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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16) (116/310)



〈 116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거대한 성문은 기사로 보이는 이가 지키고 있었다.
집사장처럼 노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젊어 보이지는 않았다.
노련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의 기사였다.

그런 기사의 옆에는 살짝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붙어 있었다.
저걸 보통 종자라고 했던가?

“여기 있습니다.”

기사는  귀족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에게 존대해야만 했다.

자넷의 품에서 용병단을 증명하는 양피지가 기사에게 건네 진다.
그 밖에도 이번 영지전과 관련된 계약서 역시 함께 제출되었다.


- 스윽. 슥.

진위를 가리는 아티팩트로 하는 검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두세 번 반복되어 검사 되었다.
덕분에 마을을 입장할 때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검사가 끝나고도 개개인의 신분증 검사까지 했다.

“찬영 박. 하얀 고래 용병단 소속.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 맞군.”

“감사합니다.”

- 스윽.

도로 건네받은 용병패를 품에 넣으며 말했다.
다행히 크리스 역시 무탈하게 검사를 통과했다.
나는 다른 용병을 검사하기 위해 멀어지는 기사의 등을 향해 상태창을 띄웠다.


띠링!

=
[이름] 루고 볼레어
[직업] 기사
[힘] 48 [민첩] 45
[체력] 48  [지능] 9
[기교] 43  [매력] 21
[마나] 377

[특성] -
=


평생을 검술 수련에 바친 기사의 스텟은 절대 범상치 않았다.
무려 힘과 체력 스텟이 50 가까이 되었으니까.

‘절대 맞붙으면 안 되겠네…’

해가 하늘에 떠 버프를 최대로 받는 내 스텟보다 10가량 높았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 남자와 ‘정직하게’ 싸우게 된다면 이길 확률보다 질 확률이 더 높으리라.

중년의 기사 루고 볼레어는 테라포밍에서 7년간 단련한 크리스보다 4배는 훌쩍 넘는 시간을 단련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스텟은 충분히 납득  수 있었다.

띠링!


그의 스킬 창을 열어보니 예상대로 스킬이 존재했다.
처음 보는 종류의 스킬이.


‘발리에르가문 기사 마나 심법 Lv 5… 발리에르가문 기사 검술 Lv 6?’

다른 사람이 가진 제대로  검술과 심법은 처음이었다.
용병들이 가진 스킬은 죄다 ‘감으로 익힌’, ‘눈으로 보고 배운’ 같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으니까.

정말 믿기지 않지만…
시스템의 기준으로 Lv 5가 이류라고 했으니,  기사는 50에 가까운 스텟으로도 이류 수준일 것이다.

…수도에 있는 기사도 아니고,
작은 영지의 몇 없는 기사  한 명이니 아니라고만은 할  없나?

“검사는 끝났다! 입성을 허가한다!”

“그,그럼 무기를 제게 맡겨주세요.”


입성 허가가 떨어지자 드디어 종자가 나서서 우리의 무기를 받아 가기 시작했다.
냉병기가 없는 나를 제외한 모든 용병들의 무기가 종자의 손에 맡겨진다.
크리스 역시 허리춤에 단 도축용 단검을 포함한 무기를 제출했다.


간단한 신체검사를 하며, 모두에게 숨긴 무기가 없음이 확인되고  뒤.
드디어 성문의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부 안내는 역시 늙은 집사장이 해주었다.

저벅저벅.

외벽보다 한층 더 두텁고 단단해 보이는 성의 내벽을 지나자,  웅장해 보이는 성의 안채가 우릴 반겼다.
멜은 성의 거대함에 눈길을 빼앗겼다.
물론 100층을 넘나드는 마천루에 익숙한 나와 크리스에겐 특별한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장비보다는 인간의 손길이 더 많이 들어간 건물이 주는 독특한 매력은 확실히 존재했다.

전투가 벌어진 평야에서 마을까지는  시간을 걸어야 했다.
덕분에 지금 시간은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세계의 생활 습관을 생각한다면 이미 저녁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선 안내받은 곳은 만찬이 열리는 회장이 아니었다.
늙은 집사는 용병들을 먼저 씻기고, 준비해둔 옷으로 갈아입기를 권유했다.
노숙을  먹듯이 하는 용병들의 청결은 좋게 말해도 깨끗하다고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각 배정받으신 방에 있는 개인 욕탕을 쓰시면 됩니다. 인당 한 명씩 목욕 시중이 붙을 것인데, 혹시 거절하실 분이 있으신가요?”


“목욕 시중은 남자가 합니까?”


“아뇨. 죄송합니다만… 목욕 시중 교육을 받은 고용인은 전부 여자밖에 없어서…”

“뭐, 그럼 전 상관없습니다.”


남자에게 알몸을 보이기 불편했는지, 시중을 드는 시종의 성별을 확인한 자넷이 집사장에게 대답했다.
자넷을 제외하고도 시종이 여자라는 것에 기뻐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와 크리스를 제외한 대다수의 용병 단원이 그러했다.


그런 용병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감지한 집사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크흠. 곧 있을 만찬을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너무 오랜 시간 목욕하는 것은…”

즉, 시종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다.
그 말에 단원들이 흥이 식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 얼굴은 곧 이어진 집사장의 말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물론 하얀 고래를 섭섭하게 대접하겠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만찬이 끝난 뒤에 준비해 두었으니 부디… 식사가 끝날  즈음 개인 방안에 대기를 하도록 명령해 놓았습니다.”


- 휘익!
- 그렇지!
- 마음에 들어!!

“그럼 목욕 시중을 거절하신 분은 없는 거로 알고…”

“저,저요!  괜찮아요!”


목욕 시중은 단 세 명만이 거절했다.
나와 크리스, 남장한 것을 들키면 안 되는 멜이었다.


그리고 우리 셋은 밤 시중 역시 거절했다.
이건 자넷까지 포함해서.


“큭큭큭…  이 애송이 자식.  아직 여자 좋은 줄 모르는구나?”
“설마  아직도 경험 없냐?”
“뭐?! 명색이 용병인데 경험이 없다고? 그럴 리가!”

“…”

멜은 얼굴을 붉힌 채 용병들의 음담패설에 대답하지 못했다.
나와 크리스는 서로가 연인이기에 시중을 거절하더라도 이상치 않았지만,
그들이 남자로 알고 있는 멜은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동정을 버리지 못한 남자로 보였기에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건 자넷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슬슬 웃으면서 멜을 놀리기 시작했다.


“킥킥! 고향에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다던가?”


“크흐흐! 단장님, 제가 봤을 때 마을에 남겨진 약혼자는 진작에 멜을 잊었을 겁니다.”
“혹시 알아? 지고지순하게 기다릴지!”
“사실 멜의 약혼자는 지금쯤 옆집 한스와 물레방앗간에서…”
“푸하하핫!! 미친놈!”
“웬만한 여자들도 네 나이면 처녀 딱지를 떼는… 아악!”

- 빠악!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아으… 네?… 넵…”

용병들의 소란은 갑작스럽게 자넷에 의해 제압되었다.
뒤통수를 맞은 용병은 억울한 듯이 자넷을 돌아보다가, 그녀의 살벌한 눈을 보고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뭐야? 방금까지만 해도 자기도 신나서 놀렸으면서…’

어쨌든 드디어 만찬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잠자코 우리를 기다리던 집사장이 안내를 다시 시작한다.
우리는 각자의 방 안에서 몸을 씻고,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원단이 좋아 보이는 옷은 아니었다.
그냥  옷 특유의 깔끔함만이 존재했다.

“그럼… 다들 준비가 되신 것 같으니 회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저벅저벅.


어쩐지 자넷이 기분이 나빠 보였기에, 눈치 없이 떠드는 단원은 없었다.
우리는 수십 개의 발소리만을 남긴  회장으로 이동했다.

 앞에서 아주 기초적인 예법을 집사장에게 들었다.
성 밖에서 한 자넷의 말처럼 이들은 우리에게 예법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똑똑똑!


“하얀 고래 용병단이 도착했습니다.”

“…입장하시오.”


- 끼익… 쿵!

안쪽에 갑옷을 입고 무장한 기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의 신분증을 검사했던 남자와 다른 사람이었다.
회장의 벽에 붙은 기사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래도 용병인 우리와 영주를 밀실에 두고 볼 수는 없었나 보네.’

나는 좋았다.
기사라는 직책의 스테이터스와 스킬 레벨 평균을  더 정확하게 측정 가능했으니까.

새로 보는 특성이나 스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심법과 검술은 ‘발리에르 가문’으로 공통된 것을 익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영지 기사로 키워지며 받게 되는 영주가 가진 비전인가보다.

스윽.


주변을 둘러보아도 회장에는 영주로 보이는 이는 없었다.
당연하다.
원래 고위직 사람들은 나중에 입장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지구와 다른 세상이지만, 귀족 역시 상류층은 맞았기에 서로 생각하는 수준이 비슷하지 않을까 예상되었다.

“이야… 냄새 봐라…”
“세상에, 기름 흐르는 것 봐…”
“예술이다… 진짜 다른 게 아니라 이게 예술이지…”
“꿀꺽…”


거대하고 길쭉한 식탁에 가득 채워진 음식들은 목욕 직후의 배가 꺼진 우리를 유혹 했다.
하지만 먹는 것을 고사하고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아직 영주가 등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석을 비운 채 각자의 의자 곁에 서서 영주를 기다렸다.
달아오른 단원들의 표정을 보니 조금이라도  빠르게 영주가 도착하길 기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1분만 더 뜸을 들이면 속으로 영주 욕을 가득할 것이 분명하다.

“발리에르 영지의 주인이시자, 푸른 피가 흐르는 반(反) 제국 파벌의 떠오르는 신성. 티론 테오도르  발리에르 백작님이 입장하십니다!”

- 끼이익!


짝짝짝짝!!

기사가 양쪽에서 문을 크게 열어주며 영주의 입장을 반긴다.
우리 조금이라도 영주의 발걸음이 빨라지기를 재촉하는 마음을 담아 열심히 박수를 쳐대었다.
물론 박수는 집사장이 미리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역효과를   같다.
영주가 우렁찬 박수를 조금이라도  즐기기 위해 발걸음을 늦췄으니까.

- 짝짝짝짝!!

의외로 영주는 뚱뚱하지 않았다.
적당히 근육이 들어찬 몸에, 키는 작지도 크지도 않았으며, ‘푸른 피’라고 자칭한 것 치고는 살짝 햇볕에 탄 붉은 피부를 가졌다.
한마디로 평범했다.

기름을 발라 완전히 넘긴 머리와 멋들어진 의상만이 그가 귀족이란 것을 알게 해주었다.


- 드르륵. 탁!

식탁의 가장 상석.
시종이 빼주는 의자에 영주가 앉자 우리도 앉을 수 있었다.

초대받은 전원이 앉음과 동시에 시종과 집사가 일사불란하게,
하지만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게 움직여 우리의 곁에 섰다.

쪼르르륵…

50여 명이 앉은 자리에 놓인 와인잔에는 전원 동시에 술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곁에 선 시종과 집사가 타이밍을 맞춰 술을 따라준 것이다.

말로 하지는 못했지만 그건 무척이나 멋들어져 보였다.
적어도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하게 들었다.

곧, 영주의 입이 열렸다.


“명성을 온 왕국에 떨친 하얀 고래 용병단의 도움을 얻을 수 있어서 무척이나 기쁘기 그지없군. 비옥한 나의 영토 발리에르는…”

나는 용병단 전원의 생각이 하나로 일치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지금 공통적으로 ‘도대체 얼마나  말이 저 입에서 나올까…’라며 걱정을 하고 있었다.

AOS 게임을 할 때조차 팀원 5명의 의견이 전부  다를 텐데,
무려  영주는 5명도 아닌 50명의 생각을 하나로 만든 업적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오해였다.

“…하니, 도무지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없군! 하얀 고래 용병단을 위하여! 그리고…!”

생각 외로 영주는 영지전의 승리 소감은 무척이나 짤막했다.
그것만으로 용병단의 호감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발리에르를 위하여!!”


영주가 손에 든 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
우리 역시 이때를 기다려 왔다는 듯이 잔을 높이 들고 따라 외쳤다.

발리에르를 위하여!!
- 발리에르를 위하여!!
- 발리에르를 위하여!!

진심을 담아서 축배를  수 있었다.
독하고 독특한 향을 내는 술이 입안에 넘실거린다.
바로 목으로 넘기기보다는 혀로 술을 굴리며 맛을 보는 척을 해보았다.

‘…술은  모르겠다.’

알아낸 것은 없었다.


그때,
늙은 집사장이 영주의 곁에 다가가서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는 용병단의 막내인 만큼, 상석에 앉은 영주와 나의 거리는 멀었다.
그렇기에 집사장이 하는 말은 듣지 못했다.
영주의 얼굴이 살짝 흥미롭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오호라! 과연, 현기를 느꼈다는 말이지?”

“…예… 하여…”


“으흠! 좋군. 좋은 타이밍이야. 영지전에서 승리한 날이니만큼.”

- 벌떡!

“하얀 고래 용병단이여! 자네들 중 수도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하여, 식전에 약식 미사(Missa)를 부탁하고 싶군! 우리 발리에르의 승리를 축복해 주기를 내 이리 부탁하지!”


일어서서 한 영주의 말에 용병단 전원의 시선이 저절로 나를 향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아는 수도자는 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영주가 지목한 ‘수도자’는 내가 맞았다.

영주의 시선이 모두의 고개를 따라 나를 향한다.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호오! 과연! 검은 머리의 검은 눈이라! 들어 본 적이 있어! 수도승 중에는 동양인이 많다지? 어서 기도를 부탁하네!”


영주가 미소를 만들며 새하얀 치아를 자랑한다.

이런 씨발.
나 수도자의 교리에 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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