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유적이 발견된 장소는 수도의 바로 옆.
도착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난 놀고만 있고 있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멜, 크리스와 함께 잡담만 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나는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스텟이나 스킬창을 열어 보며 특이사항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띠링! 띠링!
내 시선이 옮겨짐에 따라 수십개의 상태창이 열렸다 닫히길 반복한다.
귀찮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이다.
한 톨의 정보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다.
‘스텟이 높은 사람은 몇몇 보이지만… 주의해야 할 정도는 아니네.’
특성이 있는 자는 없었다.
드물게도 스킬이 있는 용병은 있었으나, 별로 쓸모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인물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넣어 두었다.
이들이 스킬을 쓰는 것을 직접 보게 된다면, 이 세계를 완결 지었을 때 상점창에 스킬이 해금 될 테니까.
비록 구매할 가능성이 무척 낮다곤 한들 해금해서 나쁠 것 없다.
원작과 달리 멜은 긴장에 움츠러들지 않았다.
내가 말 상대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어라? 저기 모인 사람들이 하늘 산맥 용병단 아닌가요? 그런데 지난번에 뵈었던 하늘 산맥 용병 단장님은 안보이네요?”
“자넷 단장한테 물어보니 용병 길드장을 단 이후 직접 의뢰에 나서지 않는다던데?”
“아… 하긴, 그분은 더 노력해 봐야 더 올라갈 곳도 없을 테니까요. 이미 정상이시니…”
멜은 내 말에 어렵지 않게 납득 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거리가 아직 무척이나 떨어져 있기에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허나 내 눈에는 보였다.
칼과 갑옷으로 무장 한 수십여명의 인원들이.
‘수도 근방에 도적 떼가 나올 리도 없고… 아마 도착 했나 보네.’
그들은 정형화된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대부분이 병사로 보이는 이들이었으며, 개중 몇몇은 전신 갑주를 입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유적의 입구를 지키라는 명을 받은 기사이리라.
유적의 입구는 겉보기에 화려하지 않았다.
지상 위로는 세워진 장식은 하나 없었다.
다만 시꺼먼 어둠에 잡아 먹힌 계단이 입을 벌리고 우릴 기다릴 것이다.
원작 소설의 묘사 그대로라면.
- 터벅터벅.
“어라? 찬영. 도착 했나 본데?”
“응. 나도 보인다.”
두 번째로 눈치를 챈 사람은 크리스였다.
내가 정면을 말없이 응시하자, 그녀 또한 나를 따라 눈매를 좁히며 정면을 빤히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도착을 눈치채는 용병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나 또한 좀 더 선명하게 저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병사와 기사 주위에는 건물이 부서진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잔해를 치웠다고 하기에는 많았고, 치우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적었다.
아마 작고 조그마한 오두막이 유적의 입구를 가리고 있었으리라.
곧 작게 소란이 일었다.
상대방 역시 우리를 발견 했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평범한 단원들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었다.
머리 아픈 서류처리나, 확인 절차는 자넷과 다른 용병 단장들이 했으니.
“베이스캠프 상주 담당은 나다.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요 앞 탐사 동안 잘 부탁하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기사가 자넷을 향해 말했다.
하늘 산맥과 철사자의 단장이 없는 지금.
세 손가락에 드는 하얀 고래 용병단의 단장인 자넷이야말로 용병들을 대표하기 알맞았기 때문이다.
기사는 등을 돌려 우리를 안내 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철거된 오두막의 터 중간, 그 깊이가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었다.
그런 기사의 등을 한 명의 남자가 랜턴을 든 채 부지런히 따라갔다.
남자는 어설프나마 무장을 한 것을 보니 시종이 아닌 종자가 확실했다.
띠링!
나는 그의 등을 향해 상태창을 열었다.
십의 자릿수가 5나 되는 스텟이 여럿 보였다.
‘내 평균 힘·민·체 스텟이 버프를 받은 걸 포함 해 30대 중반이니…’
역시 수도의 기사다.
전에 보았던 발리에르 같은 조그마한 영지의 기사와는 뚜렷이 차이 나는 스텟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전의 기사와는 목숨을 걸고 싸우면 어떻게 비빌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이 남자와 맞붙게 된다면 무사히 몸을 빼는 것이 고작일 것 같다.
나의 감이 그리 말해주었다.
“뒤를 따라 오도록.”
이 앞은 어두우니 조심하라는 말은 없었다.
기사는 관광 가이드가 아니었고, 용병들 역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크기의 바위 하나를 통째로 조각한 것처럼 일체화된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윽… 퉷. 거미줄이 입에 들어갔어.”
통로는 고요했고, 축축 했으며, 음습했다.
기사 다음으로 선두에 선 자넷이 손에 든 랜턴을 높이 들어 앞을 밝혀 보려 했지만,
작은 램프 안에 갇힌 빛은 바닥까지 닿지 못했다.
그러나 지상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용병들이 계단으로 내려갈수록 고요함이 걷히기 시작했다.
제각기 든 횃불과 랜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통로 안을 점령 하기 시작했다.
- 저벅! 저벅!
불똥이 튀는 소리는 백여 명이 내는 발걸음 소리에 묻혔다.
대부분의 전투화는 밑창이 단단히 마감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계단과 신발이 부딪히는 소리가 통로를 크게 울렸다.
특히 선두의 선 기사의 발걸음 소리가 가장 컸다.
강철로 만든 갑옷을 빈틈없이 걸쳐 무게가 다른 용병들의 배는 되었기에.
그뿐만이 아니라 기사의 밑창은 가죽이 아닌 강철로 되어 있다.
전투화에 갑옷을 얹는 형태인 지구의 풀 플레이트 아머가 아닌,
밑창까지 완전히 강철로 감싼 갑옷이었기 때문이다.
마나가 없는 일반인이라면 지탱하지 못할 무게다.
‘깊긴 하네. 그래도 끝은 보이지만.’
내 눈은 어둠을 뚫고 계단 끝에 존재하는 진정한 입구를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저 입구를 보니 저절로 입안이 마르며 긴장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특성의 덕에 얼마 안 가 시들해졌지만.
보통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실사 같은 조각상, 혹은 벽에 새겨진 멋들어진 양각은 없었다.
보이는 것은 깊고 무거운 글씨체로 새겨진 경고 문구 한 줄.
마치 이곳에 침입자가 기대하는 보물 따위는 없고,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말해 주는 듯했다.
꾸밈은 없다.
단순했기에, 오히려 허투루 보지 못하였다.
이 정도 유적을 건설한 인물이 미술품을 신경 쓰지 못했을 리가 없다.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저 입구 위에 새겨진 경고 문구에 모든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 저벅저벅.
계단의 끝.
유적의 입구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다.
적어도 우리 전원은 서 있을 만한 공간은 존재했다.
- 으… 거미줄 봐라.
- 저 문 안쪽이…
- 어후 시벌, 귀신 나오게 생겼네.
- 이봐, 우리가 내려 온 통로를 봐… 빛이 완전히 점처럼 보여.
- 도대체 얼마나 깊은 거야?
원래 석벽으로 막혀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덕분에 방금의 통로와 비교도 안 되는 시꺼먼 어둠을 문 너머로 볼 수 있었다.
기사를 시작으로 모든 용병들이 입구 앞에 존재하는 공터를 채우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전부 경고 글귀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글귀에서 오는 분위기에 오한만을 느낄 뿐이지, 정작 내용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다.
당연했다.
이들이 글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솔직히 글을 읽은 나도 저 경고 문구가 무얼 말하고 싶은 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단어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자넷이 나를 툭툭 건들며 손가락으로 문 위에 크게 새겨진 글귀를 가리켰다.
“야. 파계승. 저거 뭐라고 적혀 있는 거냐?”
“’자격이 없음에도 침입을 하려는 자. 이름을 잃은 게브하르트가 되리라.’ 게브하르트…가 뭔가요?”
“게브… 뭐? 나도 처음 듣는데?”
자넷은 내 물음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짐작 가는 것이 없단 눈치다.
원작에는 이 경고 문구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글을 아는 사람은 기사밖에 없었는데, 그는 용병들에게 묻지도 않은 것을 말해 줄 만큼 친절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적 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도 딱 업무적인 보고를 들을 뿐.
그는 무식한 용병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했다.
수도의 기사씩이나 되는 인물이 속이 넓지 못했다.
“게브하르트. 수백 년 전, 마녀와 흑마법사에게 납치당해 끔찍한 생체실험을 당한 피해자를 그리 불렀지. 모를 법도 해. 이젠 쓰는 사람이 없는 단어(死語)이니.”
대답을 해준 것은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방금까지 내가 속이 좁다며 욕을 했던 기사였다.
나는 물론이고, 자넷까지 놀랍다는 얼굴로 기사의 등을 바라보았다.
“거기 동양인. 글을 아나?”
기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빠르게 표정을 정중하게 바꾼 뒤,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
“부족하지만, 그러한 재주가 있습니다.”
“음!”
내 대답에 기사가 만족한 듯 미소를 띠었다.
설마 나는 글을 알기 때문에 ‘무식한 용병’에서 벗어 난 걸까?
어쩌면 그의 안에 세워 둔 대화 상대의 최소 조건이 글을 아는 것일 수도 있다.
무려 수도의 기사, 준 귀족과 연을 쌓을 기회가 왔지만…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그가 팔에 털이 숭숭 난 근육질 남자인 것도 그러했고,
이 기사는 기본적으로 용병을 무척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나 기분 나쁘게.
‘참… 스스로는 자제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더 악질이지.’
원작 속 그는 준 귀족인 기사답게 기품 없는 욕설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행동 하나하나에 용병을 오물 취급하는 언행이 섞여 들어가 있었다.
원작 속 함정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다.
그는 소규모 용병단 향해 몸으로 함정을 뚫기를 진지하게 권유했다.
그 용병들이 죽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저 탐색에 드는 시간을 약간 줄이기 위해서.
심지어 술안주가 부족하다고 용병 두 명을 보고 돈을 줄 테니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워 보라고 시키기까지 했다.
놀라운 것은 이것들 모두 용병을 모욕하기 위해 짜낸 말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제안’이란 것이다.
용병이 자신들의 취급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도저히 기사를 고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와 친하게 지내게 되면, 다른 용병들과의 관계가 악화 될 수 있다.
무척이나 높은 확률로.
‘아무리 글만으로 묘사된 원작 속 인물의 성격을 과신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 정도 특이사항이면 고려해야지.’
도저히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인물이다.
적당히.
그냥 서로 안면만 튼 사이면 좋았다.
그가 내게 악감정만 쌓이지 않게끔.
그러나 기사는 내 의견과는 좀 다른 것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베이스캠프에서 심심할 텐데 잘 되었군. 자네 내 말 상대나 좀 하지.”
“…저는 지식인이 아닌, 돈에 생명을 사고파는 용병입니다. 배운 것 없는 저의 언행이 혹여 기사님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렵습니다.”
“음? 이거 드물게도 주제를 아는 친구였군! 그래. 응당 용병이라면 귀족을 상대할 때 그리 부담을 느껴야지.”
기사가 수염을 손가락으로 쓸며 흡족하게 웃었다.
말이 계속 이어질 낌새였다.
이대로라면 약간의 무례 정도는 괜찮다는 듯 허락이 나올 분위기다.
그의 말이 다시 시작되면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한낱 평민이 귀족의 말을 끊은 것이 되니까.
나는 절묘하게 그가 말을 맺은 틈을 노려 빠르게 준비한 말을 내뱉었다.
“괜…”
“기사님께서는 저 같은 무지렁이의 속까지 헤아려 주시는군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비굴하지 않아 보일 정도로만 고개와 허리를 작게 숙였다.
정갈하고, 예의 있어 보이도록.
대화를 이것으로 끝내겠다는 의도였다.
기사의 키는 나보다 작아 내가 고개를 숙였음에도 머리 높이가 비슷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떨떠름한 얼굴로 내 머리를 쳐다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진다.
“…뭐, 상관없겠지. 너무 용병이랑 어울려서야 그것도 품위 없는 짓이고.”
기사의 말이 끝나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고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는 손을 작게 휘저으며 나의 인사를 받았다.
내게 흥미가 식은 눈치다.
기사는 곧 자신을 따라온 한 명의 종자를 데리고 유적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위에 새겨진 경고 문구는 추호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당당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랜턴을 든 시종은 그렇지 않나 보다.
문 안쪽, 거대한 공간을 채운 어둠에 압도되어 다리와 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니.
나와 기사의 대화를 숨죽이고 바라보던 자넷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곤 미소를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처가 만족스럽다는 뜻이다.
“귀족은 피곤하죠.”
“킥킥.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