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왕국은 용병 산업이 굉장히 발전했다.
단순히 용병단의 질만을 따진다면 무려 제국과 비견 될 정도로.
제국이라고 몬스터가 없을 리가 없는데, 이 나라만 특히나 용병 산업이 발전할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왕국은 치안이 좋지 않다.
변방에 있는 작은 마을의 경우에는 굶어 죽는 사람도 많이 나왔다.
수도에 가까이 위치하거나, 영주성이 있었던 마을은 사정이 훨씬 나았겠지만…
대부분의 마을은 배를 곯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내가 빙의한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살던 고향이나, 멜의 고향은 수도에서 그렇게까지 멀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활 수준이 낮은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처음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에 빙의했을 때. 몸 주인의 친구로 보였던 사람은… 별로 풍요롭게 보이지는 않았지.’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용병이 되겠다는 나를 크게 말리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신경 쓰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리라.
이곳에서 농민들의 삶은 대부분이 이러했다.
고된 삶을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약탈자가 되길 선택하는 사람 또한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길에는 몬스터가 출몰하고, 그보다 더 빈번하게 약탈자가 나타난다.
용병 없이 중거리 이상의 상행을 나서는 것은 만용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파산해서 사라지는 상단보다, 약탈당해서 사라지는 상단이 더 많을 지경이니.
우리의 호위를 받는 조그만 상단이 정말 기뻐하는 이유다.
“그런데 생각보다 도적이 안보이네요? 종종 몬스터는 보이긴 했어도…”
멜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마을 밖은 치안이 좋지 않아 위험하다는 소리를 귀에 박히도록 들으며 자란 그녀다.
특히 그녀는 어렸으며, 예쁘기까지 했으니 그 경고는 더욱 강했다.
하지만 멜은 도적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원작이 연중 되기 전까지 그녀가 만날 도적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는 그 원인을 쉽게 짐작 가능했기에 멜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었다.
“네가 도적을 본 적이 없는 것이 이상해?”
“네… 전 사실 마을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도적이 득실거릴 줄 알았거든요. 어른들이 다들 그렇게 말씀하셔서…”
“아무리 배운 게 없는 도적이라고 해도, 진짜 칼밥을 먹는 사람과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오합지졸의 차이 정도는 알겠지.”
놈들이 우리가 하얀 고래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관계없다.
평균의 실력을 갖춘 용병만 해도 머릿수가 같은 도적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 할 테니까.
마나가 있는 세상이기에 그 격차는 훨씬 클 것이다.
제정신으로 50명의 전문 무장 집단에게 덤벼들려고 하는 도적은 없었다.
“그,그런가요?”
“무엇보다… 마차 한 대를 호위 하는 오십여 명의 용병을 상대하는 것과, 마차 네다섯대를 호위 하는 십여 명의 용병을 상대하는 것. 너라면 둘 중 무엇을 노릴래?”
“아…”
우리가 마차를 열 대 넘게 호위를 하고 있다면 눈이 돌아가서 덤벼들 도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성공만 한다면 도적질 같은 위험한 일은 그만두고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고작 마차 한 대 털자고 반백 명의 용병을 상대한다?
인간보다는 고블린과 오크에 가까운 지능을 가졌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걔들은 실제로 종종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억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쉽게 처리했다.
“네가 겪는 호위 임무는 이번이 처음인가?”
“맞아요. 혹시 찬영님은 과거에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하셨나요?”
“그럴 리 없잖아. 나도 용병 일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런데 상당히 용병 일에 대해 잘 아시네요? 마치 베테랑 같아요!”
“베테랑은 무슨… 그냥 상식적인 선 안에서 해석했을 뿐이야. 이 정도는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지 않아?”
“누,누구나 다… 상식, 상식이라…”
상식이 모자란 멜이 충격받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녀가 보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지었다.
멜은 놀리는 맛이 있었다.
‘심심풀이로 말 상대나 되어달라고 한 보람이 있네.’
짐을 내게 맡긴 것에 미안해하던 멜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찾았다.
내가 지쳐있던 멜이 눈에 자꾸 걸렸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녀의 마음이 불편해진 것으로 보였다.
한순간도 내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나름 숨긴다고 힐끗힐끗 쳐다보았지만, 나에겐 그런 그녀의 시선이 전부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요구한 것이 잡담이나 나누잔 것이었다.
크리스가 멜을 남자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장점과 하나의 단점이 존재했다.
장점은 내가 멜과 가까워지더라도 별로 불안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단점은 멜을 남자로 여겼기 때문에 일정 이상 친해지지 않게 벽을 세웠다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찬영은 마음에 든 사람에게 저런 짓궂은 구석이 있거든요. 그냥 멜씨를 놀린 거예요.”
“마,마,마음에 드는…?”
나를 잘 아는 크리스의 말에 멜이 당황해하며 손을 휘저었다.
마음에 들었냐 들지 않았냐, 흑백 논리로만 따진다면 전자가 맞긴 하지만…
오해의 가능성이 많이 있으니 저런 말은 곤란했다.
당장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한 멜도, 얼굴이 약간 붉어졌으니까.
“…토끼 관리는 네가 하고 있지, 멜? 이따 식사 시간에 다 같이 먹이나 주자.”
“앗! 그,그럴까요?”
토끼는 하얀 고래의 입단 시험뿐만이 아니라 은근히 쓸만한 구석이 많았다.
많지는 않지만 나름 비상식량도 되었고, 당장 마을에서 의뢰 대금을 뜯을 때도 유용하게 사용했었다.
그런 토끼의 관리는 멜이 맡고 있었다.
기다리던 점심 식사 시간이 되어 잠깐 이동이 멈추었다.
나와 크리스는 지구로 가 빠르게 식사를 해치운 뒤, 멜이 식사를 마치길 기다려주었다.
그녀는 우리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미안했는지 상당히 허겁지겁 식사하려 했다.
내가 그러다 체하면 업고 가게 만들 속셈이냐고 물으니, 다시 그 속도가 평범히 돌아왔지만.
토끼 자루는 상인의 마차 빈 공간에 실려 있었다.
오전에 한 약속대로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려고 갔다.
토끼들이 잘 먹는다는 풀을 말려 챙겨서.
집토끼 품종이 아닌 완전한 야생 토끼라는 걸까?
이렇게 좁은 자루 안에 빛도 보지 못하고 몇 마리나 담겨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죽을 법도 했지만,
토끼들은 그런 낌새 하나 없이 팔팔하게 살아 있었다.
“으으… 언젠가 죽일 토끼라고 생각되니까 너무 가슴 아파요…”
“지난번에 보니 고블린 목은 망설임 없이 썰어 대던데, 토끼한테는 동정심을 품는 거야?”
“그,그거랑 이거랑은… 토끼는 제가 직접 챙겨주며 정이 들었단 말이에요…”
“너 설마 지난번에 토끼 고기 안 먹은 이유가 그거였어?”
나는 놀란 눈으로 멜을 쳐다보았다.
멜은 내 질문에 소리 내어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이곳이 지구라면 직접 키운 토끼의 고기를 먹는 것은 꺼리는 것이 보통일지 모른다.
하지만 배를 곯는 것이 대부분인 이 세상에서 이 정도로 순진한 인물은 몇 없을 것이다.
그러나 멜은 흔치 않은 단백질 섭취 기회를 날렸다.
원작대로라면 그녀 또한 배를 곯으며 자란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 분명했음에도.
“찬영? 오히려 먹는 게 이상하지 않아? 나도 내 아공간… 큼! 내가 키우고 있는 ‘치킨’은 먹기가 꺼려지던데.”
“그,그렇죠 베넷씨? 제가 이상한 것이 아니죠?”
“아, 네. 저도 제가 키운 토끼라면 입에 못 댈 것 같아요. 남들이 먹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보세요 찬영님! 찬영님의 여,연인분도 동의했다니까요?”
원래 지구에서 자라 온 현대인이자, 이 세계의 생활 수준을 정확히 모르는 크리스는 멜의 생각에 동의했다.
굳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살면서 애완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기에 크리스와 멜의 심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굳이 정 들인 애를 먹을 필요가 없긴 하네.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마을만 간다면 고기쯤은 실컷 먹을 수 있잖아?”
“앗! 그렇죠! 찬영님, 저희에겐 금화가 있었어요! 두 개나!”
“…너 설마 까먹고 있었던 거야?”
“…”
금화를 받고 난 며칠간은 30분 간격으로 품에 있는 돈주머니를 흘리지 않았는지, 금화가 제대로 있는지를 수시로 확인하던 그녀였다.
최근에는 그런 행동이 줄었기에 큰돈을 지닌 것에 익숙해진 줄 알았더니…
그냥 까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멜을 약간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까,까먹은 거 아닌데요오…”
“티 나는 거짓말 하지 마. 그리고 너무 자주 돈주머니를 꺼내지도 말고. 그러다 정말 떨어뜨린다?”
“그,그럴수도 있겠네요. 알겠습니다!”
“너는… 음… …아니다.”
“그렇게 중간에 말을 삼키시면 제 욕을 하려다 만 것 같잖아요! 말은 끝까지 해주세요!…”
“…정말로 듣고 싶어?”
의도적으로 표정을 굳히고 목소리를 내리깐 나의 언행에 멜의 얼굴에도 긴장이 감돈다.
침을 몇 번 삼키고, 짧은 고민을 하던 멜은 결국 고개를 저으며 듣지 못한 나의 말을 듣는 것을 포기했다.
얼굴이 울상으로 된 것은 덤이고.
그 얼굴은 나의 장난이라는 말에 풀어졌다.
멜은 어리숙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 욕을 먹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타인에게 민폐를 끼친다면 몰라도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우리 셋은 토끼에게 먹이를 주며 용병단이 출발할 때까지 잡담을 나누었다.
*
평균적으로 꽤나 높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대부분의 건물이 2층에 불과했지만, 반대로 말해 중시 기준으로 2층 건물이 대부분이란 것은 나름 대단한 일이다.
크지 않은 왕국에 불과 하다고 하더라도 한 나라의 수도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을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시야에 들어오는 4층짜리 건물이다.
2층까지는 석조로 되어있지만 그 위부터는 나무로 되어 있다.
증축을 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저 높은 건물이 우리의 첫 목적지였다.
수도에 있는 용병 길드의 본부다.
“우와…! 수도! 수도에요! 사,사람 엄청 많다!…”
- 휙! 휘익!
멜이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구경했다.
너무 격하게 고개를 돌리는 나머지 그녀의 목이 약간 걱정이 될 정도까지.
그 모습이 마치 놀이동산을 처음 와 본 어린애 같았다.
나쁘게 말하면 촌놈 같았다.
그러나 멜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수도로 오자 문명이 0.5단계는 올라간 것 같다.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여유가 묻어 나왔으니까.
단순히 춥고 더움을 피하기 위함이 아닌, 멋을 부리려는 흔적이 있었다.
오히려 이 거리에 있는 사람 중 옷에 자수 하나 새겨져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 용병단이 유일했다.
“크리스 네 취미가 자수였지? 넌 싸우지 않아도 먹고 살 걱정은 없겠다.”
“돈을 얼마나 받을지는 모르잖아? 그리고 취미는 취미로만 가지고 싶고.”
“하긴… 취미가 일이 되면 완전히 인식이 뒤바뀌지…”
크리스의 말에 공감했다.
단순히 취미가 일이 되는 것이 괴로울 뿐만이 아니라, 취미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니.
- 그럼, 정말 감사했습니다!
- 나중에 상단이 몇십 배로 성장하면 우리에게 정식으로 의뢰를 넣어 달라고?
- 하하하! 그럴 수만 있다면 하얀 고래를 반드시 고용하겠습니다! 당연히 제값을 주고요!
- 좋네. 나쁘지 않은 인연이었어.
- 저희야말로 정말 감사드립니다.
수도에 들어옴으로써 호위 의뢰는 완전히 끝났다.
멀리서 상단과의 거래를 마무리한 자넷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손에는 조그마한 돈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이번 의뢰 보수는 50명이서 나누기도 뭐 할 정도로 낮아. 나중에 무기나 방어구 수리비로 남겨 두자고?”
자넷의 판단에 불만을 가지는 단원은 없었다.
다른 용병이 말하길, 하얀 고래의 부단장이 주기적으로 공적 지출 내역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번 의뢰 대금은 용병단 운영비에 포함되었다.
우리의 목적은 용병 길드에 있었지만, 그 전에 숙소부터 잡아야 했다.
밤까지 미뤘다가 방이 없는 사태가 발생하면 마을 내에서 노숙해야 했으니까.
칼밥을 오래 먹은 사람이 대다수인 용병단은 일의 우선순위를 잘 알았다.
역시 수도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두시간 정도나 남았음에도 방이 전부 찬 여관이 많았다.
물론 수도 내부에 여관 자체가 정말 많았기에 어렵지 않게 방을 구할 수 있었다.
다시 마을 입구 앞, 용병 길드의 문 앞에 모인 우리들은 드디어 길드의 내부로 들어갔다.
나는 곧 이어질 만남에 기대를 했다.
이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그 남자가 있을 것이다.
왕국에서 가장 큰 용병단을 이끄는 단장인 동시에,
용병 길드의 장을 맡고 있는…
불사신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그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