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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34) (134/310)



〈 134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아.”

키스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것이었다.
입술을 꾹 다문  하는 어색한 입맞춤은, 입술을 비볐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러나  안에 담긴 멜의 용기와 풋풋함만은 내게 확실히 전해져 왔다.


내게서 떨어진 멜이 굳어 있는 나를 슬쩍슬쩍 보며 자신의 입술을 매만진다.
입맞춤의 감촉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워하면서, 동시에 살짝 기뻐 보이는 멜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성숙한 여인으로 느껴지지 않다던 과거의 자신이 우스워질 만큼이나.

‘어째서…’

나는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것도 표정 관리가 제대로 안  정도로 동요해 버렸다.

멜이 내게 기습적으로 키스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동요한 이유는…
키스를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내가 피하지 않았단 것에 있었다.

나의 양손에는 술병과 기름병이 잔뜩 들려 있었다.
아무리 멜과  사이에 스텟차이가 극심하다고 한들, 이 미끄러운 물건들을 들고 그녀의 움직임을 쉽사리 피하지 못한다.
스텟만을 따지자면 그녀에게 꼼짝없이 입맞춤을 당해도 별말 없다.

그러나 내게 해당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천권일각의 사념각(邪念脚)이 있기 때문이다.

멜이 내게 다가오는 그 순간.
나는 뇌리에 분명히 사념각(邪念脚)을 떠올렸다.
양손에 든 짐을 지키면서, 어렵지 않게 입술을 피할  있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사용을 그만둬 버렸다.
그 이유를…

알면서도 정면으로 마주하기 당황스러웠다.

“…후우…”

언제나 그랬듯이, 『자연치유』의 효과는 뛰어났다.
당황이 가시고 이성이 돌아온다.

어째서 지금껏 멜에게 눈을 떼지 못했는지,
그녀가 힘들어하면 왜 오지랖을 부려 거들고 싶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멜에게 반했냐’라는 질문의 대답은 망설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두고 있냐’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감정은 그 미묘함의 사이에 있었다.

“괘,괜찮으신가요?…”

너무 오랫동안 생각을 정리했나보다.
홍조가 가시지 않은 멜이 다가와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멜을 향한 감정을 깨닫지 못했으면 모른다.
그러나 깨달았음에도 눈을 가리고 모르는 척하는  너무 나답지 않은 짓이다.

순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멜이 탐났다.
평소에는 소심하다가도, 가끔은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곤 하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그녀를 손에 넣고 싶었다.
눈앞에 놓여진 과일이다.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다.
이미 손에 쥔 과일과 부딪혀서 멍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의 능력에 달린 문제겠지.
욕심이 많은 나는 결국 손을 뻗을 것이다.

“…네가 오해 한 것이 있고, 오해하지 않은 것이 있어.”


“오,오해… 말인가요? …말했지만 무르기는 절대 안돼요. 전 양보  해요.”

“그래. 내가 다 자초한 거네. 뭐… 결과가 나쁘지는 않은  같지만.”

나는 쓰게 웃으며 멜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나와 그녀 사이에 얽힌 오해를.
처음에는 궁금한 표정으로 말을 듣던 멜의 표정이 점점 하얗게 변하기 시작한다.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멜의 얼굴이 다채로운 색으로 변한다.
붉어졌다가, 하얗게 변한 뒤, 다시 새파란 얼굴로 돌아왔다.
내 설명이 끝나자 멜의 입은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못했다.


“그,그,그럼… 그날 그게 전부…”

“내 지레짐작 때문에 발생 한 문제였어. 미안해.”


“오,오늘 저를 도와준 것도…”


“…그렇지.”

“으,아,그게 무슨…”

내게 있어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우선은  잘못이 맞았다.
나는 솔직하게 멜에게 사과했다.

한동안 뻐끔거리던 멜의 입에서는…
곧 탈진한  생기가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역시 그랬네요… 사실 전 어제 끝난 것이었는데, 그냥 하루 늦춰진 것뿐이었네요…”


생각 외로 멜의 당황은 길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이런 비극을 예상했다는 얼굴로 변해 갔다.
그녀 또한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마 지난 밤 동안 별별 상상을 다 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지금 같이 모든 것이 오해였다는 결말 역시 있었나 보다.
포기와 체념이 순진한 멜의 눈망울에 깃든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은 꽤나 가슴 아팠다.

“…너무… 흑… 우,운이 좋다 했어요… 어떤 수도원에서… 흑… 그런 걸 가르칠까요?… 흐윽…”


글썽글썽.

“…아직 울지 마. 내가 오해 하지 않은 것도 있다고 했지?”


“흡… 그,그건… 그럼… 뭔데요?… 흐읍… 여기서  가슴 아파질 이야기라면… 흡… 천천히 해주세요… 이미 충분히… 아파서…”

멜이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강하게 누른다.
심장이 있는 쪽이다.
마치 심장이 찢어지는 것을 양손으로 억누르려 하는  같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치미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픈 걸까…

나는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는 멜에게 나직이 말했다.

“…네가 방금 말한 대로, 나는 네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나 봐.”

“…네?”

- 포옥.


재주 좋게 물건들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손을 이용해 멜을 당겼다.
키가 작은 그녀는 내 품에  알맞게 들어 왔다.
만약 우리 둘을 누군가 뒤에서 본다면 멜의 모습은 나의 등에 완전히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으리라.
물론  길목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적어도  감각에 느껴지는 사람은 없다.


품 안에서 멜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손등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었다.
가죽 갑옷을 입은 딱딱하기 그지없는 품인데도, 멜은 안심감이 들었나 보다.
울먹임이 줄어든 것을 보면.

“어? 어어?… 차녕님?…”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녜?…”


턱 아래를 멜의 순백색 머리카락이 간질였다.
방금 씻고 나온 탓일까?
멜의 머리에서는 좋은 향이 흘러나왔다.

십여 초를 넘게 이러고 있으니 아무리 멜이라도 상황을 깨달았나 보다.
품 안의 멜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아직도 멍하니 있어, 너무나 그녀다워 웃음이 터질 뻔했다.


가까이서 보는 멜의 눈은 여전히 순박했다.
약간 물기에 젖어 있어 요염함이 보이기도 했다.
나와 멜은 잠깐동안 이렇게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아,
멜의 얼굴이 점점 빨개진다.
그건 초인이 아닌 범인이 보더라도 명백할 정도로 시시각각 변해갔다.
서로 눈을 보는 것이 그렇게나 부끄러운가?
이렇게 몸을 맞대고 있으니 그녀의 심장 소리도 얼핏 들리는 것 같다.
내 감이 맞는다면…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멜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을 보니 마냥 착각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저,정말로?…”

“응? 뭐가?”

“정말로 저를… 조,좋아 하세요?”


이렇게 멜과 몸을 맞대고 있으니 가슴이 간질간질한다.
단순히 이성과 껴안았다고 뛰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가진 여자와 서로 마음을 확인했을 때 특유의 기쁨이다.
타인을 향한 스스로의 연애 감정을 눈치채기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이 정도는 구분 지을 줄 알았다.


모든 것은 내가 멜을 연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대답해 줘서야 재미없다.

멜은 대답 말고 의미심장하게 웃는 내 얼굴을 보고 초조해했다.
하지만 재촉하진 않았다.
멜은 내 품에서 얌전히 내 눈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내려 입을 맞추었다.

“흡…!”


 품에 안긴 멜은 도망치지 못했다.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다시 한번 크게 뜬  얌전히 있었다.


멜이 내게 한 것처럼 딱딱한 키스와는 달랐다.
긴장이 풀린 부드러운 입술끼리 하는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아까의 것보다 이번 키스가 더욱 기분 좋았으리라.
서로의 온기가 확실히 느껴졌으니까.

“대답이 됐어?”


“…아…”

멜이 작게 탄식했다.
그녀의 동공이 좌우를 그린다.
명백히 나의 질문에 살짝 고민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짐작이 가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흐흡. 대답이 안 되었다고 해도,  번  키스 안 해줄 거다?”


“하읏!…”

정곡을 찔린 멜의 몸이 살짝 들썩인다.
속이 뻔히 보이는 그녀의 순수한 언행이 귀여워서 머리를 마구 쓰다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양손은 물건이 채우고 있었다.
멜이 원하는 추가 입맞춤은 다음을 약속하기로 했다.
너무 빠르게 진도를 나가면 연애의 재미가 사라진다.

“다음에 해줄게.”


“다음…이요?”

“나중에 다시 둘이 되었을 때, 다시 키스해 줄게.”


“다음…도 있나요…? 오,오늘이 끝이 아니란 뜻이죠?…”


“응.”


멜의 불안을 잠재워 주었다.
이번에야말로 오해 하나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몇 번이고 내게 사실을 확인해 오는 그녀에게 친절히 답을 주었다.

일관성 있는 나의 대답에  안심한 멜이었지만,
다시 침울해 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녀가 다음에 꺼낸 말에서 그 이유를 알아챌  있었다.


“…전 베넷씨한테 찬영님을 빼앗으려고 했어요…”

그녀는 우리 둘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었다.
굳이 당장 이야기하지 않고 도망칠 법도 한데, 희한한 곳에서 용기가 있는 멜답다.
이제 나는 그조차 멜의 매력으로 느껴졌지만.


“그럼 오늘  일을 크리스에게 말 할 거야?”


- 절레절레.

“…못해요… 저는…”


“응. 비밀로 해줘.”


“찬영님은… 저와 베넷씨 중 저를 선택하신 건가요?”


대답을 이미 알고 있는 눈이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멜은 자신이 크리스를 넘어서지 못했음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어.”

“언뜻 그럴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건 저와 베넷씨 둘  얻고 싶다는 건가요?”

“정확해. 욕심쟁이지?”

“어떻게 성직자가…”

“지금은 아니야. 성직자를 쉬고 있으니까.”

“…바람둥이.”


“그건 맞네.”


나는 멜의 반응에 의문을 느꼈다.
정상적인 반응이라면 이렇게 담백하게 넘어가지 않고, 좀 더 확실히 하라며 화내는 것이 옳다.
하물며 나는 과거에 성직자가 아니었는가?
물고 늘어지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멜은 ‘역시 그렇구나…’라며 납득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나와 크리스 사이에 낄  있음에 안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껏 멜을 설득할 말도 여럿 준비 했는데…
아마  말들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문뜩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멜은 나와 크리스 사이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왜 화내지 않아?”

“…찬영님이랑 베넷씨는… 절대 떼놓지 못할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무언가?”

“음… 말로는 설명 못 할… 여자만이 알 수 있는?…”

“애매하네.”

“네… 사,사실… 처음 찬영님을 빼,빼았자고 다짐했을 때… 실패를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도전하기 전에 포기하긴 싫었지만요.”

“그래서 지금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구나. 어찌 되었든 목표는 달성했으니까.”


“…저,저,정확해요오… 전 지금 이 상황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 투욱.

멜이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불만은 없다는 뜻이다.
참 소박한 꿈이었다.
아니면 그만큼 멜에게 있어서 나는 놓치기 싫다는 뜻이거나.


“…그러고 보니 베닛씨는 찬영님이 이렇게 바람둥이인 걸 아시나요?…”


“아니. 전혀 몰라.”

“…네?”

“상상도 못 하고 있을걸?”


“네에에?!…”

멜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진다.
그만큼 나의 말이 충격적이었나보다.


“그,그럼 전 어떻게 허락받나요? 찬영님이 너무 당당하시길래 쉽게 공인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내가 크리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했잖아.”

멜의 입이 다시 벌어진다.
이제 더이상 커질 수도 없다.
이렇게 입을 쩍 벌렸는데도 얼굴 형태가 동글동글해 귀여울 따름이었다.
내게도 콩깍지가 쓰였나보다.
나는 멜을 향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괜찮아. 시간만 필요할 뿐, 반드시 설득할 수 있으니까.”

“그,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전 세계의 사람 중 크리스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나니까? 어쩌면 크리스 본인보다 잘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세상에나…”

멜은 나의 자신감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나는 거짓 하나 없는 진실만을 입에 담았다.


지금 크리스를 설득하기엔 너무 일렀다.
7년 전의 트라우마로, 내가 어느 순간 죽거나 사라질까 봐 무서워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내게 과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다.

허나 언젠가 크리스의 트라우마가 완전히 아무는 그때.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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