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40) (140/310)



〈 140화 〉지구

나는 몸이 바뀌기 이전에도 춤과 관련된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댄스 크루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다.
딱히 재미를 느끼지도, 지루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은근 즐기게 되었다.
정확히는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배우는 과정 자체가 재밌었다.
특성의 효과로 높아진 재능 덕에 실력이 늘어나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남들은 다 한 걸음씩 천천히 걸을 때,  혼자만 두 다리로 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정말로 춤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우게 된다면 언젠가 날고 있는 사람을 만나겠지만…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난 춤을 취미로 즐기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시작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으니.

그러나 고다연은 달랐다.
그녀는 전문적으로 춤을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다연씨는 이 팀이 만들어질 때부터 있었던 건가요?”


“팀 자체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됐어요. 사람도 얼마 없는 조그만 팀이잖아요?”

“아하… 그런데 다연씨는 왜 팀장급이 아닌가요? 춤도 크루에서 제일 잘 추시는데.”

“공부를 제일 잘한다고 학교 반장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사실은 춤추는 것에 집중하고 싶어서 제가 거절했지만요.”


그녀는 모든 팀원  가장 열성적으로 연습에 참여했다.
오죽하면 완전히 백수인 나를 제외하고 평일 연습에 가장 높은 참여율을 보이는 사람이 고다연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녀와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지금에서는 둘만 남아 이야기를 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찬영씨도 춤에 제대로 맛들리셨나요? 항상 연습에 참여하시고, 실력도 날이 갈수록 좋아지시고!”

고다연이 눈을 빛내며 내게 물어보았다.
같이 제대로 춤을 시작하자고 권유할 기세였다.
그건  곤란했다.
그쪽 업계가 개인 시간을 전혀 가지지 못할 정도로 일해야 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의외로  같이 모여서 활동하는 것이 재밌더라고요? 그래도 취미로 그칠  같지만요.”


“아… 취미…”


“다연씨는 취미로 끝날 생각은 아닌 건가요? 아, 혹시 말씀하기 불편하시면 안 해도 상관없어요.”


어찌 보면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해주기 힘든 이야기일 것이다.
허나 고다연의 눈에는 내게 다른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으리라.
나의 순해 보이는 얼굴은 이럴 때도 도움이 되었다.

“사실… 제대로 한번 해보려고 고민하고 있어요.”


“그럴 것 같았어요. 항상 열심히 하셨잖아요? 대학에서도 댄스부를 이끌고 있다고 하시고.”

“어라? 눈치채셨어요?”


“이 댄스팀에서 가장 친해진 사람이니까? 저 그리 눈치 없는 사람 아닙니다.”

“네에? 차,찬영씨가 눈치가 있다고요?”


고다연의 눈이 크게 떠진다.
도저히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그녀는 나를 정말 눈치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으니 당연하다.
나는 의도적으로  내 여자들의 유혹에 모르는 척 철벽을 쳤으니까.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심지어 제가 다연씨의 미래 계획을 어렴풋이 눈치챈 사실보다 더?…”

“아! 미안해요. 절대 찬영씨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없었고…”


“하하하! 농담이에요. 장난을 그렇게 진지하게 받으면 어떻게 해요?”

허둥지둥 변명하는 고다연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고다연이 당황을 추스르며 어색하게 나를 보며 마주 웃었다.

나는 팀원별 선호하는 커피나 음료수를 기억해 두거나,
대화할  개개인이 흥미를 보였던 화제를 던지는 등…
겉으로 티 나지는 않지만 아주 눈치 있는 행동을 보여 왔다.
연애 방면에만 눈치 없는 척을 한 것이다.
그런 만큼 고다연도 생각을 좀 하더니 납득 한 듯 보였다.


“음… 그러고 보니 찬영씨에게 아주 눈치 없다고는 못하겠네요?…”


“저 눈치 없다는 프레임이 씌워져 있었습니까?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요?…”


“풋! 그걸 모르니 그런 소리를 듣는 거예요!”

“설마 다연씨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건… 비밀로 할게요!”

고다연은 터지는 웃음을 손으로 눌러 참으며 내게 말했다.
내 어리둥절한 표정이 그리도 웃기나 보다.


겨우 웃음기가 가신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상당히 의외인 것을 보는 눈이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호의적인 방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와… 완전히 과거의 저랑 닮은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네요.”

“예? 저랑 다연씨가 닮았다고요?”

- 절레절레.

“으응. 그냥 혼잣말.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해놓고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고다연의 과거와 닮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니, 이 말에 담긴 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다.
넘겨짚기에는 정보가 한도 끝도 없이 부족했다.


“시작은 백업 댄서로 활동할 생각이에요.”


“어… 화제 전환이 상당히 갑작스럽네요. 백댄서라면, 무대 뒤쪽에서 가수를 더 돋보이게 하는 직업이죠?”

“네. 요즘은 이렇게 데뷔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명문대생이었듯이, 같은 대학을 다니는 그녀 역시 명문대생이다.
그녀의 과는 춤과 전혀 상관없는 과로 알고 있다.
기껏 공부하며 좁은 입시의 문을 뚫었는데, 예체능 쪽으로 빠진다니…
큰 결심이 필요한 행동이다.
언행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마음이 굳어진 것만 같았다.

“진심으로 성공할 것 같은데요? 춤도 정말 잘 추시고, 웬만한 그룹에선 센터를 차지할 수 있으신 비주얼이니.”

“가,감사합니다…”


“아뇨. 사실인데요.”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외모 칭찬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말해야 아부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
실제로 고다연은 나의 말이 진심이 담긴 평가라고 받아들였다.
평소 항상 자신감 넘치던 그녀가 수치에 가까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찬영씨도 모델 하시고 있다 했죠?”

“전문이라고 하기 부끄러운 프리랜서지만요.”

“계속하시면 정말 성공하실 것 같아요. 찬영씨도 손에 꼽힐 것 같은 외모잖아요?”

“너무 과대평가인데요.”


“에이. 겸손하시긴. 아! 그러고 보니 춤에 대해 막히는 부분 없나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그러고 보니 조금…”

나의 모델 이야기에서 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 되었다.
그것이 고다연에게 커다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내가 예상 하기로는 모델을 한다는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들었을 때,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관심을 보여야 정상이다.
은근슬쩍 수입을 예상할 수 있는 질문이 반드시 들어 오리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내 사진이 올라온 쇼핑몰을 구경하고 싶다 하면서, 그 쇼핑몰의 규모를 파악한다든지.
내가 아는 그녀는 상대방의 스펙을 눈여겨보기 때문이다.


허나 고다연은 내가 모델이라는 사실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지나간 화제는 다시 한번 끌어 올리기 힘들다.
만일 그녀에게 내 스펙을 파악할 기회가 있다고 한다면, 방금이 더 없을 적기였던 것이다.

나는 방금 고다연의 미래 계획을 들었다.
그러니  또한 어느 정도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공평하리라.
상대방의 심리적 부채감을 능숙하게 이용하는 사람은 놓치지 않을 기회였다.
내가 아는 고다연이라면 기회를 놓칠 리 없는데…


그녀는 단순히 외모 칭찬을 돌려주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했다.

‘…한번 발을 뺀 건가? 저 그늘 없는 얼굴은 표정 관리를 잘하는 거고?’


아니, 그건 아니었다.
초인의 시력을 가진 나는 미세한 속눈썹의 떨림까지 잡아낼 수 있다.
심지어 밤을 한정으로 신체가 닿은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를 어렴풋이 감지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녀가 어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스파이도 아니고,
거짓말할 때의 생체 신호를 숨길 수 있을 리 없다.

고다연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척을 하며 그녀를 살폈다.
모델에 관련된 화제가 다시 올라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내가 ‘백하민’일 때 알던 그녀는 착각일지도 몰랐다.
고다연은 계산적이고, 스펙을 중시하며, 타인의 마음을 잘 컨트롤 하는 성격이라 예상했다.
스펙을 본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녀와 똑같이 인간관계가 넓었던 내가 그랬으니까.


그녀를 향한 고정관념을 전부 버리기로 했다.
내  눈으로 확인한 사실만을 믿기로 했다.
너무 과감한 판단이 아닌, 전부 경험에서 우러나온 판단이다.

처음 크리스를 실제로 봤을 때.
나는 그녀를 소설 속 ‘광년이’의 성격이 맞다고 확정했지만, 그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크리스는 광년이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었다.

최근 멜과의 오해도 그러했다.
소설 속 그녀의 성격상 내게 절대 이성적인 호감을 품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틀렸다.
멜은 내게 반했다.
이미 나에게 연인이 있음을 알고 있는데도 고백할 만큼이나.


 번의 실수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세 번 하는  좀 그렇지 않은가?
천재는 실수하기 전에 미리 알아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실수를 하며 성장한다.
나는 평범한 사람 축에는 들었다.

“아…  연습실 대여 시간이 끝나네요. 저희도 슬슬 들어가죠. 찬영씨.”


“그럴까요?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다음에 볼 때는 주말이 되겠네요.”

“…그…”

나는 깔끔하게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고다연은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살짝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말하기 어려운 것인가 보다.


이제 와서 모델 관련된 질문을  것 같지는 않고…
그녀가 무얼 망설이는지 예상이 안 되었다.

“다연씨? 뭔가  말 있나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음… 별건 아니고… 그냥 간단하게 커피나 마시고 갈까요? 목이 좀 타서.”


확실히 고다연은 표정 관리를 할 줄 알았다.
고민을 거친 말치고는 상당히 정돈된 어조로 말이 나왔으니까.
그러나 긴장에 차 입술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은 막지 못했다.

고다연은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시죠, 다연씨. 커피는 제가 살게요. 한 달 동안 신입인 저를 챙겨 준 보답으로.”


“…고마워요.”



*


- 터벅터벅.


혼자 걸었을 때는 시선이 그리 많이 집중되진 않았다.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관과 달리, 한국은 어딜 보아도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 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게는 ‘고요한 발자국’ 스킬이 있다.
딱히 마나를 주어 활성화하지 않아도 과도한 시선은 떼주는 것에는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나의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선이 쏠리는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고다연과 함께 거리를 걸으니 시선이 몇 배나 되었다.
누가 보아도 선남선녀가 함께 길을 거니니 저절로 시선이 가는 것이다.

잠깐 머물다가 가는 힐끗힐끗 보는 시선이기에 고다연은 그리 눈치채지 못 했지만…
육감을 수련 하고 있는 나는 달랐다.
누가 어디서  초나 쳐다보는지 어림짐작으로 느껴졌다.


물론 별로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하얀 고래의 발자취’에서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 끼익…


간단한 대화를 하며 카페를 찾던 우리는 금방 하나의 카페를 발견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다연이 먹는 커피는 이미 알고 있다.
그녀는 영하로 떨어지는 한겨울에,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고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따뜻한 아메리카노 하나… 맞으시죠?”
“예. 맞습니다.”
“음료는 드시고 가실 건가요?”

“아! 찬영씨, 저희…”

“안에서. 매장 내에서 먹고 갈게요.”
“알겠습니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주문은 매장 내에서 먹기로 했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자고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할 이야기가 있을 테니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것이겠지.

여성 팀원이 내게 커피나 마시자며 권유하는  매번 일어나는 일이었다.
당연히 나는 항상 철벽을 치기 위해 테이크 아웃만 주야장천 해대었다.
그런 내가 갑자기 매장에서 먹겠다고 하니 고다연의 표정이 의문스럽게 바뀌었다.


“어라? 찬영씨 테이크 아웃을 선호하지 않으셨어요?”

“아. 오늘은 좀 느긋하게 먹고 싶어서 그랬는데… 혹시 싫으셨나요?”

“아! 저는 좋아요.”

우리는 커피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주변에는 사람이 적당히 차 있어 소음이 일었다.
목소리만 그리 높이지 않으면 우리의 대화가 누구에게 들리지는 않으리라.


- 달그락. 달그락.


시간이 흘러도 잡담만 나올 뿐…
고다연은 본론을 꺼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억지로 잡아끈 잡담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짧은 정적이 감돌았고, 고다연은 고개를 살짝 숙여 얼음이 담긴 커피잔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커피잔의 냉기에 맺힌 물방울만 만져대던 고다연이 고개를 들었다.
고민과 결심, 그리고 미안함이 섞인 눈빛.
어쩐지 한번 본 것 같은 눈빛이다.


“찬영씨. 저희… 사귈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