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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44) (144/310)



〈 144화 〉지구

연습실의 문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다연의 목소리다.
아마 들리지 않을 것이라 안심하고 있나 보다.
연애 얘기까지 서슴없이 할 정도이니.


확실히 평범한 사람이라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다.
그러나 내가 듣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내 청력은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연애 전문 책사… 진짜 있었네.’

놀랍게도 고다연에게는 연애를 돕는 조언자가 실존했다.
들려오는 통화 내용을 들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있었다.
상대방은 고다연의 친구인 것 같았다.
적어도 첫 연애를 상담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척이나 친한.

어쩐지 의도적으로 보여 준 메모를 보고도 한눈에 눈치채지  한다 했다.
마지막까지 눈치를 못 챘다면 내 입으로 힌트를 던져 주며 생각을 이끌어 낼 생각이었지만,
그보다 고다연이 알아서 눈치채는 것이 훨씬 깔끔했다.
결국 조언이라는 형태로 깨닫게 되었지만.


‘무슨 꼭두각시 전쟁도 아니고…’


이제야 의문이 좀 풀려간다.
평소 연애에 노련한 듯 보이던 고다연의 행동과, 전혀 그렇지 못하던 어투가 맞아떨어졌다.
아무래도 그녀는 친구에게 꽤나 많은 조언을 얻고 있나 보다.

- 끼이익… 쿵.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통화를 마친 고다연이 연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이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면으로 나를 마주보기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나는 그녀를 보고 내심 웃음을 참아야 했다.
고다연의 양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연씨? 편의점에 다녀오신다면서… 물을   오셨네요?”

“아앗! 마,맞다! 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만들어 내며 물었다.
어젯밤부터 준비한 노림수가 꽤나  먹혀 들어갔나보다.
빈틈이 거의 없던 그녀가 이렇게 실수를 저지른 것을 보면.

“사 오려고 나갔는데, 어… 그게… 아! 식사! 식사하러 가실래요?”


“밥이요?”


“네! 제가 찬영씨에게 식사를 한번 사기로 했잖아요? 어차피 나가는 것,  먹고 돌아오는 길에 물을 사 오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급조한 것 치고는 꽤나 좋은 변명이었다.
지금 시간은 점심과 저녁의 사이쯤.
저녁을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다.
그러나 데이트에는 더 좋을지도 모른다.
식당에 사람이 많이 없을 테니까.


“좀 이르긴 한데, 저는 상관없어요. 괜히 연습 중간에  먹으러 나가기도  그러니까요.”


“다행이네요! 그럼 가시죠!”

내 대답에 살짝 안도한 고다연은 앞서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연인인데 뒤 보다는 옆에서 걷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리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한 쌍의 남녀.
누군가가 우리를 발견 한다면 어떻게 보더라도 연인으로 보일 것이다.
내가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우리 둘은 무척  어울렸기 때문이다.


‘월요일의 애매한 시간대라 사람이 거의 없는데… 그럼에도 우릴 향하는 시선이 있네.’

솔로인 여성과 남성들은 우리를 부럽다는  보고 지나갔다.
그들이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맞았다.
우리는 연인이니까.

그것을 고다연 또한 의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채자, 그녀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 역시 억지로 새로운 화제를 던지며 대화를 질질 끌려고 하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둘 사이에는 어깨가 닿을 정도의 거리에 있음에도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


어찌 보면 어색한 공기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분위기는 어색함이라고 하기보다는…
 연애 특유의 풋풋함이 맴돌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종종 걷는 와중에 서로를 바라보다 시선이 맞고는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조차 화들짝 놀란 고다연이 모르는 척 시선을 틀었기에 우리를 멀리서 보고 있는 사람은 눈치  챘을 순간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연출해 낸 분위기였다.


‘효과는 꽤 있는 것 같고.’


고다연의 얼굴에 미약한 홍조가 드리운다.
나는 이것을 긍정적인 변화라고 해석 했다.
따로 되새겨 주지 않더라도, 명백하게 나를 연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 터벅터벅.

고다연의 인도대로 식당을 향해 걷기 시작한 지 10분째.
나는 약간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어쩐지 우리가 가는 길이 살짝 돌아서 가는 듯했기 때문이다.
지금 가는 길로 오려면 좀 더 빠른 길이 있었는데, 동선의 낭비가 있었다.
마치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걷고 있는  같은 느낌이다.

당연히 나는 목적지를 모른다.
저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에 먹는 이번 식사는 고다연이 내게 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얼 사주든 얌전히 얻어먹을 생각이었기에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고다연 역시 내게 무얼 먹을지 아직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나는 고다연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곧, 방금의 추측은 단순한 추측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녀의 팔과 다리가 골목을 꺾을 때마다 미세하게 멈칫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어색한 몸짓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큭큭. 다연씨. 저녁을 뭘 먹을지 아직 못 정한 거죠?”

“읏…”


고다연이 침음을 흘렸다.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향한 그녀의 얼굴은 명백히 정곡을 찔린 표정이었다.
내게 식사를 하자고 급조해 말하긴 했지만, 정작 어느 식당으로 가야 할지 감을 못 잡았던 것이다.

그녀가 식사 장소를 정해 두었다면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첫 데이트 장소를 여유롭게 선정하기에는 그녀의 연애 경험이 턱없이 부족 했다.
연애 초보의 머릿속은 훤하게 읽혔다.
지금의 고다연은 명백히 부담을 느끼고 있다.
내가 선택  식당이 찬영씨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가 도움을 주는 것이 고다연의 입장에서는 더욱더 좋으리라.


“너무 고민이시라면 제가 정해도 될까요?”


“엇? 그러면 저야 엄청 편하죠! 말씀해 주세요!”


“저기 카레집 어때요?”


나는 멀리 떨어진 간판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손끝이 향한 곳은 이름 있는 프랜차이즈의 카레 전문점이었다.
이 지점은 아니더라도 몇  먹어 본 적이 있는데, 꽤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격도 적당했다.
내 몫까지 사줘야 하는 고다연에게는 이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그녀의 정확한 재정 상황은 모른다.
허나 대학생인 그녀의 지갑 사정이 그렇게까지 부유할 리 없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까지 떡볶이와 카레를 싫어하는 여자를 못 봤다.


가끔 임준혁 총무가 간식으로 사 오는 떡볶이를 맛있게 먹은 고다연이다.
그녀는 흔히 널린 한국인답게 맵고 자극적인 맛에 강했다.
그런 그녀가 카레를 싫어할 확률은 낮았다.


‘평소라면 절대 데이트로  갔을 장소지만… 지금은 이만큼 적당한 곳이 없지.’

정식적인 데이트라면 카레 전문집에 가기에는 꺼려졌을 것이다.
나와 그녀 모두 괜찮은 옷을 차려입었을 테니까.
혹시라도 옷에 냄새가 배거나, 카레가 튄다면 많이 곤란해질 것이다.
데이트 경험이 많은 나는 괜찮겠지만,
분명 고다연은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몸가짐을 신경 쓰느라 맛도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우리 둘은  연습을 위해 가벼운 복장을 하고 왔다.
냄새와 카레가 조금 튀는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카레집은 꽤나 센스 있는 선택이 되었다.


“찬영씨,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긴 한데… 첫 데이트 장소가 카레집이라도 괜찮나요?”


“뭐 어때요? 맛있잖아요. 카레. 아, 혹시 다연씨는 싫어하세요?”


“아뇨! 정말 좋아해요!”

고다연이  말에 고개까지 저어가며 부정했다.
겉치레가 아닌 진실로 보였다.
다행히 카레가 입맛에 맞나보다.


*



“잘 먹었어요. 다연씨.”

“저도 잘 먹었어요! 찬영씨도 매운 거  드시네요?”

“그냥 딱 한국인 평균 정도 되는  같아요.”

“에이… 지난번에 술 마셨을 때도 평균 정도 먹는 것 같다고 하시더니… 이젠 안 믿어요! 킥킥!”


고다연이 나를 슬쩍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런 자연스러워 보이는 겉모습을 보면 이제 나를 남자로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등 뒤에 숨겨진 그녀의 양손을 보면 그것이 아니란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다.
높은 확률로 손가락끼리 꼬물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굳이 감춰진 손가락을 보지 않아도 그녀가 태연함을 가장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입꼬리라면 몰라도 긴장에 굳어진 눈매까지는 세세하게 컨트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는 걸 잡아낼 정도는 아니겠지만, 긴장했는지 안했는지 정도는 알아채지.’

“엇? 다연씨. 입술 쪽에 카레가 약간… 여기 냅킨이요. 챙겨 온 보람이 있네요.”


“저,정말요? 으… 부끄러워라…”

고다연은 내가 내민 냅킨을 받아들고 내게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입가를 훔쳤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음… 아직 안 닦였네요…”

“이제는? 지금은요?”

“음…”

- 절레절레.


그녀의 흰 피부와 대비 되는 노란색 카레 방울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고다연은 고개를 젓는 나를 보고 울상을 지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손거울이 담긴 가방은 연습실에 두고 왔다.

방금 내게 입가를 닦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 않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가 나를 의식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했다.
마침 기회가 왔으니 실험해 보기로 했다.
이렇게 그녀를 향해 사소한 스킨십을 시도하면…

“잠깐만요. 움직이지 말아 보세요.”

“네?”

- 스윽.


“흐읏!…”


금방 몸이 돌처럼 굳는다.


나는 냅킨을 손에 쥐고 부드럽게 그녀의 입가를 콕콕 찍었다.
무언가를 닦아 내려는 듯이.
나의 손길 몇 번 만에 고다연의 얼굴에 묻은 카레 자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방금 스킨쉽의 부작용으로 그녀의 얼굴이 미약한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엇, 많이 놀랐나요? 미안해요. 여자친구가 생기면 이런 걸 해보는 것이  꿈이었어서… 유치하죠?”

“아,아니요…! 약간, 아주 약간 놀란 거라서… 괘,괜찮아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사실 맨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진 것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애초에 톡톡 찍듯이 닦기도 했고, 그녀의 피부와  손가락 사이에는 냅킨이라는 방해물이 존재했으니까.
허나 이런 미약한 스킨쉽도 고다연에게는 강렬했나보다.
표정 관리가 무너진 것을 보면.

“찬영씨는! 지난 술자리에서  바로는 짜거나 기름진  잘  먹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카레는  드시네요? 게다가 매운맛으로 시키기도 하셨고.”

고다연은 당황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화제 변경을 선택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의도를 거리낌 없이 따라 주기로 했다.
너무 당기기만 해서는 지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한도 없으니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 진도를 나가면 된다.

“아… 매운 건 좀 예외입니다. 요즘 유난히 매운 음식이 당겨서.”

“아하! 저도 그럴 때 있어요!”


고다연이 내 말에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아무리 내가 자극적인 음식을 잘  먹는다지만…
최근 동거인들 덕에 매운맛에서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가끔 매운맛이 그리웠다.
일부러 카레를 매운맛으로 시킨 이유다.


이제 식사도 끝났으니 연습실로 복귀하면 된다.
편의점에 들러 생수를 사는 것보다는…
얼음이 들어간 카페인을 더 좋아할 것이다.

“얻어먹은 답례로 커피 한잔 살게요. 테이크 아웃 해 가서 연습실에서 먹죠.”


“앗! 괜찮아요! 저 어제 받은 커피 기프티콘 아직 안 써서…”


“그건 지금 말고 다음에 쓰세요. 이건 제가 따로 사드리는 거니까.”

결국 내게 자연스럽게 이끌린 고다연의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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