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지구
임준혁의 눈이 내 손에 들린 포스트잇으로 향한다.
그 눈이 명백하게 기대를 담고 있어서, 솔직히 좀 웃겼다.
여직원은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나는 사람 보는 눈이 꽤 좋으니, 20대 초반이 확실했다.
아무리 잘 쳐도 방금 여직원과 임준혁은 8살 정도 차이가 날 텐데…
음…
죄짓는 것도 아니고, 너무 외로우면 기대 할 수도 있겠지.
“…저는 아니겠죠?”
“가디건을 입으신 남자분이라 적혀 있습니다.”
나는 셔츠에 가디건을 걸친 차림이었고,
임준혁은 캐쥬얼 한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쪽지는 나에게 온 것이다.
나는 실망하는 임준혁을 향해 작게 속삭여 말했다.
- 소근소근.
“제가 마카롱을 별로 안 좋아 해서… 총무님이 3개 드세요. 전 맛만 보게.”
“…그래도 될까요?”
“저분한테 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쪽지는 깔끔하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허나 직원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다연은 여자관계가 복잡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그냥 여자가 내 타입이 아니었다.
최근 미인들만 보다 보니 내 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졌나 보다.
- 끼익…
음료와 서비스로 받은 마카롱을 다 먹은 우리는 카페 밖으로 나왔다.
계산은 선불로 했기에 직원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별로 상관없었지만, 주방에 숨은 직원의 기척을 느껴보니 상당히 부끄럼을 타고 있는 듯싶었다.
‘예쁘다고 하면 할 수 있는데… 별로 끌리지는 않네.’
나는 커피를 사준 임준혁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계약을 권유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감사 인사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인사를 받은 그도 기분이 꽤 괜찮아 보였다.
“찬영씨는 여자친구 없다고 했죠? 그 연락처로 연락 할겁니까? 보니까 좀 예쁘던데.”
“아뇨… 저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해서. 번호를 따거나 주는 건 조금…”
“…하하. 왜 그런 외모로 아직까지 연인이 없는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네요…”
임준혁은 씁쓸하게 내게 말했다.
연애 경험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보일 것 같이 생긴 나의 입에서 모쏠이나 할법한 말이 나왔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이 핑계는 나름 고르고 고른 답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연애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으로 비쳐야 하니까.
연애 경험이 많다는 것은 장점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단점으로 여기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건 고다연 역시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다.
“이런… 사람이 적고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카페였는데, 이젠 못 가겠네요.”
“예? 어째서 그런가요?”
“찬영씨가 연락을 안 주면 그 직원이 제게 번호를 물어볼 것 같아서요. 그럼 서로 곤란하잖아요?”
“하하. 설마요. 과한 생각이겠죠.”
“어라? 찬영씨 의외로 여자를 잘 모르네요? 그 직원분 눈빛 못 봤어요? 단단히 결심한 눈이던데.”
나도 봤다.
그러나 임준혁이 남에게 내 번호를 막 알려줄 정도로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작은 집단이라고 해도 한 단체의 총무인데 그 정도의 개념은 있으리라.
거절의 의미로 포스트잇을 두고 가도 되었지만…
사비로 서비스까지 줘 가며 번호를 쥐여 주었는데, 버리고 가는 것은 너무 냉정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혼자 카페에 온 것이 아닌 임준혁과 같이 왔다.
사소한 이미지 관리도 해야 옳으리라.
물론 맘 졸이며 기다리고 있을 직원에게는 못 할 짓을 했다 할 수는 있다.
허나 한번 보고 말 사이인데, 내가 그런 것까지 배려해 줘야 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초면인 사람에게 정도 이상으로 깊이 반했을 리 없다.
몇 달 뒤면 내 얼굴도 가물가물하겠지.
며칠간 연락이 없으면 어련히 알아서 눈치를 챌 것이다.
자신이 까였다고.
“어… 사실 제가 연애 경험이 적어서… 아니, 사실 없어서…”
“하하하! 농담이죠?”
“으음… 하하…”
“…정말인가요?”
임준혁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나의 약간 수치를 느끼는 듯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연기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초인이 되며 신체를 세세한 부분까지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면서, 나의 표정 관리는 점점 완벽해 지고 있었다.
임준혁은 깜짝 놀랐다.
첫 만남에서 내 얼굴을 확인했을 때처럼.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연애 경험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이상한가요?”
“아니… 그… 찬영씨 나이가 20대 초반이었죠? 그렇다면 절대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그렇죠?”
“엄청, 엄청 흥미롭네요. 혹시 이거 다른 팀원에게도 말해도 되나요?”
“네. 상관없어요. 다른 분이 물어봐도 솔직히 대답할 생각이었거든요.”
그의 머릿속의 나는 남중 남고 테크트리를 탄 것으로 생각될 확률이 높다.
딱히 착각을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카페와 지하철역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나는 역 앞에서 그와 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어후… 알람 엄청 울려대네.”
그날 밤, 단톡방은 의외의 화제로 불탔다.
임준혁을 시작으로 내가 연애 경험이 없는 숙맥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기 때문이다.
이 화제에 흥미를 느낀 여성 단원들이 내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나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모쏠이 맞다고.
실제로 지구에서 알려진 박찬영은 연인을 한 번도 사귄 적 없다.
평범한 사람들이 소설 속으로 들어갈 리도 없고, 모습을 숨긴 천사를 볼 수도 없다.
그러니 나는 떳떳했다.
*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
사교적인 사람과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
이 둘은 언뜻 보면 같아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전자는 타고 난 성향에 가까웠다.
성장 과정에 따라 바뀔 수는 있으나, 그리 자주 벌어지는 일은 아니리라.
허나 후자는 능력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별로 사교적이지 못 한, 흔히 말해 ‘눈치 없는 사람’도 노력을 한다면 충분히 사교적으로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다연은 사교적이게 바뀐 사람이었다.
그녀는 타고나길 외향적인 성격으로 자라왔다.
누군가와 어울리길 좋아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길 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렸을 적 고다연에게는 사교 능력이 없었다.
그 정도가 심해, 그녀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 본 말이 바로 ‘눈치 없다.’라는 말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이름보다도.
그런 어린 시절 그녀에게도 친하게 지내 준 소꿉친구가 단 한 명 있었다.
고다연과 달리 그녀는 인기가 많았고, 무척이나 사교적이었다.
그런 동성 친구를 닮고 싶은 그녀가 스스로를 바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다.
“여보세요? 잘 들려 은미야?”
- 응! 잘 들려!
고다연은 핸드폰에서 들려 오는 익숙하면서도 가녀린 목소리에 살짝 편안해졌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지방으로 내려간 친구였다.
그러나 고다연은 하루에 한 번은 빠지지 않고 그녀의 친구와 연락을 하고는 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짤막한 카톡은 반드시 나누었다.
박은미 또한 고다연을 둘 없는 절친한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한창 박은미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인 심야에 전화가 걸려 와도 고민하지 않고 받을 만큼이나.
당연히 고다연과의 통화 또한 즐기고 있었다.
특히 최근은 친구의 풋풋한 연애 얘기가 주가 되었기에 더더욱.
- 그러고 보니 그 백하민이라는 쓰레기는 어떻게 됐어??
“아… 네 조언대로 했더니 지금은 완전히… 대학에서 배척당하는 중.”
- 어휴… 미안해. 내가 괜히 전부터 걔한테 고백하라고 해서… 너만 고생했네.
“아니야! 내가 느끼기에도 너무 어이없는 행동이었는 걸. 예상 못 하는 게 당연하지.”
고다연은 소중한 친구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단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만약 박은미가 자신이 백하민에게 강간당할 뻔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녀는 무척이나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고다연은 그런 상황을 겪기 싫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고다연으로서도 그 화제는 두 번 떠올리기 싫은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은미 너는, 내가 너한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알고 있을까?’
둘 모두 어렸을 적.
박은미는 고다연을 도와주었다.
단순히 물고기를 잡아 준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 주었다.
박은미는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고다연의 사교성을 키웠다.
그랬기에 지금 친구가 많은 고다연이 존재할 수 있었다.
- 으으… 걔 성격 좋다고 하지 않았어? 막 친구도 엄청 많고, 교수들조차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응. 이전까지는 그랬는데… 갑자기 휙 뒤바뀌듯이 변해서…”
- 당황스럽네… 분명 말로만 들어보면 네 남친감으로 완전히 적합한 인재였는데!
“그,그건 잘 모르겠어…”
- 명문대에, 공부 잘하고, 성격 좋고, 사교성 많고, 여자관계 깨끗하고, 키 크고, 얼굴까지 잘생겼고… 으으… 근데 완전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니…
사실 박은미에게도 장점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점이라 보기에는 애매했지만…
그녀는 참견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특히 타인의 연애사에 대해서.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점은, 박은미의 연애관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그녀는 상대방의 조건을 무척이나 따졌다.
흔히 말해 스펙이라고 하는 그것.
항상 중요한 친구를 사귈 때 박은미에게 조언을 구하는 고다연으로써는 너무나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고다연이 처음 ‘백하민’과 얽혔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녀는 연인을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항상 ‘친한 친구를 사귈 때 스펙을 따지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박은미는 고다연의 모티브이자 스승이었다.
고다연이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세우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난 연인이 필요하진 않았는데… 당장은 춤에 집중하고 싶고.’
허나 ‘백하민’의 스펙을 듣고 눈을 빛내며 재촉한 박은미에게 떠밀리듯 고백을 해버리고 말았다.
박찬영이 느낀 이질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다.
- 역시 완벽한 남자는 세상에 없는 걸까? 백마 탄 왕자님 같은!
“푸훗.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 아! 맞다! 매번 너네 크루의 댄스 영상 잘 보고 있어! 그런데… 그 잘생긴 사람은 누구야?
“잘생긴…”
단어를 듣자마자 바로 떠오르는 인물은 있었다.
당연히 박찬영이었다.
“우리 팀의 신입…은 이제 아니네. 한 달이 막 지났으니. 새로 들어온 정식 단원인데, 사실 나도 잘 몰라. 이름하고 나이 밖에는?”
- 모델? 연습생이래? 진짜 입이 떡 벌어지게 생겼던데.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모델을 시작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 와아! 하긴, 그 얼굴을 안 써먹긴 아깝긴 해. 분명 여자도 엄청 많겠지?
“으음… 큭큭. 아니. 연애를 한 번도 안 해봤다던데?”
고다연도 내심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저 얼굴로 연애를 못 해봤다니?
평소라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난 한 달 동안 그의 언행을 보지 못했다면.
대부분의 여성 팀원들이 그를 향해 추파를 시도 때도 없이 던지고는 했다.
그러나 박찬영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여성 팀원 중 하나가 은근슬쩍 둘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니,
그 순하고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리며 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고다연은 그 모습을 보고 솔직히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그런 모습이 마치 아주 어렸을 적 눈치 없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거짓말. 그거 100% 거짓말이야. 내가 장담 해도 좋아!
“푸후훗! 아니, 이번에는 네가 틀렸을걸? 나도 장담할 수 있어!”
- 으음… 그 정도야?
“응. 진짜로.”
- 그렇다면… 모델… 저 정도 생겼으면 수입도 많을 테고… 여자도 없고… 으음… 영상을 보니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으,은미야?…”
- 성격은? 성격은 어떤데?
“으음… 완전 착하고 사교성 좋기는 한데…”
고다연이 보는 박찬영은 항상 남을 배려하는 언행이 몸에 뱄다.
무언가를 먹을 때도 도저히 혼자 먹는 법이 없었다.
반드시 다 같이 먹을 분량을 사 오고는 했다.
- 오호라…?
박은미의 목소리에 미약한 음흉함이 담겼다.
고다연은 데자뷰에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 흐름은 그녀가 전에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었다.
- 다연아.
“응?…”
- 이거 완전 그 백하민 그 자식 상위 호환 아니야?
“어어… 나는 잘 모르겠는데…”
- …하자. 고백. 너 정도면 충분히 먹힐 거야. 넌 네 생각 이상으로 엄청 매력적이니까.
예상했던 대답에 고다연은 나오는 한숨을 억눌러야 했다.
그녀는 아직 남자에 대해 관심은 없었다.
물론 자신의 과거를 닮은 박찬영에게 꽤 커다란 호감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연애 감정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 모르는 상대랑 사귀어도 정말 좋을까?… 난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 정드는 거야 같이 밥 먹고 영화 보고 하다 보면 저절로 드는 거지! 특히 저렇게 생겼으면 안 빠질 수가 없을걸?
“으으음…”
- 다연아. 잘 들어. 연애는 무조건 조건을 따져야 해. 그게 나중에 볼 때도 더 행복하다니까?
전에 한 번 들었던 말이다.
박은미는 고다연을 재촉하며 설득을 이어 했다.
결국.
고다연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