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둘 모두 하얀 고래 용병단이 된 걸 환영해.”
“그런데 단장님. 그거 아시나요?”
“응?”
“저희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습니다.”
“푸하하! 그러네!”
나와 크리스는 오십여 명의 용병 단원들과 통성명을 나누었다.
그들은 동양식인 나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했지만, 역으로 이질적이었기에 쉽게 외웠다.
당연히 인사를 나눈 인물 중에서는 용병 단장과 멜 또한 섞여 있었다.
나는 용병 단장의 상태창을 열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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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자넷
[직업] 용병 단장
[힘] 34 [민첩] 33
[체력] 33 [지능] 15
[기교] 32 [매력] 50
[마나] 107
[특성] 『양자택일』
=
=
『양자택일』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할 때,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감각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단,
하나의 분야에 대해서만 특성이 발동합니다.
분야의 선택은 특성을 보유한 사람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현재 ‘자넷’님의 선택된 분야 - 금전
[금전]과 관련된 것에 대해 양자택일 시, 높은 확률로 올바른 선택을 내립니다.
=
‘이건…’
지금까지 본 특성처럼 정형화된 버프가 있는 것이 아닌, 명확하게 성능을 구분 짓지 못하는 효과가 적혀 있었다.
이 특성의 유용함은 직접 겪어봐야 확실히 알 것 같다.
단순한 상상대로라면 이 특성은 무척이나 쓸모가 많아 보였다.
다른 자잘한 버프를 포기하고 성능을 한 곳에 집중시킨 느낌이다.
자넷의 스텟은 다른 용병 단원과 비교해서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높았다.
이 정도면 테라포밍 세계에서도 충분히 교관을 할 수 있을 정도다.
민첩을 제외한 나머지 스텟은 크리스와 비슷했다.
나조차도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스텟 증가 버프를 2배로 받는 낮이 아니라면, 스텟의 총합은 자넷보다 낮았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밤에 싸우면 진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목숨을 건 싸움은 단순히 스텟의 숫자 놀음으로 결과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봐 파계승. 원래대로라면 신입은 한 달 동안 견습을 거처야 해. 그래야 보수를 나눌 때 1 몫을 받을 수 있어. 견습일 때는 절반의 몫만 가져가고.”
“원래대로라… 그렇다면 저희는 좀 다르게 적용이 된다는 말이군요.”
“큭큭. 눈치 빠른 놈. 내 느낌상 너희 두 명은 실력 증명을 길게 잡을 필요도 없는 베테랑 같단 말이지?”
“…밝히지는 못하지만 나름 경력이 있죠.”
“그렇다면 굳이 견습 딱지를 질질 끌 이유도 없을 것 같고…”
“바로 한 몫을 쳐주겠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러면 우리만 호구 되는 거잖아. 한 달간 반 몫만 줘도 되는 걸 괜히 한 몫으로 늘린 거니까.”
“그렇다면?”
“어때. 내가 ‘견습 기간’을 없애 준다면… 넌 우리 용병단에게 뭘 해줄 수 있어? 돈 냄새가 좀 나거든. 너한테서.”
- 씨익.
자넷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내게 거래를 요청했다.
‘이게 특성의 효과인가?’
상당히 날카로워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자넷의 말대로 내게 돈이 될만한 능력들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도 패를 하나 까기로 했다.
까더라도 손해가 없는 패를.
“…저는 간단한 감정을 할 줄 압니다.”
“감정?”
“아까의 벨데루 씨앗 농축액이요. 그것도 감정을 한 겁니다.”
“…아.”
“마법인지, 수도승의 비전인지, 아니면 아티팩트인지는 비밀입니다.”
“그런 건 상관없어. 감정… 감정이라… 그렇다면 유물이나 장신구의 가치도 측정 가능해?”
“물건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너무 특수하거나 강력한 물건이면 감정에 실패할 수도 있거든요.”
“독은?”
“…일단 시험을 해봐야 알 것 같은데, 가지고 계시는 독약은 없습니까?”
“멜! 가져와 봐!”
“넵!”
- 후다닥!
나는 멜에게서 입구가 꽉 막힌 병을 받았다.
좁은 입구는 밀랍 비슷한 것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막혀 있었다.
뚜껑을 열지 않아도 아이템 정보 확인은 가능할 것 같지만, 보지도 않고 알아채는 것은 좀 수상해 보이니 조심스레 입구를 열었다.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흑사(黑蛇)의 마비 독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마비 상태이상 부여
상세:
강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흑사(黑蛇)의 마비 독입니다.
누런 색깔과 독특한 맛을 지녔지만, 향은 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독에 당할 경우 몸에 열이 오르며 손과 발이 굳습니다.
소량이라면 죽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회복되지만, 대량 투약 시 사망까지 이릅니다.
* 경구 투약은 효과가 미미합니다.(단, 입안에 상처가 없을 경우.) - 아이템 정보 확인 2Lv
* 흑사(黑蛇)의 주식이 되는 땅개구리를 고아서 먹으면 독의 중화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 아이템 정보 확인 2Lv
=
다행히 내가 원하던 정보는 전부 담겨 있었다.
“흑사의 독이네요. 땅개구리를 고아서 먹으면 해독되고요.”
“…원래 알고 있던 건 아니지? 흑사의 독은 흔하니까.”
“그럼 다른 걸 가져오면 다시 감정하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독은 그게 끝이야.”
독은 이걸로 끝이었지만, 처음 보는 가죽이나 물건 같은 것을 몇 번 더 감정을 한 끝에야 나는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자넷의 표정을 보니 꽤나 기뻐 보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마법사나 연금술사에게 물건을 감정받는 것에 큰돈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흐흐. 돈 굳었다. 그동안 내가 감정비 때문에 얼마나 속 쓰렸는지 알아?”
보통의 용병단이라면 유물이나 아티펙트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얻는 일은 상당히 적다.
용병단 내부에 감정사가 있다고 한들 일 년에 한번 쓸모가 있을까 말까이리라.
하지만 이들은 큰 건수를 위주로 의뢰를 받는 일류였다.
종종 큼지막한 의뢰를 하다 보면 정체불명의 물건을 발견하는데, 그때마다 소모되는 지출이 꽤나 컸다고 한다.
‘물론 자넷의 특성 덕에 감정을 한 이상 아주 높은 확률로 본전을 뽑았겠지만.’
저리 앓는 소리 하는 것도 다 과장이다.
유물의 가치보다 감정의 값이 더 들면 그것을 귀신같이 눈치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 파계승과 그의 연인 크리스는 수습 기간 없이 처음부터 1 몫을 받는 거로 한다! 그리고 감정을 받은 물건의 판매액에 대해선 파계승은 2 몫을 챙긴다! 이의 없지?”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넷은 용병단에게 커다란 신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금처럼 금전적인 분배와 조절은 더더욱.
“음… 제 이름을 알려 드렸는데 계속 파계승이라 부르실 건가요?”
“기분 나빠? 그래도 참아. 내가 네 상사거든.”
“딱히 상관은 없지만…”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자넷이 내 생각보다 너무 예측 불가라서 떨떠름했을 뿐이다.
- 톡톡.
팔뚝을 손끝으로 두들겨지는 감촉에 옆을 돌아보자 크리스가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작게 손짓을 하는 것이 고개를 숙여달라 하는 것 같다.
아마 남들 몰래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다.
- 스윽…
“찬영은 어떻게 이 세계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물건을 감정하는 것도 찬영의 능력?”
“내 능력이 맞아. 그리고 내가 전에 다른 차원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얻게 된다고 했지?”
“그거의 연장선인 거야?”
“그런 거지.”
- 휘익!
서로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작게 속삭이던 우리 둘은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에 얼굴을 뗄 수밖에 없었다.
소리를 낸 주인은 역시나 자넷이었다.
그녀 말고는 우리에게 이리 서슴없이 행동할 사람은 없었기에.
“연인 사이 뜨겁네. 어휴. 아주 부러워? 엉?”
“자넷 단장님은 연인을 만들지 않습니까?”
“흐흐… 나를 얻으려면 둘 중 하나여야 돼. 돈이 아주 많거나, 아주 많아질 예정이거나.”
그렇다면 조금 전 나를 탐낸 자넷이 판단하기에 나는 ‘돈이 아주 많아질 예정인 남자’로 보였다는 뜻일까?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만큼 쉽사리 판단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자넷은 ‘뒤죽박죽’이라는 단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으니.
“좋아. 이러면 추가 보수네.”
“추가보수?”
“어. 우리가 굉음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이곳에 온 건 알지?”
“네.”
“근데 굉음의 원인을 퇴치할 수 있으면 퇴치해 달라고 했거든. 그러면 추가 보수를 준다면서.”
“아…”
난 그제서야 자넷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어째서 그녀가 이렇게나 신나 보이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니, 깨달은 줄 알았으나…
사실 그녀가 신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굉음의 주인인 제가 사라졌으니 의뢰는 완료되었군요. 마을에 민폐를 끼친 것을 사과해야…”
“아니아니, 무슨 소리야? 너 설마 네가 굉음의 원인이라고 밝히려고?”
“네?… 그러면 밝히지 말까요?”
“어휴. 너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안 굴러가는구나? 뭐, 짬이 차면 저절로 습득하겠지. 얘들아!! 작업 시작해!!”
- 네!!
- 움직여!
- 토끼, 토끼 자루 여기 있어!
- 어디 쓸만한 나뭇가지가…
- 나도 나뭇가지…
자넷의 말에 용병 단원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 크리스는 그런 오십여 명의 용병 모습을 멍하니 봤다.
아, 추가로 멜까지도.
가장 먼저 브랙과 비슷한 덩치를 가진 사내가 토끼가 들어있던 자루를 가져왔다.
그러더니 자루에서 토끼를 네댓 마리를 꺼내 칼로 찔러 죽였다.
- 끼익!! 끽!!
순식간에 옷과 칼이 피범벅이 된 사내는, 피가 뚝뚝 흐르는 토끼 사체를 다른 용병에게 넘겼다.
건네받은 용병 역시 토끼의 피를 가죽 갑옷과 칼에 묻혔다.
‘잠깐… 저거 설마…’
난 이제야 좀 감을 잡기 시작했다.
이들이 왜 이런 기행을 벌이는지.
크리스와 멜은 아직도 어벙벙한 표정이었다.
얼굴에 ‘멀쩡히 잘 관리가 돼 있던 칼에 토끼의 피는 왜 묻히는 거지?’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찾아다니던 용병은…
“찬영? 저 남자 지금 다리에 부목을 대고 있는 거야? 다,다치지도 않았는데 왜?…”
“아…하… 하하… 그러네. 이들은 용병이었지?”
“용병? 그게 왜?…”
나는 대답을 해주는 대신 용병들의 기행을 좀 더 지켜봤다.
그런 나를 보고 자넷이 놀란다.
“오. 파계승. 설마 눈치챘어?”
“…용병은 다들 이런 겁니까?”
“이야. 머리 좀 돌아가네? 믿음직스러운데? 그리고 이렇게까지 하는 용병단은 없어. 반대로, 이렇게까지 하기에 하얀 고래 용병단이 일류인 거야.”
참…
저 말에 동의해야 할지 약간 고민된다.
이들이 하는 행동은 중세시대 용병이 할 법한 짓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일본어가 어원이니 사용하면 안 되지만, 군대 용어로는 ‘가라’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아니, 이건 가라를 넘어선 위법이다.
걸릴 리 없는 위법.
“자, 하얀 고래 용병단은 ‘굉음’의 원인인 거대한 몬스터와 치고받고 싸운 끝에 놈을 이 마을 밖의 머나먼 곳으로 쫓아 낸 거다?”
“참 힘든 싸움이었죠.”
나는 피식 웃으며 자넷의 말에 동조해 주었다.
그런 나를 자넷이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낄낄낄. 그랬지. 저기 봐라. 우리 용병 단원이 전투 중에 다리 부러진 거… 가슴 아파서 어떻게 하냐?”
- 절뚝!절뚝!
“이거야… 의뢰 완수금으로는 만족 못 하겠는데?”
타이밍을 맞추듯, 옆에서 덩치가 큰 사내가 자넷에게 다가왔다.
내게 자신이 부단장이라 소개한 인물이자 가장 이 ‘가라’를 주도적으로 행한 사내다.
“단장님. 수리가 필요한 갑옷이 7벌, 칼이 13자루 있습니다.”
“마을에 대장간이 있었지?”
“네.”
“무료로 수리받아.”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건조 식량은 아직 여유분이 넉넉한데…”
“그래도 받아 내. 전부, 받을 수 있는 거 모조리 뜯어.”
“예.”
“아, 따뜻한 잠자리와 오늘 밤 즐길 술과 안주는 당연해 포함해야 하는 거고.”
“의뢰 완수금, 무기 수리, 식량, 술과 음식, 잠자리. …기억했습니다.”
“맡길게.”
- 꾸벅.
자넷의 명령을 들은 사내는 깔끔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50명 전원이 위장을 끝마쳐 있었다.
마치 이제 막 격렬한 전투를 끝낸 것만 같은 패잔병의 몰골이다.
“파계승 네가 이 공터를 만들어 둔 덕분에 장소에 대한 위장은 크게 필요 없을 것 같네!”
“이미 이 주변은 토끼 피로 범벅인걸요.”
“낄낄낄. 어때. 처음 겪는 제대로 된 ‘용병질’에 대한 소감은?”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하네요.”
“잘 들어. 용병은…”
“…”
“무슨 일이 있어도 정직하게 돈을 벌지 않아.”
내가 느낀 자넷의 첫인상은,
진짜 돈 귀신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