정을 배울 때까지는 내가 챙겨 줄게! 용병단에 남아!’라는 변명도 이젠 불가능해졌다.
그는 유능했다.
너무나.
‘…적당히 부족한 면도 있어야지! 인간미 있게! 어?!’
사실 이렇게까지 자넷이 절박하게 찬영을 잡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귀족의 반열에 들 정도로 재산을 쌓았기 때문이다.
돈을 안 쓰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돈을 쓰는 양에 비해 돈을 모으는 능력이 몇 배나 뛰어났을 뿐이다.
하나의 정신병이자, 강박증이었다.
내면 깊숙이 자리하던 트라우마는 그녀에게 끝도 없이 돈을 모으도록 만들었다.
이제는 머리가 굵어지며 그 대부분이 아문 상처지만,
박찬영에게서 풍기는 깊은 돈의 향기는 그녀의 트라우마를 다시 불 지폈다.
- 후우…
다시 한번 나오는 무거운 한숨.
어렸을 적 풍경이 자넷의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부둣가의 바다 쩐내 나는 평민과 다른,
깔끔한 옷을 차려입고 무언가를 사들이는 남자.
마을에서 점점 사라지는 여자아이.
할당금을 벌지 못하면 팔아 버린다고 위협하는 아비.
그리고 후에 알게 된 사라진 동갑내기 친구가 당한 ‘끔찍한 일’.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삶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녀가 타고 난 돈을 버는 감각은 범상치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비의 도박 비용을 내주면서 돈을 모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어린 시절의 자넷이 보유한 금전 감각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능력인 동시에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남성이 극대다수인 용병들 사이에서 자넷이 한 번도 연인을 만들지 않은 이유다.
그녀는 남자를 한 번도 연애 대상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물론 동성 역시 마찬가지다.
용병들과 어울리며 늘어만 가는 것은 천박한 음담패설뿐이었다.
‘파계승을 잡을 방법… 돈… 모은 돈을 전부 쓰게 해서 어쩔 수 없이 용병단에 남게… 아! 분명 남자가 돈에 얽매이는 세 가지가…!’
첫 번째로 술.
자넷이 본 찬영은 술에 집착하는 타입이 전혀 아니었다.
영주성에 초대되었을 때, 꽤나 좋은 술이 나왔음에도 별로 입에 대지 않았으니까.
술을 즐기기보다는 분위기 자체를 즐기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과음은 자제하는 듯했고.
비싼 명주를 수집하는 취미도, 음주로 인한 낭비벽도 전혀 없어 보였다.
이건 아니다.
두 번째로 도박.
용병 중 도박에 중독된 사람이 많다.
그녀의 용병단만 해도 중독자가 한둘이 아니다.
실력과 지성이 비례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찬영 또한 어느 정도 금전 욕구를 보여 왔다.
어디까지나 성직자의 기준으로.
이건 좀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다만…
도박에 빠진 사람의 최후를 알고 있는 자넷으로서는, 상당히 꺼려졌다.
당장 그녀의 친부만 해도 도박에 중독이 되어 있었다.
어린 자넷에게 할당금을 걷어 간 이유가 도박 때문이었으니.
도저히 좋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여자.
의외로 연인이 있는 것을 보니 전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성직자도 인간인 이상 성욕이 있긴 하리라.
그 둘의 언행을 보면 첫날밤까지 멀고 먼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찬영이 창녀를 살 것 같지는 않았다.
자넷이 아는 찬영은, 색욕에 눈이 뜨이기 이전에 동정일 확률이 무척 높았으니까.
당장 옆에 강하고 아름다운 연인이 있기도 했다.
무려 ‘성씨’가 있는, 푸른 피가 흐를지도 모르는 여성이다.
어지간한 여자는 비교조차 불가능하다.
여자를 사는 것에 흥청망청 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으… 결국 도박에 맛 들이게 해…? 씹… 집어치우자. 사람 인생 망치자는 것도 아니고… 하…’
자넷은 끙끙 앓았다.
그녀는 자신이 찬영을 꼬시는 것에 성공하면, 절대 용병단을 떠나지 못한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잠자리 경험은커녕 연애 경험조차 한 번도 없기 때문도 있었고,
엉뚱한 곳에 용기가 있는 남장 여자가 아닌 한 발상 자체가 힘든 극단적인 생각이기도 했으며,
무의식적으로 남성을 꺼리게 되는 그녀의 트라우마 탓도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단.
그녀가 최초로 남성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 대상이 찬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희박하기 그지없는 확률이지만…
세상에 절대란 것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