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나의 옆에 앉은 크리스가 살짝 걱정스러운 눈으로 본다.
그녀는 내가 진짜 수도승이 아닌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향해 살짝 눈짓하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었다.
‘거짓으로 지어내며 식전 기도를 드리는 건 너무 위험해. 내 신앙 지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짓이니까. 그렇다면… 하지 않겠다고 할 수밖에.’
늙은 집사장에게 성직자라고 거짓말을 할 때,
분명 나는 핑곗거리를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을 납득시키기 위한 말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도 제대로 설득을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다.
다들 내가 입을 여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이들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앓는 소리만 이어 했지만…
사실 설득 시킬 자신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발리에르의 승리를 축하드리지만, 축사를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음? 어째선가?”
“지금 저는 일시적으로 성직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성직을… 내려놓아?”
내 말에 나를 바라보던 영주의 눈이 살짝 커진다.
영주 주위에 서 있던 기사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앙이란 사들인 물건을 되팔듯 쉽게 물릴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결론을 앞에 세워두는 두괄식 대화체를 사용하게 된다면, 이어질 내 말에 신경을 집중시킬 수 있다.
허나 이들을 제대로 납득시키지 못하는 순간 자칫하면 배교자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으리라.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납득 시킬 자신이 있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영주와 시선을 맞추었다.
오명을 피하기 위해선 스스로를 떳떳하게 여기는 언행은 필수적이었다.
표정이 흔들리지 않게 신경을 기울이며, 내게 주의를 집중한 오십여명의 청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예. 어느 날과 같이, 새벽 기도를 드릴 때. 한 가지 의문이 들더군요. ‘내가 살아오며 본 세상은 좁디좁은 수도원 한곳 뿐인데, 과연 내가 공부 하는 모든 것이 만인에게 해당 될까?’라는 뿌리 깊은 질문이요.”
“흐음… 교리를 의심하다니… 그건…”
“맞습니다. 흔히들 심마(心魔)가 찾아왔다고 하죠. 살아오며 처음 마주한 벽이었습니다.”
“심마…!!”
나를 향한 의문 어린 시선이 확 뒤바뀌듯 변했다.
좋지 않은 일을 당한, 안타까운 사람을 보는 시선으로.
이들 또한 ‘심마’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력하는 기사들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심마라는 벽.
그것은 가진 무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찾아올 확률이 높아져 갔다.
벽을 넘는 방법은 개개인이 모두 달랐다.
더욱더 고된 수련으로 심마를 잊어버리는 기사도 있었고,
금식과 명상을 반복해서 스스로를 고행으로 몰아넣는 기사도 있었으며,
세상을 떠돌며 견문을 넓히는 기사도 있었다.
바로 나처럼.
기사에게 찾아오는 심마는 일정 경지에 닿아야 찾아온다.
당연하지만 심마를 넘지 못하고 주저앉는 기사가 대다수였다.
그 순간이 바로 성장의 끝이다.
더는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갈 일만 남게 된다.
영주와 용병단, 갑옷을 입은 기사까지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는 이유다.
넘을 확률 보다, 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을 테니까.
‘이들이 심마라는 키워드를 알고 있으니 그에 맞춰서 적당히 각색하면 되겠지.’
당연하지만 실제로 성직자들 역시 심마를 겪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반박하지 못한다.
수도자인 내가 나서서 심마를 겪고 있다는데, 어떻게 반박 할 수 있겠는가?
본인들이 신앙에 대해 깊은 연구 하여 심마가 찾아올 정도로 높은 경지에 다다른 성직자도 아닌데.
“그렇기에 더더욱 이 벽을 넘을 필요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있던 수도원은 수도자가 속세에 얽히는 것을 금했죠.”
“그래서 벽을 넘기 위해 잠시 환속을 했다? 허…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꽤 파격적인 판단이군?”
“이 벽만 넘게 된다면 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 할 테니까요.”
“그렇겠지. 애초에 심마란 그런 놈이니…”
영주가 눈을 감고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게 공감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납득하네? 좀 더 입을 털어야 할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이 가문의 이름이 붙은 검술과 심법이 존재하고 있다.
기사 가문이라기에 이곳은 너무 변방이고, 기사의 수도 많지 않지만…
최소한 기사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가문이란 뜻이겠지.
심마의 고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해하겠네. 심마를 물리기 위해 칼을 손에 놓고 명상하는 기사에게, 검술 시연을 보여달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건 무척 실례가 되는 일이겠지.”
“감사합니다. 이리 선뜻 이해해 주시다니…”
“무얼. 자네가 심마를 무사히 넘을 수 있기를 기도 해주겠네.”
나는 영주의 덕담에 다시 한번 감사의 대답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비굴해 보이지는 않고, 예의 있어 보일 정도로 조절해서.
이것으로 작은 헤프닝은 무사히 넘어갔다.
다시 한번 이어진 영주의 짧은 건배사를 신호로 가라앉은 공기가 전환 되었다.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됐다.
- 두런두런.
연회장 내부에 있는 기사와 영주를 의식한 탓일까?
용병들은 몸가짐을 조심히 하며 음식과 술을 즐겼다.
모두들 심마를 겪는 나를 배려하고 있는 것인지, 이 화제가 연회 중에 다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진지하고 안타까운 나의 이야기는 연회 중 할만한 것이 못 되었기도 했고.
나 역시 연회에 가담하며 술잔을 들어 술을 목으로 넘겼다.
물론 꽤 좋은 술을 두세 번 연속으로 먹어도 음주의 교양을 깨우치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도수가 꽤 된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다.
잔이 빌 때마다 여시종이 눈치 빠르게 다가와 술을 채워 주었다.
“채워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앗. 제 일인걸요. 일일이 감사를 하실 필요는…”
“그러더라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지요.”
나는 술을 따르는 여시종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시종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내 옆에서 쏘아보는 크리스의 시선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읏! 술, 따라드리겠습니다!”
- 쪼르르륵… 후다닥!
술을 따른 후 바쁜 척 도망치는 여시종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는 내 눈을 피하고 있는 크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크리스? 설마 저 여시종에게도 그 ‘감’이 느껴진 거야?”
“그건 아니지만…”
“음… 나였어도 널 얼굴 붉힌 채 쳐다보는 남자를 고운 눈으로 보진 못할 것 같다.”
“…그렇지?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내 ‘감’이란 것, 믿을 것이 못 되는 것 같아.”
“어? 갑자기 왜?”
“그야, 남자한테도 느껴지는걸.”
“뭐?… 나,남자?”
- 속닥속닥…
“으응… 이상하지? 쟤한테도 감이 오더라고.”
크리스의 말에 크게 당황하고 있을 때, 그녀는 티 나지 않게 손가락으로 우리 자리의 바로 옆을 가리켰다.
내 시선이 급하게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간다.
남자와 엮인다니? 죽어도 싫었다.
그리고…
크리스의 손끝에 멜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멜은 신입답게 가장 구석인 이곳에서 나와 크리스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
“찬영이 남자와 만난다니, 그것만큼 웃기는 농담도 없잖아? 내 감, 완전 꽝이야.”
“…그러네.”
저번 환영회 때도 느꼈지만, 멜은 별로 술에 익숙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양손에 든 술잔 속 술을 빤히 바라보며 그 냄새를 맡는 것에 집중하느라 자신이 화제에 오른 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크리스는 모르고 있지만, 그녀는 여자다.
그리고 멜에게 그 ‘감’이 느껴졌다면…
…우선, 나는 떳떳했다.
멜과 나 사이에 의심을 살만한 헤프닝이 전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멜은 그녀가 남장을 선택한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갈 만큼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할 만한 이유는 못 되었다.
‘…뭔 일이 생기면 그때 결정하자…’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도망치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상석 바로 밑에 앉은 자넷에게로.
자넷은 유일하게 영주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다.
성직자로서 대화한 나를 제외 하고는 귀족의 격에 맞는 인물이 자넷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유명한 용병단 단장이었기에 귀족과 단독으로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 …했던 의뢰도 있었지요.
- 역시 하얀 고래! 무용담이 한둘쯤은 있을 줄 알았다니까!
- 과찬이십니다.
- 흐음… 그나저나 너무 오래 있었군. 이만 들어가 보겠네. 과식과 과음은 자제하는 중이라서.
- 전혀 아닙니다. 영주님께서는 연회의 주인이신걸요. 그럼 편안한 밤 되시기를.
- 편안히 즐기게.
자넷과 영주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둘의 형식적인 대화는 영주가 기사를 이끌고 연회장을 나가면서 마무리되었다.
‘하긴. 귀족이 제정신으로 용병과의 대화나 연회를 즐기겠어?’
그냥 관심 좀 받은 것으로 만족했으리라.
영주와 기사가 회장을 떠나가자 단원들은 본격적으로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시종이 술을 따르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 왁자지껄!
연회장은 금세 소란으로 가득 찼다.
나와 크리스 역시 편안히 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열린 마음으로 먹는 음식은 꽤나 맛있었다.
MSG에서 오는 감칠맛은 부족 했다.
하지만 원재료의 맛을 극한으로 살린 풍성함은 존재했다.
몸이 바뀌기 전, 몸매 관리를 위해 나트륨 섭취를 줄여서 먹던 내게는 딱 취향의 음식이었다.
- 쪼르르륵…
나는 술을 마시길 그만두었지만, 크리스와 멜은 아니었다.
둘은 간간이 술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너 진짜 술 잘 먹는다…”
“어?… 호,혹시 나 나이 들어 보여?”
“아니. 전혀. 너무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셔야 한다?”
“그,그건 당연하지… 난 조절할 줄 알아!”
크리스의 손에 들렸던 술잔이 다시 식탁에 내려놓아 진다.
그녀의 얼굴은 아직까지 전혀 취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발음도 명확했고.
‘설마 『자애』의 정신 공격 저항이 술에 취하는 것도 막아 주나?…’
음주와 정신력에 대한 관계는 정확히 아는 것이 없다.
그냥 짐작만 할 뿐이다.
단순히 크리스가 술에 강한 체질인 것일 수도 있으니.
크리스는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와 같은 속도로 술을 마시던 멜은 취했다.
“으으… 어지러워…”
“…배 채웠으면 그냥 들어가서 자. 괜히 술 때문에 실수하지 말고.”
“그,그럴까요?… 우와…! 눈앞이 핑핑 돌아요!”
- 드르륵. 턱!
나의 조언에 멜이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균형 감각을 잃은 멜은 일어남과 동시에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런 그녀의 팔을 잡아 쓰러지는 것을 막았다.
“감사함니다아!”
“길 가다가 넘어지지 않을 수 있지? 알아서 가라?”
“네엡!”
- 터벅! 터벅!
다행히 일어날 때만 어지러움을 크게 느낀 것인지,
연회장을 나서는 멜의 발걸음은 많이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은 비틀거렸다.
“괜찮겠지?”
“뭐 어때? 내비 둬. 남자잖아? 바닥에 쓰러지면 지나가던 시종이 모포라도 덮어 주겠지.”
“…모르겠다.”
그녀를 신경 쓰기에는 눈앞의 음식들이 정말 내 취향이었다.
간만에 맛보는 담백한 음식이었다.
소스를 과일과 향신료만을 사용해 맛을 살린 산듯한 요리들.
‘…오랜만에 먹으니 정말 괜찮네.’
최근 내 주식이 기름지고, 짜고, 자극적인 것들로 완전히 변한 이유는…
지구의 음식에 맛 들인 안젤리와 크리스 때문이었다.
“여기 음식은 조금 싱거워. 으음… 난 찬영이 해주는 것이 더 맛있다.”
“그렇게 칭찬만 하면 더 맛있는 것 해줘 버린다?”
“…칭찬 더 해달라고 돌려 말하는 거야?”
“정확해.”
“푸핫!”
내 농담에 크리스가 즐거워한다.
꽤나 맛있고 즐거운 밤이었다.
*
나와 크리스는 연회 중간에 빠져나왔다.
용병들은 한참을 먹고 마실 기세였기에.
우리 둘이 술을 엄청나게 즐기는 것도 아니고, 끊이지 않고 대화할 정도로 친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가 방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나 역시 내 방을 찾아갔다.
그리고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난 분명히 밤 시중을 거절하지 않았나?…”
내 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밤이 되어서 강화된 청각에는 분명히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 왔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아도 내가 목욕을 하고 나온 나의 방이 맞았다.
‘괜히 밤 시중을 받았다가 크리스의 귀에 들어가면… 음… 안에 있는 사람을 돌려보내야겠네.’
- 끼익… 쿵.
해답은 간단했다.
나의 의사를 전달받지 못하고 밤 시중을 들러 온 여자를 돌려보내면 된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고,
“아… 진짜… 이 주정뱅이가…”
내 침대에서 대짜로 뻗어 자고 있는 멜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