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을 보니 듣고 싶긴 하나 보다.
나는 살짝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쩐지 내가 지금 실수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초인의 감이다.
그러나 나는 상황을 감보다는 이성적으로 판단하고자 한다.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이라면 당연한 선택이다.
도저히 어쩔 수 없을 때만 감을 의지 하고는 하지.
“…으으음… 아직 좀 멀었다고 볼 수 있을 거야. 아직 크리스도 제대로 생각은 안 해봤을걸?”
“그,그런가요?… 두 분은 연애를 시작한 지 꽤 된 것 아니었어요?…”
“어… 그건 좀 애매하네. 7년…은 아니고, 날짜로만 친다면 1년이 안 돼.”
“후으… 하우으… 그,그렇군요…”
멜은 어쩐지 화색을 보이며 웃음을 흘렸다.
결혼이 많이 남은 멜에게는 것이 기쁜 일일까?
기쁜 일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슬픈 일도 아니다.
방금 그녀 나는 터놓은 대화로 인해 서로 완벽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사과를 받아 주었고,
멜은 더이상 내가 결혼 은퇴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결혼이 늦어진다고 슬퍼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럼… 찬영님… 이, 이건 혹시 물어보는 건데…”
“또 물어볼 게 있어?”
“거,거절 하셔도 상관없어요!… 거부하시는 순간 ‘역시 그러려나…’ 하고 납득할게요! 그,그으… 허락받았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적어도 ‘시도’를… 하는 걸…”
- 힐끔. 힐끔.
멜이 고개를 푹 숙이며 내 쪽을 힐끔거린다.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진 것이 명백히 수줍음을 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평소의 멜보다 아름답게 보여서,
나도 모르게 살짝 심장이 뛰어버렸다.
양손에 땀이 차는 것을 의식해 꼬물거리는 것을 보면…
마치 실시간으로 고백을 하는 여자아이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없겠지.’
살짝 고개를 털며 상념을 떨쳤다.
그녀가 주어를 생략한 채 말 한 ‘시도한다.’라는 것은 나와 크리스가 동침하길 유도하는 것을 말하는 걸까?
지금까지 그녀와 한 대화를 생각해 보면 이 해석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제 와서 나와 크리스의 동침을 유도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상관은 없는데… 어째서?”
“어,어,어째서냐니… 그건… 전부 알고 있으시면서…”
멜의 고개가 ‘팍!’ 소리를 내며 숙여진다.
그녀의 입이 있으리라 추정되는 곳으로부터 작게 짓궂다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를 향한 말이리라.
이미 알고 있다? 짓궂다?
그녀가 나와 크리스의 결혼을 재촉할 이유로는…
…설마 이건 고도의 꼽을 주고 있는 건가?…
아니, 꼽이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아직 나를 완전히 용서는 안 했다는 뜻이군…’
입안이 썼다.
내 생각보다 멜의 상처가 깊었다는 의미였기에.
저건 말 한두 마디로 넘어가기 보다는, 앞으로의 행동으로 보여 달라는 뜻이다.
자신이 하는 막내 일을 나보고 도우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멜은 진심으로 나와 크리스의 동침, 그리고 결혼 은퇴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시도하겠다’는 말은 그녀의 소극적인 시위를 의미한다.
당신들이 나를 무시할 때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당신들에게 시위할 것이다, 라는 멜의 뜻이다.
그조차도 우리의 양심에 기댄…
정말 멜 다운 상냥한 시위였지만.
‘어차피 오늘부터라도 멜을 도울 생각이었으니 거절할 필요는 전혀 없겠네.’
내향적인 성격의 멜이라면 이런 못된 생각 따윈 안 할 것 같다고?
틀렸다.
평소에 소심한 성격의 멜은 의외인 곳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몬스터를 썰어 버릴 때가 그러했고, 앞으로 있을 유적 탐사에서 활약할 때가 그럴 것이다.
멜이 시도 때도 없이 고구마를 먹이는 소심한 성격이라면, 원작 소설이 인기 많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녀는 딱 사이다를 주기 좋은 웹소설식 주인공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방금 멜의 요구는 좀 건방져 보일 수는 있지만…
나는 미인에게 관대하다.
멜 정도면 내가 정한 선에 넉넉하게 합격선이고.
이번 잘못은 원인이 내게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납득 할 수 있다.
“좋아. 알겠어. 네가 원할 때 언제든지 시도해도 돼.”
나는 자신감을 담아 그리 말했다.
오늘 이후로 그녀가 스트레스받을 일을 없도록 노력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멜이 푹 숙였던 얼굴이 번개같이 치켜 들어 올린다.
그 눈에는 살짝 흥분이 담겨 있었다.
얼굴은…
어째선지 여전히 붉었다.
흥분 때문일까?
“정말이죠? 말씀하셨어요! 허락받았다고요! 무르기 없어요! 절대 절대 없어요!!”
“어?… 어어… 그래. 무르기 없어.”
“하우으!!”
- 폴짝폴짝!
멜이 기쁨을 숨기지 않고 제자리에서 뛰어 대었다.
스트레스에서 해방이 된 것이 이렇게나 기쁜가 보다.
행복해하는 멜을 보니 어째선지 나도 뿌듯해진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작게 말했다.
“아, 참고로 오늘 한 이야기는 전부 크리스한테도 이야기할…”
“으악!! 안돼요오오!”
“…어?”
“제가, 제가 감당 못 해요!!… 부디 비밀로! 제발! 부탁드릴게요!!”
“그 정도로? 딱히 숨길만 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만, 반대로 말 안 해도 괜찮은 이야기라고 생각되니… 알았어.”
“다른 사람! 다른 사람 모두에게도 비밀이니까요! 알겠죠?”
“응.”
나의 대답에 경악하던 멜이 안도했다.
참 감정의 변화가 빠른 여인이다.
여인… 이라고 하기엔 멜은 성숙미가 뿜어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와 멜은 함께 여관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평소 말이 많던 멜은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 숙인 채 내 뒤만을 졸졸 따라서 왔다.
*
노을이 들어선 저녁 시간.
멜은 객실을 혼자 쓰는 사치를 부리면서도, 어제처럼 ‘이,이건 과소비가 아닌가?…’ 같은 걱정은 들지 않았다.
단지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절실히 감사를 느낄 뿐이었다.
‘이래서 1인실을 쓰는 거구나…’
이상했다.
멜은 명백하게 이상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상황이 너무나도 그녀에게 좋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기억조차 안 날 정도로 어렸을 때 마음씨 좋은 약초꾼에게 주워지고,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검술 재능을 지녔으며,
하얀 고래라는 유명한 용병단이 그녀의 마을을 찾아왔다.
심지어 약간 실력이 부족 했음에도…
입단까지 허락받았다.
그것으로 멜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행운은 모두 사용했으리라 생각했다.
“난 어쩌면… 용병이 아니라 상인을 해야 했을지도 몰라…”
멜은 그만큼의 천운이라고 여겼다.
오늘 아침 그녀와 찬영이 한 대화 내용은.
그러나 용병을 하지 않았더라면 찬영을 만나지 못했을 거란 데까지 생각이 닿자, 상인이란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하우… 아직도 꿈 같아…”
- 꼬집.
“으약!”
멜은 얼얼한 볼을 매만지며 꿈이 아님을 실감했다.
볼은 아팠지만, 아프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길 때면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 그녀의 탱탱한 볼을 밀어내었다.
“큼! 크흠!”
씰룩거리는 웃음을 애써 헛기침으로 억눌렀다.
멜은 이것에서도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그녀는 이 정도까지 찬영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와서는 더아상 찬영을 못 본다고 생각하면…
“흐윽…”
멜은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프다.’라는 말이 과장이 아닌, 진심으로 그 정도의 통증을 표현했단 것을 깨달았다.
말 그대로 가슴에 있던 종이를 반으로 찢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저절로 눈가에 물이 맺혔다.
통증 때문에 맺힌 눈물은 아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멜은 점점 더 찬영이 좋아지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 아침보다, 지금이 훨씬 더.
“왜?… 왜지?…”
너무 짧은 시간 내에 연정이 증폭되었다.
처음 경험해 보는 감정.
그 첫사랑의 급격한 변화는 순수한 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얼굴이 시뻘게지겠지만, 그녀는 머리를 굴려 가며 자신이 찬영에게 반한 이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오늘 찬영님께 공식적으로 허락 받으면서 눌러지고 있던 사,사,사랑이… 윽…”
얼굴은 터질 것 같이 붉어진 것은 한참 전이다.
이젠 목소리까지 하염없이 떨리던 멜은, 결심했다.
그냥 입 밖으로 내지는 말고 속으로만 생각하자고.
‘난 사실 내 생각보다 찬영님을 많이 좋아하고 있던 걸까?…’
그것이 죄악감 때문에 억눌리고 있다가, 찬영의 허락을 받으며 한계가 사라졌고?
멜은 그리 생각해 보았다.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나 설득력이 있는 소리였다.
그 밖에서도 멜은 자신이 찬영에게 반한 이유를 하나둘씩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반한 찬영을 칭찬하는 것만 같았기에, 생각보다 즐겁게 찾아낼 수 있었다.
‘찬영님 하면 뭐라고 해도 눈이지! 아름다운 밤하늘을 그대로 넣은 것 같은 검은 동공. 흐으…’
그 동공이 멜과 눈을 맞출 때면 그녀의 심박 수는 미친 듯이 올라갔다.
이 상태로 입을 벌리고 있으면 찬영에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경험한 적이 있는 심장의 속도였다.
그녀가 하얀 고래 용병단에 입단할 때.
자넷 단장이 준 시꺼먼 액체를 마시고 난 뒤, 심장이 이렇게 방망이질 쳤었다.
“그… 찬영님이 말하길 벨다루?… 씨앗의 농축액이라고 했지…”
멜이 보는 찬영은 아는 것도 많았고, 강했으며, 잘생겼다.
그가 하는 말에서 다식이 묻어 나왔다.
용병단을 습격하는 몬스터 정도는 여유롭게 처리했다.
수도의 길거리를 거닐 때면 찬영을 향해 여자들의 시선이 몰리곤 한다.
‘키도 정말 크시고… 잘 웃으시고… 가끔 짓궂지만, 기본적으로 엄청 상냥하시고…’
무엇보다 성격이 좋았다.
그와 만나는 대부분의 인물 중에서 찬영에게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지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멜은 그런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수도에서 주어진 개인 시간 때, 다른 용병들과 달리 돈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
영지전 이후 연회에서 찬영 혼자 술을 조절하며 마셨다.
연인이 이미 있음에도 수도승으로서 성욕을 멀리했다.
금전, 음주, 여자.
전부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녀를 위해 마을 아줌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준 ‘좋은 배우자’의 조건에 모두 들어맞았다.
멜은 이래서야 자신이 반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
수도원에서 이상한 상식을 배웠다는 것과, 연인이 있다는 것만 빼면 단점이 없다.
그래.
연인이 있다는 것만 빼면.
“하우으… 베넷씨는… 어떻게 하지?…”
멜은 크리스에 대해서 잘 모른다.
크리스가 나서야 할 때면 찬영이 대신 나서서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이름과 성별, 가진 실력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과거를 캐묻지 않는 용병의 특성상 물어볼 수도 없었다.
크리스에게 베넷이라는 ‘성씨’가 있음에도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멜도 눈치는 있다.
적어도 크리스와 찬영이 수도원에서 만났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둘의 사이는 단순히 연인으로만 엮인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까.
좀 더 끈끈한 무언가가 존재하는 듯했다.
“혹시 베넷씨가 찬영님과 함께 수도원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베넷씨도 내가 찬영님에게 손대는 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으려나?…”
안타깝지만 그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예전에 자넷 단장이 찬영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 크리스는 민감하게 반응했으니까.
멜은 그날 선 상황을 톡톡히 기억하고 있었다.
“으으… 역시 찬영님이 베넷씨에게 말하는 것을 말리길 잘했어…”
아무리 찬영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한들 칼에 찔려도 할 말 없는 짓을 하고 있는 만큼,
멜은 약간 풀이 죽었다.
물론 그 ‘허락’조차 착각이란 것을 모르기에 풀이 죽은 것으로 그친 것이다.
“…아. 밤이다…”
이미 창밖에 해는 졌다.
잘 시간이 다가왔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는 않았다.
어찌어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겨우 잠이 들고 아침이 밝았을 때.
그녀는 스스로의 행운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 터벅터벅.
“멜? 우리 유적 탐사 가기 전에 잡화 살 건데, 돈 줄 테니까 좀 사 올래?”
“앗. 단장님! 알겠습니다.”
이른 아침.
멜은 자넷에게 심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찬영이 멜에게 다가왔다.
“단장님.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제가 하얀 고래의 막내니까요. 그렇죠?”
“차,찬영님?!… 어째서 갑자기?… 저희 둘이서만요?…”
“괜찮지?”
“네,네에… 저야 좋지만…”
멜이 얼떨떨하게 대답을 흐렸을 때.
“둘이 가야 할만한 양은 아닌데… 뭐 마음대로 해.”
그녀가 전혀 상상치도 못한 데이트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