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하얀 고래 용병단은 유적 탐사를 앞둔 채 대기하고 있었다.
말만 대기라고 했을 뿐, 단원 제각기 모아둔 돈을 탕진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유적 탐사는 일개 용병단 한 개가 맡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왕실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탐사에 나서는 것은 하얀 고래뿐만이 아니다.
다른 의뢰를 수행 중인 철사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수도를 거점으로 삼는 하늘 산맥은 이미 참가해 있었다.
그 밖에 중소 용병단을 모아 한 번에 출발할 것이다.
별로 부유하지 않은 왕국임에도 용병을 고용하는 것에 돈을 꽤 쏟아부었다.
왕실이 얼마나 왕성 지근 거리에 발견된 유적을 중요히 여기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물론 기사를 보내었다가 몰살당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히기야 하겠지만.
유적의 위험도는 아직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허나 그 크기가 범상치 않았기에 입구에 적힌 경고 문구를 절대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파계승아. 그것뿐만이 아니야. 현 왕실은 제국을 배척하고 있잖아? 그런데 주요 전력인 기사들이 혹시나 사라져 봐.”
“왕국은 반항조차 못 하겠네요.”
“맞아. 실권을 쥔 귀족들은 왕국이 제국에게 잡아 먹히는 상황을 겁내는 거지. 걔들은 기사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해. 덕분에 우리는 돈을 달달하게 받는 거고.”
어부지리에 좋아하며 웃는 자넷.
그녀의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에도 종종 느꼈지만, 생각보다 자넷의 머리 회전이 빨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세계의 평균 지능 수준은 훌쩍 뛰어넘었다.
자넷이 가진 『양자택일』 특성의 도움은 아니었다.
이건 금전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도 아니었고,
이지선다도 아니었으니까.
온전히 자넷의 능력이다.
“…자넷 단장님은 정치에도 눈이 밝으셨습니까?”
“용병질도 세 손가락 안에 들려면 정치는 필수지.”
“그런데 왜 일상 생활 속에서는 눈치가 그리 없으신가요?”
“…닥쳐.”
자넷은 떨떠름하게 내게 대꾸했다.
그녀도 자신이 인간관계에 한해서는 능숙하지 않은 것을 아는 눈치다.
바로 농담이었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한번 진실이 쑤셔박힌 자넷의 표정은 여전히 뾰로통했다.
그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일부로 질문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놀며 보내도 됩니까? 유적 내부에서 초면의 용병과 단체 행동을 해야 할 텐데, 미리 합이라도 맞춰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쥐방울만 한 용병단이나 그러지, 우리는 해당 안 돼.”
“예? 어째서 그럽니까?”
“어차피 내부에서는 팀 단위로 수색에 나설 테니까. 머릿수만 따져서 중형 이상이면, 그냥 용병단 자체가 한 개의 팀이 되거든. 50여 명이면 중형은 충분히 넘고.”
“아하. 그럼 유적 내부에서도 하얀 고래끼리 다니겠네요.”
“맞아. 그러니 맘 편하게 놀아. 바쁠 땐 쉬지도 못하는 직업이니까.”
자넷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긍정했다.
이렇게 팀으로 쪼개져 수색하게 된다면 사망자가 나올 확률이 높지만, 왕실이 용병의 생사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죽어도 손해가 없다는 장점이 있기에 큰돈을 들여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어서 유적의 정체나 낱낱이 밝혀내는 것이겠지.
생각을 정리했다.
원작대로라면 출발하기까지 대략 사흘쯤 걸릴 것이다.
잔잔한 정통 판타지답게 이 기간 동안 멜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거의 없다.
그냥 그녀가 가진 2골드를 어디다 쓸지 고민하는 것과,
1실버나 되는 와플의 유혹에 끙끙 앓는 것이 전부다.
덕분에 나도 느긋하게 계획을 잡으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이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뿐만이 아니었으니까.
*
- 쏴아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이 내 머리부터 발끝을 적신다.
나는 얌전히 그 물을 몸으로 받으며 보이지 않은 땀을 흘려보냈다.
욕조를 사용하며 느긋이 씻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곧 먹을 식사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크리스는 욕조에 몸을 담그며 느긋이 씻고 있다.
내가 짧게 샤워로 끝내면, 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기까지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차를 원했기에 목욕이 아닌 샤워를 택했다.
식사를 차리기에 딱 알맞은 시간이었다.
크리스의 입장에서는 목욕을 끝마치자마자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나도 느긋하게 목욕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이러면 크리스가 좋아하니, 노력하는 맛이 있지.’
나 역시 목욕하고 나오자마자 먹는 갓 지어진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고 있다.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저절로 배가 꺼지지 않던가?
그런 만큼 각별하게 더 맛있게 느껴지리라.
사실 크리스의 언행을 보면…
배가 꺼진 상태에서 즉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이 기쁜 게 아닌,
내가 그녀를 배려해 행동했다는 것 자체에 더 감동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왠지 크리스가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 싶은 날이다.
오늘은 샤워로 만족하기로 했다.
- 끼릭.
이미 바디워시 등을 사용해 씻은 것은 한참 전이다.
물을 잠그고, 몸을 수건으로 닦았다.
달궈진 피부의 진정과 보습을 위해 로션과 크림을 발랐다.
향이 옅은 바디로션 역시 꼼꼼히 발랐고.
아무리 잘생기더라도 청결하지 않으면 그 빛을 잃는다.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서 정말 잘생긴 배우들이 ‘못생김’을 연기할 때, 얼굴에 때를 칠하지 않던가?
그런 면에서 나와 크리스는 항상 아름다움을 유지했다.
땀을 흘릴 때마다 자주 지구로 돌아와 몸을 씻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번 달 나올 난방비와 수도세가 두려웠다.
지구 시간 기준으로 거의 한 시간에 한번 샤워를 한 수준일 테니.
‘반면에 다른 남자 용병들은… 좀 많이 냄새나지…’
노숙할 때.
대부분의 남자 용병들은 씻기를 귀찮아한다.
여자인 멜과 자넷은 시간이 날 때마다 수건을 물에 적셔서 꼼꼼히 몸을 닦고 있는 것 같지만…
나와 크리스처럼 몸에 향이 나는 수준은 아니었다.
당연히 자넷과 멜은 부러운 표정으로 그 비법을 물어 왔다.
나는 그럴 때마다 수도승 흉내를 내어 ‘외면은 곧 내면의 거울. 마음의 더러움을 비우면 육신도 저절로 깨끗해지는 법입니다.’라는 말을 돌려주었다.
물론 내가 말했지만 나도 이해가 안 가는 개소리다.
순진한 건지 아닌지 그 둘은 나의 말을 믿어 주었지만.
“그럼… 슬슬 밥이나 만들어야겠다.”
이미 무엇을 만들지는 정해 두었다.
나는 주방으로 가는 동시에 시스템 창을 불러왔다.
가벼운 가정식은 만드는 동시에 다른 행동을 하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띠링!
=
[소설 진입]
테라포밍 - [完]
현재 상태: 에필로그(Epilogue) 진행 중
하얀 고래의 발자취 - 51화 연재 중단. 작가 필명: 파맛첵스
현재 상태: 연재 중
- 비어 있음.
현재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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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능을 해방해 한 번에 두 개의 소설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테라포밍을 완결 맺으며 진입 가능한 소설란 중 하나의 공란이 남게 되었다.
이 공란은 아직까지 선택되지 않은 채 비어있다.
내가 선택을 미룬 것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선택할 생각은 아직 없었다.
이유는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소설 목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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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앤 빌런 - 45화 연재 중단. 작가 필명: q1w2e3r4
미리내 - 115화 연재 중단. 작가 필명: 물효자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 37화 연재 중단. 작가 필명: 이정도면가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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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그락. 달그락.
본격적인 요리를 시작하며 시스템 창을 눈으로 흩어 보았다.
칼질할 때를 제외하고는 위험한 건 없었다.
우선 ‘게임 속 마법 아카데미’.
이건 남녀 역전 소설이다.
심리적인 거부감이 들지만, 신경 쓰지 않고 실리를 우선으로 판단할 것이다.
이 세계의 가장 큰 단점은…
소설이 로맨스나 코미디가 주력이다 보니 세계관 설정이 많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로인들과 주인공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스토리에 주를 이룬다.
기연과 같이 내가 얻어갈 것이 거의 없는 뜻이다.
마법과 관련된 물건이나 스킬도 나오긴 하는데, 그 대부분을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관에서 얻어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소설 속 마법이란 어느 정도 틀이 잡혀 있으니까.
오히려 정통 판타지에 가까운 ‘하얀 고래의 발자취’에서 마법을 더 자세히 다룰 수도 있다.
그러니 이건 탈락이다.
두 번째로 ‘미리내’.
특이하게도 115화까지나 연재가 된 뒤 연재 중단되었다.
즉, 여태까지의 소설과 달리 유료화를 한 뒤에 연중을 했단 뜻이다.
당연히 내부 정보도 풀린 것이 다른 연중 소설과 비교해 월등히 많으리라.
나는 80화까지 보다 하차했지만, 지금이라도 남은 편수를 구매해서 마저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주 아주 거대한 단점이 있기에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거 게임 판타지잖아…”
기본 배경이 현대다.
지구랑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현실 세계에 마나도 없고, 특별한 스킬도 없고, 해금을 노릴만한 아이템도 없다.
내가 아는 정보들도 전부 게임 내부적인 정보다.
게임 캐릭터를 키우는 것에서나 유용하지,
실질적인 나의 무력이 강해지는 것에 하등 쓸모없는.
어찌 보면 현대의 세계에서 현금이나 금품을 훔쳐 오는 식으로 써먹을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내 통장이 아주 넉넉했기에 선택이 보류되었다.
아무리 많이 낭비해도 ‘하얀 고래의 발자취’를 완결 할 때까지는 금전적인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벌써부터 돈을 모으겠다고 선택을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 세계의 아이덴티티인 가상 현실 게임?’
나도 유명한 게임 몇 가지는 친목을 위해 즐겼던 만큼 흥미가 가긴 하다.
그러나 딱 흥미로움에서 그쳤다.
한참 미래에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소설이 십수 개쯤 되었을 때,
순수히 가상 현실 게임을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는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히어로 앤 빌런’.
초능력 각성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세계관이다.
이건 내가 얻어 갈 것이 많다.
이능이 나오는 세계관이다 보니, 완결을 하는 순간 수많은 스킬을 상점에 해방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수는 테라포밍의 찔끔찔끔 있는 것과는 자릿수를 달리 할 것이다.
아공간 스킬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고 있는 만큼, 내겐 상당히 매력적인 선택지다.
만일 내가 다음 들어갈 소설을 선택하게 된다면…
높은 확률로 ‘히어로 앤 빌런’을 선택하리라.
그럼에도 당장 이 소설의 선택을 보류한 이유가 있다.
“…여긴 파워 밸런스가 너무 높은 곳이야.”
초목을 태우고, 번개를 부르고, 대기를 얼리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나는 강하지만, 그건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관 기준일 뿐.
혹시 실수해 상위급 빌런에게 잘못 걸리는 날이 바로 클리어 보상이 깎이는 날이다.
즉.
지금 당장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가진 무력이 부족해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다.
어차피 선택해놓고 활동을 안 할 거라면, 보류하는 것이 더 좋은 판단이다.
그럴 확률은 무척 낮겠지만…
혹시나 미래에 내가 생각지 못한 장점을 발견해, 다른 소설을 선택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갑자기 급전이 필요해져 ‘미리내’로 들어가야 할 수도 있고.
“역시… 결론은 미뤄야 한다는 거네.”
지금 당장은 하얀 고래의 발자취에 집중하고 싶다.
곧 메인 에피소드가 시작되니까.
‘히어로 앤 빌런’에 진입하는 것은 시간이 흐르며 스텟이 올라가거나, 스킬이 레벨 업되면 진지하게 고민할 것이다.
딱히 정해 둔 무력의 최소치 기준은 없었지만…
적당히 무력이 부족해 곤란함을 겪지 않을 수준이면 될 것이다.
- 챠락 척 척…
식사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 식탁을 차렸다.
주걱에 붙은 메인 반찬의 일부를 먹어 보며 간을 보았다.
만족스러운 맛이다.
매운맛은 하나도 없고, 짭짤함과 달달함만이 존재했다.
지난번에 크리스가 해달라고 요청한 간장 불고기였다.
마침 전기밥솥이 뜸을 전부 들였다며 김을 뿜는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차오르는 정갈한 한 상이 금방 완성되었다.
타이밍 좋게 주방을 향해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 끼익. 쿵.
“킁킁… 마,맛있는 냄새…”
“다 씻었어? 잘 됐다. 마침 상 전부 차렸거든.”
“찬영? 또 미리 나와서 밥 해준 거야?”
“오늘은 그러고 싶어서.”
“구,굳이 안 그래도 된다니까… 엄청 엄청 고맙긴 한데!…”
“기뻐?”
- …끄덕.
“…기뻐…”
“후후. 그러면 나도 좋아. 앉아. 어서 먹자.”
“…응!”
일찍 샤워를 마친 보람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