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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41) (141/310)



〈 141화 〉지구

“예?…”


“큼! 찬영씨. 저희…”

얼떨떨한 나의 반문에 고다연이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한다.
그녀의 말은 한층 더 또박또박 해져 있었다.
없었던 일로 하고 싶지는 않나 보다.


“아뇨. 제대로 들었는데, 좀 당황스러워서.”

당황스럽다는 것은 본심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고다연의 고백에 당황해 버렸다.
순식간에 냉정히 가라앉았지만.

‘빨라도 너무 빨라. 나랑 고다연은 고작 한 달밖에 알고 지내지 않았는데?’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백하민이었던 시절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그녀의 신체 반응이 보인다.
저 자신감 넘치는 미소 뒤에는 명백한 긴장이 담겨 있었다.
옅게 칠해진 화장의 덕에 홍조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귓볼은 약간 붉어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부끄러움은 느낀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것이 나를 향해 애정을 품고 있다는 의미는 못되었다.
그녀는 사랑을 하는 여자라고 보기엔 너무나 냉정해 보였다.


“다연씨는 저를… 마음에 두셨던 건가요?”

“……네.”

나의 질문에 살짝 망설인 고다연이 작게 내뱉었다.
그 표정과 말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내가 느끼기엔 진실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감이 내게 말해 주었다.


과거라면 판단의 근거로 ‘감’만을 내세우지는 않았으리라.
허나 이전에 내게 육감이 있다는 것을 물리적으로 증명했다.
이젠 내 육감을 어느 정도 신뢰 할 수 있다.
과거처럼 논리적인 추론에 밟혀 일방적으로 무시하지는 못했다.


‘내 스펙을 확실히 파악한 것도 아니고, 내게 반한  같아 보이지도 않고… 음…’


물론 금전적인 부분만 제외한다면 나는 고다연의 조건에 전부 들어맞는 사람이다.
오히려 ‘백하민’ 때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이다.

결론은 나왔다.
내 예상보다 많이 이르긴 하지만,
다른 여자 팀원이 채갈 확률을 생각해 본다면 조급해져 고백할 만하다고.
실제로 한  뿐이지만 내게 고백을 한 팀원도 있다.

내 대처는 정해져 있다.
손에 쥔 커피잔을 꼬물대며 마사지하는 고다연에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사귀죠.”


“…네? 어라?”


“고백. 받아들일게요. 다연씨.”

나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고다연을 쳐다보았다.
마치 오래된 연인을 보는 것처럼.
그러나 고다연의 반응이 이상했다.
내가 고백을 받아들이리라 생각 못했다는 얼굴이다.

“어… 그, 죄송한데… 찬영씨는 전에 누군가가  고백을 거절하시지 않으셨나요?”

“아! 소라씨 말씀이신가요? 이런, 나름대로 입을 조심 했는데 소문이 났나 보네요…”


내가 댄스 크루에 들어온 지  달이나 지났는데, 당연히 고백해온 여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좀 확실한 이유를 대어서.

“하하… 여자 팀원끼리 따로 단톡방이 있어서… 그보다, 그때 고백을 거절하신 이유가 제가 기억하기론…”

“…설마 그것까지 소문이 났나요?…”

나는 당황한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당연히 이 이야기가 여성 팀원들 사이에 떠돌 것이란 건 예상 하고 있었다.
내게 고백 한 박소라라는 여자는 입이 가벼웠으니까.

이왕 그녀가 내게 고백 한 것, 살짝 이용 한 것이다.
그녀를 거절한 이유가 크루 내부에 퍼져 다른 여성들이 내게 고백 할 엄두를  내게끔.
여성  여럿에게 고백을 받아 댄스 모임 자체가 박살 나는 건 가장 피해야 할 상황이다.

“아… 죄송해요… 찬영씨.”


“아니에요. 으…  쪽팔리긴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나쁜 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해요. 소라씨를 거절한 이유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라고 했죠? 심지어 일 년 전부터 마음에 두었고.”

“맞습니다.”

“그런데 왜  고백을 받으셨어요? 좋아하는… 사람… 이… …있, 는… 설,설…마…”


나는 그녀가 말을 하는 와중에 고다연의 눈을 가만히 맞추며 웃어 주었다.
고개를 슬쩍슬쩍 끄덕인 것은 덤이었고.
내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내가 마음에 둔 사람이 바로 고다연 너라는 뜻이다.

“맞아요. 그 사람이 다연씨에요.”

“하지만… 저랑 찬영씨는  달 전에 처음 만났는걸요? 찬영씨가 마음에  사람은 분명히 일  전부터라고…”


“1년 전부터 마음에 두었단 소리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나는 핸드폰을 켜 어플 한 가지를 실행했다.
자퇴했음에도 아직 지우지 않고 놔둔 대학 커뮤니티 어플, ‘애니타임’이다.
어플의 설정으로 들어가 인증된 대학을 고다연에게 보여주었다.

“아앗! 여긴 저희 대학교!”


“지금은 자퇴했지만요. 그리고… 저희 대학에서는 다연씨가 엄청 유명하죠?”

내가 대학에서 고다연을 봤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고다연을 모르는 것이 이상하다.
남자는 백하민, 여자는 고다연이 우리 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둘이었으니까.


애니타임은 기본적으로 입학이 증명되어야만 해당 대학의 커뮤니티에 접속 할  있다.
즉,
우리 대학 커뮤니티에 접속했다는 것은 내가 그 대학에 입학했다는 의미다.
학생증은 자퇴하며 반납했으니 당장 대학을 증명하기 가장 편한 수단이  어플이었다.


“그럼 지난번에 커뮤니티에 떠돌던 찬영씨 닮은 남자는…”


“아… 저도 봤어요. 그거 저 맞습니다. 하하…”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자퇴했기 때문이었군요…”

“그렇죠.”

나는 살짝 식은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다행히 아직 고다연은 의심하지 않고 있다.
놀라움에 놀라움이 겹쳐 생각이 빠르게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두면 내가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이 크루에 들어왔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사실이지만, 들키면 안 되겠지.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듯이 말했다.

“처음 만난 척해서 미안해요. 다연씨는 제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갑자기 아는 척하면 경계할까 봐 그랬어요.”

“그,그렇긴 하겠죠… 네…”

“생각해 보세요. 몰래 마음에만 담아 두던 사람이, 자퇴하며 다신 볼  없을 테니 마음을 접었는데… 우연히 들어간 댄스 크루에서 재회했고, 심지어 그녀가 신입을 담당한다니?”


“…우와…”


“기가 막힌 우연이죠. 아니, 운명이죠. 어떻게 포기 할 수 있겠어요?”

나는 눈을 짧은 주기로 깜빡거리며 목소리 톤을 미약하게 높였다.
숨은 깊게 들이쉬고, 길게 내뱉었다.
사람이 신나거나 흥분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고다연은 나의 연기를 믿었다.
나의 흥분 아닌 흥분이 그녀에게도 약간 옮겨갔다.
그녀 또한 약간 들뜬 것으로 보였다.


고다연의 입장에선 상당히 믿음직스럽게 들렸을 것이다.
내 목적이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라면, 대학에서 자퇴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객관적으로 따져 보아도 우리의 만남은 놀라운 우연이었다.


“그런데… 그런 다연씨가 제게 고백을 해주다니…”

“아…! 그,그건…”

“제게 고백을 해주셨다는 건, 저와 같은 마음이란 것이겠죠?”

“…”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다연씨.”

고다연은 양심에 무척이나 찔리는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무려 1년에 걸친 짝사랑을 운명 같은 만남을 걸쳐 이루었는데 정작 자신은 상대에게 애정이 희미 하다니,
어지간히 냉혈한 아니고서야  말이 없으리라.


그녀가 내게 호감을 넘어서는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는 건 잘 안다.
그러나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이미 연인이 된 이상, 그녀가 내게 반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내겐 최고의 무기인 외모가 있었으니까.

“다연씨. 저희가 만나는 건 팀원들에게 비밀로 할까요?”


“…그러죠. 찬영씨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불편한 공기가 흐를 수도 있어서…”


“음…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보군요.”

“그건… 아마 말해줘도 모를 거예요. 아! 하나 궁금  게… 1년간 대학에 다니셨는데, 커뮤니티에는 왜 최근에서야 사진이 나돈 걸까요?”

“사정이 있어요. 그건 나중에 천천히 말해줄게요. 지금은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워 보이니까. 그렇죠?”

“맞네요… 하하…”

고다연은 살짝 지쳐 보이는 말로 대답했다.
그녀의 언행을 보면 내 입에서 거절의 대답이 나올 줄 알았나 보다.
그러나 고다연은 고백했다.
차일 걸 알면서도.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어떤 상황이 되어야 이런 모순이 성립될까…

‘고백을 받은 순간 이성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걸 노린 건가?’

비록 내가 관심이 없었다고 한들, 나를 좋아해 주는 상대를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고백해온 상대가 어디 모난 곳이 없고, 인기가 많을수록 그렇다.
오히려 고백을 거절한 이후에 연애 상대로 의식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일이나 공부를 하던 중,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은 뒤, 휴식하거나 밥을 먹고 있을 때 등등…
자신에게 고백해온 상대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이성을 향한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관심 역시 늘어난다는 뜻이 된다.

‘하물며 계속 얼굴을 보는 사이라면… 저절로 상대방을 향해 시선이 갈 수밖에 없지. 그러다 보면 본인도 모르게 정이 드는 거고.’

한번 고백을 거절당한 사람이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고백했을 때 둘이 이어질 확률은,
사람들 사이에 퍼진 인식 외로 은근히 높다.
물론 고백 전에   명이 서로를 향해 호의를 품고 있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고다연은 그런 상황을 노린 걸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과거의 나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만나자는 권유를 받았으니까.


약간 머리에 걸리는 것은…
내가 헛짚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읽은 것이라면, 이건 연애사에 통달한 고수나 사용 할 법 한 노림수다.
연애 경험이 없다고 자자하게 소문이 난 고다연이 떠올릴 수가 못 된다.


‘…연애 전문인 책사라도 데리고 있나?’


물론 그럴 확률은 너무 낮았다.
차일 걸 전제한, 더 먼 미래를 내다본 고백.
이건 평범한 사람이  법한 수는 못 된다.
외모가 받쳐 주는 고다연이라서 가능한 방법이다.

아무리 연애의 고수라고 한들, 개개인에 맞춰서 연애 전략을 짜주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
조언자가 가족이나 소꿉친구가 아닌 한.
물론 고다연은 친구가 많으니 조언자가 있을 수 있지만…
그녀가 홀로 이 계획을 떠올렸을 확률이 더 높다.


아니면 단순히 우연이거나.

“그런데 찬영씨…”

“예?”

“저희… 정말로 연인이 된 건가요?…”

“다연씨가 고백하시고는 그리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도 대답해 드리자면, 당연하죠!”

대답을 들은 고다연의 표정은 알쏭달쏭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나쁜 것인지 모르는 표정이다.

일부러 지어낸 표정은 아니었다.
저 표정을 보니 우연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녀가 계획을 세운 당사자라면 분명히 좋아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럼…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고백한 이유가 따로 있다는 뜻이군.’

조급하게 알아낼 필요는 없다.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가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어찌 보면 흔치 않은 관계가 완성되었다.
서로 상대방을 향한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적당한 호감만 느낄 뿐인데, 우리는 사귀고 있다.


“잘 부탁해요. 다연씨.”

“…네.”





*



“은미야. 나 남자친구 생겼어…”

어라? 설마 그 남자가 바로  고백을 받았어?

“응… 예전부터 날 좋아하고 있었다더라.”

- 살짝 내 예상이 빗나갔지만, 다연이 넌 엄청 예쁘니까 그리 이상한 건 아닐지도?…


고다연은 귀에 걸린 이어폰을 매만지며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의 친구는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고다연의 이야기를 집중해 들었다.


연애사를 남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은 용기 없이는 하기 힘든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신에게 연인이 생긴 것이 마치 남 일처럼 느껴지는 고다연에게는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 제대로 된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우와! 축하해! 어때. 첫 연인이 생긴 감상은?

“…그냥 얼떨떨하네. 거절당할  알았거든.”


첫 남자 친구.
연인이 되었다고 해도 마법에 걸린 것처럼 애정이 샘솟지는 않았다.
살짝 감회가 새롭기는 했다.
고다연 또한 박찬영을  호감 어린 시선으로 봤으니까.


이어폰을 껴 양손은 자유로웠다.
그녀는 통화를 끊지 않은 채 핸드폰을 조작해 너튜브에 들어갔다.
A.Light 댄스팀 채널에 가장 최근 올리온 영상을 클릭하자,  시간 전에 봤던 얼굴이 화면 안쪽에 가득 찼다.
박찬영의 얼굴을 보고 흥분한 카메라 감독이 솔로 샷을 잡았기 때문이다.

‘…잘생기긴 했다.’


마치 연예인이 일반인인 척 섞인 것만 같았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애인이라고 생각하자, 고다연은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 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리 오래 지속 되지는 않았다.
당장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남자친구… 춤을 연습하는데 방해되면 안될 텐데…”

- 쯧쯧. 다연아. 연애는 시간이 날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든 만들어서 하는 거야.


“…연애를 하면 그렇게 좋아? 매번 내게 권유 할 만큼이나?”


- 음…  중 하나지. 네 생각보다 훨씬 좋거나, 훨씬  좋거나. 나는 네 첫 연애가 반드시 전자였으면 해. 그래서 계속 참견했던 것이고… 미안.

“후후. 사과 안 해도 돼.”


말로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박은미가 그녀에게 해주는 말은 전부 진심 어린 조언이라는 것을.

박은미가 겪은 아프고 괴로운 연애사를 전부 그녀의 입을 통해 들었다.
잔소리 역시 자신의 친구만은 그런 쓴맛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인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항상 고다연은 그녀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 주는 마음이 너무 예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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