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식당은 여관을 겸하고 있었다.
좁디좁은 방 여럿에 어떻게든 50여명을 욱여넣어 자는 것에 성공했다.
‘따뜻한 잠자리’라고 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었지만, 공짜로 실내에서 잘 수 있던 것에 다들 만족했다.
용병단은 아침이 밝아오자 마을을 떠날 준비를 했다.
보통이라면 며칠 더 쉬면서 여독을 완전히 풀었겠지만…
지금 이들은 바쁘게 갈 곳이 있으니 당연했다.
들어야 할 짐 역시 우리에게 분배되었다.
나와 크리스는 말없이 배낭을 들었다.
- 스윽!
내게는 인벤토리가 있었고, 크리스에게는 아공간이 있었지만…
우리 둘 모두 직접 배낭을 짊어졌다.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
사회생활이란 것은 은근히 까다로웠으니까.
생각해 보자.
어제 막 들어온 신입이, 아무리 스스로의 능력을 사용한 행동이라고 해도, 자신보다 편하게 행군을 하고 있다?
몇몇 꼴통은 분명 열 받는다.
50명 중 꼴통이 한 명도 없을 확률은 존재하지 않았고.
‘별 불편하지도 않은데, 그냥 짐을 직접 들고 괜한 분란 거리 만들지 않는 것이 좋지.’
이런 ‘꼰대질’이 공개적으로 비판 받는 현대라면 몰라도, 이 세계의 생활 수준에서는 충분히 눈 밖에 날 수도 있는 행동이다.
무엇보다 나와 크리스의 근력으로는 이 정도 짐 따위는 전혀 무겁지도 않았다.
원할 때 지구로 가서 마음껏 쉴 수도 있었고.
- 터벅터벅.
마을 사람들의 환대한 배웅을 받으며 출발하길 몇 분.
나는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앞서가는 자넷에게 물었다.
“저희는 어디를 목적지로 가는 겁니까? 꽤나 부지런히 가는 것 같은데…”
“아, 너희는 아직 몰랐지? 우리 지금 큰돈 만지러 가고 있어.”
“큰돈?”
나는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띠며 물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한 번 더 확인을 해야 안심을 할 것 같다.
테라포밍에서 겪었던 시간여행으로 인한 변수가 내게 이런 사소한 강박증을 생기게 했다.
“응. 요 앞에 곧 전쟁이 있을 예정이거든.”
“무,뭐? 전쟁?!”
옆에서 얌전히 듣던 크리스가 놀란다.
나도 예의상 놀란 표정을 지어 주었다.
결과를 알고 있는 만큼 전혀 겁먹지도, 놀라지도 않았지만.
자넷은 나와 크리스의 표정을 보고선 깔깔대며 웃었다.
“잠깐. 이건 듣지 못했는데. 이 용병단, 이렇게 정도 이상의 위험한 일을 하는 거였어?”
크리스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죽어도 다시 살아나거나, 시간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반응이다.
크리스의 입장에서 나는 여전히 지켜야 하는 연인이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이었다.
나 같아도 테라포밍 속에서 크리스가 위험해지는 꼴은 볼 수 없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푸흐흐. 겁먹었어?”
“겁 이전의 문제야. 서로 간의 신뢰의 문제라고. 찬영이 물어보지 않았다면, 아무 말 없이 그를 전쟁터로 끌고 갈 생각이었던 거야?”
“이야… ‘우리’를 전쟁터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를’? 파계승. 네 연인은 자신이 전쟁터에 가는 것은 상관없고, 네가 가는 건 싫나 보다? 으음… 이건 감동을 넘어선 극성인데?”
“…말 돌리지 마.”
“조언 하나 해주자면… 너무 집착하지 마. 정떨어질지도 모르잖아?”
“이런 개…”
크리스의 표정이 무척 험악해진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저녁 쌓은 호감도는 다시 무너진 것 같다.
“어,어라?”
크리스의 표정을 본 자넷이 놀란다.
예상을 벗어났다는 표정이다.
크리스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줄 몰랐는지, 자넷은 당황했다.
전날 저녁에 크리스와 자넷은 ‘지인’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친해졌다.
자넷이 크리스를 놀린 것 또한 악의가 전혀 없는 웃음기 섞인 장난이었다.
하지만…
자넷이 유능한 분야는 금전 감각에 한했다.
인간관계에서의 자넷은 그리 비범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눈치가 있기는 한 사람’ 정도로 평가했다.
“오우… 잠깐,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파계승이 네 역린이였어?”
“크리스의 입장에서 보면 단장님이 절 속인 거니 그리 민감한 반응도 아닌 것 같은데요.”
“…그,그런가? 이야… 그래도 너 진짜 능력 있나 보다. 여자를 얼마나 홀려야 이런 반응이 나오냐?…”
“저도 크리스에게 단단히 홀려 있으니 상관 없습니… 윽!”
- 빡!
나는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남 앞에서 낯간지러운 말을 한 대가로 크리스에게 맞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화는 전부 풀려 있었다.
입가는 씰룩거렸고, 귓가 또한 살짝 붉어져 있었으니까.
“으씨발. 잠깐, 닭살 돋았어. 씨발.”
- 벅벅!
자넷 또한 질색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긁어대었다.
보아하니 의도한 대로 둘 사이에 날카로운 분위기는 어느 정도 완화된 모양이다.
적절한 중재는 이런 방법으로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서 해명이나 해 자넷. 내가 크리스에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줄 수는 없잖아?’
지구에서 내 능력에 대해 크리스에게 설명했을 때.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 그 세계의 언어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어떻게 납득시켰다.
…아니.
크리스는 납득한 것이 아니라 내게 자세히 묻지 않고 넘어가 준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시간을 돌린다던가, 죽어도 몇십몇백번이고 부활하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이건 물어보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그리고 나는 의문점 하나 남기지 않는 완벽한 답을 줄 수 없다.
나로서는… 크리스에게 이 사실을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 번도 죽지 않고 완성도 100%를 넘겨서 클리어하면 특성을 줬어.’
나는 앞으로 죽지 않게끔 필사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마치 내게 주어진 목숨이 단 하나인 것처럼.
그렇다면 나나 크리스가 죽기 직전이 아니고서야 굳이 말해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음… 크리스? 화가 났다면 사과할게. 전쟁이란 건 과장이야. 그냥 흔하디흔한 영지전이라고.”
“…”
“무엇보다 네 생각 이상으로 전혀 위험하지 않을걸?”
크리스의 예쁜 미간이 다시 한번 좁혀진다.
영지전이나 전쟁이나 대규모 전투인 것은 변함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넷의 말은 별로 신뢰할 것이 못 되었으리라.
나 또한 원래라면 자넷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내게는 저 말이 사실이란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짧게 고민하던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용병이 된 이상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할 생각이었지만, 영지전이 위험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
“이미 승자가 정해져 있는 영지전이거든.”
“승자가… 정해져 있다고?”
“뭐… 자세한 건 직접 가서 겪어보면 알게 될 거야. 용병들이 참전하는 영지전을. 아! 우리가 가는 곳은 당연히 승자 쪽.”
“…내가 원하는 건, 너무 과하게 위험하지만 않으면 돼.”
“그럼 걱정할 필요 없겠네.”
‘승자 쪽’이라는 단어는 크리스의 불안을 어느 정도 꺼트려 주었다.
사실 승자 쪽이나 패자 쪽이나 안전한 것은 똑같지만, 단어에서 주는 안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럼 단장님이 저희를 놀린 것으로 이해 하겠습니다.”
“…뭐 그렇지.”
자넷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상급자의 입장에서 크리스의 방금 행동은 꽤나 까다로웠을 것이다.
매우 짧은 순간이지만, 하극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이 선 반응이었으니까.
하지만 크리스가 매 사건에 이런 식으로 반발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자넷의 장난이 원인이었고, 나를 잃는 것에 트라우마를 가진 크리스의 역린을 건드렸기에 생긴 불상사였다.
그렇기에 자넷으로서도 크리스에게 경고를 주지는 못했다.
자신에게도 큰 책임이 있었으니까.
“그러면 여기서 그 영지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느긋이 가면 엿새. 하지만 우린 나흘 안에 가야 해.”
“중간에 휴식은 많이 없겠네요.”
“기본적인 체력은 되지? 아, 크리스가 저리 홀린 걸 보니 체력은 아주 넘치겠네? 큭큭큭!!”
- 휙휙!!
자넷이 오른손을 주먹 쥔 채 자신의 머리 근처에서 위아래로 흔들었다.
마치 남성의 자위를 연상케 하는 손놀림이다.
그리고 의미하는 것 역시 그것이 맞았다.
“미친년…”
자넷은 (전)광년이이게 미친년 정품 인증을 받았다.
*
대학을 그만둔 지금, 현실과 소설 속 세상의 시간 균형을 맞춰야 할 이유가 크게 줄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에서만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테라포밍에서도 볼 일이 있었으니까.
나는 방금 첫 내근직 업무로써 전투직 합숙소를 방문한 뒤 나오는 길이었다.
아쉽지만 크리스는 나와 함께 이곳으로 출장 오지 못했다.
감찰팀은 총 3개의 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팀 하나에 속하는 팀원이 상당히 소수였다.
한 팀에 신입을 두 명이나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와 크리스는 다른 팀에 배정받았다.
‘다행히 지구나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에서 실컷 보니까 크리스도 달랠 수 있었고.’
띠링!
=
[스킬]
이름: 고함
레벨: 0Lv
효과: 목소리를 크게 만듭니다.
상세: 스킬 습득 시 자동으로 성량이 커집니다. 마나를 불어 넣어서 효과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가격: 30,000 카르마
[구매하기]
=
첫 출장의 성과는 있었다.
비록 절대 살 생각이 들지 않는 스킬이었지만, 이 스킬을 가진 전투직과 만나는 즉시 상점창에 스킬 등록이 되었으니.
패시브가 달린 스킬인 만큼 내가 그를 만나자마자 이능의 효과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커지는 패시브… 생각보다 꽤나 불편해 보였지.’
구매의 가능성이 저 밑바닥으로 박힌 이유였다.
레벨이 오르면 효과가 달라질지도 몰랐지만, 패널티가 달린 스킬에 30,000 카르마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선배님, 저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어서…”
“여자랑? 설마… 바람은 아니지?”
“에휴… 멍청아. 잘생긴 놈은 원래 친구로 지내는 여자가 많아.”
“…그래?”
“꼭 애인 한번 사귀어 본 적 없는 놈이 여자와 남자관계 사이에 그런 것밖에 없는 줄 알지… 쯧쯧.”
“나 애인 있었던 적 많거든?”
“전부 네 전투직이라는 배경 보고 들러붙은 거겠지. 이 머저리야.”
“…”
“하하… 전 천천히 복귀하겠습니다. 조심히 퇴근하세요.”
“그래. 수고해라.”
“그, 혹시 여자 사람 친구가 많으면, 나도 나중에 소개를 좀… 으헉!”
“신입 앞에서 선배 망신 시키지 말고 제발 입 좀 닫고 따라와!”
나는 감찰부 선배를 배웅했다.
다들 좋은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물론 좋은 사람의 기준은 나의 사생활을 깊게 캐묻지 않는다는 뜻이다.
- 터벅터벅. 탁.
걸음을 옮겨 약속을 잡은 사람과 만나기로 한 식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쉘터 외각 특유의 더럽고 조잡한 건물이 아닌, 깔끔한 식당이었다.
몇 번 이곳에서 식사했기 때문에 음식의 질 또한 괜찮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식당뿐만이 아니라 주변 건물들은 나름 깔끔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투직 합숙소와 붙어 있는 이 주거 지역은, 당연하게도 쉘터의 가장 외각이었다.
하지만 이 근처 주민들은 쉘터 중심부에 비견 될 정도로 생활 수준이 높았다.
돈 많은 전투직들이 외출·외박을 나올 때면 아낌없이 돈을 쓰고 복귀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전투직은 이 근처에서 괜찮게 놀 수 있지. 좀 덤터기를 씌우더라도 전투직에겐 부담되지 않을 수준이니…’
- …터벅터벅.
식당 건물을 구경하고 있을 때쯤.
정확히 내 쪽을 향해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조금은 궁금했기 때문에.
- …
마침내 그녀가 내 등에 서 있었다.
몇 초간 망설이는 기척이 느껴진다.
곧, 나의 어깨에 손가락이 닿았다.
- 툭툭.
“…오,오래 기다렸냐?”
“왔어?”
“12구역에 올 때는 미리 연락하라고!…”
“핸드폰도 없는데 어떻게 연락을 해?”
“…쳇.”
평소 같은 날이 서지 않은 까칠함이었다.
내가 첫 번째로 출장을 나온 곳은 12구역이었다.
그리고 오늘 비번이었던 리 샤오린을 마주칠 수 있었다.
점심 식사 후 나무 그늘 밑에서 낮잠을 때리던 리 샤오린은 나를 마주치고는 엄청나게 당황해했다.
작게 욕설을 내뱉을 정도로.
“뭐야. 너 왜 차려입은 것 같냐?”
“펴,평범한데? 네 눈이 이상한 거야.”
“그런가? 음… 아무튼 들어가자.”
- …끄덕.
내 칭찬 아닌 칭찬에 살짝 얼굴이 밝아진 리 샤오린과 함께 식당에 들어갔다.
이 식당에서의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 먹어줄 만했고, 리 샤오린은 갑작스러운 나와의 만남을 즐겼다.
나와 그녀는 식사 후 간단한 산책 이후에 헤어졌다.
리 샤오린은 외출을 나온 것이지, 외박을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 역시 그녀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열매는 알맞게 익었을 때 먹어야 가장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