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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31) (131/310)



〈 131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멜의 뒤를 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달려 나간 이유는 어느 장소를 목적으로 향한 것이 아닌, 그저 나와 크리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으니까.
멜은 여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에 멈추어 섰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그녀와 이야기하기도 편하리라.
건물의 그늘에 가려진 골목 사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나는 딱히 고요한 발자국 스킬을 마나로 활성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멜은 그녀의 등을 향해 다가오는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효과가 강력하지는 않지만, 활성화를 하지 않더라도 기척이 줄어드는 패시브가 있긴 하다.
그녀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도 큰 몫을 했다.
멜은 생각이 입 밖에 빠져나올 정도로 생각에 깊게 빠져 있었으니까.
물론 소리는 청각이 강화된 나로서도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긴 했다.


“천천히… …진도는 더딜… 하얀 고래… …내게도 기회는 있으니까!”


천천히, 진도, 기회는 있으니까?
유일하게 마지막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멜이 다짐하듯 강하게 내뱉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향해 걸어가는 발을 늦추지 않으며 고민을 해 보았다.
기회를 노린다는 말은 곧 원하는 것이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녀가 세울만  목표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원작을 떠올려 보았다.

‘음… 원작  멜에게 목표는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적당히 돈이나 많이 벌고, 세상 구경하는 것이 전부였지…’


그런 의미에서 상인 다음으로 목표에 적합한 직업이 용병이었다.
안타깝게도 멜은 돈의 흐름을 읽는 재능보다는 칼을 쓰는 것에 재능이 있었고.
재능이 하나라도 있는 게 어디인가?
하고 싶은 것으로 먹고 살 정도의 재능이 있으면 충분히 축복받은 것이다.

어찌 되었든 결론은 하나다.
자세한 것은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 알겠지만, 멜은 원작과 달리 새로운 목표가 하나 생겼을 확률이 높다.
당연히 그 차이점은 나와 크리스가 개입해서 발생한 나비효과이리라.


멜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려 노력해 보았다.
엿들은 혼잣말은 그녀의 생각을 읽는 것에 커다란 단서가 되어 줄 것이다.

‘천천히… 진도… 기회는 있다라… …진도?’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아니 두  있다.
첫 번째는 단순히 멜이 나한테 이성적으로 반했을 경우다.
그러나  이 확률을 낮게 잡았다.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원작 속 멜은 살아오며 사랑을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고, 연재 도중 남자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었다.
만난 지  달도 안된, 게다가 연인이 이미 있는 나에게 갑자기 반할 확률은… 거의 없다.
그리 확정 짓는 사람은 중증의 나르시시즘을 앓고 있는 사람이겠지.

그러나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할 확률이다.
원작의 묘사대로 남자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기에는…
정작 나의 행동에 당황하거나 홍조를 띠는 등 눈에 보이는 반응이 있었다.
확정지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그래도… 나에게 반했다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가설이 있어서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나는 멜의 입장에서 상황을 다시 읽어 보았다.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멜의 입장을 원작과 현실에 비교해 달라진 점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녀에게는 후배가 생겼다.
당연히  다음으로 하얀 고래에 들어  나와 크리스다.

단순히 후배가 생겼다는 것에서 큰 이변이 발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따로 있다.
나와 크리스는…
선배 입장에서 무엇보다 부담이 되는, 자신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난 후배였다.


‘멜의 서열이 애매해졌지… 하얀 고래에서도 사실상 멜을 막내로 여기고 있고. 충분히 곤란해 할 만해.’


한국에서는 흔하게 ‘군번이 제대로 꼬였다.’라 표현되는 상황인 것이다.

내가 이름 있는 용병단에 있다가 스카우트 되어 온 것이면 또 모른다.
멜과 달리 경력직이라는 변명이 가능하니까.
그러나 나와 크리스는 멜과 같은 완전히 생초짜 용병이다.
그렇기에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멜은 겉으로 티 하나 내지 않았지만, 내심 많이 힘들었나 보다.
오늘 참지 못하고 이렇게 질문한 것을 보면.
멜에게는 하얀 고래 생에 첫 용병단이다 보니 더욱 민감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
퍼즐이 척척 들어맞았다.


‘아까 나와 크리스에게 질문하려다 내가 말려서 하지 못한 질문은…!’


이제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당연히 나와 크리스의 결혼 예정은 언제쯤이냐 물어보려 했겠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우리 둘은 자연스레 용병에서 은퇴하게 될 테니까.

오늘 아침.
우리를 보고 우물쭈물하며 겨우 입을  그녀의 질문인,
‘왜 몸을 섞지 않느냐’를 물어본 이유도 이제야 이해  수 있었다.

‘멜은 크리스에게 아이가 찾아오길 바랬구나…’

아이를 가진 임산부가 용병 일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임신한 아내를 두고 목숨이 위험한 용병 일을 계속할 리도 없다.
멜의 입장에선 크리스와 나는 은퇴 할 수밖에 없다.

나를 성직자로 알고 있는 멜인 만큼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예측했을 것이다.
크리스가 임신만 한다면, 자신의 꼬인 용병 생활은 다시 다잡아질 것이다… 라고.

멜의 성격이라면 차마 ‘언제 은퇴할 생각인가요?’라며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으리라.
그냥 소심하게 어서 크리스가 임신하길 기도했을 뿐이겠지.
어찌 보면 이건 저주보다는 축복에 훨씬 가까웠으니…
참 쓴소리하기도 애매했다.


‘방금 들은 혼잣말이…  단서가 되어 주었네…’

엿들은 말은 ‘천천히’, ‘진도’, ‘기회는 있으니까’.
우리가 몸을 섞지 않는다는 소식은 멜에게 있어서 불행일 것이다.
당연히 나와 크리스의 남녀 관계 진도에 불만을 가졌다.
그리고 목표를 하나 세웠겠지.


멜의 순수한 계획은 전부 읽혔다.
그녀는 나와 크리스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밀어줄 생각일 게 분명하다.
적절한 예시로 사랑의 신 큐피드나, 지구의 윙맨(wingman, 바람잡이 역할을 해주는 친구.)이 있다.
나와 크리스의 합방을 계속 유도하여, 임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사실 나와 크리스는 지구에서 자주 사랑을 나누며, 항상 콘돔을 착용한다는 것도 모른 채…


아무리 생각해도 멜이 내게 반했다는 머리가 꽃밭인 생각보다는  가설이 더 들어맞았다.
머리를 굴려보아도 떠오르는 다른 경우의 수는 없다.
나는 나의 생각이 맞다고 확정 지었다.


‘젠장. 전부 내 실수잖아…’

멜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전부 나의 잘못이었다.
내가 미리 멜의 입장을 파악하고, 나와 크리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기 전에 눈치 빠르게 행동 했어야 했다.
가령 단원들이 멜에게 시킨 잡일을 나서서 거들어 준다든지.


괜찮다.
아직 돌이키지 못할 정도는 전혀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멜을 많이 챙겨주면, 그녀와 나 사이에 생긴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것을 방지 할 수 있으리라.


- 터벅터벅.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멜의 등을 향한 발걸음은 끊기지 않았다.
등 바로 뒤에 섰음에도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멜을 보니 나의 무신경으로 인해 그녀가 겪었을 마음고생이 떠올라 쓴웃음이 나온다.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멜. 잠깐 이야기 괜찮을까?”

“히익!”

- 움찔!!

깜짝 놀란 멜이 나를 휙 소리 나게 돌아보았다.
그녀의 당황은  얼굴을 본 순간 더 심각해졌다.
동공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네,네네? 괘,괜찮은데요오??”


멜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한창 큐피드 계획을 세우고 있는 도중에 계획 당사자가 와버렸으니 당연 한 것일까?

어차피 나는 멜의 목표를 전부 알고 있다.
빙빙 돌리지 말고 멜과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은 합의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숨길만 한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다.
크리스도 이 정도 수위의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다.

“우리가 너무 무신경했지? 괜히 널 고생 하게 만들었네.”


“…예? 무슨 소리에요?”


“으음… 내가 너의 속내를 알아차렸다는 이야기야. 네가 생각한 것보다  깊숙히.”

“흡!…”


멜의 몸이 굳었다.
허둥지둥 움직이던 손발이 한순간에 멈추었다.
그것은 지진이 난 것처럼 떨리던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자, 그늘진 골목에는 정적이 그 몸을 드러내었다.


멜의 표정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여갔다.
애초에 커다랗던 멜의 눈이 더더욱 동글동글하게 변한다.
장난삼아 손가락을 넣어 보고 싶을 정도로 벌어진 입이 뻐금거리며 할 말을 찾는다.
그러나 한동안  입에서 말이 나오지는 못했다.


- 끄덕.

전체적으로 방금 자신이 들은 것이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사살을 해주었다.
그제야 하얗게 물든 머릿속에서 감정이 싹트나 보다.
그것이 긍정적인 감정은 전혀 아닌 것 같았지만.

“전부, 전부 알아차리셨다고요? 제 속내를? 정말로?…”


“내 생각에는?… …사실 전부 알아챘다고 생각해.”

- 훌쩍.


“정말로요?”


“음… 알다시피  눈치가  빠른 편이라.”

- 훌쩍. 훌쩍.


“……흐윽… 흑. 죄,죄송… 저는… 저는… 그게 아니라…”

“어?…”


“그냥… 이런 적은 처음이라… 정말… 흐윽… 죄송…”

“뭐야! 왜,왜 울어?  것까지는 없잖아?…”

멜의 순하던 눈망울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당황했다.
당황은 하리라 예상했지만, 눈물까지 흘릴 것이란 건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매를 쥐어 허둥지둥 멜의 눈을 닦아주었다.


“잠깐, 진정해 봐. 왜 사과해?”

“그치만… 흐윽… 비록 시도는… 훌쩍… 하지 않았지만… 흑… 사과를 안 할 수는…”


크리스가 임신하도록 기도 하거나, 우리 둘을 엮으려던 것이 질책을 당할 정도의 죄는 아니었다.
멜의 격한 반응을 보니 이 세계의 법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가령 타인의 연애사에 관여한 자는 형벌에 처한다든지…

하지만 나는 죄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멜을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다른 뜻으로…
다른 소설  세계의 법률상 죄가 아니더라도, 내가 죄라고 판단하면 깽판 칠 것이란 뜻이다.
사람이 일관성 있어야지.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라라?
나는 그런 말 모른다.

“괜찮아.  네게 죄가 있다고 생각 안 해.”

“자,잘못이 아니라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따지고 보면 너를 신경 써주지 못한 나랑 크리스의 잘못이지.”


“그,그,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어디에…!”

내 대답에 멜의 입이 다시 벌어진다.
아까 내가 그녀의 속내를 알아챘다고 했었던 때만큼이나 크게.
아무래도 정말  세계에는 그런 법이 있나 보다.
지구의 중세시대에도 정말 기상천외한 법이 많다고 했으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나는 멜을 안심시키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내가 자란 수도원에서는 죄가 아니라고 했어.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


“…도대체 찬영님이 있던 수도원에서는 무얼 가르치는 건가요?…”


“어…  많이 깊숙한 산골에 있어. 아무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외딴곳이지.”


“하,하하…”

멜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지 않은 채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머리로는 지금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표정이다.
 얼굴이 퍽 귀여워서 미소가 나왔다.


“전 모르겠어요… 정말로 모르겠어요… 진짜… 제가 살아오면서 오늘만큼 충격을 많이 받은 날도 없을 거에요…”

“…그 정도야?”

“시작인가, 싶었더니 바로 끝나 버렸고. 끝났나, 싶었더니 사실 괜찮다네요. 하하… 하…”

하얀 고래에서 용병 생활을 시작하나 싶더니, 나와 크리스가 오며 꼬였고.
그걸 방금의 대화로 풀리며 괜찮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의미인 것 같다.

무언가 초탈 해 보이는 멜.
여태껏 그녀가 한 마음고생에 대한 보답 삼아 한 가지 의문이나 풀어 주기로 했다.

“아, 네가 물어보려 했던 것이나 답해줄까?”

“물어보려?… 헉!! 서,설마 그걸 제게 말해 주실 생각이신가요?… 크리스씨랑… 그… 어,언제 할지??…”

“뭐야. 물어보려는 것이 날짜였어? 흠… 정확히 정해 둔 날짜는 없지만… 대략 이야기해줄게.”


“그야 당연히 정해  날짜는 없겠죠!! 그보다 정말 이야기해주게요?!”


멜이  말에 경악했다.
이 세계는 결혼을 언제 예정하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조차 대해 부정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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