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13) (113/310)



〈 113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하루를 하얀 고래의 발자취에서 행군하고, 하루를 테라포밍에서 일했다.
지구에서 가끔 안젤리와 밀회를 즐긴 것을 제외하면 정말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쌓인 카르마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아공간 스킬쯤은 구매하고도 남을 정도로.
아무리 신중하게 고민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이상으로 시간을 보내면 놓치게 되는 숙련도가 너무 많다.
이제 곧 본격적인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의 에피소드가 시작되니까.
모여있는 카르마를 사용해야 할 때가 왔다.


하지만 스킬이나 기능을 구매하기 전에, 비상사태를 위한 대비를 일 순위로 해야 옳다.
나는 상점창의 소모품 항목을 열었다.

“크리스. 이거 받아.”

“응? 어,어?”

- 턱. 터억, 턱.

나는 크리스에게 하급 포션 5개를 하나씩 건네 주었다.
크리스는 자신의 손에 겹쳐 쌓이는 포션을 떨어뜨리지 않고, 요령 좋게 균형 잡았다.

크리스가 포션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붉은색 액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다.

“포션이야.”


“포션?”

“상처를 입었을 때 먹거나 상처 부위에 바르면 치료돼. 너무 심한 상처는 안 되고, 그리 심하지 않은 상처만.”


이제 그녀에게  비밀을 밝힌 만큼 이 포션을 줘도 될 것이다.
잠시 포션을 내려다보던 크리스가 살짝 놀랐다.
그녀 역시 짐작 가는 곳이 있는 모양이다.


“아! 이게 설마 내 다리를 치료했던 방법이야?”

“응.  개는 네 다리에 바르고, 한 개는 잠든 네게 먹였어. 2개를 사용하니까 다리뼈가 금이 간 정도는 치료되는 모양이더라고.”


“완전 예비 목숨이네…”


“아공간에 넣어 둬. 나한테도 포션은 있지만, 혹시 네가 급하게 사용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 사용하면 말해 줘. 언제든지 보충해 줄게.”

“이거… 숨겨야 하는 비밀? 다른 사람에게는 사용하면 안 되지?…”


“일단 그렇긴 한데… 절대적인 건 아니고, 네 판단을 믿을게.”


“…응. 알겠어.”

원래의 『자애』라는 특성을 가졌으면, 처음 보는 타인이 위험해도 망설이지 않고 포션을 사용할 것이다.
특성의 이름에서  수 있듯이 믿음을 쉽게 주고, 정이 많을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크리스는 다르다.
그녀는 지구에서 겪은 일 때문에 ‘타인을 쉽게 믿는 자신’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크리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마음의 벽이 두터웠다.
물론 나의 경우처럼 한번  벽을 넘으면 맹목적인 신뢰를 받았지만.

“이거… 귀한 거지? 일단 최대한 아껴 쓸게.”

“너와 나에게 쓰기엔 전혀 아깝지 않고, 남들에게 쓰기에는 약간 아까운 정도야. 스스로에게 사용하길 아끼지는 마. 다시 구할 수 있으니까.”

- 끄덕.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크리스는 짧게 말했음에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녀는 이 포션의 특별함을 깨달았지만, 필요할 때는 망설이지 않고 사용할 것이다.

크리스의 손에서 5개의 포션이 사라졌다.
그녀의 아공간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걸로 최소한의 위험 대비는 끝마쳤다.
카르마의 사용을 미루지 않아도 되리라.

지나간 테라포밍에서의 2일 중, 출장을 한   다녀왔다.
내가 가보지 못한 새로운 구역이었다.
덕분에 나는 드디어 쓸만한 스킬을 하나 발견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것이 내가 갑작스럽게 카르마 소모를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띠링!

=
[스킬]
이름: 고요한 발자국
레벨: 0
효과: 기척이 줄어듭니다.
상세: 스킬 습득 시 자동으로 기척이 줄어듭니다. 마나를 사용해 강화할 수 있습니다.
가격: 30,000 카르마
[구매하기]
=

디시빙(Deceiving)과 함께 사용하면 정말 좋은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킬 것 같은 스킬이다.
둘 모두 잠입에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으니.
게다가 ‘고함’ 스킬과 달리 패시브가 상당히 쓸모 있어 보였다.

천권일각의 카운터 기술인 사념각(邪念脚)은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 내어 사각으로 이동하는 기술이다.
즉, 나의 움직임이 상대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 되는 것이다.
만일 급박한 전투 와중에 사념각(邪念脚)과 고요한 발자국을 동시에 사용한다면…
 효과가 극대화되어 눈앞에서 귀신같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줄  있으리라.


 스킬과 좋은 연계가 예상되는 스킬이  개나 있다.
그러니 구입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역시 아공간 스킬과 이 스킬을 구매하자.’

내게는 기존에 있던 60,000 카르마에 ‘역천의 구슬’ 삭제 보상으로 받은 30,000 카르마까지 더해 총 90,000 카르마가 있다.
두 스킬을 사고도 10,000 카르마가 남는 것이다.


띠링!

=
[스킬 이름] 고요한 발자국
[레벨] 0
[속성] 행동
[타입] Active / Passive
[상세]
기척이 영구적으로 줄어듭니다.

마나를 지속적으로 소모하며 효과를 강화할  있습니다.
마나는 고정된 수치만이 소모됩니다.
즉, 마나를 많이 사용하여 효과를 한층 강화하지 못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
=



=
[스킬 이름] 아공간
[레벨] 0
[속성] 기타
[타입] Active
[상세]
마나를 소모하여 손에 닿은 물건을 아공간에 보관합니다.
아공간에 들어간 물건은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마나를 소모하여 아공간에 넣은 물건을 꺼냅니다.
본인에게 익숙한 물건일수록 몸에서 떨어진 곳에 꺼낼 수 있습니다.
현재 거리 한계 0M (Lv 0)


[재사용 대기시간] -
=


두 개의 스킬을 구입 완료했다.
약간 내 기척이 줄어든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아직 Lv 0의 스킬이라 그런지 패시브만으로는 눈에 띄는 효과가 없어 보였다.
당장 나를 주시 하는 크리스도 별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이제 마나가 허락하는   스킬들을 항상 연습하면서 행군을 해야겠다.
특히 아공간 스킬을 위주로.
레벨을 올려도 얼마나 좋아질지 모르는 ‘고요한 발자국’과 달리 ‘아공간’은 확실한 성능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연습은 7년 전, 테라포밍에서 크리스가 연습한 것 처럼 조약돌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면  것이다.
손바닥 안에 있는 조약돌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을 누군가 눈치챌  없으니.





*




용병단과 함께 마을을 떠나 출발한 지 나흘째 되는 날.
나무가 무성하던 숲길이 끝나고  넓어 보이는 평원이 눈에 들어왔다.


평원에는 밀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작물이 규격에 맞춰 자라고 있는 것을 보니 인간의 손길이 닿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인 마을 어귀에 들어  것이다.

아직 가을이 되기 전이라 밀은 전부 자라지 않았고, 그 색은 푸르렀다.
강화된 시야로 뻥 뚫린 평지를 크게 둘러보았다.
 멀리서 밭을 일구고 있는 사람 몇몇이 보였다.
거리가 너무 멀어 그들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곧 도착이다! 다들 인상 풀어! 오늘은 좀 빨리 들어가서 쉬자!”

예엡!!

자넷이 용병들에게 소리쳤다.
그 말에 다들 노숙하느라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는 등 멀쩡하게 보이기 위한 노력을 했다.
 이루어질 마을로 들어가기 위한 검문을 빠르게 통과하기 위함이다.


기존이라면 50여 명의 용병들의 신분증 검사를 하나하나 하지 않는다.
이름이 크게 알려진 하얀 고래 용병단을 증명하는 서류 하나면 전부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무장집단은 맞지만, 이들이 한순간에 도적으로 돌변하는 무뢰배는 아니란 것이 보증되니까.

하지만 곧 이 마을은 전시 상태에 돌입한다.
검문이 평소보다 강화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일단 원작에서는 개인 신분증 검사는 하지 않았지만…’


원작을 안다고 한들 이런 사소한 사건은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을 절대 확신하지 못한다.
자넷이 말실수 한마디만 하면 신분증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서류만으로 무사히 마을 안에 들어갈  있기를 기도했다.
지금 당장 크리스에게는 신분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 속닥속닥…

“찬영? 정 안되면… 몰래 용병 무리를 빠져나가 마을을 둘러싼 벽을 이능으로 넘을까?…”


“아직 그럴 필요는 없어.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


신분증 검사가 없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모르는 크리스는 살짝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용병단 50명의 눈을 전부 속이기는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크리스가 제안한 방법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 터벅터벅.

양옆에 밀밭을 둔 채로 그사이에 난 길을 걸어갔다.
아직 본격적인 주거지 내부에 들어가기 전이지만,  주변만 봤을 때는 너무나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곧 영지전이 일어나리라 생각하지 못할 만큼.

몇 분을 더 걸었을까.
아침 특유의 분위기가 완전히 가시고 정오에 접어들 무렵에, 나는 남들보다 뛰어난 시력으로 마을을 먼저 발견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은 자넷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무리의 가장 앞에 선 자넷이 나 다음으로 마을을 발견했다.


“마을이 보인다!”


조금만 더 걸으면 휴식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용병단의 걸음이 가벼워진다.
이제 모든 용병단이 마을의 입구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이러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마을을 발견한 크리스가 작게 탄식했다.
이전 마을에서 봤던 것처럼 나무로  조잡한 격벽이 아닌, 제대로 세공된 벽돌로 쌓아 만든 석벽이 우릴 반겼기 때문이다.
그 위에는 무장한 경비병들이 주기적으로 순찰을 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석벽 위를 사람이 거닐어야 하므로 석벽의 두께가 5M를 넘겼다.
크리스의 스킬로는  번에 뛰어넘지 못하리라.

‘이럴  같더라… 하긴, 아무리 중세시대 생활 수준이라도 영주성이 있는 중심 마을인데 이 정도 방비는 되어야지.’

“괜찮아. 용병단 증명 서류만으로 통과 할 수도 있잖아? 정 안되면 자넷에게 도움을 달라고 부탁하면 되고.”


“…”

경비병들이 마을에 가까워지는 우리를 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단순한 상인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오해하기엔 용병단 개개인의 덩치가 무척이나 커다랬으니까.


“잠깐, 멈추시오!”

- 터벅터벅. 탁!

우리는 막아선 경비병이 살짝 긴장한  말했다.
용병단은 얌전히 그의 말대로 멈추어 섰다.
우리에게 마을의 통제를 들을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서일까?
경비병의 표정은 점점 긴장이 풀려갔다.


“목적은 무엇입니까?”


“저희는 용병단입니다. 곧 벌어질 영지전에 대비해 용병을 고용한다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놀랍게도 자넷은 존댓말로 경비병을 대했다.
나는 그녀가 존대하는 모습을 살짝 어색하게 쳐다보았다.
정말 어울리지 않았기에.

“음… 그렇다면 용병단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하얀 고래 용병단입니다. 제가 단장인 자넷이죠. 여기, 증명 서류입니다.”

부스럭부스럭.

“헉! 하,하얀 고래!”


자넷이 품에서 인장이 찍힌 양피지를 내밀었다.
중요한 서류인 만큼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챙기고 다니는 모양이다.

스윽!

경비병은 양피지를 양손으로 공손히 받아들고선, 이상하게 생긴 도구를 품에서 꺼내 서류에 달린 인장에 대보았다.
외견만 보고서는 도무지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지 짐작이 안 갔다.
나는  도구를 향해 ‘아이템 정보 확인’을 사용했다.


띠링!

‘아. 인장의 진위를 가리는 간단한 아티팩트구나.’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다 보니 저런 편리한 물건도 존재 하나 보다.
덕분에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없었다.


“진품이군요. 내부에 바로 들어가셔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검문은 없고요.”

“이거, 편의를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전혀 아닙니다. 이름 있는 용병단이 오면 정중히 대하라는 영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설마 그 하얀 고래가 찾아올 줄이야 상상도 못 했지만요.”


“그럼 호의를 받아…”


“아, 영지전 관련 내용은 용병 길드에 가시면 됩니다. 저희 마을에는 길드의 지부가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얘들아! 들어가자!”

저벅저벅.

옆에 선 크리스의 표정은 겉으로 보기에 전혀 의심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작게 안도하고 있는 것을  수 있었다.


다행히 원작과 마찬가지로 검문은 없었다.
이제 용병 길드에서 정식으로 하얀 고래에 입단함과 동시에, 신분증을 대신할 용병패를 받을 것이다.
앞으로 오늘같이 불안에 떨어야  이유가 사라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