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고작 용병단 이름에 얽힌 이야기치고는 꽤 무거웠기 때문이다.
나도 ‘과거에 흰색 고래를 닮은 몬스터를 잡은 적이 있다.’ 정도로 예상을 했을 뿐,
이렇게 어두운 과거사가 나올 줄은 몰랐다.
물론 나는 겉모습만 진중한 모습을 보였지, 실제로는 상당히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새로 얻는 정보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자넷이 실실 웃으며 괴로워하는 티는 조금도 내지 않았기에 나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무슨 오지랖인가?
“에이… 거 봐. 와플 맛 떨어지지?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그런갑다 하고 가볍게 넘겨.”
“그,그래도…”
“내가 그게 편해서 그래. 어휴… 매번 설명할 때마다 해명이나 해야 하고, 용병단 이름을 바꿔야 하나?”
“하하… 그건 좀…”
“아, 내가 아재랑 친한 것도 이거랑 좀 관련이 있지.”
“아저씨라면… 용병 길드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때 아재는 길드장이 아니었지만… 응. 막 용병질에 나섰을 때, 내 사정을 들은 아재가 날 좀 챙겨줬거든. 잃은 딸이 생각난다면서.”
자넷과 길드장과의 인연은 꽤 길었나보다.
한국의 미디어 매체 탓에 ‘딸 같아서 그랬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부정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지만,
자넷 성격상 가만두고 볼 리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이리라.
게다가 결혼이 빠른 이 세계 기준으로 자넷과 길드장의 나이 차이면 정말로 딸뻘이기도 하다.
“그럼 자넷 단장은 길드장을 부친처럼 여기겠군요.”
“뭐?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좀 친한 아저씨 정도지. 무엇보다 예전에 아재는 정 붙이기 정말 꺼려졌어.”
- 멈칫.
“…꺼려졌다…? 음… 주제넘은 참견이지만, 뒤숭숭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파계승 네가 생각하는 이유랑 달라. 그 아재 전투 스타일상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거든. 괜히 정 붙였다가 다음날 죽으면 심란하잖아?”
“아… 그런 이유로…”
“용병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지.”
이어진 자넷의 설명에 의하면 몇몇 베테랑 용병 중 친목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전부 초짜일 때 지인을 잃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란다.
대화에 지친 자넷은 나이프를 들어 와플을 썰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지금까지 이야기해주느라 별로 와플을 먹지 못했다.
“궁금증이 풀렸으면 이제 와플이나 좀 먹자. 아, 다 식었네…”
자넷은 시무룩해 했지만, 와플은 식어도 맛있었다.
크리스가 살짝 곤란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척 내가 내민 와플을 받아들일 만큼이나.
크리스를 보고 있으면 여자는 복잡한 생물이란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녀는 내 눈을 길게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몫을 전부 먹어 치우고, 나의 몫까지 뺏어 먹는 것에서 약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와플을 향한 포크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런 크리스를 귀여운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눈을 뗄 수 없는 마법적인 무언가가 나를 옭아매었다.
부끄럼을 타는 크리스는 몇 번을 봐도 정말 보는 맛이 있었다.
“왜,왜 자꾸 내가 먹는 걸 봐?”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 돼지 아니다?”
“큭큭큭. 알아.”
- 슥. 스윽.
참지 못하고 터진 나의 웃음에 크리스의 시선에 불만이 담긴다.
크리스가 토라지기 전, 어서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그녀를 달랬다.
나의 손길에 불만이 차오르던 크리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편안해진다.
참으로 사이좋은 연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빠짐없이 지켜본 동행인 두 명이 있었다.
“어휴 시벌. 진짜 욕 나오게 하네. 파계승 네 눈에서 꿀 떨어지겠다.”
“와,와플보다 더 달아요… 욱…”
“애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 어?”
서로 없이 못 사는 연인의 애정 행각.
멀리서 지켜본다면 뿌듯한 웃음이 나오겠지만,
코앞에서 지켜본다면 위가 쓰라릴 것이다.
멜과 자넷의 표정은 절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두분은 평소에도 그렇게… …그러시나요?”
“남이 안 볼 때는? 연인이니까.”
“…”
멜은 무언가 불만을 가지면서도 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내 곁에 앉은 크리스를 살짝 영문 모를 시선으로 몇 번 봤을 뿐이다.
결국 멜은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와플에 집중했다.
내게 남은 몫의 와플은 없다.
그러나 곧장 가게를 나갈 수 있을 리 없다.
자넷과 크리스, 멜이 와플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크리스가 먹는 모습을 계속 구경하면 정말 화낼 것 같기에, 눈을 돌려 주변을 흩어 보았다.
- 입에는 좀 맞으신가요? 나의 피앙새.
- 너무 맛있어요. 이런 멋진 곳에 데려와 주셔서 정말…
- 내가 직접 보고 온 제국에 비하면, 왕국의 수도는 시골이야 시골. 수준 차이가 하늘과 끝이더군.
- 어허, 이 사람이. 밖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 난 당당하네. 거짓 하나 없으니까! 쯧쯧… 어서 왕국도 제국의 문명을 받아들여야 할 텐데.
- 크,큰일 날 소리 하는구먼…
- 진심으로 생일 축하 해, 니나.
- 고마워. 그런데… 설마 오늘은 이게 끝?… 수도에 유행하는 자수가 새겨진 옷이 신상으로 나왔다던데…
- 다,당연히 이거 먹고 옷을 선물해 주려고 했지.
- 와아! 사랑해!
- …으응…
아무래도 디저트 가게다 보니 여자들끼리, 혹은 연인들끼리 많이 찾아왔다.
가게에는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인기 많은 가게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방금 우리는 어찌 보면 민감한 대화가 나왔지만, 그리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우리를 향하는 시선이 없다는 것은 꽤 신기했다.
‘가게에 들어올 때 관심이 몰렸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없네.’
나의 동행인들은 전부 미녀와 미남?… 이다.
자넷은 확실한 미녀였으며, 멜은 귀염상의 얼굴에 더해 중성적인 매력을 가졌다.
크리스가 아름다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
‘외모’는 단순히 얼굴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의상이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수도 어딜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자수 하나 새겨져 있지 않았으니까.
눈에 띌 정도는 절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껴 있으면 다르다.
객관적으로 봐도 나는 시선을 끌 외모를 가졌다.
잘생기고, 키가 큰 것도 큰 몫을 하겠지만…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동양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나친 관심을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새로 얻은 스킬의 성능이 은근 괜찮잖아?’
고요한 발자국.
지난번 테라포밍에서 출장을 다니며 새로 얻어낸 스킬의 덕이다.
패시브로 기척을 줄여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마나를 소모하며 이 효과를 강화 할 수 있다.
연습이 아닌 실전에서 마나까지 소모해 가며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 가게에 입장했을 때,
관심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뒤늦게 스킬을 활성화 시켜 기척을 줄여도 이미 인식된 시선을 떼어 놓을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리에 앉은 이후부터는 스킬의 효과가 체감되었다.
하나둘씩 나의 존재를 잊고 자신들의 동행인과 대화 하는 것에 집중했으니까.
‘일정 거리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 같고.’
레벨이 0에 불과한 스킬은 강하지 않았다.
자넷과 멜, 크리스가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첫 번째’로 실전에 사용해 봤을 때를 생각해 봐도 증명 할 수 있었다.
내가 공식적으로 멜의 남장을 알게 되었을 때이다.
과거.
나는 놓고 간 가방을 가지러 가기 위해 방에 잠입해야 했다.
당연히 이 스킬을 활성화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멜을 눈앞에서 마주쳤다.
‘…멜은 어렵지 않게 나를 발견 했지…’
바로 몇 미터 앞에 있음에도 나를 발견 하지 못하는 등…
소설이나 영화처럼 극적인 효과는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어느새 모든 접시가 비워졌다.
드디어 식사가 끝난 것이리라.
어찌 보면 한 끼의 식사로 치기에는 너무 가볍기 그지없지만…
단순히 칼로리로만 본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계산은 자넷이 했다.
은화 네 개가 종업원 손에 건네어진다.
슬슬 화폐 가치에 대해 감을 잡는 만큼, 저 금액이 입이 벌어질 정도로 비싼 금액이란 건 알고 있다.
아. 옆에 실제로 입이 쩌억 벌어진 사람이 있다.
당연히 멜이었다.
“저,저는 두 번 다시 못 먹겠네요… 적어도 제 돈으로는요!… 비싸… 너무 비싸… 이게 말로만 듣던 수도의 물가?…”
“…넌 도대체 꿀이랑 시럽, 설탕 같은 감미료가 얼마나 싸다고 생각 하는 거야? 이 정도면 그렇게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닌데.”
“단장님은 부자시네요…”
“난 돈을 모으는 것만 잘하는 게 아니야. 쓰는 것도 잘해. 그리고… 하얀 고래에 있다 보면 너도 이 정도는 부담 가지 않을 정도로 벌걸?”
“저,정말인가요?”
자넷의 말은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개개인 수입만을 따지자면 하얀 고래의 수입을 따라 올 용병은 없으니까.
“크리스 너는 어때?”
“으음… 가,가끔 사 먹을지도?…”
“마음에 들었나 보네. 다음에는 둘이 오자.”
“응!”
내 말에 웃으며 동의했다.
염장을 지르는 우리를 쏘아보는 멜과 자넷의 시선은 무시했다.
우리는 수도의 거리를 구경하며 걸었다.
소화도 시킬 겸 걷자는 자넷의 제안이었다.
분명 수도를 구경하고 싶어 하는 멜을 배려해 준 것이리라.
반대 한 개 없이 만장일치로 산책이 시작되었다.
문명이 낮다고는 하지만, 의외로 볼만한 건 있었다.
곳곳에서 바드가 노래를 불렀고, 이야기꾼이 돈을 걷으며 사람을 모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포장마차 비슷한 역할을 하는 간판 음식점도 있었다.
소화한다는 핑계로 나온 산책이라 구경만 할 뿐, 사 먹는 사람은 없었다.
나 또한 즐길 거리를 찾았다.
중세풍의 마을을 거니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건 둘째치고…
난 지금 미인 세 명과 동시에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분위기가 분홍빛은 아니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그렇게 수도를 구경하길 삼십분가량이 지났을 때.
‘…슬슬 내게도 초인의 감각이란 게 생기기 시작한 모양이네.’
멀리서 이쪽을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갔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남자와 나의 시선이 맞았다.
두 명의 남자다.
허리춤에 찬 칼을 보니 용병, 혹은 경비병인데…
옷 입은 꼴을 보니 용병이 확실하다.
최근 발견된 유적으로 인해 수도에 오는 용병 또한 늘었을 테니, 확률은 무척이나 높았다.
용병.
처음 보는 얼굴.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나랑 크리스와 인연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원작대로라면 수도에서 멜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다면 저들이 보고 있는 사람은 자넷인가?
가능성이 있다.
자넷은 하얀 고래 용병단의 단장으로, 아는 사람에게는 알려진 얼굴이니까.
나는 귀를 기울여 대화 소리를 들어보았다.
확실하게 우리를 특정 해 바라보았던 만큼, 대화 내용이 우리와 관련된 내용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 예상 밖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 에라이 퉷. 누구는 씨발 수도 물가 때문에 노숙해야 하는데, 누구는 여자를 셋이나 끼고 놀아?
- 젠장, 나 방금 쟤랑 눈 마주쳤어.
- 뭐? 착각이겠지.
- …고개 돌렸네. 착각인가?
- 귀신도 아니고 어떻게 여길 봐? 그나저나 칭크(Chinck, 동양인에 대한 멸칭)새끼가 저러는 걸 보면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야.
- 갑옷을 입었는데? 용병 같아.
- 병신아. 무기가 없잖아! 분명 돈 많은 동양인이 서양 구경하며 하렘 차리려고 만든 유람단일걸?
- …좆같네. 진짜.
놈들의 대화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나였다.
귀찮은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가게에 나와서도 ‘고요한 발자국’ 스킬을 유지 시키는 건데.
몇 마디의 대화를 더 하고, 멋대로 화내던 두 명의 용병 중 한명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한다.
나는 재빠르게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의 스텟창을 열었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판단을 마쳤을 때는 놈이 이미 우리의 가까이 와 있었다.
나는 놈의 어깨가 멜의 어깨를 치고 가기 직전에, 그녀의 팔목을 끌어당겨 피하게 했다.
- 와락.
“으아! 차,차,찬영님?”
“…조심하시죠.”
품에 안긴 멜이 나를 올려다보며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에 익숙지 않은 멜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것을 본 용병은 열이 더 받은 것 같았다.
놈의 목적은 내게 망신을 주는 것이었을 텐데, 오히려 제 여자를 지켜준 남자가 되어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