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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26) (126/310)



〈 126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의 기준으로 꽤나 세련된 직원복을 입은 여인이 나의 앞에 접시  개를 두고 간다.
접시는 크리스와 멜, 자넷의 앞 역시 순서대로 놓여 갔다.
멜이 상기 된 얼굴로 호들갑을 피운다.

“와아! 나,나왔어요!”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이 식당 내부에 들어왔을 때부터 은은하게 풍기던 향.
 미각을 돋구는 냄새가  접시 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른 세 명의 동행인이 그러한 것처럼, 나 역시 접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 스윽.

접시에서 올라 온 따뜻한 열기가 얼굴을 데운다.
맛깔스러운 연갈색 빛을 띤 격자 모양의 팬케이크가 김을 내고 있다.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겉면에는 꿀과 설탕나무의 수액으로 만든 시럽이 덮여 있었다.
요철 모양 틀에 찍힌 팬케이크는, 넘치는 시럽이 접시에 흘러 내리지 않게 막아주었다.
보통은 이걸 와플이라고 부른다.


잔잔한 호수 위에 나룻배 하나가 떠다니듯, 위에 놓인 버터 한 조각은 화룡점정이다.
노란빛의 버터는 와플의 열기로 인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저절로 커피 한잔을 시키고 싶어지는 모양새다.


- 꿀꺽…


‘이걸 먹는다면… 살… 찌겠지?’


맛은 있어 보이나…
내면에 존재하는 헬창의 영혼이 이 음식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최근 어마어마하게 많아진 운동량으로 인해 과거처럼 극단적인 식단 관리는 없어졌다.
그러나 이런 설탕과 밀가루가 대부분인 디저트는 여전히 입에 잘 대지 않았다.


“…단장님? 저희가 가는 곳이 식당이라면서요?”

“내게 얻어먹으면서 말이 많네? 그리고 너 빼고  만족하는 중이니까 입 닫아.”

“…”

자넷의 말 그대로였다.
나를 제외한 3명의 여성은, 눈을 빛내며 접시 안의 아름다운 자태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들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면 분명 수십장이고 사진을 찍어대었겠지.
나도 SNS를 할 때는 한창 그랬으니 충분히 안다.

‘휘핑크림이 올려져 있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사실 예전에도 가끔 디저트를 먹기는 했다.
여자랑 놀려면 이런  음식이 널린 가게는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하니 때문이다.
그런데서까지 음식을 가리면…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보다는, 재미없는 사람 취급받는다.

다행히 이 와플은 보기보다 설탕이 많이 안 들어갔을 수 있다.
꿀과 설탕 같은 단맛을 내는 원료가 싸지 않은 세계니까.

- 달그락.

여전히 눈으로만 즐기는 여자 3명을 대신해 먼저 맛을 보기로 했다.
접시의 옆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작게 썰었다.


빈속에 먹는 디저트의 첫 한입.
손가락 한 마디 크기면 충분하다.
시럽에 덮인 와플은 자신의 바삭함을 증명하듯 별로 날카롭지 않은 빵칼에 쉽게 잘려 나갔다.
녹아내리는 버터를 스치듯  스치듯 묻히고, 포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수도의 명물이라고 불릴 만 하네요.”


“큭큭큭. 그치?”


냉동식품과 공장제가 없다는 말은 곧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상당히 맛있었다는 뜻이다.
단맛에 환장하지 않더라도, 이 와플을 먹기 위해 먼 거리를 올 정도의 가치는 있었다.


“마,맛있어? 찬영?”


“차,찬영님? 어때요? 어떠세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유일하게 와플의 맛을 본 나를 향해 크리스와 멜이 물어온다.
나에게만 와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의 접시에는 손대지 않은 와플이 있다.
먹기만 하면 바로 알게 될 텐데도 내게 물어온 것이다.


물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 여사친들과 SNS 맛집을 올 때면 자주 이러는 것을 겪어 봤기 때문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먹어 보면 알잖아’ 같은 무미건조한 대답이 아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들의 기대감을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으음… 겉은 바삭바삭한데, 시럽에 젖어서 전혀 딱딱하지 않고… 딱 좋은 식감? 안쪽은 잘 구워진 팬케이크처럼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워.”

“꿀꺽…”

“그리고 씹을 때마다 반죽 사이에 스며든 달콤한 시럽이 입안을 가득 채워서… 후…”

“으으으!!…”

“한마디로 정말 맛있어. 이건 뜨거울 때 먹어야 해.   식기 전에 빨리 먹어 봐.”

나의 말을 침 삼키며 경청하던 멜과 크리스가 포크를 들었다.
크리스가 이렇게 단 것을 좋아하는  알았다면  데려가 줄 것을 그랬다.
나도 과거에 한 SNS 덕에 디저트 맛집을 나름 알고 있는데.

자넷은 나의 감상을 매우 뿌듯하단 얼굴로 즐기고 있었다.
원래 맛집을 추천  사람은 이렇다.
자신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 음식을 즐기면 즐길수록 본인이 마치 가게의 주인인 것처럼 좋아한다.


“단장님! 잘 먹을게요! …마,마시써!!”

“으음!… 찬영 이거!…”


크리스의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니 저절로 뿌듯한 미소가 나온다.
이건 전부 자넷의 돈이고, 내가 따로 해준 것이 없음에도.

그녀가 와플을 다 먹으면 나의 손대지 않은 와플 일부라도 좀 나눠 줘야겠다.
내 혀와 위는 달콤한 음식에 적응되지 않아서 그런지…
너무 많이 먹게 되면 느글거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연 치유의 덕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억지로 먹어야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멜 너는… 뭔가 보면 볼수록 여성스럽단 말이지? 보통 남자들은 여기 와플을 먹고도 감탄까지 하지는 않거든. 파계승처럼.”

- 갸웃.


나와 멜을 번갈아 가면서 보던 자넷이 살짝 의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열심히 와플을 씹으며 달콤함을 즐기던 멜의 얼굴이 딱 하고 굳었다.

금전 쪽을 제외하고 눈치가 있다 말할 수 없는 자넷 치고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이건 원작에는 없던 지적이다.
같은 남자인 내가 있었기에 반응이 비교 된 것이리라.
수습은 내가 해야 했다.
얼음처럼 굳어 있는 멜이 오해 하나 남기지 않고 해명이 가능할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냥 성격이 중성적인 것이겠죠.”


“아. 맞아. 멜은 외모도 중성적으로 생겼지. 처음에는 여자인 줄 알았다니까?”

- 움찔!

“음… 본인도 주변에 오해 많아서 힘들 텐데, 괜히 상처를 쑤시는 건 좀… 지금 멜의 표정을 보면 심란해하고 있잖아요?”

“엇? 그,그런가?  또 역린 같은  건드린 거야?…”

자넷의 표정에 당황이 감돈다.
그녀도 나의 말로 방금 깨달았겠지만…
어찌 보면 남성에게 여자 같다고 말하는 것은 시비조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전 소설에서 상대를 도발할 때 종종 욕설로 사용하지 않던가?
‘계집애 같은 놈’이라고.


“미안해. 내가 너무 생각 없었네. 혹시 기분 나빴어?”

“앗! 아뇨! 그,그런 건 아니지만…”

멜은 자넷의 사과를 받았다.
그러나 이 화제를 반기지 않는다는 티는 확실하게 났다.
자넷을 포함한 모두가 알아볼 정도로 얼굴에 살짝 곤란함이 섞여 있었으니까.

“다,단장님이 와플을 사주시기로 했으니까 괜찮아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로!”

결국 얻어먹는다는 핑계를 대며 넘어갔다.
멜은 자넷이 정말로 실수를 한 것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사과받기가 양심에 찔렸나 보다.

“가,감사합니다… 찬영님…”


멜이 이쪽을 향해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바람이 새는 소리 같이 작았지만,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화제도 돌릴 겸, 줄곧 궁금해하던 것이나 물어보기로 했다.
나는 시무룩하게 와플을 포크로 쿡쿡 찌르는 자넷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넷 단장님. 하얀 고래 용병단은 왜 하얀 고래 용병단인가요?”

“…응? 여태까지 그게 궁금했어?”


“네. 용병단 내부에 하얀색이라고 할만한 것도, 그렇다고 고래나 바다와 관련된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 혹시 초대 단장님이랑 관련이 있나요?”

“하얀 고래는 물려받은 것이 아니야. 내가 설립한 거지.”


“…단장님이 초대라는 말씀이신가요? 대단하시네요.”

“큭큭. 칼질에 재능이 있었거든.”


자넷이 손안에서 가볍게 빵 칼을 가지고 놀며 말했다.
그녀가 하얀 고래의 설립자라는 정보는 처음 듣는다.
원작 속에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다.
그것은 용병단의 이름이 하얀 고래인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용병단의 단원이라면  이름의 유래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얌전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나와 크리스, 멜을 흩어 본 자넷의 표정은 약간 곤란해 보였다.

“말해주지 못할  없는데… 이 이야기는 뭐 먹으며 할 이야기는  되거든.”


“음… 가벼운 호기심이었을 뿐이니, 말씀하시기 불편하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아니아니아니, 말 못 한다고 돌려 말한  아니야? 진짜로  먹으면서 할 얘기가 못 돼서 그래. 단원 중 몇몇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고.”


나는 자넷이 돌려 말하는 줄 알았다.
그녀의 대답을 ‘남에게 말하기는 꺼려진다’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그러나 정말로 식사 중에 할 이야기가 아니었나 보다.
피식 웃으면서 내 말에 대꾸하는 것을 보면.

“저도 좀 궁금했어요. 철사자랑 하늘 산맥은 그 이름의 유래가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하얀 고래는 떠도는 이야기가 없어서…”

“찬영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좀 궁금하긴 하네?”


멜과 크리스가 포크로 와플을 찍어 먹으며 말했다.
두 쌍의 눈동자에서 달콤함이 주는 행복감에 더해 호기심이 서렸다.

“음… 괜찮겠어? 와플 맛 떨어져도  모른다?”

“어… 호,혹시 심각하게 무섭거나, 잔인한 이야기인가요?…”


“큭큭. 그건 아니야.”


“앗! 그럼 전 괜찮아요!”

“음… 그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멜이 내쉰 안도의 한숨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넷이 말을 고르며 살짝 고민했다.
단원 몇몇이  이야기를 알고는 있다 했지만,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익숙지 않나보다.


“난 항구에서 태어났어.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항구 마을이었지. 어머니는 없었고, 아버지는…”

우물우물.


자넷의 빵칼이 와플을 잘랐다.
내가 자른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조각을 잘라낸 그녀는, 한입에 그것을 물었다.
끊어진 말은 그녀가 눈을 감고 몇 번 씹으며 완전히 삼킨 뒤에야 이어졌다.

“…애매했어. 그걸 과연 아비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고민할 정도로.”

“으음…”


“지금 시대에 가정사가 불행하지 않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고는 하지만… 난  유별났지. 아무튼, 내 아비는 뱃사람이었어. 뱃사람답게 험했고.”


단순히 입이 험했다는 뜻이 아니리라.
어린 시절 맞고 자라는 자넷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도 자넷에게 조금이나마 정이 든 것일까?
약간 불쾌해졌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어느 날. 아비가 타고  배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더군. 그리 멀리 나가지 않던 배인데, 참 신기했지. 폭풍이 불지도 않았거든.”


뒤에 이어진 이야기는 간단했다.
그러나 가볍지는 않았다.
자넷이 무언갈 먹으면서 할만한 이야기가 못 된 다는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며칠 뒤 항구에 판자 몇 가지가 떠밀려 왔단다.
당연히 사람들은 자넷의 아비가 탄 배는 원인 모를 이유로 난파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배에  사람의 장례식까지 마쳤다.
장례식에는 자넷의 아버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자넷은 부친이 죽은 것을 좋아했다.
그는 자넷의 생활을 돕기보다는 자넷이 벌어온 돈을 빼앗는 쪽이었으니까.
자넷은 독립이 가능할 정도로 돈을 벌 능력이 있었다.
아비의 피를 닮은 건지 제 몸을 지킬 수준의 무력 또한 가졌다.


배가 난파당했다는 이야기는 곧 진실로 밝혀졌다.
다시 하루가 지나자…
배의 생존자가 떠밀려 왔기 때문이다.

“킥킥킥. 참 재수도 없지. 하필 그 생존자가 내 아비라니. 안 그래?”

“…”

“들어 봐. 결국 해피 엔딩이니까. 알고 보니 배를 난파시킨 범인이 바로 고래더라고. 말향고래.”

어째선지 고래는 선박을 공격했다.
바다를 멀리 나가지 않던 작은 배는 쉽게 난파당했고, 선원 전원은 바다에 빠졌다.
그리고 자넷의 아비는 유일하게 고래에게 잡아 먹혔다고 한다.
그것이 부친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이야… 정말로 마을 근처에 말향고래가 머리를 박고 죽어 있더라고? 그 남자는 고래가 죽은 걸 눈치채고 위 속에서 기어 나온 거야. 참… 삶이 질겨.”

“그럼… 단장님의 부친께서는 지금 살아 계시는 건가요?”

“아니, 일주일 뒤에 죽었어. 죽은 고래의 저주를 받아 온 몸이 새하얗게 변한 채.”

몸이 새하얗게 변한 것은 죽은 고래의 저주가 아니다.
고래 위산의 영향으로 온 몸이 새하얗게 탈색 된 것이다.
그녀가 말한 말향고래, 즉 향유고래와 내가 아는 고래의 차이점이 없다면 그럴 것이다.
고래에게 마법적인 능력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러나 그런 사실을 그녀가 알 리가 없다.
어린 시절 그녀의 눈에는,
여러 합병증으로 인해 쇠약해져 가는 그녀의 부친은 마치 ‘저주’에 걸린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그래서 하얀 고래인 것이네요.”

“맞아. 나의 원수에게 몸이 하얗게 변해 죽어 가는 저주를 걸어 주어, 내게 자유를 준 고래를 기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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