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지구
“하아…”
고다연은 핸드폰에 온 문자를 바라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숨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감정이 들어 있지 않았다.
단순히 무언가에 지쳤기에, 저도 모르게 나온 한숨이었다.
마지막으로 온 문자에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뚜껑이 열린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한 손에 든 남자가 한 명.
모델이 예술이니 급하게 찍은 사진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마치 커피 광고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가 슬픈 듯이 눈매를 누그러뜨리지만 않았다면.
“이잇…!”
고다연은 화풀이라도 하듯 손가락으로 사진을 꾹꾹 눌러가며 터치했다.
작고 가녀린 손가락이 남자의 얼굴을 가렸다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화면에 화풀이를 해 봐야 진짜 박찬영이 아파할 리 없었다.
사진 속 남자가 화면을 뚫고 고다연을 쳐다보고 있다.
저 아무런 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한 눈.
이 눈이 문제였다.
마치 귀를 접은 커다란 리트리버를 보는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저 눈망울을 보고 화를 낼 수 있을까.
적어도 고다연은 그러지 못했다.
- 꾸욱! 꾹!
그럼에도 고다연은 손가락을 멈추지 못했다.
이미 사진을 본 순간 내심 순식간에 용서를 해버렸지만, 오히려 씰룩거리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눌러야 했지만,
그걸 인정해 버리면 너무나 쉬운 여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이건 벌이었다.
그녀가 박찬영을 용서하기 위해 내리는 벌.
고다연은 이런 복잡한 이유로 핸드폰 액정의 수명을 갉아 먹고 있었지만, 그것이 여자라는 생물이었다.
복잡하지 않은 여자는 검은 깃털을 가진 백조처럼 희귀했다.
- 꿀꺽.
고다연은 은근슬쩍 문자에 담긴 사진을 저장했다.
계속 문자 메세지를 보며 얼굴을 누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저장된 사진의 얼굴을 크게 확대했다.
이 또한 당연히 손가락으로 얼굴을 누르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어쩔 수 없었다.
“…”
허나 더이상 고다연의 손가락이 박찬영의 얼굴을 누르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화면을 가득 메운 얼굴만을 멍하니 응시했기 때문이다.
평소 웃는 얼굴만 보다 이렇게 슬퍼하는 얼굴을 보니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이것이 모성애라는 걸까?
저절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상냥히 위로하고 싶게 만들었다.
이대로 두면 한 시간은 멍하니 보았을 것이다.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 오지만 않았다면.
우우웅!
“으햐앗!”
화들짝 놀란 고다연이 떨어질 뻔한 핸드폰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화면에 떠오른 발신인은 ‘엄마2’.
박은미였다.
- 여보세요? 들려?
얼굴에는 여전히 열이 올라 있다.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릴 법도 했지만, 고다연은 금세 자신의 목을 가다듬는 것에 성공했다.
“잘 들려! 말해도 돼.”
- 어라? 너 목소리가 왜 흔들려? 뭐 숨기는 거 있는 것처럼.
“크,큼! 무슨 소리야?”
- 으음… 착각인가?
고다연 자신보다 고다연을 더 잘 안다고 자부하는 박은미였지만, 수화기 너머서 목소리만으로 감정을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의심은 벗어났다.
고다연은 그 사실에 내심 안심했다.
동시에 궁금증이 밀고 일어섰다.
오늘은 이미 한번 그녀와 전화를 했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두 번이나 전화를 하는 것은…
딱히 어색한 일은 아니었지만, 흔한 일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 맞어!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냐니?”
- 네 남친! 아까 궁금증만 엄청 부채질 해 놓고 끊어버리더니, 도저히 기다릴 수 있어야지!
“아…”
- 그래서 좋아하는 거야? Like? Love?
그녀의 친구가 박찬영을 향한 감정을 물었을 때.
약간 얼버무리며 대답을 미루었다.
답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말을 해주기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것이 박은미가 고다연에게 전화를 걸도록 만들었다.
“그냥… 잘 돼 가고 있어.”
- 오? 아하! 아하아하! 알겠다! 확실히 이해했어! 흐흐…
“…뭘 이해했다는 거야?”
- 잘 되어 가고 있단 건, 관계를 계속 이어 가고 싶단 뜻이잖아? 이건 LIKE보다 LOVE를 의미하는 거고!
“그,그,그게 왜 그렇게 돼!”
- 에이. 쑥스러워 하지 마. 세상에 사랑을 하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오히려 살면서 사랑을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지.
“그건… 그렇네.”
- 게다가 네 말만 들어보면, 너의 남친한테 빠지지 않는 것도 힘들 거 같은데? 얼굴이면 얼굴. 성격이면 성격. 부족한 게 없으니까.
확실히 박은미의 말이 맞다고 인정했다.
그녀가 일깨워준 덕에 다시 떠올렸다.
댄스 크루에서 박찬영을 이성적으로 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단 것을.
심지어 그는 한번 고백까지 받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허나 어째선지 이전과 달리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대책을 마련해야겠다고, 고다연은 생각했다.
심지어 극단적으로는 연애 사실을 공개하는 것까지 고려했다.
박찬영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음… 싫지는 않아…”
- 좋네. 네가 남자친구에게 관심이 있는 게 어디야? 그래도 네 성격이라면 진도 나가는 건 하아아안참이나 걸리겠지만…
움찔.
너무나 정곡이었다.
실제로 고다연은 자신의 연인에게 진도를 느리게 나가자고 부탁했으니까.
그러나 인정하지는 못했다.
그녀 스스로는 자신의 연애관이 무척이나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닌데? 우리 진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평범하게 나갈 건데?”
- 아! 그래도 무섭다고 너무 진도를 느리게 빼지는 마? 남자 쪽에서 기다리다 지칠 수도 있으니까.
“무섭기는 누가 무섭다고 그래. 누가 들으면 내가 겁먹은 줄 알겠다.”
- 남자가 여자를 잘 알면 알아서 널 리드 하겠지만… 그쪽도 네가 첫 여친이라고 하니까.
“…은미야?… 내 말 듣고 있어?…”
- 네 남친이 용기 내서 스킨십 시도하면, 너무 철벽 치지 말고 은근슬쩍 받아 줘.
고다연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허언이란 의미였다.
물론 실제로 허풍이 가득 들어찬 말이었다.
그러나 고다연은 이것이 허풍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직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로만 해서는 은미가 믿을 리 없는데… 증명… 증명할 수단이… 아!’
잠깐을 말없이 고민하던 고다연은…
자신을 의심하는 친구를 향해 자신 있게 말을 하였다.
“…손.”
- 응? 손?
“오늘 손잡아 봤어. 심지어 내가 나서서 잡은 거야.”
- 뭐? 다연이 네가? …에이. 거짓말하기는. 절대 안 믿어.
“이런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 가지고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그냥 손을 내밀어서, 잡을 뿐인 쉽고 간단한 일인데.”
- 가,간단한 일?… 다연이 너한테?…
“그럼. 당연히 쉽지. 오늘 키스도 할 뻔했는데, 그 정도야 뭘.”
- 키스? 너 지금 키스라고 했니?
“물론 그건 내가 막았어. 너무 진도가 빠르면 연애하는 재미가 없잖아?”
- 연애하는 재,재,재미… 가… 없다…?
간접 키스 역시 키스의 범주 안에 들어갔다.
어디까지나 고다연의 기준에서.
- …어라? 지금 통화 중인 건 다연이가 맞는데?…
박은미는 자신의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화면을 보았다.
현재 통화 중인 사람은 ‘첫째 딸’.
잘못 건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통화 중인 것은 고다연이 맞았다.
- 목소리를 들어 보니…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는 않…
“거짓말이 아니니까.”
- 그래서 지금 멘붕 중이야!…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고다연이 나서서 손을 잡았으며, 키스…도 할 뻔했고, 고다연이 막아섰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다연 역시 그것을 알기에 약간 양심에 찔렸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속이는 것이 되었으니까.
물론 오해를 정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은미는 날 너무 어린애 취급한다니까? 나도 할 때는 하는데!’
박은미가 연애에 대해 빠삭히 꿰고 있는 것은 안다.
그러나 하나부터 끝까지 참견을 받아서는 곤란했다.
고다연은 그녀의 친구에게 최소한의 신뢰감을 주기를 원했다.
비록 그 수단이 좀 불순했지만.
- 너 의외로 연애에 대해 완전히 모르는 건 아니네?
“나 로맨스 소설은 많이 읽거든?”
- 어라? 그러면 더 몰라야 정상인데…
“그,그래?”
- 소설이랑 현실이랑 같을 리가 없잖아. 가령… 첫 키스는 야경이 아름다운 전망대, 또는 선상 파티가 폐막 되고 빛 하나 없는 적막한 호수 한가운데에서… 이런 현실성 없는 것들.
“에이. 나도 그 정돈 구분할 줄 알아.”
- 그럼 다행이고. 참고로 내가 둘 다 가봤는데, 그런 인기 많은 장소는 사람 겁나게 많아서 귀가 아프더라. 분위기는 개뿔… 야경보다 핸드폰 플래시 터지는 빛이 더 강해.
고다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세워두었던 야경 계획을 취소했다.
그리고 오늘 밤 알아볼 예정이었던 한강 유람선의 티켓도.
만일 하게 된다면, 첫 키스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이 좋았다.
어디까지나 하게 된다면!
“아! 내 남자친구 사진… 음… …아니야.”
- 응?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이왕 문자로 남자친구의 얼굴 사진도 받았겠다, 친구에게 자랑하려고 했지만…
그만두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손에 들어온 사진은 무척이나 희귀한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박찬영은 웃고 있을 때보다 무표정일 때가 훨씬 적었고, 풀 죽어 있는 얼굴을 할 땐 거의 없었다.
아니, 완전히 처음 봤다.
댄스 크루에서 가장 그와 시간을 많이 보낸 그녀조차도.
그런 만큼 타인에게 공유하기는 무언가 꺼려졌다.
이 사진은 그녀의 갤러리 속에만 보관하기로 했다.
‘다음에 평범히 웃는 사진을 얻게 됐을 때 보여주면 되겠지? 으음… 아! 울상인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더 잘생겼을 테니까!’
박찬영의 외모는 단순히 눈꼬리를 내린다고 빛이 바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다연은 이런 핑계를 대기로 했다.
“곧 너튜브 채널에 새로운 영상 올라갈 것 같은데, 찬영씨도 나올 것 같다고.”
- 오. 눈 호강하겠네. 네 남친 분량 좀 늘려 달라고 해봐.
“…”
- …야. 네 남친 안 뺏어. 아니, 못 뺏어. 서울이랑 여기랑 거리가 얼만데…
“그,그런 걱정 안 했거든.”
- 다 티 난다. 어휴… 둘이 좋은 사랑 하세요?
고다연은 어째선지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
왼쪽을 둘러보아도 우락부락한 사내.
오른쪽을 둘러보아도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사내.
사방에 온통 남자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유적 탐사의 출정을 앞둔 채 모여 있었고, 당연하게도 이들은 전부 용병들이었으니까.
이 세상에서 여자 용병이란 건 이토록 희귀한가 보다.
정확히는 ‘능력 있는’ 여자 용병.
그런 만큼 크리스와 자넷은 단연코 눈에 띄었다.
여자일 뿐만이 아니라, 외모까지 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 크게 말을 걸러 오는 남자는 없었다.
여기에 모인 용병들은 다들 우리가 하얀 고래임을 알고 있기에.
“이야. 파계승 너는 사람 사이에 섞여도 찾기 정말 편하단 말이야? 키도 엄청 크고, 머리도 시꺼머니까.”
실제로 평범한 사람들보다 덩치가 훨씬 큰 용병들의 모임에서도 나는 무척이나 키가 큰 축에 속했다.
내가 순한 얼굴임에도 다른 이들이 쉽게 보지 못하는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나는 말을 걸어 온 자넷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이라고는 일말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다.
저쪽에서 눈을 감고 코를 손으로 꼬집은 채 입으로 숨을 몰아쉬는 멜과는 천지 차이다.
음…
다시 봐도 좀 웃긴 장면이긴 했다.
아까 멜에게 뭐 하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고향에서 배운 긴장을 푸는 방법이란다.
쩍 벌어진 입에 손가락을 넣어 봤다가 약간 혼났다.
“절 찾으셨습니까?”
“신입들 긴장 풀어 주려고 왔는데… 별로 긴장한 눈치는 아니네?”
“정작 영지전 때는 아무 말 없으시더니, 갑자기 챙겨주는 척하시네요.”
“챙겨 주는 ‘척’이라니, 말 존나 예쁘게 하네. 그때는 제대로 된 실전이 아니었잖아. 무엇보다… 우리들밖에 없었고.”
“아하. 이해했습니다. 크리스는 제가 챙길게요. 가능하면 멜도.”
“이해를… 했다고?”
“다른 용병 앞에서 긴장한 티 내지 말라는 뜻 아닙니까?”
“…여전히 눈치 빠르네. 파계승 넌.”
자넷이 당황스레 입맛을 다시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저렇게 멜처럼 긴장에 차 있으면 하얀 고래의 이름값이 깎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명성으로 먹고사는 용병단에게는 별로 좋은 현상은 아니리라.
정작 전투에 들어가면 하나도 긴장하지 않는 멜이지만, 아마 오늘 하루는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할 것이다.
원작에서 그랬으니까.
가는 도중에 그녀와 잡담이나 하며 놀아줘야겠다.
“5분 뒤에 출발 합니다아!! 각 용병단들은 마지막으로 보급 물자 확인 부탁 드립…”
멀리서 한 사내가 우렁찬 목소리로 출발이 다가 왔음을 알렸다.
아닌 척했지만, 나도 내심 미약한 흥분을 했다.
그건 내가 ‘하얀 고래의 발자취’ 소설을 선택한 이유와 관련 있다.
이 세계의 배경은 정통 판타지.
적지만 분명하게 기연이 있을 만 하다.
그건 원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소설 속 기연을 마주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