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지구
나는 바람둥이가 맞다.
당장 내 연인만 해도 크리스, 안젤리, 멜, 고다연까지 넷이고…
리 샤오린과는 한창 썸을 타는 중이니까.
그리고 이것을 크게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죄’의 여부를 타인에게 피해가 가느냐 가지 않느냐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피해 본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죄가 될까.
물론 몇몇 연인을 만드는 중 이런저런 순탄치 않은 일들이 있었고, 있을 예정이지만…
적어도 고다연과는 관련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가진 능력과 연인들에 대해 밝힐 생각이 추호도 없다.
숨기고자 하면 절대 들키지 않고 평생 숨길 방법이 널렸기에 내린 결정이다.
‘밝혀도 이득 하나 없는데, 굳이 밝힐 이유가 없잖아?’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난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음에도 하나의 연인만을 바라보는 남자로 보일 것이다.
지구에서만큼은 순정남, 일편단심이 되리라.
다른 차원에서는 둘 없을 바람둥이지만.
“찬영씨는… 의외로 손에 굳은살이 많네요.”
“운동을 하다 보니 저절로 박히더라고요.”
그녀의 말대로 내 손에는 굳은살이 꽤 있었다.
천권일각을 수련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대련 상대가 없을 때는 나무를 때리며 수련해야 했으니까.
『자연치유』 특성은 상처의 재생을 높여 주는 효과가 있다.
허나 굳은살이 박히는 것을 막아 주지는 못했다.
굳은살의 원리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자연치유가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다.
세포의 재생이 빨라 죽은 세포를 밀어내는 속도가 범인에 비해 몇 배나 되기 때문이다.
‘물론 굳은살이 생겼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관리를 게을리 한 것도 아니고.’
보통이라면 굳은살 안쪽, 죽은 세포가 거뭇하게 박혀 있어야 정상이리라.
그러나 내 손은 피부색보다 약간 진한 연갈색을 띨 뿐이다.
언뜻 보기에는 절대 굳은살이 티 나지 않았다.
찢어지고 뭉개진 흉터는 전부 세심하게 관리를 하며 치료했기에 눈에 띄지 않는 수준이 된 것이다.
상처가 생길 때마다 포션을 조금씩 바르는 건 물론이고,
보습제와 핸드크림까지 꼭 바르고 다녔다.
덕분에 색소 침착이 심각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역시 여성분이 보기에는 많이 흉한가요?”
“아니요! 절대로 흉하지 않아요. 오히려 무언가를 노력했다는 증거잖아요?”
“에이… 너무 띄워주신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나는 고다연을 향해 생긋 웃어주며 말했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 내 웃는 얼굴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미소를 본 고다연이 1초간 멍을 때리더니,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손목으로 귓가를 쓰다듬는 것이 귓볼이 붉어진 것을 의식했나보다.
알기 쉬운 반응이라 귀여웠다.
“그,그런데 춤 말고 하시는 운동이라면… 헬스 같은 건가요?”
“아니요. 스포츠에요. 봐요. 손가락의 안쪽이 아닌 겉 부분에도 굳은살이 있잖아요?”
“아… 격투기 같은 건가 보네요.”
“맞아요. 댄스처럼 취미로만 즐기고 있지만요.”
몇몇 사람들은 격투기를 하면 폭력적인 성향을 가졌다 선입견을 품기도 했지만…
다행히 고다연은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살짝 감탄한 얼굴로 내 손을 쳐다보았으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다른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어야 했다.
지금은 옷에 가려져 그리 티 나지 않지만, 내 몸의 근육량은 어지간한 운동인을 훌쩍 뛰어넘는다.
절대 식단 관리와 취미로 하는 춤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몸매다.
운동과 동떨어진 삶을 산 일반인이라면 나의 몸을 보고서도 큰 의문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근육의 밸런스가 예술로 잡혀 보디빌더만큼 우락부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상대는 고다연이다.
예체능에 종사하기 위해 운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은 채 노력 하고 있는.
그녀는 나의 신체가 얼마나 만들기 어려운 몸인지 눈치챌 것이다.
‘내 맨몸을 본 사람만 해당이 되겠지만… 언젠가 고다연은 볼 거 아니야?’
고다연의 눈이 내 손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하긴, 내 얌전하고 순해 보이는 얼굴에 비해 손이 남성미를 물씬 풍기고 있긴 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반전감을 느껴도 그리 이상치 않았다.
평소 나의 언행은 부드러움의 대명사였기에 더욱.
“호,혹시 만져 봐도 되나요?”
“그럼요.”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니 그녀도 나 같은 손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보나 보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백하민 시절, 내 넓었던 인간관계를 뒤져 보아도 지금 내 손처럼 굳은살이 많이 박힌 손을 가진 사람은 손에 꼽았기 때문이다.
주로 동성 친구와 다니는 고다연인 만큼, 이런 손은 스마트폰 속 화면에서만 보았을 확률이 높다.
- 톡.토옥.
내 허락이 떨어지자 고다연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내 손을 눌렀다.
너무나 가벼운 손길이었고, 굳은살 위였기에 간지럽게 느껴질 법했지만…
통각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손길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엄청 딱딱해… 제가 만지는 거 느껴져요?”
“아주 잘 느껴집니다.”
“와… 신기해요.”
- 스윽…
손가락으로 어설프게 만지는 것 만으론 그녀의 호기심을 채우기엔 부족 했나 보다.
곧,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부드러운 양손이 나의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어?’
나는 그녀의 대담함에 깜짝 놀랄 뻔했으나,
고다연의 얼굴을 보고 나의 예측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지금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우리 둘이 처음으로 손을 잡은 것을.
“우와… 손 엄청 아프셨겠다.”
“지금은 괜찮아요.”
“이런 말은 좀 웃기지만, 굳은살이 엄청 예쁘게 났네요? 혹시 이런 것도 유전자에 영향을 받는 건가…”
“글쎄요… 그것보다 저희, 손잡았네요.”
- 깜짝!
내 말에 고다연이 화들짝 놀라며 내 시선을 마주 보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보는 그녀의 동공이다.
아까부터 나와 눈을 맞추는 것이 부끄러운지, 은근슬쩍 시선을 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고다연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정신이 없는 듯했다.
“흣! 그,그러네요!”
- 스윽… 턱!
나는 당황스레 빼내는 고다연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내 손에서 벗어나다 말고 내게 잡혀 있었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힘 조절이었다.
예상했던 움직임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반응했다.
“빼지 말아요. 그렇게 싫어하면 저 좀 상처받는데…”
“앗! 그,그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저랑 손잡는 거 싫나요?”
“…”
손을 빼려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었다.
우리는 계속 손을 잡고 있었다.
고다연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대었다.
지금까지 작게 홍조만 띠었던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사진 찍으면 화내겠지?’
당장 왼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은 뒤, 그녀에게도 보여 주고 싶다.
두 눈으로 보여 주기 전까지는 절대 자신이 이렇게나 얼굴이 붉어질 거란 걸 믿지 못할 것 같았기에.
고다연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그녀의 얼굴이 얼마나 재밌는지에 대해 굳이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나는 입꼬리를 밀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았다.
얼굴에 진심이 가득 담긴 웃음을 띠며 잡은 손을 놓아 주었다.
- 슥.
“너무 서둘렀나 보네요. 미안해요.”
나의 말에는 장난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놀림 받았다는 것을 눈치채지는 못하는 듯했다.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설레여 하는 얼굴이다.
고다연의 손이 원래 있던 그녀의 품으로 복귀하는 것에 성공했다.
내게 잡힌 손을 다른 손으로 몇 번 주무르던 그녀는, 겨우 진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말 없이 눈을 맞추며 그녀가 평정을 되찾길 기다려주었다.
“읏…!”
음…
역효과였다.
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고다연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으니까.
“다연씨. 스킨십은 좀 천천히 나가는 것이 좋을까요?”
- …끄덕…
“제가 익숙지 않아서…”
“이해합니다.”
결국 고다연과 대화가 가능해진 것은 5분이 지나서였다.
허나 대화만 가능해 졌을 뿐, 완전히 진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얼굴이다.
그런데…
정말로 도망쳐 버렸다.
“그… 차,찬영씨…”
“네?”
“…손. 싫은 건 아니었어요…”
- 끼익! 쿵. 탁탁탁!
고다연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연습실에서 도망쳐 버렸다.
자신의 짐도 내버려 둔 채로.
붙잡으려면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좀 더 재밌는 상황이 나올 것 같았기에 얌전히 보내주었다.
나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켰다.
- 짐은 제가 맡아 둘게요. 이 연습실은 빌린 거니까. 답장은 괜찮아요.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바로 읽지는 않았지만, 핸드폰을 연습실에 두고 가진 않았을 것이다.
저녁을 먹었을 때 그녀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으니까.
‘곧바로 읽지는 않으려나?’
내가 답장은 괜찮다고 선수를 쳐서 보내면, 고다연의 성격상 무조건 답장을 보내게 되어 있다.
그녀는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답장도 보낸 문자를 읽어야 온다.
당황스러운 감정에 핸드폰 진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문자 확인이 늦을 수도 있다.
그때,
내 핸드폰이 진동을 울리며 문자가 왔단 신호를 보내었다.
지잉!
- 감사합니다…
역시 예상대로 답신은 왔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문자를 주기 위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에 담긴 것은 이미 절반쯤 먹은, 카페에서 테이크 아웃으로 가져온 그녀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 (사진), 커피 남은 것, 제가 먹어도 되나요?
- 상관없어요…
“어라? 허락을 해 준다고?”
나는 의외의 답신에 놀랐다.
분명히 안된다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곧 그 이유를 짐작 할 수 있었다.
‘아직 당황이 다 안 가셨나 보네.’
나의 예측은 곧 사실로 증명되었다.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으니까.
냉정을 찾은 고다연이 상황을 알아챈 것이다.
나는 서둘러 메세지 창을 열어 보았다.
곧 있을 재밌는 무언가에 대해 기대가 가득 찬 심정으로.
지잉! 지이잉! 지잉!
- 아니요!
- 드시면 안 돼요!
- 버려주세요!
- 찬영씨! 설마 먹었어요?
- 읽으셨는데 왜 답장이…!
“큭큭큭큭…”
문자에서 느껴지는 다급함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일부러 도망가는 그녀를 놓아준 보람이 있었다.
리액션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이렇게까지 격렬히 반응할 줄 몰랐는데.
우우웅. 우웅.
내가 읽고서도 문자의 답신이 없자 전화까지 왔다.
놀랍게도 이건 우리 둘 사이의 첫 통화다.
지금까지 안부 확인은 문자로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여보세요.”
- 찬영씨! 커피 드셨어요?
“지금 먹고 있어요.”
- 으아!…
“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나는 순진한 척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커피를 홀짝거리는 소리를 수화기로 들려주면서.
- 그…그건…
고다연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말을 더듬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짓궂게 질문했다.
“큭큭큭. 근데 다연씨, 간접 키스를 신경 쓰는 건 초등학생 때까지 아닌가요?”
- …
뚝.
“하하!”
참던 웃음이 터져 나온다.
도저히 말 못 하던 정곡을 내가 찔러 버리자, 말없이 전화가 끊겨 버렸기 때문이다.
놀림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아… 놀리는 건 재밌는데 항상 그 뒷 수습이 문제란 말이지.’
아무래도 좀 삐졌나 보다.
애초에 사교성이 많은 그녀다 보니 크게 걱정은 안 되었지만…
이런 건 빠르게 조기 진압을 하면 할수록 더 좋다.
나는 손을 놀려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었다.
- 미안해요… 다연씨가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요. ㅠㅠ
그녀가 수신한 것은 확인되었지만, 기다려 보아도 돌아오는 답신은 없었다.
나는 재차 문자를 작성해 보내었다.
추가로 내가 먹던 커피의 사진을 찍어 첨부해서.
- (사진), 빨대로 안 먹고 뚜껑 열어서 먹었어요. 걱정하신 간접키스는 없었습니다.
역시 답신은 오지 않으려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확확 뒤바뀌진 않다 보니 해명을 한다고 한들 여전히 삐져 있을 수 있다.
어찌 되었든 내가 그녀를 놀린 것은 사실이니까.
그녀를 놀리길 결심한 순간부터 이후 돌아올 투정은 감수할 생각이었다.
지잉!
문자가 온 소리에 나는 빠르게 핸드폰을 열었다.
혹시 꽁한 마음이 풀린 걸까?
나는 빠르게 내용을 확인했다.
문자에 적힌 글은 너무 짧았다.
그러나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확실히 전해져 왔다.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 멍청이!
지구의 히로인, 고다연입니다!!
춤을 추기 위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었군요!!
생각보다 너무 귀엽게 나온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일러가 넘 제 취향으로 뽑혀서 그냥 받아버렸습니다... 죄송....
옆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포인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