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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야, 일어나봐. 멜. 멜!”


툭. 툭툭!


“크허… 헝… 큽!”


“…하…”

완벽하게 술에 취해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멜.
내가 어깨를 두드리며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황을 보아하니 한동안은 뻗어 있을 것 같았다.

“…배꼽도 다 드러났네. 참, 남장한 걸 숨길 생각은 있는 건지…”

그녀의 상의가 말려 올라가 하얀 배와 앙증맞은 배꼽이 전부 눈에 들어왔다.
그 꼴을 계속 보지는 못하겠다.
성욕을 느끼기에는 그녀가 침을 흘리며 자는 모습이 좀 가관이었고, 평소의 얼빵하던 언행이 잊혀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가슴이 작은 것도 큰 몫을 했다.

- 펄럭!

나는 이불을 들어 그녀의 몸 위로 던졌다.
더이상 멜의 눈꼴시린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 어쩌지…”

여성이 남성의 방에서 무방비하게 자고 있다면 그건 ‘날 잡아먹어 주세요’란 뜻이나 다름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여자도 그것을 감수하고 남자의 방에 들어 왔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멜이 내 방에 들어온 것은 어디까지나 실수다.
게다가 술에 취해 있기도 했고.
건들면 여러모로 뒷감당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물론 디시빙(Deceiving)으로 얼굴을 바꾸면 들키지는 않겠지만…

‘강간은 진짜 선 넘는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생각으로만, 가능성으로만 여기고 넘기기로 했다.
멜은 인격을 가지고 살아 있는 사람이다.
모두를 구하는 영웅이  생각은 없기에 나의 행동으로 인한 간접적인 타인의 불행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기는 꺼려졌다.

…아니, 사실 명확한 대가가 있다면 한다.
하지만 그녀를 범한다고 해서 얻을 이득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생각나지 않는다.
내게 득이 없다면 ‘개씹새끼’가 아니라 ‘나쁜 새끼’ 정도로 평가될 삶을.
나는 적당한 쓰레기로써 사는 것이 좋았다.

‘비어있는 멜의 방에서 내가 자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멜의 방을 모른다.
다른 방에 용병들이 전부 들어가면 비어있는 하나의 방이 멜의 방이겠지만,
다들 연회를 즐기느라 돌아오려면  걸리리라.

- 끼이익… 쿵!

나는 우선 멜을 내버려  채 복도로 나갔다.
안타깝게도 내가 찾던 시종이나 집사는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복도 속, 수십 개의 방문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 복도에 있는 방 전체를 용병단이 머물도록 되었다.
자리가 부족한 몇 명은 위층의 방을 쓰도록 안내받았는데…
그건 내가 아니라서 모르겠다.


나는 눈을 감고 수십개의 방문 안쪽을 향해 청각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다른 용병들은 밤시중을 수락했으니 방 안에서 여자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멜은 밤시중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인기척이 없는 방이  멜의 방이리라.
하지만…


“…젠장. 그러고 보니 자넷도 밤시중을 거절했지?”

방 안에서 인기척이 나지 않는 방은 두 개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50% 확률에 몸을 맡기기?
그렇지 않으면 멜과 함께 이 방에서 동침?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하… 그냥 크리스 방에서 같이 자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선택이었다.
적어도 50% 확률로 자넷에게 뺨을 맞거나, 아침에 멜과 같은 방에서 나오며 양성애자라는 오명을 얻는 것보다는.


물론 오늘 크리스와 몸을 섞지는 않을 것이다.
피임 도구, 샤워 시설, 메트리스, 침대의 청결 등등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은 이곳에서 굳이 뒹굴 필요는 없을 테니까.
나와 크리스는 원하면 언제든지 지구의 내  안에서  수 있었다.


크리스의 방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방금 배웅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방문을 두들겼다.


*




멜은 오랜만에 개운한 느낌 속에서 잠에 깨어났다.
모포를 두세 겹 깔아도 여전히 딱딱한 흙바닥과 새벽이 되면 온몸이 축축이 젖는 이슬이 아닌,
부드러운 침대가 주는 상쾌한 숙면이었다.

“끄아아함!”

보는 이도 없으니 입이  벌어져라 하품을  멜은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향했다.
귀족이 지내는 저택이라는 걸까?
놀랍게도 이 성에는 방마다 개인 욕실이 딸려 있었다.

멜에게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여자인 것을 숨겨야 하는 그녀로서는 평소 목욕이란 항상 불안과 스트레스를 동반했으니까.
집사에게 지급받은 새 평상복을 대충 침실의 바닥에 벗어 버렸다.
모든 옷을 벗고 팬티만을 입은 채 욕실에 들어갔다.

- 콸콸콸!

수도꼭지를 돌리자 찬물이 아닌 김이 나는 물이 욕조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하던 멜은 옆에 놓인 조그만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투명하면서도 노란빛을 띄는 액체가 찰랑거렸다.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어제저녁은 급하게 씻느라  봤나?’

- 킁킁!

“와아!”

호기심으로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은 멜은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봄날의 만개한 꽃처럼 진한 향이 병의 입구로부터 욕실을 채운다.
그리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더라도, 돈 많은 사람이 몸에 바른다는 향기 나는 오일이리라.


개인 욕실, 뜨거운 물에 이어 미용품까지.
사치스러웠다.
분명 멜 인생에  번 없을 귀한 경험이 틀림없었다.
신나게 지금을 즐기자고 마음을 먹은 멜은 발끝을 시작으로 몸을 욕탕에 담구었다.

풍덩…


“으아… 하우으…”

노곤하게 몸이 풀리는 기분에 저절로 신음이 나온다.
그녀가 아는 유일한 노래가 입을 타고 나왔다.

- 흥얼흥얼!


예전 멜의 마을에 찾아온 바드가 알려준 노래였다.
그녀는 자신이 노래를  외울 때까지 바드를 닦달해 몇 번이고 불러주길 요구했었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다.
멜은 흥얼거리는 수준에서 끝내지 않고 꽤나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옆방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목욕이 전부 끝난 후.
멜은 기대를 가지고 병의 뚜껑을 열었다.
오일을  방울만 떨어뜨린 수건에 몸이나 머리를 쓸어내리며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사용법이었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멜은 손바닥에 오일을 떨어뜨리고선 온몸에 치덕치덕 발랐다.

“어… 이거 한 병이 일회분이겠지?”

결국 멜은 향기에 파묻히다시피 한 뒤에야 오일의 사용을 멈추었다.
그녀는 오일을 아껴서 반병만 쓴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느긋하게 아침 목욕을 즐긴 멜은 가져온 남성용 팬티만을 입었다.
 속옷이 아닌 목욕 전에 입던 속옷이었지만, 옷을 자주 빨 수 없는 용병은 감수해야만 했다.


브래지어는 하지 않았다.
불편한 것은 둘째 치고, 욕실에 놓인 목욕 가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운을 가볍게 걸친 멜은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들어와 있는 박찬영을 마주쳤다.

“으아악!!”


- 휘익!

앞섬을 전혀 메지 않은 목욕 가운을 끌어모아 몸을 가렸다.
설마 보였나?

‘제,제대로  봤겠지?…’

멜은 남장하기 위해 압박 붕대를 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도 말하기 안타까웠지만…
멜의 가슴은 굳이 속옷을 필요로 하지 않는 크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브래지어까지 하지 않으면  수 없는 무언가에게 지는 것 같아 억지로 하고 다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가슴 쪽이 약간 보였더라도 여자인 것을 바로 눈치 채이지는 않았으리라.
그녀의 가슴은 여성성을 명백하게 드러내지 ‘못’했으니까.
멜은 이러한 희망 섞인 기대를 했다.


“찬영님이 어째서 제 방에! 노크도 없이?…”


“…노래 잘 부르더라?”


“드,드,들렸어요?!”


흥에 겨워 신나게 부른 노랫소리가 타인에게 들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멜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남자에게 가슴을 내보였다는 사실도 커다란 몫을 했고.


동시에 멜은 살짝 안도했다.
찬영의 표정이 무언가 눈치를 챈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기억  나?”

“예?… 기억이요?”


“여기 네 방이 아니라 내 방이야.”

“네에?…”

멜이 찬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짝 헤매고 있을 때.
그가 움직여서 방에 놓인 가방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멜은 그제야 찬영이 이곳에  이유를 깨달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저 짐은 찬영의 짐일 테니까.

- 스윽.

가방은 겉보기에 멜 자신이 메고 다니는 가방과 같았다.
용병단에서 주는 짐이 담긴 가방은 모두 같은 모양이니, 중요한 것은 가방의 내용물이었다.


찬영이 가방의 입구를 열려고 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짐인 것을 확인시켜주려는 것이었다.
멜은 그것을 보고 다급하게 내뱉었다.


“자,잠깐만요!”


“응?”


“제가… 제가 열어 볼게요!”

“네가? 뭐 상관없지. 자.”


멜은 살짝 안도하면서 가방을 건네어 받았다.
찬영은 멜에게 이 가방은 자신의 가방이라는 듯이 말했지만…
만약 멜의 가방이라면 문제가 된다.

‘호,혹시나 그걸 봐버린다면…’

그녀의 짐 깊숙한 곳에는 어쩔 수 없는 여성용품이 있으니까.
멜 또한 다른 여성과 마찬가지로 한 달을 주기로 마법은 찾아왔다.


- 부스럭부스럭.


“…정말 제 짐이 아니네요?”


“어제 너 술에 취해서 방을 잘못 찾았어. 내 방에서 자고 있더라.”


“…네?”


들려온 말은 멜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단순히 술로 인한 실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녀와 찬영은 같은 침대에서 잤다는 말이 되었으니까.

물론 멜을 남자로 알고 있는 찬영이 그녀에게 손대었을 리가 없다는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심리적인 문제였다.
멜 또한 용병단에 들어오며 단원 여럿과 여관의 같은 방에서 잔 적은 있었지만…
남녀 둘이서 합방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 같이 자는 상황과는 명백히 구분되어 다가왔다.

“설마…! 설마…!”

“잠깐, 무슨 생각 하는지 알만한데…  이 방에서 안 잤다? 내가 일부러 남자랑 같은 침대에서 자겠어?”


“그,그럼 찬영님은 어디서?…”


“난 당연히 크리스랑 같이 잤지. 내 연인이잖아.”

“아…”


그제서야 멜은 안도했다.
당황이 가시는 것이 느껴진다.


‘으앗? 자,잠깐… 나 방금…’

복잡하던 머릿속이 차분해지자, 자신의 작은 실수를 깨달았다.
멜은 급하게 찬영을 향해 해명했다.

“제,제가 찬영님이랑 같이 자기 싫어하는 이유는 그냥 동성애자로 오해받기 싫어서…!”

평범한 남자라도 남자와 같이 자기는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냥 투덜댈 뿐이지, 질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멜은  배나 더 경계 어린 반응을 해버렸다.
마치 남자와 같은 침대를 쓰는 것을 경계하는 여자처럼.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눈치를 챌 수 있다.
그것이 멜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 피식.


찬영은 멜의 필사적인 해명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웃음으로 넘겼다.
그 모습에서 불안을 느낀 멜은, 화제를 돌리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고 보니 찬영님, 언제 제게 말을 놓으셨죠?”

“어제저녁에  마시면서 놓았잖아. 혹시 불편해?”

“아뇨, 그건 아닌데요…”

“그래서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거야? 여기 내 방이라니까?”

“아,앗! 정말 죄송합니다! 당장 비켜드릴게요!”

방을 빼앗은 것으로 모자라, 노크도 없이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는 오해를 하는 등…
멜은 찬영에게 너무 많은 민폐를 끼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사과는 나중에 시간을 들여서 하면 된다.
일단은 더이상 민폐 끼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멜이 허둥지둥 방을 나서려는 그때.

턱.


작은 어깨가 찬영의 손에 붙잡혔다.

“너 설마 그 차림으로 나가게?”


“아!…”

찬영의 지적에 멜은 자신의 옷차림을 깨달았다.
아래 속옷만을 입은 채 가운을 두른 것이 끝인 남에게 보여주기에 부끄러운 복장을.


“가,감사… 옷 챙겨 갈게요!… 아,아니! 욕실에서 입고 갈게요!”

멜은 욕실 입구에 널브러진 자신의 옷가지들을 챙기려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몸이 덜컥 굳어 버리고 말았다.


“…”


널브러진 옷가지들은 집사장에게 지급받은 것으로 전부 남성용 옷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옷가지가 아니었다.

욕실의  앞에 그녀의 브래지어가 떨어져 있었다.
불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필 떨어져 있는 위치가, 찬영이  있는 각도 상 도저히 시야에 안 들어올 수 없는 위치였다.

“뭐해?  입고 나와.”

- …끄덕.

굳어진 몸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욕실을 가리키며 하는 찬영의 말이었다.
멜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운을 벗고 옷을 전부 입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못 봤나?… 하,하지만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 혹시 엄청난 행운으로?…’


정말로   것인지, 아니면 못 본 척을 하는 것인지 판단이 안 되었다.
멜은 사람의 표정을 읽는 것에 재능이 없었다.
사실 있다고 하더라도, 찬영의 표정을 읽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그럼…  가보겠습니다…”


- 꾸벅…

멜의 목소리는 기어가는 듯했다.
찬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밖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객실의 문이 닫히기 직전,
뒤에서부터 들려온 말에 다시 한번 몸이 굳어져 버렸다.


“좀 더 신경 써. 방금처럼 실수 하지 말고.”


“읍!…”


- 끼익… 쿵!


멜은 문이 닫혔음에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방문을 두드리며 방금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그녀는 10초가량이 지나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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