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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33) (133/310)



〈 133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유적 탐사는 중앙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해 두고 팀별로 수색에 나설 것이다.
기본적인 식사와 소모품 보급은 고용자인 왕실이 지원해 준다.
우리가 준비할 것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비상용품밖에 없었다.

하얀 고래 용병단은 일류 용병단이다.
당연히 비상용품 쯤은 평소에 넉넉히 챙겨 다녔으니 살만한 것은 많이 없었다.
자넷이 멜 혼자에게만 심부름을 시키려 한 이유다.

“뭐 사야 해?”


“랜턴용 기름  통 하고, 독한 술  병, 적당한 두께의 밧줄 두 묶음… 인데 ‘적당한 두께’라는 것이 어느 정도 일까요?…”


“한 번에 사람 여럿을 너끈히 지탱할 정도면 되겠지. 우린 인원이 꽤 많으니까.”


“아하!…”


원작에서는 멜은 심부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작게 혼났다.
기름은 이상한 놈을 사 왔고, 술은 바가지를 쓴 데다, 밧줄은 손가락만큼 가는 것을 사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밧줄은 좀 더 두꺼운 놈을 사 가면 될 것이다.

세 물건 전부 잡화 상점에 있을 것이다.
밧줄과 기름은 당연하고, 독한 술은 상처 소독용으로 많이 쓰이니까.

“그런데  상처에 술을 붓는 걸까요? 장난 아니게 쓰라리던데… 으…”

- 부들부들.


멜이 살짝 몸서리치며 말했다.
그녀의 겉모습에는 눈에 띄는 흉터는 보이지 않았지만, 과거 상처에 술을 부은 적이 있나 보다.
그럼에도 그 원리를 모르는 모양이다.


현미경도 없는 세상에서 에탄올의 살균 작용에 대해 정확하게  리가 없다.
그냥 세상에 수천 개쯤 존재하는 민간요법  나름 효과가 있는 놈이란 것만  뿐이다.

“…도수가 너무 낮은 술을 상처에 부으면 역효과니까 조심해.”


“헉. 혹시 찬영님은 왜 상처에 술을 붓는지 알고 계시나요?”


“알긴 하는데… 설명하려면 정말, 정말 복잡해. 전부 이해할 자신 있어?”


“…아니요. 그냥 모른 채로 살게요.”


다행히 멜은 물어보는 것을 포기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학구열이 크게 없다는 사실은 무언가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나의 귀찮음을 덜어주었다.
자넷에게 받은 돈주머니를   수도의 거리를 거닐었다.

 일부로 평상복을 입기보다는 가죽 갑옷을 착용한 채였다.
동양인이라는 사실과 나의 외모 때문에 사람의 이목을 꽤 많이 모았기 때문이다.
용병인 티를 내는 것은 걸려오는 괜한 시비를 줄이기 위한 방법 중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

- 터벅터벅.

‘그러고 보니 원작에는 멜이 수도의 어느 상점을 갔는지 서술되지는 않았네. 술을 바가지 썼다는 곳을 거를 수 있으면 편한데…’


나의 제안으로 우리는 수도의 가장 큰 잡화 상점을 향해 걷고 있다.
당연히 수도의 중심 거리를 지나쳐야 했고,
사람이 많은 만큼 우리에게 시선이 모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루종일 ‘고요한 발자국’ 스킬을 활성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멜 또한 꽤나 눈에 띄는 외모기도 했다.
미인인 것은 둘째치고, 순백색의 풍성한 단발머리를 가졌으니까.

남자들이 대부분인 용병단 무리 중간에 있으면 남자처럼 보이는 중성적인 외모를 소유한 멜이지만,
이렇게 단둘이 걷고 있으면 여자로 오해받을 수도 있으리라.
멜이 남성용 옷을 입지 않았다면.

나와 달리 멜은 평상복을 입었다.
무기 역시 차지 않았다.
심부름하기 딱 좋은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내가 그녀의 옷을 슬쩍 구경하고 있을 때,
멜이 내게 슬며시 말을 걸었다.

“그,그런데 찬영님은…”


멜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종종 자신의 소심함을 나타내려는 것처럼 말끝을 흐리곤 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화법이다.
나는 느긋하게 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갑자기 왜… 저를 도와주려고 나선 것인가요?… 그,그것도 단둘이…”


“응? 그야 어제 우리가  대화 때문이지?”


“여,역시 그렇군요…”


그것을 끝으로 잡화 상점에 도착할 때까지 멜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가끔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고개를 ‘휙!휙!’ 소리 나게 젓는 것을 반복했다.

도대체 방금의 대화에서 무슨 생각을 했기에 저런 반응이 나오는지 살짝 의문스러웠다.
난 그냥 어제의 암묵적인 약속대로 그녀를 도와준 것뿐인데.
이것이 오늘 내가 느낀 첫번째 의문이었다.

그러나 당장 나의 의문이 풀리는 일이 없었다.
목표로 한 잡화 상점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끼익… 덜컹!


“계십니까?”

“어서 옵쇼!”

마치 브랙을 떠올리게 하는 근육질 사내가 우리를 반겼다.
사실 근육질이 브랙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 아닌, 대머리가 브랙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멜을 대신해 심부름 물품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우선 밧줄부터.


같은 길이로 통일되어 묶인 밧줄들이 계산대 위에 줄지어 올라왔다.
굵기와 재질, 가격이 전부 달랐다.

“멜. 자넷한테 얼마 받았어?”

- 짤랑!

“어… 2실버 들어 있네요.”

“다 써도 되는 놈이지?”

“예. 남기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요.”

받은 돈은 와플 2개 분량의 돈이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분량이다.
수도는 물가가 비싸니까.

다행히 밧줄의 가격은 전체적으로 낮은 축에 속했다.
재료와 시간만 있다면 어린아이도 만들  있는 난이도인 만큼 공급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밧줄 하나하나의 상태창을 열어보며 적당한 놈을 찾았다.
나름 가성비 있어 보이는 놈을 골라 두 묶음 챙겼다.
물론 손가락보다 훨씬 두꺼운 것으로.


밧줄은 어렵지 않게 판단을 내려 빠르게 구매  수 있었지만…
랜턴용 기름부터는 사정이 틀렸다.


- 쿵.


“…이게 전부 랜턴에 사용되는 기름인가요?”

“크하하! 내 가게는 일단 잡화점이지만, 웬만한 전문점 못지않다고!”


랜턴의 기름으로 쓰이는 놈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상상도  했다.
어떤 건 밝기가 밝은 대신에 연기가 많이 나온다.
어떤 건 고약한 냄새가 나지만 가성비가 좋다.
어떤  인화성이 좋아 덜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기 정말 적합하다…

“흐와아… 너,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이건 불똥이 튀는 기름이고… 으아…”


멜의 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기름의 종류와 가격이 너무 다양했던 탓이다.


‘이래서 멜이 심부름에서 실수했군…’

원작에선 자세한 쇼핑의 내용은 생략이  채 심부름의 결과만을 보여주었다.
용병질에 초짜인 멜이 옳은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나는 돈의 분배를 위해 마지막 물건을 보기로 했다.

“일단 결정은 미루어 두고, 술부터 보고 싶군요. 독주 있습니까?”

“독한 술? 마침 좋은 게 있지. 이건 무려 연금술사가 만든 놈이라고.”


척.

자신 있게 말을 한 상점 주인은 병 하나를 찬장에서 꺼내었다.
방금 본 기름병처럼 투박한 도자기에, 질 낮은 밀랍으로 입구가 틀어 막힌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유리병에 코르크 마개까지 되어 있는 깔끔한 술이었다.
보기에는 투명한 빛을 띠는 것이 무척이나 도수가 강해 보였다.
연금술사가 만든 술이라고?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실력 있는 연금술사의 증류주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취함 상태이상 부여
상세:
정체 모를 싸구려 재료들을 발효 시켜 만든 증류주입니다.
양조한 연금술사의 실력이 무척 뛰어나 불순물은 거의 없습니다.
즉, 숙취가 거의 없는 술입니다.
그러나 돈벌이용으로 만들어진 만큼, 그리 맛의 퀄리티가 높지 않습니다.


도수 - 87%



‘리처드의 연금 공방’ 소속 데이지 (제작자) - 아이템 정보 확인 Lv 2
* 미각과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역함을 느낍니다. - 아이템 정보 확인 Lv 2
=

“와아… 엄청 좋아 보여요…”


멜이 술병의 자태를 보고 작게 감탄했다.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원작에서도 멜은  상점으로 심부름을 왔다고.
그리고  술을 바가지  구매해 돈을 탕진해 버렸을 것이다.


“한 병에 얼마인가요?”

“50 쿠퍼! 말했듯이 연금술사가 만든 놈이라 가격이 좀 나가. 대신 수도에서 구할 수 있는 어떤 놈보다 독하다는 건 보장하지!”

“어,어라? 생각보다 엄청 싸네요?… 비싼 술은 몇십 실버나 한다고 했는데…”

“우리 상점이 남겨 먹는 것이 많이 없어서 그래. 진짜 양심적인 가격이라니까?”

병당 0.5 실버라…
아마 이 술을 세 병 구매하고 나면 기름과 밧줄은 제대로  놈을 구매하기 힘들 것이다.
원작에서 멜이 심부름에 실패한 원인이다.

그녀는 이미 이 술을 구매할 생각이 가득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내가 술의 정보를 확인한 이상 우리가  증류주를 구매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적당한 소독용 술이라면 6~70% 정도면 나름 괜찮은 것으로 알고 있으니.
굳이 이렇게까지 도수가 높은 술을 구매할 필요는 없었다.
명백한 과소비다.

주인장의 상술에 혹한 멜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그녀 대신 앞으로 나섰다.
다른 술을 보여달라는 내 말에 주인장의 활짝 웃던 표정에 금이 갔다.
결국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멜을 뒤에 둔 채 무사히 심부름을 마칠 수 있었다.

“제,제가 들어도 되는데…”

“그냥 내게 들게. 누가 들어도  상관없잖아?”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소득이 없는 심부름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인정할 정도로 유능한 연금술사가 있는 공방을 발견 했으니.
나는 ‘리처드의 연금 공방’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혹시나 연금술사가 필요한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 찬영님. 괘,괜찮으시다면… 좀 천천히 들어갈까요? 곧 저,점심시간이고…”


“밥 먹자고? 그럴까?”

“그럼… 지난번에 갔던 그 와플 가게는 어떤가요?…”

- 멈칫.

“…와플? 거기 비싸잖아.”

“그,그건 그런데… 오늘 도와주신 보답으로 찬영님께 제가 사드리고 싶어서… 아,안돼나요?…”


난 살짝 이질감을 느꼈다.
오늘 느끼는 두번째 의문이다.
원작 속 멜은 결국 자기 돈으로 와플을 단 한 번도 사 먹지 않았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도 갑자기 나와 함께 가자고 하고, 심지어 자기가 사준다고 하다니?
고작 심부름에 대한 보답치고 2실버라는 금액은…
너무 과했다.

“호,혹시 싫으시다면 그냥 숙소로 돌아가도 상관…”

“…아니야. 가자. 고맙게 먹을게.”

침묵에 당황하는 멜에게 우선 대답했다.
나의 허락을 받은 그녀는 화색을 띠며 말이 많아졌다.
그것은 가게에 도착한 뒤, 식사 도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멜에게 있어 1실버나 되는 값비싼 와플에 집중하기 보다는, 나와의 대화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
마치 가게에  목적이 와플이 아닌 나와의 대화라도  듯한 모양새다.


세번째.
무언가 이상하단 것을 눈치채지 못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멜이 말을 거는 것에 부드럽게 맞장구를 쳐주며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과연 내가 내린 결론이 맞는 것인지.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방문 부탁드립니다, 손님!”

끼익… 쿵.

“고마워. 잘 먹었어. 멜.”

“저,저도 즐거웠어요!”

맛있었다가 아닌 즐거웠다라…
평소라면 깊은 생각 없이 넘겼을 말에도 지금만큼은 의미심장하게 들려왔다.


나와 멜은 말없이 숙소로 향했다.
본격적인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아니면 마차도 못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이라 그런지…
수도의 거리임에도 사람은 한산했다.

- 터벅터벅.

시선이 느껴진다.
그녀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멜은 나의 옆얼굴을 힐끗거리며 쳐다보고 있다.


이제는 확신했다.
나와 멜 사이에 무언가가 크게 어긋나 있음을.
어제저녁, 그녀와 골목길에서 한 대화는…
명백한 오해가 섞인 대화였다.

- 터벅터벅. 탁.


한창 길을 걷다가 중간에 멈춰 섰다.
그런 나를 멜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녀를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멜. 넌 나를 좋아해?”


“흡!…”

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허둥지둥 대며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나 거리에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멜은 약간 진정하더니…

…끄덕.

나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저는 어제 찬영님께 사실상 고백을 했어요. 이미 찬영님도… 알고 계시죠?…”

그 얼굴은 터질  붉어져 있었지만,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이다.
부르르 떨리는 멜의 입술 사이에서 선명한 음색이 새어 나온다.
평소의 소심하던 멜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용기다.


“제 마음을 알고 계신대도… 오늘 아침 찬영님은 직접 데이트를 권유했어요. 방금 점심을 먹자는 제 노골적인 요구도 수락했어요.”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만 했다.
그러나 그건 서로의 입장 차이가 달랐기에 발생한 오해다.

“이건… 찬영님도 제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다고 해석해도 되는 거겠지요?…”

멜은 평소처럼 말을 떨지 않았다.
차분하게, 내게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저 해석은 틀렸다.
나는 멜을 향해 해명하고자 했다.
그녀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게끔.


“잠깐, 그건 우리 둘 사이에 무언가 오해가…”


“아니요! 제가 어제 말했잖아요. 절대, 절대 무르기 없다고.”


- 탁!

나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입술이 부드러운 무언가에 막혔기 때문이다.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입술은 떨어졌다.
나의 목을 감싼 작고 얇은 팔이 풀어진다.
까치발을 들은 멜의 발이 제 위치를 찾았다.


다시 평소처럼 목소리를 떨면서, 멜은 내게 속삭였다.


“바,반드시 책임… 지,지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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