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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너 지금 시비 거냐?”

“네 부주의로 일행이 부딪힐 뻔했잖아.”

“반말? 허 참. 이래서 동양인 새끼들은…”

“네가 한 건 존대고?”

“이런 개새끼가.  나라로 돌아가라고 씹새끼야. 수도에 거닐면서 내 눈살 찌푸리게 만들지 말고. 알아들어?”


“시비 걸러 왔다고 고백을 하네. 지랄하지 말고 갈 길 가. 입 잘못 놀리다  잘리면 네 책임이니까.”


내게 다가온 많이 못생긴 얼굴의 용병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시비 거는 것이냐며 화를 내었다.
상황은 어디서 많이 본 클리셰대로 흘러갔다.


이런 새끼들 상대로 정중히 대해줄 필요는 없다.
시비 걸려고 온 놈인데, 뭐가 예쁘다고 잘해줘?
몇 대 쥐어 패고 돌려보내면 된다.


‘자넷의 얼굴을 보고 물러서지는 않네. 거기서 끝났지 뭐.’

이들은 용병이다.
그러나 자넷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얀 고래의 이름을 모르는 멍청이는 없을 테니, 그냥 자넷과 만나본 적도 없는 어중이 떠중이리라.
실제로 그의 상태창에는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특성은 물론 스킬도 텅텅 비었어, 그렇다고 스텟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이름까지 빠지지 않고 체크해 혹시라도 성이 있나 확인했다.
건드렸는데 알고 보니 무슨 무슨 사정으로 신분을 숨긴 방계 귀족이었다, 이런 암 걸리는 이야기는 질색이다.
이제 딱 하나만 확인하면 건드려도…


- 탁. 빠악!!

“꺼흑…!”

- 쿠당탕!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씹새끼? 찬영이  친구냐?”


“케헥…”

내가 판단을 전부 내리기 전에 움직인 것은 크리스였다.
그녀는 번개같이 놈의 발목을 후려 차서 길바닥에 눕혔다.

단순히 발길질로 균형을 흔든 것이 아니었다.
오른손으로는 놈의 목을 잡고 당기는 동시에, 놈의 발끝에 힘을 가해 사람을 풍차처럼 돌려 버렸다.
덕분에 놈은 공중에 잠깐동안 뜨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후는 저렇게 바닥에 굴러야 했을 것이다.
사람이 날 수는 없지 않은가?

- 터억.


“컥… 자,잠깐…”

“이 악물어라. 혀 씹는다.”

“뭐,뭘 할 건데! 하지 마! 뭐 할 거냐고!”


크리스는 놈을 눕힌 것만으로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엎드린 놈의 등에 발을 올리고, 오른팔을 잡아 올렸다.
저건…
어깨를 빼려고 하는 것이다.
탈골은 제대로 맞추기만 하면 후유증은 거의 없지만, 처음 당하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프다.
빠질 때도.
도로 끼워 넣을 때도.


최근  앞에서 너무 얌전한 모습만 보여서 그렇지…
크리스는 적에게까지 상냥한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내 앞에서만 7년 전의 온순한 성격이 되는 것이다.


“자. 하나, 둘…”

턱.


“잠깐만 크리스.”


“어,어? 찬영? 그치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야. 확인할  있어서.”

크리스는 말리는 나를 보고 살짝 당황했다.
내가 말릴  예상치 못했나 보다.


총에 맞은 것도 아니고, 이 자식을 상대로 동정심을 품은 건 절대 아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어서 볼일을 끝내고 놈의 어깨를 마저 뽑도록 하자.


스윽.

나는 품을 뒤적거려 나의 용병패를 꺼내었다.
그리고 엎드린  앞에 쭈그려 앉아 눈에 패를 들이밀었다.


“보여? 무슨 생각이 들어?”

“뭐,뭔데. 뭘 원하는 건데? 어쩌라고? 내,내 팔에  할 생각인데!”


“…어?…”


용병패를 봤음에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놈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나는 내 용병패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변함없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
‘하얀 고래 용병단 소속’이라고.
내가 무엇이 잘못됐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정답이 들려 왔다.


“푸하핫!! 야 파계승아. 내가 지난번에 말했잖아. 용병들은 죄다 까막눈이라고.”


“아…”

“용병패를 읽을 리 없는데, 보여줘도 우리가 하얀 고래인 걸 알아?”

“크흠… 그러네요.”


“푸흡!! 야, 너 존나 귀여운 면도 있다? 큭큭큭… 반할 뻔했잖아.”

“…”

내가 이렇게 멍청했나?
오랜만에 느끼는 쪽팔림이다.
그조차 자연 치유의 덕에 금방 사라지겠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글을 모르는  기본으로 여겨야 한다니…
머리로는 알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나 보다.
젠장.

내가 부끄러움을 삭히는 것과 별개로,
바닥에 깔린 놈의 얼굴이 점점 어색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얀 고래란 단어를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하얀 고래?… 하얀 고래라고? 네가? 너 설마 하얀 고래야? 도,동양인이데 어떻게?…”


“누가 내 용병단 입단 조건에 동양인이면 결격 사유래?  그딴 룰 만든  없어.”

놈의 말 상대는 자넷이 대신해주었다.
 보기에 그녀 역시 지금 사태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내’ 용병단?… 갈색 머리… 눈에 띄는 미인… 설마… 용병 단장? 님… 이신… 가요?”

“어떻게 생각해?”


“사,사칭…”


“큭큭. 머저리 새끼.”

자넷은 실실 웃으며 정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용병은 그 모습을 보고 한층 더 불안에 떨었다.
자넷이 진짜가 맞다고 하면 오히려 믿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놀리듯 어물쩍 넘기니…
내가 봐도 진짜 같았다.


나는 엎드린 놈에게 다가가 품을 뒤졌다.
놈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보다 이게 빠르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게 내가 목적으로  물건을 찾는 것에 성공했다.
내 손에 들린 것은 놈의 용병패였다.

‘어디보자… 이름은 상태창에서 본 이름이랑 같고… 본인 게 맞네.’


놈의 용병패 역시 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간단한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
신분증 역할을 대신하는 놈이니 당연하다.


“어?  사람 하늘 산맥 용병단이네요.”

“헉! 어,어떻게!”

나의 말에 바닥에 깔린 놈이 눈에 띄게 놀랐다.
글을 읽는 용병은 처음 보는 걸까?
…생각해 보니 처음 보는  수도 있겠다.

“아저씨의? 뭐야. 진짜 피래미였잖아?”


“건드려도 상관없나요? 그래도 지인의 용병 단원인데.”

“전혀. 아재 용병단은 쥐도 새도 모르게 탈퇴하거나, 뒤지는 피라미까지 신경 쓰지는 않거든. 한두 명이 아니라 수백 단위니까.”


“…입단자를 보호하는 장치는 없나 봐요?”


“도대체 용병한테  기대하는 거야? 자기가 용병단 내부에서 인맥 쌓는 건 자유지만, 난 그쪽 간부랑 얼굴도 많이 알아서 탈 없어.”


“좋네요.”


뒷배가 있는 것이 이리도 든든할 줄이야.
이것으로 내가 크리스를 말리기까지 하면서 확인하고자 한 것에 대한 확인이 전부 끝났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이 쓰레기가 철사자 용병단 소속이거나 하늘 산맥 용병단의 1군급 인물이라면?
혹은 꽤나 강한 용병단 소속 단원이라면?
함부로 건드려서야 용병단끼리의 항쟁으로 번질 수 있다.
나로서는 신중히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음…
솔직히 이 남자가 철사자 용병단 소속이었다 하더라도 건드렸을 것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분노를 참는 것은 몸에 해롭다.
그냥 알고 대비하느냐, 모르고 있다 뒤통수를 맞느냐의 차이다.

“단장님? 혹시 여쭈어보는데… 용병끼리 싸우면 경비단에게 잡혀가지는 않죠?”

“피만 안 보면? 주먹질로 감옥에 가면… 매일  수십 개의 술집마다 감옥을 가야  사람이 네다섯씩 나오잖아.”

“…제가 있던 수도원 밖은 이리 살벌했습니까?… 으음… 오히려 유혈사태가 나오면 경비대가 개입한다는 것에 만족해야…”

“어어… 사실 용병 사이의 다툼은 피가 나도 사람만  죽으면 손을 잘 안 대.”

용병 산업이 발전했다는 것은 용병이 가진 정치적인 힘이 강하단 걸까?…
아니면 단순히 왕국의 치안이 개판인 탓?…
수도인데?…
…난  모르겠다.

“찬영? 이제 슬슬 해도 돼?”


“응. 해. 아, 한쪽 팔은 남겨 둬. 내가  거니까.”


“어? 찬영 할 줄 알아?”

“잘 몰라. 이참에 가르쳐줘.”


“응! 알겠어!”

크리스에게 사람 탈골 시키는 방법이나 배우기로 했다.
복수하는 김에 겸사겸사 이런 기술을 배우면 어딘가 쓸모 있지 않겠는가?


“처,천생연분… 어떡하죠… 저걸 보니 자신 없어졌어요오…”

뒤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 뒤에 선 인물은 소란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을 제외하고는 멜밖에 없었다.
내가 멜을 향해 방금의 말을 물어보는  보다,
크리스에게 등을 밟힌 놈이 다급하게 말을 뱉는 것이 빨랐다.

“자,잠깐. 내가  남자를 욕한 것이 화났으면 사과할게. 하지만, 욕만 했다고 팔을 부러뜨리는  너무 하잖아?”


“그런다고 니가 찬영보고 씹새끼라 한 게 사라져? 그리고 부러뜨리는 거 아니야. 고개 앞으로 돌려.”

“나,나는 치료비도 없다고! 당장 돈도 없어서 노숙하는데…!”


“아, 원래대로 고쳐 줄 거니까 입 좀 닫아 봐.”


- 휘익!

“어억…!”

팔을 뒤로 꺾인 용병은 몸으로 반항하지 못했다.
혹시나 움직이려는 낌새가 보이면 크리스가 꺾인 팔을 위로 올리며 놈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다.
놈은 완벽히 제압되어 있었다.


“자, 시범 보여줄게. 잘 봐. 이렇게 어깨 쪽을 발로 눌러서 고정한 다음…”

“아아악! 아파! 아파! 히이익!…”

“시작도 안 했는데 엄살은. 한 번에 팔을 당긴다는 느낌으로…”

- 우둑.


“끄아아아악!!! 팔!!  팔!”


“자! 이러면 깔끔하게 성공. 근육도 안 다쳐!”


비교 대상이 뼈가 부러지는 소리라서 그럴까?
팔을 뽑는 것은 의외로 커다란 소리는 나지 않았다.
예민한  청각으로 작게나마 잡아챌 수 있었을 만큼이나.

“이 머저리는 탈골이 처음인가 보네. 탈골된 적이 없다는  둘째치고, 탈골의 존재도 모른다는 건 진짜 애송이란 건데… 큭큭.”


“단장은 탈골을 겪어 보셨어요?”

“나? 나는 당연하고, 하얀 고래에서 탈골을 안 겪어 본 사람이 드물걸?”

자넷의 말로는 베테랑 용병들은 한두 번씩 겪는 것이 탈골이란다.
그럴 법했다.
철 덩이를 들고 끊임없이 휘두르는 게 업이니.

그러나 이 용병이 자넷의 말대로 그렇게까지 애송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잘 모르겠다.
보이는 스텟으로만 판단하면 멜보다 미세하게 아래를 밑도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나름 중위권 실력일 테고,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만한 자신감의 원천은 되어 주었을 것이다.

- 저,저거 팔이 부러진 거 아니야?
- 어머!… 끄,끔찍해라…
- 으… 용병들이란…

소란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작게 비명을 지른다.
용병이 내지르는 엄살이 대부분인 절규에 팔이 부러진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크리스가 탈골된 팔뚝을 맞추는 것을 보여주면서 조용해 졌다.

자신의 팔이 부러진 줄 알고 울고불고 하던 놈은, 다시 찾아온 커다란 고통에 새된 비명을 질러 대었다.
당연히 팔이 조립되며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자 정신을 되찾았다


“어,어라?… 팔이… 팔이 움직여!…”

“자! 이게 한 세트!”

크리스가 시범을 끝내며 내게 말했다.
용병은 부드럽게 움직이는 자신의 오른팔을 얼떨떨하게 바라보며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
그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제 찬영이 해봐! 내가 오른 어깨에 했으니… 왼 어깨로.”


“자,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고통을 또 겪어야 한다고?…”

“후유증 하나도 없잖아? 약간 얼얼한 것 빼고는.”

“그…그런 문제가…”


“입 닫고 얌전히 엎드려 있어. 몇 번 더 뽑았다 끼워버리기 전에. 조용히 있으면 앞으로  번으로 끝난다고?”

“으… 으으으…”

싸늘한 크리스의 말에 용병은 무어라 하지 못했다.
사실  정도면 정말 너그럽게 넘어가 주는 것이다.
솔직히 손가락 한두 개 정도 잘라내어도  용병은 할 말이 없다.
왜냐면 내가  강하고, 뒷배가 있으니까.


시비를 건 순간이 그의 잘못이다.
왜 가만히 있는 내게 시비를 걸고 그랬어?


‘…생각해 보니 시비 걸만  것 같기도 하고?’

남들의 눈에는  혼자서 여자 3명을 끼고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이리라.
진실은 2명의 남자와 2명의 여성이고, 그보다 더 깊숙한 진실은 나를 제외한  명 모두 여자인 것이 맞지만…
아무튼 충분히 오해할 만 했다.

내가 못생겼다면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으리라.
누가 보아도 아름다워 보이는 세 명의 여인과 연인일 리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정말로 연인이라면, 더욱 건드려서는 안된다.
못생겼는데 여자를 끼고 다닌다는 것은…
돈이나 권력 중 무시 못 할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나는 잘생겼다.
동양인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절대 못생겼다고 말할  없을 정도로 잘생겼다.
그러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정말로  아름다운 세 여인 전부를 끼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이니.

나는 백하민 그 새끼 덕에 세상에 온갖 씹새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 뒤틀린 사람이라면, 충분히 배알 꼴릴만 했다.

물론 그렇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팔은 뽑아 볼 것이지만.


뽑을  한번.
끼울 때 한번.
수도의 거리에서 비명은 두 번  울렸다.
나의 믿음직스러운 동체 시력과 신체는 크리스의 기술을 완벽히 재현했다.

저 멀리서 이 용병의 동료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놈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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