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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42) (142/310)



〈 142화 〉지구

나와 고다연은 동갑이지만…
서로 연인이 되었다고 말을 놓지는 않았다.
내가 일부러 화제에 올리지 않았고, 고다연 역시 이 이야기를 피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는 이유는 짐작이 갔다.
고다연은 아직 내게 마음을 크게 열지 않은 것이 원인이리라.

그녀는 연애를  번도 해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고다연인 만큼 익숙지 않은 남자친구로서 다가가면 거리감을 느낄 것이다.
어쩌면 친구의 입장으로 다가가는 것보다 더.


우리 사이가 단순히 친구 사이였다면 고다연은 거리낌 없이 말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까지는 훨씬 더 빠르게 친해질 수 있겠지.
허나 친구로 시작해 다가가는 것은…

‘평범한 여자라면 먹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정말 별로인 선택이야. 고다연이니까.’


그녀는 친구가 많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내가 친구로서 그녀에게 다가가게 된다면, 백 명을 훌쩍 넘게 존재하는 수많은 남사친  한 명이 되었겠지.


고다연은 남사친이 많은 만큼 그들과 거리감을  유지 시킬 것이다.
나를 연애 대상으로 볼 확률이 오히려 낮아지는 것이다.
완전히 박힌 인식을 뒤바꾸기는 어렵다.
처음부터 쌓는 것보다 더욱.

그러니 내 원래의 계획은 이러했다.
고다연에게 나의 매력과 스펙을 은근슬쩍 보여주며 고백을 유도해낼 생각이었다.
고백받기 전까지는 ‘백하민’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 친하지 않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일단 연애 대상이라는 관계를 만들어 내면 저절로 의식 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고다연의 성격이 내가 알던 것과 다를 수도 있단 걸 깨달으며 폐기한 계획이지만.’

허나 계획을 폐기 처리한 당일에 고다연이 고백을  왔다.
쉬운 길이 나를 향해 활짝 열린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무언가 많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냥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연락하는 것에 그쳤다.
일부러 고다연과 데이트 약속을 잡지도 않았다.

그녀의 언행을 잘 살펴보면 연애보다는 춤에 관심이 많은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 만큼 생활 패턴이 나로 인해 깨지게 된다면 부정적인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다연씨. 여기 물.”

“앗, 고맙…”


“무얼요. 아! 다른 분들도 드세요! 물 가져왔어요!”


나는 한 사이클 연습을 마친 고다연에게 차가운 생수를 건네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역시 생수병을 나누어 주었다.
너무 그녀만 챙겨주면 사귀는  숨기는 의미가 사라진다.
나 역시 고다연이 내게 완전히 빠지기 전까지는 밝힐 생각이 없었다.


‘음… 내게 반하게 만든 다라… 지금 당장이라도 초기 목표를 달성할 수는 있지만…’

애초에 고다연과 사귀겠다는 목적을 세운 이유는 백하민 그 새끼를 놀리기 위함이다.
놈이 살면서 처음, 그것도 무척 짧게나마 사귀어 본 ‘전’여자친구를 빼앗아 기만하기 위해.


나는 이미 고다연과 사귀고 있다.
평일, 데이트라는 핑계로 대학에 있는 고다연에게 찾아가면 기본적인 복수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와 함께 일부러 백하민 근처를 거닐기만 하면 되니까.
허나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고다연을 반하게 하려 하냐면…


‘보여주기식으로 사귀는 게 아닌, 누가 보아도 서로 없이 못 사는 연인으로 느껴져야 더 속이 뒤틀릴  아니야?’


…음…


…사실 그 새끼에게 더 지독한 복수를 하겠다는 것은 급조한 핑계에 불과했다.
간지러운 본심을 숨기기 위한 위장막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눈 돌리지 않기로 했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지금이 적기가 맞다.
그녀가 내게 정이 크게 들지 않은 지금.
후딱 목표를 달성한 뒤, 관계를 정리하고 헤어지기 가장 깔끔한 타이밍이다.


허나 나와 고다연 중 둘  한 명은 자연히 댄스 크루도 탈퇴할 것이고, 접점이 사라진 우리는 연이 끊기리라.
그것이 나를 고민 하게 만들었다.
나의 본심은, 그녀와 인연을 이대로 끊기에 아쉽다고 여기고 있었다.
의외로 난 고다연을 알아가며 꽤 많은 호감을 느끼고 있다.

아.
절대 내게 남녀 간의 애정이 싹텄다는 것을 의미 한 게 아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고다연의 인간적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적어도 나만큼은.’


학업, 인간관계, 동아리, 댄스 크루, 자기관리…
고다연은 무엇 하나 빼먹지 않고 완벽히 해내고 있다.
분명 잠자는 시간도 줄이고 있을 것이다.
이 지옥 같은 생활패턴은 매일, 매주, 매년 반복해서 유지된다.
그런데도 앓는 소리 하나 없이 웃으며 사람을 대해야 한다.


저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때려치우고 싶은지,
나만큼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예전의 내가 고다연처럼 노력했으니까.’

백하민 때는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다.
고다연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와 친해지며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과거의 나와 닮았다.
그런 만큼 연인이 아니더라도, 어쩐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이왕이면 연인으로 있어 주면 더 좋고.

사람은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고 한다.
철천지원수가 되거나, 둘도 없는 절친이 되거나.
우리는 서로 호감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친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아니겠는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술이나 먹는다고 했죠? 다연씨도 갑니까?”

“아. 저도 참석해요. 그러고 보니 찬영씨는 회식이 처음이네요?”

“맞아요.”

“술은 잘하세요?”

“음… 그냥 딱 평균 정도 돼요. 조절할 줄 아니까 걱정은  하셔도 됩니다.”


“큭큭. 조절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고다연이 나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마…
처음 회식이다 보니 신고식이 있나 보다.
나를 환영하기 위한 자리에 정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술자리 특유의 분위기 역시 싫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연치유』 덕에 어지간히 독한 술을 먹지 않는 이상에야 잘 취하지 않는다.
게다가 마나를 각성한 초인의 기본적인 저항 능력도 있고.
어쩌면 양주만큼 도수가 높지 않은 한국의  정도는 먹어도 먹어도 취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살살 부탁드릴게요.”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고다연은 즐거워 보였다.
말투 역시 누가 들어도 연기 톤이 확실했다.
아마 오늘 꽤나 마시지 않을까 싶다.

시끌시끌!


결국 술을 내게 가장 많이 먹인 사람은 고다연이었다.
물론 내가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지 않았기에 계속  것이다.

굳이 술에 취한 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놓고 친목을 위한 자리다 보니 다들 잔이  틈이 없이 마셨기 때문이다.
내가 취했는지  취했는지까지 가려낼 정신은 없었다.


“우와! 찬영씨 술 엄청 쎄네!”
“저 아저씨는 벌써 취했는데…”
“끅!… 그, 찬영쒸. 혼자   마셨지이?”

“한 세 병쯤 마셨네요.”


“안주도 거의 안 먹더만, 좀 드세요. 아침에 속 버려요.”


“아! 고마워요.”


고다연이 내미는 안주가 담긴 그릇을 받아들였다.
나를 챙겨 준 그녀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허나 내심 안주가 끌리지는 않았다.

 세계 모든 안주가 그렇듯  그릇에 담긴 음식도 기름지고 짰다.
별로 내 입에 맞는 음식은 아니었다.
특히 최근 들어 더욱 예민해진 미각에게는.
술자리 자체는 즐거웠지만…
음식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안주를 먹자고 미각을 낮추기는 좀 그렇고.’

아무리 살이 찌지 않는다고 한들, 별로 몸에 좋을  없는 음식들이다.
그냥 적당히 먹는 척만 하면 되겠지.

예전부터 숨 쉬듯 해왔던 자기관리가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이런 음식을 강제로 먹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다.


“아! 알겠다! 짠 음식 싫어하시는 거였구나!”

나를 유심히 관찰하던 고다연이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리 보고 있나 했더니, 내가 안주에 손이 가는 걸 확인 하고 있었나 보다.

- 띵동.


고다연은 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직원 호출 벨을 누르더니, 과일 안주를 하나 시켰다.
나는 그런 고다연을 살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가 나를 보고 마주 웃어주었다.
아주 뿌듯하다는 표정이다.
매력 있었다.

“과일은 드실  있으시죠?”


“네… 그런데 챙겨주는 것에 엄청 익숙하시네요?”


“앗,  났나요? 사실 친구끼리 마실 때 제가 술자리에서 이런 포지션이라.”


한 병을 훌쩍 넘게 먹었는데도 멀쩡한 그녀를 보니 살짝 이해할  있었다.
보통 술을  조절 할수록, 술에 강할수록 그런 역할을 맡곤 하니까.

2차는 없었다.
총무 임준혁의 말로는, 회비가 빠듯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들은 전부 각자 짐을 챙기며 돌아갈 준비를 했다.


가장 많이 술을 마셨지만 전혀 취하지 않은 나.
중간부터 술을 마시지 않은 고다연.
우리 둘을 빼고는 대부분이 혀가 꼬일 정도로 취했다.
덕분에 둘이서 모두를 배웅해야 했다.

“들어가세요!”


“네엡!… 수,고 했어요 찬영씨도! 끅!”


술에 취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갔다.
시끄럽던 주변이 순식간에 주변이고요 해 졌다.
옆에서 고다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것은 나와 고다연 둘밖에 없었다.


“…잠깐 편의점에서 뭐라도 마실래요? 제가 살게요.”

“쿡쿡. 찬영씨. 겉보기에는 안 그래 보여도 취했나 보구나?”


“그랬나 봐요. 좀 어지럽네. 그리고, 저희는 연인이니까 막차 전까지 잠깐 시간을 보내는 건 괜찮잖아요? 건전하게.”

“앗!… 네… 그러네요… 건전하게…”

고다연이 살짝 놀라며 말을 흐린다.
알고 보니 그녀도 완전히 술기운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나 보다.
우리가 연인이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얼굴이다.
어쩐지 아까부터 텐션이 미묘하게 높더라.

나는 그런 그녀와 함께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눈치가 빠른 고다연 덕에 나도 나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작게 답례 삼아 음료나 사주려 했다.


“뭐가 좋아요? 역시 아이스 아메리카노?”

“음… 좋아요!”


“이 시간에는 카페 문이 전부 닫았는데, 편의점 커피로 괜찮아요?”

“공짜면 다 좋죠.”

시간은  편의점에 들러서 음료를 사고 나오면 지하철 막차를 탈  있는 타이밍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시간 여유는 있었다.

그러나 예정이 살짝 꼬이고 말았다.
고다연이 실수로 내게 커피를 쏟았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내가 편의점에서 계산하던 도중에 쏟아서 피하지도 못했다.
손이 묶이지 않았다면 손쉽게 막거나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사념각을 사용한다면 피했겠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고다연이 뻔히 보고 있는데 그들의 앞에서 순식간에 이동할 수는 없었다.


“으아! 어,어떻게! 죄송해요!! 정말로…!”

“…차갑네요.”


“휴지! 휴지가!…”

- 스윽. 스윽…

다행히 내가 입은 옷은 그리 비싼 옷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어두운 계열의 색이니 티도 많이 안 났다.
아이스 커피라 좀 시리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는 고개 숙여 사과하는 고다연을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결국 편의점에서 휴지 한 팩을 사서 전부 쓰고 나서야 고다연은 고개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헤프닝 때문에 막차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택시 타야겠네요.”

“죄송합니다… 진짜로… 저 취했나 봐요…”

“괜찮다니까요. 여자친구를 이런 거로 타박할 남자가 세상에 어딨어요?”

“여…여자친…”


내 직접적인 말에 고다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너무 의식하지 않아서야 내가 곤란하다.
둘이 있을 때 한정으로 우리의 관계를 되새겨 줄 필요가 있었다.

나를 먼저 택시에 태우겠다는 말을 뭉갠 채 억지로라도 그녀를 택시에 먼저 태웠다.
결국 미안한 표정으로 택시에 탑승 한 고다연.
얼굴을 보니 내게 사과의 메세지라도 보낼 표정이다.


나는 멀어지는 택시의 뒷모습을 보며 핸드폰 메모장을 켜 짧은 글을 메모했다.
별 내용은 아니고, 그냥 보여주기식 떡밥이다.


*


- 그래서 어때? 좀 애정이 들어?


“아직 잘 모르겠어. 그런데…”


- 그런데?

“약간, 마음에 들지도?”

고다연은 방금까지 박찬영과 주고받은 메세지를 재확인하며 말했다.
역시 센스 있어 보였다.
눈치가 없던 과거의 그녀와 닮은 부분도 있었지만, 닮지 않은 부분도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해서 내가 실수를 했는데, 기프티콘을 보내 주더라.”


- 기프티콘?

“응. 아까 쏟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오늘 쏟은 벌로 밥 한번 사달래. 이거… 데이트 신청 맞지?”

- …너네 엄청 귀엽게 논다. 특히 남자애가 기프티콘 보내준 부분이. 아! 둘 다 첫 연애라 그랬지?

“뭐,뭐라는 거야!”

고다연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화를 냈다.
아직은 확정할 수는 없겠지만, 내심 박찬영이 괜찮은 남자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연인의 실수를 부끄럽지 않게 감싸줄 매너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연습실에서 박찬영과 함께 안무를 연습 하던 중.
어떤 사건으로 인해 고다연은 처음으로 연인에게 설렘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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