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 흔들흔들.
눈앞에 하얀 머리가 살랑이며 흔들린다.
나의 앞에 선 멜이 고개를 살짝살짝 꺾으며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저 아침이 되어 가벼운 식사를 하기 위해 크리스와 함께 여관의 식당으로 오자,
나와 크리스를 기다렸다는 듯 불러 세운 멜이 마중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고.
그 이후로 계속 이 상태다.
우물쭈물하는 얼굴로, 무언가 말하려다가 다시 삼키는 것을 몇 분이나 반복한다.
슬슬 무슨 일인지 내가 나서서 물어보려는 그때,
멜이 드디어 입을 뗐다.
“저,저어… 찬영님? 베넷씨?… 혹시 제가 엉뚱한 것 질문해도 될까요오?…”
“뭔데?”
“그… 어,엄청 실례가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을… 까요?”
멜이 망설이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질문 할 것이 있는데, 그게 무례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질문인가보다.
짐작 가는 것은 없었다.
나 또한 그녀가 물어볼 것이 궁금했기에 평소라면 흔쾌히 질문해도 된다고 수락했겠지만…
멜이 어두에 붙인 ‘엄청’ 이 조금 걸렸다.
“…그렇게까지 강조해서 말한다면… 질문의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
“여,역시 그렇죠? 그럼 질문은 하지 않을…”
“아니, 궁금하니까 물어봐. 그렇게까지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할 거리가 뭐였어?”
내 말에 몸을 돌려 도망치려던 멜이 몸을 멈춰 세운다.
평소에 소심하던 그녀라면 내 말에도 괜찮다 거절하고는 마저 도망쳤을 텐데,
이렇게 몸을 멈추어 세운 것을 보니 아마 질문할 거리가 상당히 궁금했나보다.
아니,
애초에 무례가 될 질문의 양해를 구하는 것을 실행한 것 자체가 멜에게는 큰 용기다.
도대체 얼마나 궁금한 것이길래?
나 또한 점점 더 궁금해진다.
“그,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찬영은 친절한 면이 많으니까요.”
“그런가요?… 그럼… 저어… 두 분은…”
“엇, 저도?”
크리스가 살짝 놀랐다.
질문의 대상에 크리스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멜은 크리스의 말에 답해주는 대신에 질문을 마저 이어 했다.
“두 분은 어째서… 여관의 방을 따로 잡으신 건가요?… 분명 여관 주인이 2인실이 있다고 했는데… 연인… 아니신가요?…”
- 움찔!
멜의 질문에 크리스가 소리 없이 당황한다.
그런 크리스를 보고 멜 역시 당황한다.
물론 나는 당황에 전염되지 않았다.
확실히 듣기에 따라 무례하게 여길 수도 있는 질문이다.
멜이 어째서 이 질문을 그렇게까지 궁금해 한지는 모르겠지만, 질문하기를 조심스러워 한 이유는 충분히 이해 갔다.
크리스와 내가 방을 따로 잡은 이유는 별것 없었다.
아무리 연인 사이라고 해도 개인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샤워한 뒤 옷을 갈아입는 모습이나, 화장실을 쓰러 가는 모습, 옷이 말려 올라간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침대에 늘어진 모습은…
연인에게 보이기 부끄럽지 않은가?
‘게다가 이 세상에서 크리스와 몸을 섞을 것도 아닌데…’
특히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할 때 더 심해진다.
상대방의 앞에서는 몸가짐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니까.
잘 때조차 마음 편히 있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크리스를 배려해 방을 따로 잡았다.
지구에서도 각방을 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다.
“연인이라고 해도 굳이 방을 같이 잡을 필요는 없잖아?”
“그,그건 그런데…”
“어?”
나는 이번에야말로 약간 당황했다.
적당한 대답을 해주었음에도 멜이 물러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상의 이야기는 정말로 사적인 이야기다.
친구는 물론 가족에게조차 잘 이야기 해주지 않는 연인끼리의 비밀.
그런 영역을 멜은 물으려 하고 있었다.
멜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백번 천번을 고개 숙여 사죄하더라도 대답은 듣고 싶다는 결심이 담긴 표정이다.
“두 분은 성인이시고, 게다가 평소 노숙할 때는 합방을 못 했으니… 분명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생각보다 과격한 질문이었다.
이리저리 돌려 말했지만 결국 ‘왜 기회가 왔는데 떡을 안치냐.’라는 뜻이다.
멜을 남자로 알고 있는 크리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성에게 자신의 성(性)생활이 밝혀지는 것은 수치스럽다.
화를 내려는 건가, 크리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 턱.
나는 그런 그녀의 팔을 잡고 말렸다.
괜히 둘을 싸우게 두기 싫었다.
내가 직접 멜과 단독으로 면담하며 심문할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한 이유를.
“대답을 돌릴 수는 있지만… 얼굴을 보니 계속 물어볼 것 같네.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자면, 성직자는 금욕적이거든.”
“…아.”
- 푸흡,콜록콜록!…
내가 금욕적이라는 말에 크리스가 웃음을 터뜨리다 황급히 기침으로 위장했다.
그녀가 아는 나는 금욕과 거리가 무척이나 먼 사람이니.
다행히 심각할 정도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나 보다.
나는 살짝 안도하면서 멜을 쳐다보았다.
대답에 만족했냐는 뜻으로.
“그럼… 혹시 찬영님은…”
“질문이 더 있어? 잠깐,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둘이서 하자. 남자 대 남자로.”
“…아앗! 네,넵! 정말 죄송합니다!…”
다행히 멜은 내가 눈치를 준 것을 알아들었다.
난 방금 ‘크리스는 너를 남자로 알고 있어.’라는 말을 암암리에 전달 한 것이다.
멜 또한 여자인 만큼, 남자에게 그런 질문을 받는 것 자체가 화낼만한 일이란 걸 알고 있으리라.
방금은 멜의 실수가 맞다.
그러나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그녀는 남장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되었다.
남자로 취급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만도 했다.
허리를 90도가량 굽혀가며 몇 번이고 사과하던 멜은,
크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괜찮다고 말하자 도망치듯 사라졌다.
- 후다닥!
“…멜씨는 갑자기 왜 저러신대?”
“한창 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대잖아. 이 세계에는 성교육 같은 것도 없고.”
“아하. 그러려나?”
점점 멀어지는 멜의 등을 보고 크리스가 중얼거렸다.
나는 멜을 대신해 변명해주었다.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크리스는 내 설명을 듣고 충분히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이나 동안인 그녀의 외모는 이럴 때도 도움이 되었다.
사춘기라는 핑계가 가능했으니까.
“내가 잘 이야기해 볼게. 할 말 못 할 말은 구분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으응… 믿고 있어.”
네가 부끄러워 할만한 정보는 감추겠다는 의미였다.
그 말을 듣고 크리스는 작게 안도했다.
크리스에게 미리 이야기는 해주었다.
나는 도망간 멜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
‘저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거겠죠?…’
멜은 스스로가 이것이 옳은 행동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크리스와 박찬영에게 방금 저지른 실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말로 하는 무례보다 몇 배는 더 악질적인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멜은 그렇게 배웠으니까.
어렸을 적.
그녀를 키워준 늙은 약초꾼과의 대화가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멜이 아직 성인이 되기 한참 전의 기억이었다.
- 내가 만일 죽게 된다면,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를 한이 무엇인지 아느냐?
- 제가 항상 말하죠! 죽는다고 하지 마세요!
- 하하하. 되었고, 대답은?
- 얼굴을 알던 마을 사람이 도적이 되는 걸 말리지 못한 것이요? 아니면 실종된 마을 여자애를 찾지 못한 것! 항상 후회하시잖아요.
- …두,둘 모두 맞구나. 그런데 내겐 하나 더 있단다.
- 음… 한 번도 배불리 먹지 못한 것?
- 아니. 아니란다.
- 그러면요?
- 내가 젊었을 적, 한 번에 반한 여인을 붙잡지 못한 것이 큰 후회가 되더구나. 말이라도 붙여볼 걸… 하고.
- …고작 여자?…
- 떽! 고작이 아니야! 들어 보거라. 그 여인은 호수를 떠오르게 하는 하늘빛…
다시 떠올리면 지루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야깃거리가 하나도 없던 어렸을 적의 멜은 이조차 흥미롭게 들었다.
약초꾼이 별로 신통치 않은 묘사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어렵사리 표현할 때면,
멜 역시 상상 속에서 여인을 그리며 재밌어했다.
약초꾼이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지 못해 반복되는 어휘로 여인과의 헤어짐을 그릴 때면,
멜 역시 함께 이별의 슬픔을 공감했다.
그렇게 나온 약초꾼의 결론은 하나였다.
마음에 드는 이가 나타나면, 후회하지 말고 붙잡아라.
“시도는… 해보거라.”
- 꽈악.
마주 쥔 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도 모르게 이 교훈은 뼛속 깊숙이 새겨졌다.
그리고,
그녀는 오늘에서야 약초꾼의 말이 자신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음을 깨달아 버렸다.
눈앞에 마음에 드는 이가 나타나 버렸으니까.
“어… 어어… 그래도 난 한눈에 반한 건 아닌데… 괜찮… 겠지?”
멜은 허둥지둥 기억을 더듬으며 혼란스러워했다.
약초꾼과의 대화에서 첫눈에 반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대처법은 없었다.
그녀가 찬영에게 반한 것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며 천천히 반해버렸다.
멜이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버릴 만큼이나.
혼란은 잠시였고, 결론은 정해졌다.
역시 도전할 것이다.
의외인 곳에서 겁이 없는 그녀다.
멜의 결심은 나름 확고했다.
이렇게 말하니 한참 전부터 마음을 다져 온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멜이 도전을 결심한 것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며칠 전,
멜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자신의 첫사랑은 실패할 확률이 너무나 높다는 것을.
동양인 특유의 이색적인 매력을 가진, 그녀가 본 어떤 남자보다 잘생긴 박찬영.
강하고, 아름다웠으며, 멜과 같이 노숙을 함에도 항상 몸이 깨끗해 보이는 크리스.
멜의 눈에 두 연인은 너무나 어울렸다.
심지어 둘의 결속은 끈끈해 보였다.
그녀가 파고들 수 없을 만큼이나.
마음속 고이 접어 둘 연심이었다.
그러나…
최근 기회를 발견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그녀 내면에 새겨진 교훈을 일깨워 버렸다.
찬영과 크리스가 각방을 잡았다.
이 소식은 멜을 기대하게 했다.
어쩌면 둘의 사이는 자신의 생각만큼 깊지 않은 것인가, 하고.
기대는 방금의 대화에서 더욱 커져만 갔다.
“응… 금욕이라고 했지? 그러면… 혹시 둘의 진도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이 안 나갔을 수도?”
영주성에서 연회를 벌일 때,
멜 자신의 실수로 찬영과 크리스가 동침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얼마나 속앓이를 했던가.
찬영이 성직자이기에 마음을 돌리는 것은 정말로 어렵겠지만,
오히려 성직자이기에 둘은 진도를 많이 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분명 남자들은 세,세,세… …야한 것을 허락 안 해주면 정이 떨어진다고 했어…!”
남자로 알려진 이상 용병단의 음담패설에 휘말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거에는 그저 고역이었을 뿐이지만,
남자 용병단 사이에서 들어 왔던 정보는 지금 멜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멜의 머릿속에 부끄럼을 탔던 크리스의 모습이 되새겨졌다.
어쩌면 그것은 숫처녀였기에 더욱 부끄러움을 탄 것이 아닐까?
물론 평범한 여인이 그 상황에 처했더라면 당연히 해야 할 반응이다.
허나 멜의 사고는 이미 긍정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첫사랑에 냉정할 만큼 노련하지 못했다.
“천천히. 응. 천천히 하자. 어차피 둘의 진도는 더딜 테고… 계속 찬영님이 하얀 고래에 계시는 한, 내게도 기회는 있으니까!”
아무리 어수룩한 멜이라고 한들…
성급하게 시도했다가 일이 틀어지면 어떻게 될지 정도는 쉽게 예상 할 수 있었다.
아마 하얀 고래에 둘 다 남아 있지는 못할 것이다.
용병단을 나가는 것은 높은 확률로 수도자로서 죄를 짊어진 찬영이 되리라.
멜이 아는 그라면 누군가 말리기도 전에 망설임 없이 자진해서 나갈 테니까.
차라리 자신이 방출되었으면 되었지, 그녀가 반한 이에게 민폐를 끼치기는 죽기보다 싫은 멜이다.
행동은 신중해야 했다.
‘베넷씨한테는 미안하지만… 으으… 미안하지만… 으…! 못 하겠어… 어쩌지?…’
멜은 고민하면서도 결국 독한 마음을 먹지는 못하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크리스는 아무런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죄는 멜이 짓고 있다.
그리고 멜 또한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의 죄를 억지로 만든다면 너무 매력적인 남자를 연인으로 둔 죄인데…
그건 일이 잘 풀리면 멜 또한 저지를 죄일 것이다.
물론 그녀는 기쁘게 받아드리겠지만.
죄를 짓는 것과, 서로 호의를 보이던 상대와 원수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자신의 결심.
크리스를 향한 양심.
이 둘을 저울질하던 멜은…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를 뒤따라온 누군가가 멜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멜. 잠깐 이야기 괜찮을까?”
“히익!”
- 움찔!!
크게 놀란 멜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뒤를 돌아보았다.
잘생긴 얼굴이 그녀를 바로 앞에서 반겼다.
그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밤하늘을 닮은 동공이 멜을 직시했다.
‘차,차,찬영님!!…’
우습지만, 멜은 당황한 순간에도 자신을 보는 저 한 쌍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