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상대 영주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안쓰러웠다.
그는 불리한 입장에서 가진 패를 최대로 활용하며 최선을 다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운이 상대 영주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어.’
그는 자신들이 철사자 전체를 영입했단 사실을 용병들에게만 은밀히 알렸다.
우리 쪽 영주에게 용병이 고용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비슷한 체급의 용병단끼리의 싸움은 지금처럼 짜고 치지만…
만약 상대가 하얀 고래가 아닌, 중소 용병단이었다면?
철사자는 분명 상대 용병들을 무참히 박살을 냈을 것이다.
그래야 추가 수당을 받아낼 테니까.
즉,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우리 쪽에 붙을 소규모 용병단은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상대 영주의 노림수는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하얀 고래를 제외 하고는 다른 용병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 영주가 의도한 대로, 고위 마법사는 철사자를 막기 위해 진땀을 흘렸어야 했으리라.
우리의 개입이 없었다면.
고위급 마법사의 이름은 무거웠지만, 150명에 달하는 철사자를 전부 막지는 못하기에 이길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원작에 나온 상대 영주는 자신이 승리할 확률을 2:8 정도로 점쳤다.
20%면 충분히 걸어볼 만 하지 않은가?
적어도 손 놓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에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불행은 용병에게만 은밀히 알린 ‘철사자를 영입했다’는 소식이, 좀 떨어져 있던 자넷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것밖에 없으리라.
‘자넷이 영주 대리한테서 보수를 크게 받아냈다고 했지? 잘 밀당 했나 보네.’
철사자를 막을 병력이 없는 우리 영주에게 하얀 고래는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용병단이었을 것이다.
고용에 성공만 한다면 80%에 가까운 승률을 100%까지 끌어 올려 줄 테니까.
파벌에서의 지원이 두둑해서 금전이 많은 영주에게, 고용비란 크게 신경 쓰이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고.
결론은 이 영지전의 진정한 승리자는 하얀 고래라고 볼 수 있다.
- 챙… 채앵…
곧 상대 영주에게 소식이 들어갈 것이다.
우리 쪽에 하얀 고래 용병단이 영입되었다는 정보가.
믿고 있던 철사자는 발이 묶였다.
그렇다면 상대 영주가 할 선택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 콰앙!!
그때,
들어본 적 있는 폭발음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시시덕거리던 용병들의 목소리쯤은 가볍게 파묻을 정도로 커다란 울림이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방금의 폭발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파이어볼.”
하지만 내가 아는 파이어 볼과는 많이 달랐다.
카야의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이다.
어째서 지원 온 마법사의 앞에 ‘고위’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폭발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법사가 세 명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상대측 지휘 막사로 추정되는 곳에 두 개의 폭발이 연달아 터졌다.
- 후우욱!
한줄기의 강풍이 평지를 흩고 지나갔다.
나의 얼굴을 때린 바람은 꽤나 먼 거리를 달려오며 미지근하게 식었다.
용병들은 잡담을 멈추고, 마나가 불러일으키는 불꽃놀이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들에게도 역시 마법이란 자주 보기 힘든 기적이었기에.
“…끝났네.”
“곧 항복할 것 같은데?”
용병들은 전장을 보고는 결과를 확정 지었다.
적군은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아군 병사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사기를 끌어 올렸다.
누가 보아도 전쟁의 승패는 판가름 났다.
얼마 뒤, 상대의 진형 곳곳에서 백기가 올라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지전이 종료되었다.
*
하얀 고래는 영주성에 초대받았다.
영주가 만찬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침 용병단은 오늘의 영지전을 끝으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없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자넷은, 단박에 그 제안을 수락했다.
“으,으으… 제 생에 귀족을 보게 되다니…”
“어차피 그쪽에서도 용병에게 예법을 기대하지는 않아. 너무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그,그렇다면 좀 다행이네요…”
멜을 제외하고는 긴장하는 용병은 없었다.
이들에게 만찬을 대접받는 경험은 꽤나 익숙했기 때문이리라.
놀랍게도 만찬을 대접받는 것은 전투를 끝마친 오늘이었다.
이건 나에게 약간의 의문을 안겨주었다.
소설을 읽을 때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확실히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이다.
‘영지전을 끝마친 당일에 가장 먼저 우리를 초대한다고?’
우리를 대접할 여유가 있다는 것은 이해가 가능하다.
단 하루 만에 영지전을 끝마쳤기에 그 여파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지금 귀중한 손님이 와있다.
바로 고위 마법사라는 손님이.
상식적으로 곧 떠날 용병 나부랭이보다는, 자신의 파벌에 소속된 마법사 3명을 접대하는 것이 우선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용병이랑 고위 마법사를 같이 대접하는 건 더 말이 안 되는데…’
나야 마법사를 직접 볼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상대의 스텟창과 스킬창을 열어볼 수 있는 나에게는 그들을 만나는 것만으로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원작에서 멜과 마법사가 만나는 장면은 없었다.
궁금하면 물어보면 된다.
마을의 입구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이 늙은 집사에게.
“저희 영지는 영주님을 위해 싸워준 하얀 고래 용병단을 환영합니다.”
- 꾸벅.
안내를 시작한 것은 자신을 집사장이라 소개한 깔끔한 차림의 노인이었다.
용병단은 집사의 뒤를 따라 멀리 보이는 성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터벅터벅.
나는 곁에 있던 크리스에게 잠시 눈짓했다.
얌전히 집사의 뒤를 따라가기보다는 그에게 말을 걸기로 했기 때문이다.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깔끔한 외모를 가진 자가 호의를 보이며 인사를 하면, 적어도 눈살을 찌푸리지는 않을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아, 네. 안녕하십니까.”
“박찬영이라고 합니다. 부끄럽지만… 신학에 몸을 담고 있죠.”
무식한 용병이 말을 거는 것과, 무언가를 공부한 사람이 말을 거는 것은 첫인상에 커다란 차이를 보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수도자라는 껍질로 집사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파면했다는 말은 생략했다.
이 노인이 신실한 신자이면 오히려 호감이 깎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뒤에서 흥미진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자넷의 시선은 무시해 주었다.
그녀도 최소한의 눈치가 있으니 끼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아, 신학에 몸을 담그셨다면… 죄송합니다. 종교 쪽은 잘 모르기에.”
“아닙니다. 오히려 그 누가 감히 자신이 종교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평생에 걸쳐 교리를 공부 한 교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허허… 현기가 담긴 말씀이군요.”
내가 집사장의 부족한 부분을 듣기 좋게 포장해 주자,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적어도 첫인상은 나쁘지 않게 먹혀들어 갔나보다.
슬슬 화제를 전환해야 했다.
그가 교리에 대해 깊게 캐묻는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내 쪽도 마찬가지다.
물론 변명 거리는 만들어 주었지만, 가장 좋은 것은 그 변명을 쓰지 않을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혹시 마법사님은 성 내에 계신가요?”
“오늘 하얀 고래 용병단과 함께 영지전을 승리로 이끌어 주신 그분들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맞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수도자로서 마도학을 연구하시는 분들께 잠깐 질문할 것이 있기에…”
물론 직접 만나게 된다면 원활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성직자와 마법사의 관계가 어떤지 모르는 것은 둘째 치고,
대부분의 소설에서 그려지는 고위 마법사란 상당히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마법사에게 원하는 것은 친교를 다지는 게 아니다.
단순히 얼굴만 보면 된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고위 마법사가 가진 스킬들…
그리고 스킬 레벨이 어느 정도일 때 ‘고위 마법사’라 불리는지였으니까.
“허어… 이거 참…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고위 마법사님은 이미 영지를 떠나셨습니다.”
“영지전이 끝난 지 고작 몇 시간이 지났는데… 벌써 말입니까?”
“수도승님이 알고 계신 것처럼 그분들은 마도학 연구에 일생을 바쳤으니까요. 영주님께서도 극진히 대접하고자 했으나…”
“전부 거절하시고 떠나셨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어째서 우리 용병단이 ‘오늘’ 초대받았는지를 깨달았다.
사실 만찬회의 예정 된 주인은 마법사였으나,
그들이 빠르게 떠나버리자 이미 준비한 음식을 써먹기 위해 우리를 초대한 것이다.
‘젠장… 마법사 얼굴은 보지도 못했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멋들어진 막사에서 옷 한자락 내비치지 않은 그들이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봐야겠다.
그래도 한가지 희소식은 오늘의 만찬이 꽤나 고급질 것이란 사실이다.
영지전에서 승리한 영주가 고위 마법사에게 질 떨어지는 음식을 먹일 리가 없으니.
불쾌해하지 않고 내 질문에 대답해 준 집사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뒤,
다시 크리스의 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 턱.
그리고 가는 도중 자넷에게 붙잡혔다.
자넷은 집사장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어보았다.
- 소근소근…
“너 파면 당하지 않았냐? 이제 수도승 아니잖아.”
“정확히는 파계가 아닌, 환속(還俗. 성직자가 성직의 의무를 그만둔 뒤, 속세의 신분으로 돌아감.)이라고 봐야 옳죠. 제 의지로 성직을 그만둔 것이니.”
“…뭔가 사정이 있어?”
“비밀로 할 것까지는 아닌데… 견문을 넓히려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으음… 뭐. 알겠어. 좀 궁금하지만, 깊게 묻지는 않을게.”
자넷은 붙잡고 있던 나의 팔을 놓아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크리스에게 갈 수 있었다.
내 팔을 잡은 자넷을 불편한 눈으로 보고 있던 그녀에게.
슬슬 그녀와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
왜 크리스는 유독 자넷에게만 저리 경계심을 보일까?
“크리스? 11구역 전투직을 할 때도 내 주변에 널 제외한 여자 동료가 있었잖아?”
“그렇지?…”
“그때는 나랑 같이 웃고 떠들던 걔들한테 별로 신경도 안 썼으면서, 잠깐 대화한 자넷은 왜 그렇게 경계해?”
심지어 나는 다른 전투직 여성들과 밥까지 같이 먹고는 했다.
물론 그 안에 크리스가 껴있기는 했지만.
나와 친하게 지낸 여자는 자넷 뿐만이 아닌데, 유독 크리스는 자넷에게만 날이 서 있었다.
“음… 사실, 논리적으로 보면… 난 자넷에게 못 할 짓 하고 있는 것이긴 해…”
“응?”
“내가 자넷을 경계하는 건 단순한 감 때문이거든.”
“감? 정확히 어떤 느낌이 드는데?”
“찬영이랑 저 여자랑 무언가… 여,엮일 것 같은 느낌?”
“으음…”
“…역시 너무 말이 안 되지? 미안해… 내 착각인가 봐.”
크리스는 살짝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말이 별로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는 표정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혹시 그 감이란 거. 내 주변 다른 여자한테도 느낀 적 있어?
“11구역 여자 전투직들 중에는 한 명도 없었고… 아! 너와 훈련소 동기이던 리 샤오린?”
“리 샤오린? 그럼 그냥 착각이겠네. 걔랑 난 별로 연관이 없으니.”
“역시 그렇지? 리 샤오린과 너는 거의 만나지도 못할 테니까.”
- 휴우…
크리스가 살짝 밝아진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작게 웃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얼굴에 내 당황이 드러날 것 같았기에.
자연치유가 아니었다면 난 분명 당황했을 것이다.
크리스의 감이란 것, 전혀 무시할 것이 못 되는 것 같다.
“…앞으로는 이런 쓸데없는 의심은 최대한 안 해볼게. 자넷이랑도 원만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그래. 그러자.”
나는 일단 이 문제를 미래의 내게 떠넘겼다.
어차피 한동안은 절대 들키지 않을 테니까.
- 터벅터벅.
고개를 들어 목적지를 바라보자 성과의 거리가 꽤나 가까워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잡담을 나누는 와중에도 꾸준히 걸었던 탓이다.
나는 크리스에게 미리 말을 해놓았다.
물론 방금의 대화처럼 목소리를 최대한 줄여서.
- 소근소근.
“지금 칼을 아공간에서 꺼내 놔.”
“응? 어째서?”
“성에 들어가기 직전에 우리의 무기를 회수할 거야. 아공간 아티팩트가 있는 것을 알면 그것까지 놓고 입장하라고 할 텐데, 정말로 네게 아공간 아티팩트가 있는 게 아니잖아?”
“아하…”
크리스는 내 조언대로 칼집 채로 칼을 꺼내 허리에 찼다.
집사장은 정면을 보고 걸어가느라 그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