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테라포밍 (Epilogue)
테라포밍은 완결되었다.
그러나 이젠 그 세계에 들어갈 필요가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아직 테라포밍 세계에서 취할 이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종 마나 각성을 한 전투직이 가지고 있는 스킬이 그러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구입을 고려할 정도로 괜찮은 스킬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자가 있거나, 부작용이 있는 스킬이 대다수였다.
그것도 아니면 가성비가 맞지 않을 정도로 가격이 비싸거나.
‘무엇보다 나는 아직 보유한 스킬들조차 제대로 체득하지 못 했어.’
그저 그런 수준의 100가지 스킬을 익히는 것 보다, 유틸성 높은 스킬 몇 가지를 집중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했다.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조금씩 성장하는 패시브 스킬이라면 구매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액티브 스킬은 시간을 들여 숙련도를 쌓아야 한다.
주어진 훈련 시간이 분산되어 나의 주요 스킬들의 성장이 늦춰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당장의 급박한 위기가 없는 이상, 굳이 테라포밍 세계에 오래 머물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즘 나는 테라포밍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준비됐어!!”
“찬여엉! 그럼 시작할게!”
- 타악!
준비가 끝났다는 나의 말에,
약 15M 정도 떨어진 크리스가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나무로 만든 롱소드가 들려 있었다.
대련용 목검이다.
나는 크리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언제나 그랬듯, 크리스와 하는 대련의 시작은 반응 속도 싸움이리라.
- 후욱!
대략 5M를 남겨둔 크리스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으로 보고 반응해서야 늦는다.
옷자락이 스치는 미세한 소리를 듣고,
목검이 공기를 밀어내는 흐름을 피부로 느끼며,
솜털이 일어서는 듯한 육감으로 알아챘다.
크리스는 나의 측면 상단에 나타났다.
노리는 것은 어깨.
나는 가로로 그어지는 목검을 유연한 몸놀림으로 피했다.
- 부웅…!
거무튀튀한 색의 목검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목검이라 우습게 보면 절대 안 된다.
제대로 맞으면 뼈가 부러질 것이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피했으나, 그녀와 나 모두 큰 동작을 사용했다.
그러니 각각 몸의 균형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하리라.
크리스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 터억!!
“이,이게 읽혀?”
크리스가 당황하는 척을 했다.
내 안면으로 날아오는 그녀의 무릎을 잡아챘기 때문이다.
이제는 권술가라 자부하는 나의 악력은 꽤나 강했다.
공중에 뜬 크리스는 자세가 무너진 만큼, 평범한 방법으론 내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게다가…
이제는 내가 크리스보다 근력이 미세하게 앞서 있었다.
버프를 받았을 때 한정으로만.
‘목검은… 배제해도 되겠네.’
재빠르게 눈을 흘겨 크리스의 오른손에 들린 목검의 위치를 확인했다.
롱소드는 위협 되지 않았다.
무릎을 사용해 연속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자세를 추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크리스는 완전히 내게 제압된 것일까?
절대 아니었다.
“안 속아.”
무릎을 이용한 공격이 막혀 당황한 ‘척’을 보여주며 이것이 자신이 준비한 마지막 수라는 듯 연기했지만,
이미 전에 한 번 당한 놈이다.
나는 두 번 속지 않았다.
- 터억!
남은 한 손을 움직여 크리스의 왼쪽 팔목을 붙잡았다.
나를 향해 소리 없이 쏘아지는 그녀의 왼손은 내 손에 제지당해 멈추었다.
크리스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서린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의 왼손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샌가 나무로 만들어진 단검이 들려 있었다.
저 단검에 내 몸이 닿았다면 그 순간이 나의 패배였겠지.
아무리 봐도 아공간 스킬은 사기였다.
특히 스킬 사용에 소음과 같은 전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여기까지가 단 2초도 걸리지 않았다.
초인간의 대련은 공격도, 방어도 무척이나 빠르게 교환 되었다.
바닥을 딛지 못한 크리스의 몸이 중력에 의해 땅으로 떨어져 갔다.
결국 크리스는 마나를 소모해서 몸을 뺄 수밖에 없었다.
내 손에서 사라진 크리스는 5M 뒤에서 나타났다.
“으윽… 찬영과 나는 정말 상성이 안 좋아…”
“그런 것 같다. 내 입장에서는 넌 정말 좋은 대련 상대지만.”
“…앗! 상성이 안 좋다는 것은 전투 상성만 말하는 거야! 다,다른 상성은 다 좋아!!”
침울해하던 크리스가 허둥지둥 표정을 바꿔 내게 변명했다.
굳이 저런 말을 붙이지 않아도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는데…
그냥 귀여우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 주었다.
후자는 물론이고, 전자 역시 나도 그리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의 입장에서 나는 상대하기 최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것이 그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민첩 스텟의 격차를 없애주었다.
나는 천권일각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크리스와 맞상대 할 수 있다.
“권술가로서는 이렇게나 근접으로 붙어 싸워 주는 것은 바라 마지않는 상황이지.”
“그것도 그런데, 찬영은 빼앗을 무기가 없단 말이야…”
그녀의 투정은 절대 엄살이 아니었다.
권술가는 크리스의 전투 스타일과 천적이다.
이능을 사용해 가까이 붙어 체술로 상대방을 흔드는 동시에,
칼이나 창 같은 무기에 손을 대어 무장을 해제 시켜 버리는 것이 크리스가 정립해 온 전투 스타일이다.
그러나 권술가의 손에는 그녀의 아공간 스킬로 빼앗을 무기가 들려 있지 않았다.
당연하다.
주먹이 곧 무기니까.
“그래도 널 처음 상대하는 사람이면 절대 무사하지 못할걸?”
“그건 나도 많이 경험해 봐서 알긴 하는데…”
“나는 너와 여러 번 대련해 봐서 예상 할 수 있었던 거고.”
“…으으. 찬영은 나와 처음 대련 할 때도 내 수를 읽었잖아…”
“전부는 아니었지.”
“난 이능도 있고, 찬영보다 조금 더 빠른데도… 거의 동률이었어. 요즘은 내가 명백히 밀리고 있고…”
나야 크리스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그녀를 잘 알고 있기에 예측이 가능했다.
크리스를 처음 상대하는 적이 그런 묘기를 보일 것이라 생각이 되지는 않는다.
방금의 수 교환은 언뜻 보면 서로 이득이 없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 전투가 대련이기 때문이지, 실전이라면 상황이 달랐다.
내 손에 무릎과 팔목이 1초 이상 붙잡힌 순간이 크리스의 패배다.
마나로 강화된 나의 근력이라면 인간의 관절쯤은 순식간에 비틀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첫 대련은 내가 졌네… 계속할 거지?”
“응. 네 마나가 떨어질 때까지.”
크리스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리 침울해 보이는 것이고.
게다가 스스로에게 사용하는 아공간 스킬은 마나를 많이 잡아먹는다.
오늘 대련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서로 쌓이는 손해는 누적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는 자신에게 이능을 두 번이나 사용했는데 이득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크리스의 입장에서는 첫 시작이 별로 좋지 못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련은 서로 급소를 노리지 않는다.
방금 크리스의 목검이 내 목이 아닌 어깨를 노린 이유다.
게다가 실수로 다치더라도 포션이 있으니 안전하다.
- 타악!
크리스는 이번엔 두 다리를 사용해 정직하게 거리를 좁혔다.
분명 서로 수를 교환하는 와중에 기습적으로 스킬을 쓸 생각이리라.
오히려 내게는 좋았다.
그녀가 스킬을 쓰기 전에 1승을 챙길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크리스는 방금처럼 나와 체술로 맞붙으려 하지 않았다.
목검을 가장 사용하기 알맞은 거리를 유지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최대한 거리를 좁혔다.
“흐읍!”
*
아무리 감사를 나가는 내근직이라고 해도 출장을 가는 날보다 가지 않는 날이 더 많다.
게다가 출장을 가는 날은 절대 정시 퇴근이 불가능해서 그런지, 평소에 오전 근무가 잦았다.
그 여가 시간은 전부 내 훈련에 사용되고 있다.
크리스가 없을 때면 천권일각과 아공간, 디시빙(Deceiving), 고요한 발자국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수련했고,
그녀가 내 수련을 도와줄 수 있으면 대련을 했다.
훈련 목적에 따라 사념각(邪念脚)의 사용 여부가 달라졌다.
오늘은 전투 경험과 센스를 훈련하는 날이었다.
순수하게 나의 판단만으로 이능을 사용하며 공격하는 크리스를 대응했다.
그녀는 무척이나 변칙적인 공격을 즐겨 사용했기에, 훈련에 아주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반면 사념각(邪念脚)을 훈련하는 날은 오로지 피하는 것만을 연습했다.
크리스 역시 이능을 사용하지 않고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것에만 마나를 사용했다.
이제는 찰나의 순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념각(邪念脚)을 사용할 정도까지 몸에 익었다.
“자는 건 아니지?”
“안자아… 근데 피곤해애…”
크리스는 마나를 끝까지 소모한 탈력감에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뻗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서 곁에 앉았다.
누워있던 크리스가 용케 보지도 않고 내 손을 찾아 맞잡았다.
내가 엉덩이를 옮겨 그녀의 곁에 조금 더 다가가려고 하자, 크리스가 마주 쥔 손에 힘을 주며 나를 말렸다.
“너,너무 가까이 오지는 마…”
“또 그런다. 냄새 안 난다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매번 대련을 끝낸 그녀는 땀 냄새를 신경 쓰고 있었다.
연인이 된 지 한참이나 흘렀음에도, 크리스는 아직까지 내게 잘 보이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이제는 그런 사소한 일로 싫어질 일은 없음에도.
귀여운 소리를 내며 앙탈을 부리는 크리스의 손을 피해, 땀에 젖은 그녀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는 것에 성공했다.
크리스는 가끔 은근슬쩍 애교 섞인 장난을 시도해 왔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에 한해서.
애교라고 해 봐야 무척이나 소극적인 놈들이었다.
가령 지금처럼 맞잡은 나의 손바닥 안을 손가락으로 간질인다던가…
“간지러워.”
“킥킥.”
- 간질간질.
꼬물거리는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크리스는 입버릇처럼 내가 짓궂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내게 장난을 치자 나도 장난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자꾸 그러면 네 품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흠뻑 들이마셔 버린다?”
“으아앗! 미,미안해! 안 할게!”
“큭큭큭. 농담이야.”
크리스가 허둥지둥 내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맞잡은 손은 풀지 않았다.
손은 계속 잡고 싶었나 보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선물을 주기로 했다.
- 수욱.
인벤토리를 뒤적여 미리 준비해 둔 자루 한 개를 꺼내었다.
한 손으로 들고 있자니 꽤나 무게감이 느껴졌다.
어디까지나 일반인 기준으로.
자루 안을 확인 해 보아도 내용물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크리스에게 건네 주었다.
“선물이야.”
“선…물?”
“대단한 건 아니니까 기대는 말고.”
- 스으윽.
크리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허리를 일으켰다.
나는 그녀에게 어서 받으라는 듯 한 번 더 그녀 쪽으로 자루를 내밀었다.
얼떨떨하게 자루를 받아 든 크리스가 입구를 열어 그 안을 확인 해 보았다.
“어라? 프,프룸? 이게 전부?…”
자루 안에는 수많은 프룸이 들어 있었다.
정확한 개수는 백 개다.
백 개라고 하니 많아 보이지만, 구매하는 것에 5,000 카르마밖에 쓰지 않았다.
“아공간에 넣어 두고, 앞으로 훈련할 때마다 먹어. 다 쓰면 말하고.”
“나,나 혼자?… 이,이걸 다 쓸 수나 있을까? 한 구역에 1년마다 보급 왔던 프룸도 이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아. 유지 시간은 세 시간 정도야.”
“그건 대충 아는데… 이,이거 전부 어디서 난 거야?…”
“포션을 구한 방법이랑 같아.”
지금 당장은 적수를 찾기 어려울 만큼 강한 그녀다.
그러나 나중엔 크리스가 가진 무력이 부족해질 수도 있다.
당장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관에서 기사를 홀로 상대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지금부터 미리 대비해두면 좋으리라.
내 수련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
마침 보유 카르마도 넉넉하니, 망설임 없이 줄 수 있었다.
“…고마워. 찬영.”
“훈련 시작하기 전에 줄 걸 그랬나?”
“이거 엄청 귀한 건데, 이렇게 많이 준 것만으로 고마운걸…”
테라포밍 세계에서 프룸은 귀하다.
크리스는 무척이나 엘리트였던 만큼, 다른 전투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프룸을 받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 개가 넘는 프룸은 처음 보나 보다.
크리스에게 프룸은 넘겨주었다.
그럼 급하게 카르마를 소모해야 할 곳은 더이상 없다.
스텟을 올리거나, 스킬을 레벨 업 하는 등.
드디어 모아둔 카르마를 나에게 사용할 때가 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나의 상태 창을 불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