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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43) (143/310)



〈 143화 〉지구

“후우…”


스윽…


고다연은 말린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주변을 흩어 보았다.
연습실 내부는 텅텅 비어 있었다.

평일, 특히 월요일의 연습 참여율은 늘 그렇듯 저조했다.
특히 어제 회식이 있어서 그런지 오늘 연습은 패스를 외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안 그래도 인원이 적은 수의 소규모 팀인지라 빈자리가 더 두드러졌다.

정확히 오늘 연습에 참여를 희망 한 사람은  명이었다.
하나는 당연히 고다연 그녀였고, 나머지 하나는…


- 덜컹. 끼이익…


“오? 다연씨는 오늘도 오셨네요. 어제  들어가셨어요?”

“집에 도착 하고 나서 문자 보냈잖아요. 별 탈 없이 잘 도착 했다고.”

지금까지  번도 결석을 하지 않은 박찬영이다.
그는 방금 연습실에 도착해 그녀를 발견한 뒤 살가운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어제 그렇게나 마셨는데도 숙취 하나 없어 보이는 깔끔한 얼굴이다.

그러고 보면 이 남자가 흐트러지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몸을 격렬히 움직여야 하는 춤을 출 때, 음식을 씹거나 커피를 마실 때는 물론, 술을  병이나 마셨음에도  외모가 빛바래지는 언행은 찾아볼  없었다.

상당히 수치스럽지만,
오히려 술에 흐트러진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제가 받은  도착 확인 문제가 아니라, 사과 문자로 기억해서요. 큭큭.”


“으앗!… 어젠 정말 죄송해요… 다음에 식사 한번  살게요…”


“그럼 용서해 드려야죠! 단, 둘이서만 가야 합니다?”

- …끄덕.


“네…”


박찬영이 진담을 농담으로 포장해 던지는 말에 그녀도 모르게 수줍어졌다.
그가 이런 식으로 애정을 슬쩍 보여줄 때면, 가슴이 바늘로 콕콕 찔러지는 감각에 저절로 성량이 줄어들게 된다.
고다연은 어쩐지 이 감정이 싫지만은 않았다.

‘직접적으로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차라리 거북해질 텐데…’

박찬영은 그녀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스킨십은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둘이서 대화를 하는 주기조차 시간을 들여 천천히 늘려 갔다.
마치 실은 고다연이 연인을 사귀는 것에 대해 미약한 거부감이 있고,
그에게 호감을 넘어서는 감정을 품지 않았단 걸 아는 것처럼.


박찬영의 느긋한 속도는 고다연에게 너무나 효과적이었다.
고다연의 머릿속은 춤과 자기관리로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억지로 들어가려 한다면 튕겨 낼 정도로.


허나 요즘 들어서는 박찬영과 관련된 생각이 종종 머릿속을 헤매고는 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지분이 점차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확실하게 씨앗이 뿌리 내려 있었다.
아직 지면 위로는 무엇 하나 드러나지 않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총무님이 곧 생일이시네요.”


“어라? 알고 계셨네요?”


“다른 사람의 생일 정도는 간단히 메모해 두고 있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외우고 다니는 것이 찬영씨와는 좀 다르지만.”

“아! 그럼 다연씨가 제가 기록한 생일과 진짜 팀원분들의 생일 중 틀린 곳이 없는지  봐주시겠어요?”

어려운 것 없는 요구였다.
고다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박찬영이 내미는 핸드폰을 가볍게 받았다.


눈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메모를 흩었다.
빼 먹은 사람, 틀린 날짜는 없었다.
그녀 자신의 생일까지도.


그가 고다연의 생일을 알고 있다고 한들 특이한  없었다.
이전에 한  흘러가는 이야기로 서로의 생일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그런데… 메모 어플이 특이하네?’

팀원의 생일이 기록된 메모는 핸드폰 화면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이 어플은 다음 페이지에 있는 메모를 미리 보기로 볼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미리 보기란에 흐릿하게 보이는 메모를 향해 시선이 옮겨 갔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곧, 한 줄 남짓한 짧은 글귀가 고다연의 눈에 들어왔다.

‘아! 보면  되지.’

고다연은 타인의 메모장을 훔쳐보는 것이 잘못된 짓이란 건 알았다.
허나 미리 보기에 적힌 내용을 약간 봐버렸다.
의지로 시선을 제어하기 전에 일어난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잠깐 본 글은 너무 짧았다.
그래서 1초 남짓한 순간만 봤음에도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 와버렸다.
고다연의 호기심을 마구 자극할 만큼 메모는 특이 했다.

억지로 미리 보기란에서 시선을 돌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한번 머릿속에 박힌 내용이 잊히는 것은 아니었다.

‘23시 52분, 31아3327?’

전자에 적힌 것이 시간이라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날짜가 넘어가기 직전이란 것이 특이 했지만, 별로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뒷부분은 달랐다.
고다연은 저 일곱 글자가 무얼 적어 놓은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음… 어디서 본  같기도 한데…’

한글과 숫자가 섞여 있는 이 짧은 메모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패턴이었다.
짧게 고민해 보아도 역시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은행의 비밀번호일까?
중요한 것을 본 거면 찬영씨에게 좀 미안한데…
그런데 시간은 왜 기록을 해 놨지?


“앗! 자,잠깐만요! 다연씨!”


“네?”


박찬영의 다급한 부름에 화면에서 시선을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고다연의 손에 쥐인 핸드폰을 귀신같이 빼내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스윽!

눈치를 챘을 때는 손이 비어 있었다.
어차피 박찬영의 핸드폰이니, 그가 달라고 했으면 망설임 없이 돌려주었을 것이다.
허나 그럴 새도 없이 박찬영이 나서서 핸드폰을 회수했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몸놀림이었다.
마치 그녀가 다른 메모를 보면 안 된다는 것처럼.

그의 표정이 당황에 물들어진다.
고다연이 아니더라도 누가 본들 명백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박찬영은 동요하고 있었다.
뜬금없었지만, 고다연은 혼란이 섞인 그의 얼굴조차 잘생겼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 보,보셨나요?”

보았냐는 건 무얼 말하는 걸까.
역시 방금 내가 봐 버렸던 다음 페이지의 메모를 말하는 걸까?

숨길만 한 메모라면 중요 한 것이란 뜻이다.
평소라면 은행 비밀번호라 생각하며 방금의 메모를 머릿속에서 지웠을 것이다.
그러나 박찬영의 언행이 고다연의 사고를 틀었다.


‘저 표정은… 수치? 찬영씨는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단순한 내용을 들킨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타인, 혹은 여자친구에게 들켜서 수치를 느끼는 메모는 무엇일까?
방금의 메모를 다시 떠올려 봐도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고다연은 조언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녀의 친구는 연애 경험이 많으니 자신과 달리 떠올리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찬영씨.  잠깐 생수 좀 사러 다녀올게요.”


“아, 네… 큼!…”


“찬영씨 것도 사 올까요?”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 끼익… 쿵.

고다연은 어색한 몸짓을 반복하는 박찬영을 뒤로한 채 연습실의 밖으로 나왔다.
기본적으로 댄스 연습실은 방음이 정말  된다.
문밖에서 통화한다고 안에 있는 박찬영에게 들리지는 않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고다연은 핸드폰을 들고 자신의 친구를 향해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수신음 끝에, 핸드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다연아? 오랜만에   있을  통화 하네.


“수상해.”


- 어? 갑자기 무슨 소리?…


“내 나,남자친… 큼! 찬영씨. 방금 일이  있었는데, 행동이 수상해서.”

- 수상한 행동?…

“응!  도움이 필요해!”

방금 박찬영의 말투와 언행.
아무리 되새겨 보아도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몸짓이었다.
고다연은 방금의 상황을 요약해서 자신의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해서 우연히 보게 됐는데, 그런 메모가 있더라고.”


- 메모의 내용이 뭐였는데? 한번 들어보자.

“음… 자정이 다 돼가는 시간이 적혀 있었고… 31아3321? 이렇게 적혀 있었어.”


31 아 3321이라… 어? 이건…

“부끄러워 한  보면… 앗! 혹시 야,야한 동영상의 제품번호 그런  아닐까? 제대로 못 봐서 좀 틀릴 수…”


- 아니야 다연아…!


말을 경청해서 듣던 박은미는 곧바로 탄성을 흘렸다.
그녀의 말에는 미미하게 감동이 섞여 있는 듯 들렸다.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뜻이다.


- 그 남자애가 너 진짜 좋아하나 본데?


“응? 무슨 소리야?”


- 그거 차량 번호잖아. 31 아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

“차량번호? 아!”

 어제 회식 끝나고 집  때 택시 탔다고 했지? 그 시간이 언제쯤이었어?


“막차가 끊겼으니까 12시가 다 되어… 갔…지…”

- 맞네! 메모에 적힌 시간도 12시가 되기 직전이라 했지?

고다연은 박은미의 말이 맞음을 깨달았다.
혹시 지갑에 어제의 택시 영수증이 있는지 보려고 했다.
영수증에는 택시의 차량 번호가 적혀 있을 테니까.


“아… 영수증 지금 없는데…”

허나 지갑을 찾던 고다연의 손은 금방 멈추었다.
집에 도착한 뒤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온 것을 깨달은 것이다.

-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어. 네가 탄 택시가 맞을걸? 아! 방금 인터넷에 검색해 봤는데, 택시는 차량 번호가 ‘아·바·사·자’로 부여된다네.


메모에 적혀 있던 차량 번호는 ‘아’가 포함돼 있었다.
높은 확률로 택시의 번호가 맞으리라.

실제로 메모에 적힌 차량 번호는 고다연이 탄 택시 번호가 맞았다.
어젯밤, 박찬영이  눈으로 보고 메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택시 번호를 메모했을…”

- 으휴 이 바보! 당연히 널 걱정 해서 그런 거지! 혹시나 다연이 네가 나쁜 일 당할까봐 말없이 메모 해둔 거 아니야!

“아!… 그래서 시간을…”


- 오늘 새벽, 나랑 통화하기 전에 남친한테 안부 문자 왔었어?

“응. 잘 도착 했냐고 물어보는 문자가 왔었어…”


- 100% 확실하네. 와… 그럼 부끄러워한 이유가 괜한 걱정 했다는 걸 들킬까 봐 그랬던 거야? 큭큭! 네 남친 매력 터진다.

박은미의 도움으로 진실을 알았다.

얼굴에 열이 달아오른다.


명백하게 가슴이 뛰는 속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익숙지 않은 감각에 당황한 고다연은, 손등을 볼에 대어 얼굴을 식히기 시작했다.


‘나를… 내 생각보다… 엄청… 좋아해 주는구나…’

박찬영의 애정이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귀기 시작한 첫날을 제외하고는 좋아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들은 적 없었다.
덕분에 편한 마음으로 남자친구를 대할 수 있었지만, 그의 연심이 직접적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것이 박찬영의 배려라는 것을 피부로 깨달았다.


평소 그녀를 향한 마음을 자제하고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다.
겉모습에 가려진 박찬영은…
내심 그녀를 생각하고, 걱정하고, 소중히 대해 주었다.


오늘 사건으로 그의 숨겨진 진실을 엿보게 되었다.
위장 속에 숨겨진 그녀를 향한 애정은 고다연이 상상하던 것보다 몇 배나 더 거대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그녀를 배려해 마음을 숨기고 있다.
그것이 고다연의 마음을 크게 한번 흔들었다.
아름다운 분홍빛으로.


‘으…’

고다연은 원인 모를 수치심에 쪼그려 앉았다.
운동으로 단련된 하체는 불안정한 자세임에도 완벽히 지탱했다.
그녀의 볼 사이에 양 무릎이 닿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자 그나마 쿵쾅대던 가슴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박찬영이 말한 대로, 그녀를 1년 이상 짝사랑했다는 것이 마음에 와닿았다.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고백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고다연이 이렇게까지 설레하는 이유가 존재했다.
그녀는 항상 챙겨 주는 입장이었다.
대학 댄스부의 부장으로 있는 그녀에겐 당연한 일상이었고, 그 버릇은 술자리에서도 드러났다.
그녀가 A.Light 크루의 신입을 맡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남을 잘 챙겨주는 그녀의 성격 때문에 맡은 역할이었다.

그런 만큼 누군가에게 챙김 받는 다는 것은 너무나 새로웠다.
보통 챙김 받기 전에 알아서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일은, 아주 어린 시절 박은미에게 신세를 진 것이 마지막이었다.
처음 이성에게 챙겨 받은 감상은…
정말 나쁘지 않았다.
상대가 박찬영이라서 더더욱.


 챙겨 주는 것을 보면 남자답고, 또 그걸 숨기는 부분은 귀엽네. 이거 두 개가 공존하기 쉽지 않은데… 너 진짜 남자 잘 만났다.

“…응. 그런가 봐.”

- 어라? 네가 웬일로 남자친구 칭찬에 긍정해?

“지금까지 부정한  없었거든.”


- 동의한 적도 없었잖아. 맨날 잘 모르겠다고 하더니? 너 설마… 슬슬 사랑이 싹트는 중?

“사,사랑이 싹튼다고?”

- 내 말은 고개를 내민 수준이냐는 말이지. 개화할지 안할지는 정해지지 않은 푸른 새싹. 어때?

“…”


고다연은 박은미의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
가슴을 뒤흔드는 감정을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그 색이 선명했다.
그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마음은…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새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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