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손에서 금색의 동전 두 개가 굴러다닌다.
크기에 비해 상당히 무거웠다.
금이 많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금화는 나의 손에만 쥐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든 용병의 손에는 금화가 쥐여 있었다.
이번 영지전 의뢰의 보수였다.
배포 좋은 영주가 머릿수당 2골드를 쳐준 것이다.
단장과 부단장은 조금 더 쳐준 것 같고.
나는 100실버가 곧 1골드인 것은 알지만, 정확한 금화의 가치는 모른다.
하지만 이 금화 두 개가 하루 만에 번 것 치고는 정말 많은 금액인 것은 알 수 있었다.
멜의 눈과 입이 쩍 하고 벌어졌기 때문이다.
“으아,으아아아…!”
- 허둥지둥!
양손에 꼭 쥔 금화를 가방 깊숙한 곳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품속에 넣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뻔하게 읽혔다.
품에 보관하자니 소매치기가 걱정되고, 가방에 넣자니 혹시나 짐을 분실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리라.
나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뭐야 멜. 왜 그래?”
“금,금화는 실제로 처음 보는… 앗!”
말을 건 인물이 나라는 것을 확인한 멜의 몸이 굳어졌다.
그 이유 또한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내가 그녀의 남장을 눈치챘다는 암시를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그녀의 비밀을 공식적으로 알게 된 것은 멜의 잘못이 더 컸다.
입단할 때 통찰력이 좋고 아는 것이 많은 것을 내세운 내가 ‘그’ 증거를 보고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잖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멜의 실수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아침.
방에서 짐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나 또한 술기운이 돌아 깜빡 해버렸기 때문이다.
연회에서 먹은 술의 도수는 무척 높았다.
실시간으로는 『자연치유』가 해독하지 못 할 만큼이나.
그렇기에 짐을 찾으러 멜이 자고 있는 방을 찾았다.
그리고 객실에 도착했을 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멜이 목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욕실 특유의 울림이 섞인 노랫소리가 객실 밖에 서 있던 내 귀에 잡아 채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왕 이렇게 기회가 온 것, 멜 몰래 짐을 가져가려고 했다.
목욕이 끝난 후 짐을 찾게 될 멜은 자연스레 이 방이 자신의 방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내가 들어간 타이밍과 멜이 목욕을 끝낸 타이밍이 맞물린 것은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그으…”
“좋은 아침이야. 멜.”
“네에… 좋은 아침입니다아…”
잠깐 이어진 침묵의 시간 동안 침음만을 흘리던 멜은 나의 인사에 겨우 반응했다.
어떻게 나를 대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다.
나는 슬슬 그런 그녀에게 안심을 내려주기로 했다.
이 정도 마음고생이면 어제저녁 나를 고생시킨 벌은 되었을 것이다.
키가 작은 멜을 향해 고개를 숙인 뒤, 목소리를 죽여 속삭이듯 말했다.
“…어째서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모두에게는 비밀로 할게.”
“네,엣…?”
“네가 여자라는 것. …음… …이게 아니라면 설마 여장이 취미인 남자인 거야?…”
“하읏! 그,그건 절대 아니에요…! 저 여자 맞아요!…”
아무리 그래도 ‘사정이 있는 여자’로 여겨지는 것이 ‘성벽이 괴팍한 남자’보다 훨씬 나았나 보다.
목숨을 걸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비밀도 아닌데, 당연한 선택이다.
그녀가 남장을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선 홀몸의 여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위험했기 때문이니까.
특히 멜처럼 얼굴이 예쁘장할수록 위험이 다가올 확률은 커진다.
“그… 비밀로 해주시는 건가요?…”
“남장을 할 정도면 네게도 사연이 있는 것 같아서.”
“어,어어… 그리 사연이라 말할 것까지는 없는데…”
“나는 그 사연을 모르니까. 무엇보다 남이 숨기고 있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는 취미는 없고.”
“…엄청 착하시네요? 아… 수도승이셨죠?”
“지금은 아니야.”
나는 웃으며 멜을 안심시켰다.
타인의 신뢰를 얻기 딱 좋은 부드러운 미소였다.
최근에는 크리스에게 가장 많이 사용한 얼굴이기도 했다.
비밀을 빌미로 돈이라도 뜯어낼까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주인공’의 반감을 사면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니까.
심지어 내 손에 있는 2골드도 사용처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금전을 욕심내며 멜과의 관계를 일그러뜨리는 것은 절대 좋은 판단이 아니다.
“비밀로 할게. 약속해.”
“…”
나는 그녀의 귀에 약간 더 가까이 다가서며 속삭였다.
우리의 주위로 용병 단원이 한 명 지나갔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는 연중할 때까지 멜의 남장이 밝혀지지 않았다.
혹시나 그녀의 비밀이 모두에게 들켜, 나비효과로 인해 원작이 틀어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한…
멜이 여자란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그런데 얼굴이 너무… 가…까운…데요오…”
- 푸욱…
멜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보니 점점 홍조가 진해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 거리는 그녀에게 너무 자극적이었나보다.
아니면 내 생각 이상으로 ‘잘생긴 얼굴’이 여자들에게 큰 효과를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너 뭐 발랐어? 좋은 냄새 난다?”
“아… 모,목욕 할 때 조금…”
“음… 목욕이라… 이거 내가 들어도 되는 얘기인지 모르겠네.”
나는 살짝 어색해하는 얼굴을 만들어 내었다.
목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에는 우리 둘이 그 정도로 친하지는 않았기에.
멜이 깊은 생각 없이 말을 뱉은 것이 확실하다.
그녀는 이미 당황하고 있었으니까.
“하,하으…! 그보다 얼굴을 떨어뜨려 주세요…! 크리스씨가!”
“걘 너 여자인 거 몰라.”
“…연인에게도 비밀로 해주신 건가요?”
“좀 나빠 보여?”
“저,저야 좋지만요…”
- 스윽.
방금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었다.
더이상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면 멜이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난 그럼 가볼게?”
“하으으… 네,네엡…”
다른 용병들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식히고 있는 멜을 뒤로한다.
슬슬 용병단이 마을을 떠날 준비가 끝났기 때문이다.
- 터벅터벅.
이 마을과 그 주변은 일거리가 계속 생기기에는 너무 평화로웠다.
그리고 자넷에게 이번 영지전처럼 새로운 정보가 있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용병단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큰 무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집중된 수도로 향할 것이다.
다행히 아무 대가 없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 영주성 아래의 규모 있는 마을이라서 그럴까?
수도로 향하려는 상인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고작 3명으로 이루어진, 상단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할 정도로 작은 상인이었지만.
“이렇게 싼값에 호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원래 수도로 향하려던 것을 빌미로 깎으려 들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는 거야? 뭐… 나도 소규모 상단에게 이 정도 고용비면 만족이지.”
“저,저희의 지갑 사정을 정확히 꿰뚫고 계시는군요…?”
자넷과 상단 대표는 서로의 거래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너무 작은 상단이기에 큰 값을 지불할 능력은 절대 없었다.
많은 할인을 받았다고 한다.
정상 시세라면 하얀 고래의 단원 전원인 50여 명은커녕, 5명도 고용하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무급으로 가는 것보다 푼돈이라도 버는 것이 좋다.
용병에게 자존심?
있기야 하겠지만 돈귀신이 모인 이 용병단에는 자존심이란 큰 무게를 가지지 못했다.
결국 하얀 고래와 이름 없는 상단은 서로 만족할만한 합의점을 찾아내었다.
“정 그러면 네가 알고 있는 정보라도 좀 풀어봐. 용병질도 정보가 중요하거든.”
“원하신다면 응당 그래야지요!”
믿음직스러운 단장은 정보의 귀함을 알고 있었다.
수도로 향하는 길의 안전을 그 어느 때 보다 확실하게 보장받은 상단 대표는 호의적이었다.
물론 정말 돈이 되는 중요한 정보를 이야기해 주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런 정보는 대부분이 상인에게만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큰 건수를 잡고 움직이는 하얀 고래에게는 굵직한 정보만 해도 충분히 도움이 되리라.
*
짐을 실은 마차 한 대를 용병들이 둘러싸며 걷고 있다.
당연하게도 마차는 말이 끌고 있어 느긋하게 걷는 속도보다는 확실히 빨랐다.
그러나 따라가는 것이 벅차지는 않았다.
이들은 모두 초인이었으니까.
다만, 모든 용병단이 걸어가지는 않았다.
단장인 자넷은 상인에게 정보를 얻는다는 핑계로 마차에 앉아서 편안히 가고 있었다.
슬쩍 마부석을 보니 자넷과 상인이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제국은 이 왕국보다 몇 년을 앞선 마도학 기술을…
- 장난해? 너무 유명한 이야기잖아. 다음.
- 지금 왕실은 반(反) 제국파 귀족들이 완전한 실세를 잡고…
- …우리가 출발한 영지가 영지전에 이긴 이유가 그것 때문인데, 내가 모르겠냐고. 좀 새로운 정보 없어?
- 이건 최근에 얻은 소문입니다. 왕실 연금술사 ‘헤르스토 게버’가 불사의 약을 만들려다 실험 실패로 사망했다는…
- 음… 별로 돈은 안 되겠네.
상인은 정보를 쉽게 풀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돈이 될만한 정보는 사리는 경향이 강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 대부분이 길에 오가면 쉽게 들을 수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자넷은 이런 문답을 많이 겪어 본 것인지,
별로 화내지 않고 꾸준히 상인에게 정보를 캐내었다.
‘하긴… 이곳에서 정보는 정말 돈보다 귀하니까.’
만난 지 몇 분 만에 단숨에 이야기해 주는 것도 우스울 것이다.
적어도 상인의 길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다.
자넷에게라면 몰라도 내게는 도움이 되는 정보들이었다.
원작에서는 이런 사소한 세계관 설정에 대해서는 전혀 서술되지 않았으니까.
상인이 툭툭 던지는 평범한 정보는 내게 귀중했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한쪽 귀를 열어 상인에게서 쏟아지는 이 세계의 정보를 외워두며,
옆에 선 크리스와 잡담을 즐겼다.
어째선지 이쪽을 쳐다보는 멜의 시선이 느껴진다.
크리스에게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안한가?
- 슬쩍.
나는 크리스에게 보이지 않게 멜을 향해 작은 손짓을 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 손짓을 본 멜이 어째선지 황급하게 나로부터 눈을 떼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날 의심한 것이 들킨 게 부끄러웠나 보다.
“찬영?”
“응? 왜 그래 크리스?”
“아까 출발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멜…씨랑 상당히 친해졌네.”
“나쁘게 지낼 것 없잖아? 같은 신입인데.”
어제 이후로 켕기는 것이 좀 생긴 만큼…
나는 화제를 돌리고자 했다.
일단 멜과 나는 이성이 맞고, 좀 꼬아서 말하자면 둘만 아는 비밀을 공유 하고 있는 중이니까.
“그보다 왜 갑자기 멜씨? 어제 연회 때는 편하게 ‘쟤’라고 불렀으면서.”
“…혹시…”
“응?”
“혹시 찬영이 다른 남자를 편하게 부르는 것이 싫을까…봐?”
- 갸웃?
크리스가 귀엽게 고개를 꺾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의도적으로 귀여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귀여운 말을 하며 귀여운 척을 하니, 알면서도 속아줄 수밖에 없었다.
“차,찬영?…”
내가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크리스의 얼굴이 점점 홍조를 띠기 시작한다.
애교 부리는 것이 익숙지 않아 상당히 부끄러웠나 보다.
그 얼굴은…
내가 일부러 대답을 참은 보람이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목적으로 한 크리스의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본 것에 성공했다.
이젠 그녀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 슥. 스윽.
손끝이 간질거리는 것을 참지 않으며 크리스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내가 선호하는 애정 표현이자, 크리스도 내게 길들여져 좋아하게 된 애정 표현이다.
하지만 그녀의 장난 섞인 질문에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다른 남자의 호칭조차 제한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질투심 수준을 넘어선 중증의 집착이었으니까.
- 스윽. 스으윽.
“…다른 남자를 부르는 호칭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어. 그건 네 자유야.”
“그,그래?… 으응… 그렇구나…”
“단… 너무 친해지지는 말고. 나도 절대 편하게는 보지 못하니까.”
“…응! 알겠어!”
- 끄덕!
내가 그녀를 속박하는 뉘양스의 말을 하자, 크리스는 오히려 기뻐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크리스가 나를 향한 집착이 있음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집착 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나에게도 집착 받기를 원했다.
그래도 초기에는 심각하던 그것이, 시간이 흐르며 나아지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지구에 둘이 있을 장소가 생겨나면서.
방금의 언행을 보면 집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또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 심하지 않은 집착은 나쁘지 않게 생각했다.
나 또한 크리스에게 하나도 집착하지 않는다고는 절대 장담 못 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