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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짓궂은 장난이시네요.”

“장난으로 보여?”


- 씨익.

나를 향해 웃는 용병 단장을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병에 든 것은 독약이 아니란 것을.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벨데루 씨앗 고농도 추출액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각성 상태 유지.
상세:
각성 상태가 됩니다.
마신 양에 따라 지속 시간이 늘어납니다.

- 각성 상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심장이 1.5배 빠르게 뜁니다.
쉽게 흥분하며, 피부가 빠르게 붉어집니다.

* 종이컵 반  분량을 마시면 24시간 동안 각성 상태가 유지됩니다. - 아이템 정보 확인 2Lv
* 한 번에 많은 양을 섭취하면 부작용이 있습니다.(상태이상 기절) - 아이템 정보 확인 2Lv
=


이 액체를 지구로 친다면 아주 고농도의 커피다.
에스프레소의 몇십 배에 달하는 위력이라고 보면 된다.
독약이 아닌, 강력한 각성제인 것이다.


토끼가 이걸 먹고 죽은 이유는 간단하다.
안 그래도 심박수가 어마어마하게 빠른 토끼가 이 약을 먹고 1.5배 더 빠르게 뛴다?
1분이면 쇼크가 오기에 충분하고도 넘치는 시간이다.

물론 용병 단장은 이런 원리를 알 리가 없다.
우연히 토끼가 이걸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발견한 뒤, 이렇게 담력 시험으로 써먹고 있는 것이다.
이 액체는 벨데루의 씨앗을 물에 넣고 볶기만 하면 돈을 들이지 않아도 쉽게 만들 수 있는 액체니까.


- 끈저억…


나는 손을 들어 액체를 매만져 끌어내었다.
점성이 높은  추출액은 마치 콧물과 같아 손으로 집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손으로 매만지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코에 가까이 대어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도 했다.
이런 행동을 안 해도 시스템과 원작 소설의 덕에 이 액체의 정체를 알지만…
이 모든 것은 용병 단장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다.
내가 이 추출액의 정체를 알아내어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되게끔.

“큭큭. 겁먹었어?  바로 안 먹어?”


“벨데루 씨앗의 농축액이군요.”

움찔!


“…”
“엇?”
“어라?”

내 말에 모여있던 용병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용병 단장은 아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놀란 표정을 만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


“…너 ‘제국’ 출신이야? 이 왕국에는 씨앗을 아는 사람이 많이 없을 텐데?”

“아뇨. 제가  박식해서요.”

“…어이없네.”

“아무튼… 이건 인간에게 해가 없습니다. 심박수가 빠른 작은 동물이 먹게 되면 치명적이지만요.”


“시,심박수? 그게 뭔데.”

“음… 설명해 드려요?”

“…아니. 괜찮아.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고.”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용병 단장의 얼굴이 장난에 실패한 꼬마처럼 변했다.
내가 정답을 알고 있으니 나오는 아쉬운 표정이다.


하지만 나에 대한 흥미가 식어 심드렁하게 쳐다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꽤나 쓸만한 물건을 발견한 듯한 흥미가 샘 솟는 표정을 만들었다.

“뭐… 담력 체크는 실패했지만… 너 꽤나 박식한 것 같고, 쓸모가 있어 보이네?”


“합격인가요?”

“큭큭. 어서 마시고 빈 병이나 내놔. 그거 마시는 것이 우리 용병단의 입단 전통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굳어졌어.”

“…”

“뭐야. 왜 안 마셔? 한동안 잠 좀 못 자겠지만, 인간에게 해는 없는 걸 알잖…”

- 주르륵.

“허?…”
“미친.”

나는 망설임 없이 농축액을 바닥에 쏟아 버렸다.
끈적한 액체답게 천천히 떨어지는 검붉은 액체를 보며 용병단 전원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입단이 확정된 상황에서 내가 뒤집어 버렸으니 당연하다.

‘…난 오히려 저 많은 용병 단원들이 전부 독약인 걸 알고 먹었단 것이 더 이해가 안 가는데…’

아무리 진짜 독약이 아니더라도, 마신다는 행위 자체가 목숨줄을 타인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걸 노린 건가?
같이 칼밥 먹으려면 목숨 정도는 맡겨야 한다고?

‘교육 수준이 중세와 비슷해서 그런가? 진짜 무식하게 나가네…’

음…
생각해 보니 이런 짓거리도 하얀 고래 용병단의 이름값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짓이다.
왕국에서 손에 꼽히는 용병단이니 해약은 줄 것이라 생각하고 마셨음이 틀림없다.

유명한 용병단의 입단 시험 도중 사망자가 나오면 소문이 나돌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만 이 농축액을 먹고 사망자가 나올 리 없다.
이 단원들 입장에서는 그런 소문은 들어 보지 못했으니 믿고 마시는 것도 약간, 아주 약간 납득이 갈만한 판단이다.

“이게 뭔…”


용병 단장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아무 생각 없이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내가 바닥에 농축액을 쏟은 건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
이미 그녀는 나를 용병단에 넣을 생각이었다.
내가 지식이 많고, 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팩트를 강하게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제 ‘첫인상’이 새겨지고 있을 때니까.
지금 타이밍에 좀  나의 유능함을 내보이면 좋으리라.

“도대체 왜?”


“이건 확실히 벨데루 씨앗 농축액이지만… 뭐가 섞였는지 모르는데 미쳤다고 남이 준 것을 입에 대겠습니까?”

“…그런 이유로?”

“뭐… 잘 생각해 보세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요.”

나는 용병 단장이 가진 모든 의문을 풀어 주는 대신 대답을 피했다.
이 세계 인물치고 그녀는 똑똑하니, 내 말뜻을 알아들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깨달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면 된다.

“그 농축액에 섞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

“믿겠습니다.”


“너 혹시 이렇게 막 나가도 내가 용병단에 넣어 줄 거라 생각했어?”


“절반쯤은요?”

“절반은 개뿔. 아주 확신에 찬 얼굴이네. …왜?”

“글쎄요?”

“…보통이라면 얌전히 그 농축액을 마셨을 거야.”

“그렇겠죠.”


“…돌겠네.”


- 타악!


용병 단장이 자신의 이마를 짚은 채 탄식했다.
그래도 그녀는 점점 정답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면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 같다.


“아!…”

- 휘익!

고민하던 용병 단장이 뒤를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을 보니 드디어 알았나 보다.


“파계승. 너, 상황에 휘둘리지 않네? 마셔야 할 분위기가 만들어졌는데도 이성적으로 판단했어.”

“오… 맞았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용케 알아들으시네요?”


“…와… 진짜 골때리는 놈이네. 너 지금 나 시험한 거냐?”


“단원으로서 단장의 판단을 의심 없이 따르기 위해서는, 그 능력에 확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푸흐흐흐… 존나 맞는 말이야.”


정답을 알아낸 단장이 시원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괴짜나 좋아할 법한 방금의 유머 포인트에서 재미를 찾았나 보다.
그녀는 수전노이자 괴짜였으니까.

“이 새끼… 큭큭. 자기주장은 확실히 하네. 네 자랑이 그렇게 하고 싶었냐?”

“그래야 나중에 제가 할 조언에 무게가 실리지 않겠습니까.”

“넌 임마. 나같이 호탕한 성격의 단장이 아니었다면 전부 건방지다고 쳐냈을 거야. 알아?”


안다.
내가 단장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   있었던 행동이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행동은 좋은 결과를 내었다.
그녀는 내게  호의를 품은  같았으니.


“제가 뭐 용병단에 들어가는 것에 절박한 것도 아니고… 저도 속 좁은 사람 밑에 있기는 싫습니다.”

“푸하하! 지금 나 그릇 넓다고 빨아 준거냐? 이야… 시발놈. 매력 있네. 옆에는 애인?”

“예. 저의 확실한 연인입니다.”

“…그건 좀 아깝구만.”

- 째릿!

살짝 입맛을 다시는 단장을 크리스가 강하게 노려본다.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단장의 앞에서 연인임을 과시했다.
그제야 크리스는 경계를 풀었다.

단장은 확실히 아름다웠지만, 나설 때 나서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해 크리스가 슬퍼하는 건 보기 싫었다.
바람도 들키지 않을 능력이 있어야 필 자격이 있는 거다.

“아, 당연하지만 제가 입단할 때 저의 연인도 같이 입단하도록 부탁드립니다.”

“허 참. 이젠 조건까지 제시해? 너 정말 수도승 맞냐? 아, 파면됐다고 했지? 썅.”

“싫으시다면 뭐 저희의 인연은 여기까지…”

“잠깐. …네 애인은 제 몫을 할  있어?”


“그녀는 저와 비슷할 정도로 강합니다.”


“그럼 둘 다 확인 좀 해보지. 말만 듣고는 등을 맡기지 못하니까. 멜!”
“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상대해 봐.”
“제,제가요?”
“네가 우리 중 제일 약하잖아.”
“그렇기에 더더욱… 이,이런 광경을 만든 사람을 두 명 연속으로 상대하는 건 제겐 너무…”
“너 지금 견습 2주차지? 그럼 남은 견습 기간 빼고 정식 단원으로 승격 시켜 줄게. 얘들아! 오늘부터 멜의 몫은 1 몫이다!”

예!!

“우왓! 정말이에요? 당장 할게요!!”

- 후다닥!

멜은 신이 나서 우리의 앞으로 뛰어나왔다.
표정이 밝아 보이는 것이, 승격이 정말 기뻤나 보다.

우선은 내가 먼저 상대하기로 했다.
내 실력을 먼저 보고 싶었던 단장의 지시였다.
나와 멜을 둘러싼 사람으로 이루어진 작게 무대가 만들어졌다.
오십여 명의 용병 단원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신입의 기를 죽이려는 건가?’


부담은 전혀 되지 않았다.
몸이 바뀌기 전에는  명이 넘는 친구들의 모임을 주도해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멜씨 맞으시죠?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부탁드립니다.”

“혹시 멜씨도 벨데루 농축액을 먹었나요?”

“아… 하하.  그걸 한 번에  먹고 사흘간 잠을 못 자다가 결국 기절했죠…”


나는 안심했다.
테라포밍 때와는 달리 원작과 틀어진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간섭하기 전에는.
하얀 고래의 발자취에는 머리 아픈 시간 여행이 얽혀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과거 수도승이었던 사람답게 예의를 차려 멜에게 인사를 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는 동양식 인사에 가까웠지만, 청년보다는 앳된 아이에 가까운 멜에게 정중함을 보이는 것만으로 꽤나 그럴듯하게 느끼겠지.
물론  컨셉도 이들과 친해지면 버릴 거다.

“어… 저… 무기는?…”

“저의  주먹입니다. 선공을 양보해 드릴게요.”

“…그,그럼 사양하지 않고…”

- 스겅.


나의 말에 멜이 칼자루를 잡아 올렸다.
잘 관리  롱소드는 날 선 소리를 내며 유려하게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멜은 나를  후,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예의상 내게 보내는 선공에 들어가겠단 신호였다.
나는 그에 호응하듯 자세를 잡았다.
멜의 표정이 진지하게 굳어지더니, 나를 향해 도약했다.

- 타악!

나의 상단을 노리고 오는 깔끔한 옆 베기.
약간 뒤틀린 손목의 모양을 보니, 내게 칼날이 닿기 직전에 억지로 검면으로 틀 생각인 듯했다.
내가 칼날을 막을 방어구나 무기가 없단 것을 의식한 것이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거대한 스텟 차이에, 배려가 섞인 상냥한 공격이다.
덕분에 칼날은 너무나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사념각(邪念脚)을 쓰지 않고도,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었을 정도로.


“으엇?!”


나는 짓이겨 드는 멜의 칼날을 간단하게 피한 뒤, 그의 사각에  있었다.
이대로 주먹을 내지른다면 분명 큰 피해를 입으리라.


- 툭.

내 주먹은 멜의 옆구리에 아주 살살 닿았다.
그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힘을 조절해서.
곧 동료가 될 인물인데, 굳이 부상을 입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내게 살수를 쓴 것이면 몰라도…


- 야! 멜! 왜 힘 빼고 한 거냐!
- 젠장, 거의  것도 없잖아!
- 다시 해!

“져,졌습니다…”

“음… 너무 저를 배려하셨네요. 닿기 직전에 검면으로  생각이셨죠?”


“그걸 보셨어요?!”

대답은 미소로 대신해주었다.
다들 아쉽다고 원성이 자자했지만, 나의 입단 실력 증명은 이걸로 끝이 났다.
최소치는 너무나 여유롭게 넘겼으니까.

용병 단장이 앞으로 같이 활동 하다 보면 실컷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모두를 진정시켰다.


“난 맛있는 건 아껴먹는 주의거든. 큭큭큭.”

비록 내가 포장한 것처럼 깨끗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 다음은 크리스의 차례였다.

“그쪽도 주먹? 아니면 허리춤에 달린 단검? 주 무기로 보이는 놈은 안 보이네.”


크리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아공간에서 칼을 꺼내는 것을 허락했다.

스윽…


“헛?!”
“뭐,뭐야?!”
“마법!!”
“마법사?”

“아뇨. 아티팩트입니다. 자루 크기만 한 공간에 물건을 저장할 수 있죠.”

“…아하.”
“그러고 보니 마탑에서 저런 비슷한 걸 판다고 들은 기억이…”
“너도 아티팩트 있었지?”
“내건 저렇게 유용하지 않아…”


“정확히 어떤 능력의, 무슨 모양의 아티팩트인지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욕심을 내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고… 굳이 알 필요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네. 다들 들었지? 괜히 수상쩍게 캐내지 말자고. 멜! 시작해!”
“넵!”

다들 납득하는 눈치였다.
아티팩트는 비쌌지만, 그렇다고 미치도록 희귀한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크리스에게 목소리를 최대한 줄여 말했다.


“몸을 아공간에 담을 수 있다는 건 숨기자. 정말로 ‘아티팩트’를 욕심내는 놈이 나올 수도 있어.”

“…알겠어.”

괜히 적을 만드는 행동은 줄이는 것이 좋다.
크리스는 이능은 물론, 나와 마찬가지로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도 멜을 간단하게 압도했다.
우리 둘은 하얀 고래 용병단에 무사히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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