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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꽤나 큼지막한 마을치고는 사람이 별로 없는 거리를 지나,
하얀 고래와 직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용병 길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정식으로 용병단 입단을 마쳤다.
크리스의 용병패 발급 수수료는 내가 부담했다.
그녀가 지금 당장 가진 돈은 없었기 때문이다.

“으음…”


손에 든 용병패를 이리저리 굴리며 살펴보았다.
동으로 만들어진 탄탄한 판에 내 신체적 특징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가진 신분증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가 적혀 있었던 것처럼.

내 손에 쥔 패는 동패였지만, 자넷이 가진 용병패가 금패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모든 용병들의 패가 동으로 만들어진 패로 동일했다.


요즘 소설에서 흔하게 차용되는 설정인 ‘F급 - B급 - S급’ 이나,
‘브론즈 - 골드 - 플레티넘’ 같은 용병 등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용병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수단은 명성과 소속된 용병단이 유일했다.
그렇기에 나와 크리스, 멜은 용병으로선 이제 막 발을 들인 신입이었지만, 그 어느 용병도 우릴 무시하지 못하리라.


“와… 이,이게 용병패…! 저도 이제 용병이네요…!”
“…”

옆을 보니 나 뿐만이 아니라 멜과 크리스 역시 신기한 듯 용병패를 보고 있었다.
그런 우리 셋을 보고는 다른 용병 단원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하긴, 우리가 하는 행동이 정말로 초짜 같기는 했다.

- 터벅!터벅!


건물 2층에서 볼일을 마치고 내려 온 자넷이 나를 발견했다.
그녀 역시 동패를 손에 쥔 나를 보곤 다른 용병들처럼 웃음을 지었다.


“킥킥. 파계승. 뭘 그리 유심히 봐? 글은 읽을  알고?”

“예. 읽고 쓰는 정도는 합니다.”

“…하,할 줄 알아?”


“네.”

내 말에 자넷의 눈이 크게 뜨인다.
나는 오히려 그런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봤다.
원작 속 정보에 의하면 이 세계의 문맹률은 그렇게까지 낮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이 용병 길드는 본부가 아닌 수많은 지부  하나다.
심지어 길드의 접수 직원은 상당히 어렸다.
그럼에도  동패에 글을 새길 수 있었지 않았는가?

“왜 이리 놀라십니까?”

“놀랄 만 한데?…”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까? 당장 이 영주성이 있는 마을만 해도 찾으면 꽤나 있을 텐데요.”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은 흔하지만, 글을 읽고 쓰는 ‘용병’은 진짜 드물지. 상식적으로 문자를 알면 용병 질 하겠어?”


“어… 그런가요?”


생각해 보니 자넷의 말이 맞다.
이곳은 영주성이 존재하는 마을이기에 글을 아는 사람이 많지만,
 낙후된 시골로 간다면 글을 읽고 쓰는 것만으로 상당한 고급 인력이다.


“저는 용병을 직업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하! 파계승 너는 돈 벌려고 용병 질 하는  아니었지?… 그 뭐라 했더라… 견문을 넓히기 위한 수행?”

“그렇죠.”


“그럼 뭐 이해가 가네. …넌 생각보다 쓸모가 많을  같다. 죽지 마라?”


자넷이 나를 기특한 눈으로 흩어 보았다.
다행히 알맞은 변명이었나보다.

자넷은 방금 건물의 2층에서 내려왔다.
즉, 그녀가 용병단의 단장으로서 영주의 대리와 대화가 끝났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볼일은 끝마쳤습니까? 영지전은 어떻게 되었죠?”

“흐흐… 그건… 얘들아! 일은 맡기로 했다! 보수는 통 크게 받아 냈으니 일하자!”


자넷이 용병 단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통 크게’는 예상하던 것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를 받아내었다는 뜻이다.
그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단원들은, 돈 좋아하는 용병단 답게 모두들 희색을 띠며 소리를 질러대었다.
순식간에 길드 내부가 소란에 찼다.
다행히 우리와 직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기에 불만에 찬 사람은 없었지만.


“으… 시끄러워…”

- 터벅터벅.

나는 귀를 틀어막으며 멜과 크리스에게 다가갔다.
 둘만이 흥분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멜은 긴장에 굳어 있었고, 크리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저어… 단장님? 그럼 영지전은 정확히 언제인가요?…”


멜이 침을 삼키며 자넷에게 질문을 했다.
나는 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대답해 주는 것은 내가 아닌 자넷이었다.


“궁금해?”


“예? 네네…”


“바로… 내일이야.”

“내,내일이요?! 그렇게 코앞이라니!”

“킥킥! 전투 중간에 용병이 고용되기도 하는데 뭘. 하루 전에 도착한 거면 충분히 늦지 않은 거지.”

저리 긴장에 찬 것으로 보이는 멜도, 실제로 전투에 들어가면 ‘주인공’ 답게  몫을 톡톡히 해낸다.
음…
이번 전투에서는 활약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특성을 가진 값은 하는 것이다.

영지전은 내일이 맞다.
전쟁이 코앞까지 왔기에 우리가 빠르게 이동한 것이다.

지금 이 길드에 다른 용병  명 없이 한산한 것도,
마을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전부  영지와 전투를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곳에서 전투 장소는 멀지 않았다.
점심시간인 지금, 부지런히 걸어간다면 오늘 저녁 안에 도착할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바로 옆에 붙은 영지였기에 가능했다.

- 내일이라면…
아… 쉬는 건 글렀네…
- 오늘도 노숙인 거냐?…
- 그래도 그쪽 가면 빈 막사는 있겠지.
- 그게 노숙이랑 뭐가 다른데.
- 


하지만 약간의 휴식을 기대하고 마을에 도착 한 단원들은 살짝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돈도 좋지만, 오늘 밤은 노숙이 아닌 침대에서 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었기 때문이다.


“점심만 먹고 바로 출발한다! 휴식은 도착하고 나서 푹 쉬어!”


- 으으…
- 젠장… 천천히 먹자.

- 터벅터벅!


나와 크리스는 언제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있었지만, 용병들은 아니었다.
그들의 주식은 항상 조잡한 음식과 요리 실력으로 만드는 꿀꿀이 죽이었다.
나름 커다란 마을에서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은 용병들의 불만을 꽤나 죽여주었다.

- 터벅터벅!


식사가 끝난 후 마을을 가로지르며 이동하기 시작할 때.
가끔 길에 거니는 사람의 표정을 보면 그다지 불안에 떠는 것 같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진 영지치고는 정말 이상한 반응이었다.
그것이 신기했던 멜은 자넷에게 질문을 했다.

“저… 단장님? 주민들이 별로 불안에 떨지 않네요?”


“내가 말했잖아. 이건 승자가 정해져 있는 영지전이라고.”

“그걸… 주민들 모두가 아나요?”

“일단 비밀이긴 한데… 알려져 봐야 승패에 영향도 없으니 영주가 일부러 알린 것이겠지. 안심하고 생업에 집중할 수 있게끔.”

“아들이나 아버지, 남편이 전쟁에 나섰는데도요?”

“어차피  죽을 걸 아니까.”


“예?”


멜의 엉뚱한 표정을 바라본 자넷이 피식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어째서 이 영지가 이기는 것이 확정되었는지를.

“이 왕국에는 두 개의 파벌이 있는데,  힘의 격차가 좀 많이 심해.”


“왕국…? 파벌…? 으으…”


“하하하! 알겠어. 요약하자면… 이쪽 영지가 강한 파벌의 지원을 받고, 상대 영지는 지원을 못 받는 것의 차이야.”

어려운 정치 얘기가 나오자 멜의 눈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멜을 본 자넷은 짧고 굵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제서야 멜도 이해를  수 있었다.
그냥  영지의 뒷배가 강하다는 뜻이었으니.


“그런데  ‘지원’이 단순한 식량이나 돈, 무기뿐만이 아니었단 말이지. 무려… 고위 마법사가 지원을 왔어. 3명이나.”


“마,마법사!”

“이 쪼그만 영지전에서 고위 마법사가 3명? 이건 승패가 정해진 거지. 아마 상대 영주도 반쯤 포기하고 있을걸? 우리는 그 정보를 발 빠르게 입수 한 거고.”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동일 했다.
이 앞의 미래를 살짝 스포일러 하자면…
상대 영주는 고위 마법의 맛을 보고  뒤, 하루도 안 되어서 백기를 들어 올리게 된다.
자신의 비장의 수가 막힌 것도 한몫했다.


누군가는 이럴 거면 그냥 미리 항복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허나, 저쪽 영주에게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 ‘믿는 구석’이란 놈이 좀 많이 든든했기에,
어찌 보면 마법사 3명을 상대로 해볼 만한 전투가 될 수도 있었다.

우리가 이 전쟁에 합류해 버려서 상대 영주의 계획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지만.

“음… 변수라고 해봐야, 상대 영지에 고용된 철사자 용병단인데… 그건  큰일 없을 거야.”

“예? 단장님, 저쪽에 철사자가 있습니까?”
“어… 철사자라면…”
“이야, 오랜만에 마주치네요?”
“큭큭. 공짜로 먹는 의뢰였구만.”
“단장님은 철사자가 저쪽에 붙은 거 알고 있었죠?”
“어쩐지, 무리해 가면서까지 이 영지전에 껴들려고 하시더라…”


“큭큭. 맞아. 철사자가 상대 영주한테  빚진 게 있을 거야.”

철사자라는 단어를 들은 용병들이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마치 내일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자,잠깐만요!”

그 모습을  멜이 당황해서 모두에게 말했다.
멜이 알기로는 용병들의 반응이 상당히 비이상적인 것일 테니까.

“다들 왜 그렇게 긴장이 풀려 있어요?… 철사자라고요! 그 철사자! ‘하얀 고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류 용병단!”


“왜. 철사자랑 싸워야 할 것 같으니 무서워?”


“어… 그건 아닌데, 긴장을 풀만 한 일인가요?… 오히려 긴장을 끌어 올려야…”

“그건 내일이 되어보면 알아.”


자넷은 멜의 말을 일축했다.


상대 영주가 믿고 있는 구석이 철사자 용병단이었다.
그들의 무력은 절대로 무시하지 못했으니까.


3명의 마법사와 100명을 넘는 전문 무장 집단.
우리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영지전의 승패는  두 무리가 정했을 것이다.




*


- 뿌우우!!


영지전의 날은 이미 한참 전에 밝았다.


영지전은 병사는 병사끼리,
  없는 기사는 기사끼리,
용병은 용병끼리 싸움이 이루어질 것이다.

대부분의 영지전이 이러했다.
병사가 곧 영지 수입의 바탕이 되어주는 영주민이었기에, 병사의 희생을 최소로 줄이기 위한 일이었다.
한낮 병사가 기사나 용병을 상대했다가는 그 피해가 미치도록 커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철사자 용병단을 상대하기 위해 전장을 이동했다.
상대측 진영, 저 멀리서 우리보다 꽤나 많은 수의 용병들이 보였다.
저들이 철사자 용병단이리라.


“휴우. 많기도 하네. 지금 철사자가 몇 명이지?”


“아마 150명일 겁니다.”

“많기도 해라.”

“저희보다 입단에 필요한 무력이 확연히 낮으니 그렇지요.”

“혹시 진심으로 맞붙으면 우리가 질까?”

“질 겁니다. 하지만 저들도 2/3는 잃겠죠.”

“…농담인데 왜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해?”


자넷은 부단장의 진지한 대답에 떨떠름하게 말했다.
50명이 150명과 싸우는데 100명을 데려가는 것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능력이다.
긴장 하나 없이 단원끼리 잡담을 나누던 그때.


- 뿌우우!! 뿌우!!


뿔피리가 두  연속 울리며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왼편에 선 병사들이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상대의 진형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병사를 독촉하는 장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시작이다!! 우리도 가자!!”


“와아아악!! 에,엥?”


와아아…
와아…

자넷의 외침에 멜이 크게 함성을 지르며 뛰어가려 했지만, 흐느적거리는 주변 단원들의 함성과 움직임에 당황했다.
그 모습이 도저히 전투를 앞둔  같아 보이지 않았기에.

느긋하게 달렸지만, 기본 신체 능력이 높았던 탓일까.
우리는 곧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철사자 용병단과 마주했다.

그리고…
양 용병단의 짜고 치는 소꿉놀이가 시작되었다.

- 챙… 채앵…

“이야, 너 오랜만에 얼굴 보네? 지난번 개미굴에서 얼굴 보고 처음이잖아?”

“오! 너희 신입이  늘은 것 같다?”

채애앵… 챙…

“크하하! 점점 늘고 있다고! 곧 100명이 채워질 기세야!”


“허풍은… 그냥 입단 조건을 내려.”

“우리 단장이 허락해 주겠냐?”

- 챙…

검은 맞대고 있지만, 칼날에는 살기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느릿하게 날아가는 칼은 다른 칼에 가로막혔다.


그리고선 상대 용병단과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멜의 입이 더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이… 이게 무슨… 다,단장님?”


“크흐흐흐!! 비슷한 체급의 용병단끼리 싸울 때는 원래 이래.”


“네?…”


“서로 전력을 다해 싸우면 양 용병단 전부 괴멸이잖아?”

“하지만 저희는 고용 당했는데… 혹시나 고용주가 이걸 알면…”


“영주들도 다 알고 있어. 비슷한 체급이면 고용비는 비슷하니까, 서로 돈을 돈으로 막는다는 느낌이지. 암묵적으로 허락 받은 짜고 치기!”

“…”

“이래서 우리가 꼬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달려온 거야! 땅에 떨어진 돈을 줍는 거나 다름없다니까?”


자넷은 음습한 웃음을 흘리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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