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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108) (108/310)



〈 108화 〉하얀 고래의 발자취

눈앞의 용병 단장은 꽤나 미인이었다.
비록 베테랑 용병답게 가죽 갑옷이 온몸을 가려 정확한 몸매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소설 속 묘사대로라면 분명 나를 실망시키기 않으리라.
그렇기에 초면에 말을 서슴없이 놓은 그녀의 실례는 충분히 용서할  있었다.
나의 관대함은 미인을 향해 열려있다.

“들어 본 적 있어? 우리 나름 유명한데.”

“들어 봤습니다. 하얀 고래 용병단.”

“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 그래서 대답은? 싸울 거야?”

옆에 서 있는 크리스를 돌아보았다.
크리스는 생각보다 무척 멀쩡한 원주민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물론 전혀 티 내지 않았고, 그녀와 보낸 시간이  나만이 눈치챌 정도로 작은 동요였지만.

크리스는 분위기를 읽고 있었다.
언제든 아공간에서 칼을 빼낼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나는 대답을 재촉하는 용병단의 단장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우리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툴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단순히 수련하기 위해 소음을 낸 것이니까요. 이것이 민폐가 되었다면 그만두겠습니다.”

“수련이라… 둘이서 번갈아 가면서 수련 한 거야? 너와 옆에 선 여자랑?”


“아뇨.  흔적은 전부 제가 혼자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칼을 사용하거든요.”

나는 이 용병단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당연하지만 크리스와 함께.
그렇다면 크리스가 주먹을 사용한다는 변명은 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그녀의 주먹은 강했지만, 이렇게 따로 수련할 정도로 주력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니.

“…너 혼자? 그렇다면 좀 앞뒤가 안 맞는데. 보통 수련을 밤낮없이 해? 휴식 시간도, 수면 시간도, 하다못해 밥과 물을 먹을 시간도 없이?”

“수련으로 인해 발생한 소리를 들으셨나요? 하루 종일?”

“어. 이 근처에서 며칠 지냈거든.”

의심스러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걱정할 것은 없었다.
저건 나를 흔들기 위한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며칠간 굉음이 끊이지 않은 것을 확인   이들이 아니다.
용병단이 이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늘이니까.
즉, 이 여자는 단순히 마을 주민에게 들은 정보로 나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밝혀내기 위해 유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실수를 하기를.

“음… 이상하네요. 저희는 짧지만, 분명히 휴식을 가졌습니다. 적어도 식사나 변소를 해결할 때는요.”


실제로 마을 사람들이 굉음을 24시간 끊이지 않고 들었다고 한들 상관없다.
이렇게 대답하면 이들은 ‘굉음에 위협을 느낀 의뢰주가 한 번도 굉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과장한 거군.’이라 생각할 것이다.

거짓은 거짓으로 답하면 된다.


게다가 좀  먹음직스러운 부분이 눈을 사로잡을 것이다.
용병 단장은 기다렸다는  내가 일부러 내비친 약점을 찔러왔다.

“그렇다면 잠은 안 잤다? 2주간? 하, 거짓말이군.”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럼? 어린애처럼 밤에 잠자기 싫었어? 그래서 2주간 잠을 안 잔 거고?”

“고행 중입니다.”

“고,고행?…”

“예.”


“…쯧. 수도승이었나… 그러고 보니 주먹을 사용했지? 게다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동양인처럼 보이고.”


“파계승이지만요.”


“허…”


이 세계에 종교가 있는 것은 알고 있다.
덕분에 파면된 수도승이라는 변명은 정말로 써먹기 좋았다.

특히 신실한 종교인과 거리가 너무나  용병들 앞에서 ‘파면됐다’라고 해서 밉보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용병무리는 희귀한 것을 본 시선으로 나를 봤을 뿐이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자는 없는 눈치다.


‘…찾았다.’


나는 수십 명에 가까운 용병 무리를 흩어본 끝에 내가 찾던 사람을 발견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야 그 인물의 특색은 무척 눈에 띄었으니까.


160cm를 간신히 넘기는 남자치고 작은 키.
아직 앳되다는 것을 증명하듯 볼살이 전부 빠지지 않은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흰색의 머리카락…
내가 아는 소설의 주인공 묘사와 완전히 같았다.


“좋아. 아무튼 싸울 생각은 없다는 거지? 그럼 상관없어.”

“왕국에서 손에 꼽히는 용병단과 대적할 생각은 없습니다.”

“푸핫.  장관을 만든 장본인에게 들으니 좀 간지럽네.”


그녀의 뒤에 선 용병단원은 대략 50이 안되는 숫자.
널리고 널린 용병단에 비하면 확연히 많은 수이지만, 그렇다고 일류로 꼽히기에는 적은 수다.
 세계는 전쟁은 물론이고 마을 사이사이에 몬스터들이 많아 용병업이 상당히 발전한 세계니까.
사람이 적은 이유는 이들이 입단 조건에  제한을 두어서 그렇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 소수, 정예, 그리고 고수익이었지?’

개개인의 몸값이 높은 이들을 모아 극단적으로 금전만을 추구하는 용병단이었다.
특히 저 갈색 머리의 여자 단장은 ‘돈 귀신’이라고 불리며 금전에 집착하는 증세를 보였다.
용병단에 머릿수가 많아지면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이 줄어드니 의도적으로 몸집을 줄인 것이다.


보통의 용병단과는 정 반대다.
다른 용병단은 수익을 늘리기 위해 어중이 떠중이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며 몸집부터 키우려 한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큼지막한 의뢰를 받게 되고, 수익은 높아지니까.

이들이 이런 선택을 할  있는 이유는 실력과 명성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머릿수가 적어도 높은 보수의 의뢰를 받아낼 수 있다는 자신이.
그런 의미에서 ‘하얀 고래’ 용병단은 상당히 눈에 띄는 용병단이었다.


“마침 잘 되었군요. 슬슬 고행을 끝마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한 여행을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나는 크리스를 향해 부드럽게 웃음 지으며 눈짓했다.
앞으로 내가 할 언행에 당황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 끄덕.


크리스 역시 내 표정을 본 후 작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녀가 내게 자주 보이는 신뢰가 담긴 몸짓이었다.


이왕이면 손이라도 잡아주며 안심 시켜 주고 싶지만…
 정도로 크리스가 어린애는 아니었다.
사실 상황이 특별해서 그렇지, 그녀는 챙김을 받기보다는 누군가를 챙겨주는 쪽이 어울리는 여자였으니까.

“…여행?”

“예. 어차피 목적지는 정해두지 않았으니, 용병단에 몸을 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추후 머나먼 타지에  때를 대비해 금전을 모아 놓으면 더욱더 좋을 것 같고요.”


“오호. 이건 좀 흥미가 있네. 그건 우리에게 의탁 할 생각이 있다는 뜻이야?”


용병 단장이 쓰러진 나무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며 내게 말했다.
 무력은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
용병단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훌쩍 뛰어넘고도 남았으리라.
실제로 증명하라면 증명  수도 있으니 곤란할 것도 없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이 크리스의 신분증인데…

“혹여 제 정체가 의심되신다면 신분증을 보여드리…”

“됐어. 정규군도 아닌 용병한테 신분증 따위를 왜 보여줘? 집어치워.”

이쪽에서 먼저 변명거리를 준비하고 나서자, 용병 단장이 듣기를 거부했다.
생각해 보면 용병에게 신분증을 보여 줄 이유가 없긴 하다.


“음… 등을 맡겨야  전우가 될 텐데 최소한의 검증도 없습니까? 제가 거짓말을 하는 흑마법사면 어찌하려고요?”


“신뢰? 하! 네가 마을 단위로 사람을 학살한 정신병자든, 시체 썩은 내를 풍기는 예비 리치든 상관  해. 우리나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만 않았으면.”

단장은 ‘들키지만 않았으면’을 강조하듯 말했다.
내가 돌변해서 이들을 기습하더라도  충분히 죽일  있다는 뜻이다.
분명 이 세계의 기준으로 이런 풍경을 만들만한 무력을 가진 인물은 손에 꼽을 텐데도, 이들은 내게 겁먹지 않았다.

그러리라 생각은 했다.
저 용병 단장의 반반한 얼굴 속에는 ‘용병은 깡으로 먹고산다’라는 힙스터 적인 마인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건 단장에게 물든 단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잘 들어. 우리 용병단에 들어오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해. 첫 번째로  몫을 제대로 해내야 할 거야. 뭐… 그건  풍경을 네가 만든  정말이라면 어려울 것 같지는 않고.”


“증명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나중에. 용병질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건… 담력이야.”
“막내야! 가져와!!”
“넵!”


후다닥!

브랙만큼 거대한 덩치를 가진 용병 단원의 고함에  남자가 잽싸게 움직였다.
흰색 머리를 가진 ‘하얀 고래의 발자취’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이 용병단에 들어온 지 고작 2주가 지난 막내였으니까.
나는 달려 나가는 그를 향해 상태창을 띄웠다.


띠링!

=
[이름] 멜
[직업] 용병
[힘] 21  [민첩] 22
[체력] 21 [지능] 10
[기교] 20  [매력] 27
[마나] 13

[특성] 『집중』
=

=
『집중』
성장이 가속됩니다.
전투 돌입  추가적인 효과를 받습니다.

훈련 시 기본 스텟 숙련도 상승 + 20%
훈련 시 스킬 숙련도 상승 + 20%
전투  시야 + 10%
전투 시 체감 시간 + 8%
=


마나를 얻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답게 그 수치가 적었다.
스텟 또한 3개월의 훈련소를 막 수료한 테라포밍의 전투직 평균 정도는 되었다.

어린 나이치고는 굉장히 높은 수치다.
 세계에는 테라포밍처럼 ‘마나 각성’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니까.
당연하지만 마나 각성으로 인한 성장 +50% 버프도, 이능 각성도 없다.
지구와 달리 그 성장의 한계는 풀려있지만…
오로지 극한의 육체 단련으로만 스텟을 올려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신체에 마나를 쌓는 것조차 쉽지 않다.
마나 호흡법 같은 비전 없이는 고된 수련으로 신체에 마나를 새겨야 했다.
여타 수많은 정통 판타지 소설처럼.

마지막으로 특성 『집중』의 경우는…


‘팔방미인의 하위호환인가? 시야가 늘어나는 건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덕에 필요 없고, 1초를 1.08초로 느끼게 해주는 버프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네.’

달려있는 숙련도 상승 버프는 내가 끊임없이 먹는 프룸의 버프만도 못했다.
물론 있는 것과 없는 건 거대한 차이가 있겠지만, 『중언』이나 『팔방미인』, 『강인』 같은 훨씬 유용한 특성을 확인한 내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특색이 있다 할만한  ‘체감 시간 + 8%’ 정도인데, 이조차 전투를 할 때만 적용되었다.


- 탁탁탁!

“여기 있습니다!”

스텟과 특성을 분석하며 시간을 보내니 사라진 주인공이 돌아왔다.
주인공, 멜의 양손에는 한 개의 커다란 자루와 한 개의 조그만 물병이 있었다.

- 꿈틀! 꿈틀!


 자루가 꿈틀거렸다.
저 안에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용병단장의 손이 큼지막한 자루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자루를 빠져나온 그녀의 손에는 살아 움직이는 한 마리의 토끼가 들려 있었다.

- 버둥버둥!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크리스가  팔을 톡톡 두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이,이 세계에서도 토끼가 있어…!’라면서.
나는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토끼 말고도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이 흔하게 나오는 세계관이었으니까.

“토끼는 어째서? 방금 말씀하신 저의 ‘담력’을 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잠자코 보고 있어.”

이미 용병 단장이 할 행동은 알고 있다.
하지만 예의상 모르는 척을 한번 해주었다.


“멜, 병 줘 봐.”
“넵.”

단장은 빈손에 멜에게서 건네받은 물병을 쥐었다.
나의 예민한 청각은 그 물병에 점성 있는 액체가 가득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 끽! 끼익!


단장의 손에 한치의 사정도 없이 강하게 붙들린 토끼는 애처롭게 울어대었다.
그리고 그런 토끼의 입으로 물병에 들어 있던 액체가 흘러 들어갔다.
적갈색을 띠는 액체는 토끼의 입 주변으로 끈적하게 흘러내리며 자신의 불길한 색을 과시했다.

- 끽! 끼…끽?


토끼는 인간으로 따지자면 세 모금 정도의 분량을 마셨다.
몸집이 작은 토끼치고는 꽤 많은 양을 마신 것이리라.
적어도 위가 가득 찼을 것이다.

“자. 거기 파계승, 이 토끼를 잘 봐.”

토끼는 점점 격렬하게 몸을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꽤나 흥분한 눈치다.
그러나 작은 생물의 발버둥 정도로 단장의 손을 절대 벗어나지 못했다.
약 1분이 흘렀을 때.

- 끼끽! 끽! 끼!……


활기차게 움직이던 토끼가 한순간에 축 늘어졌다.
눈을 뒤집고 거품을 문 것이, 단순히 기절한 것은 아니란 걸  수 있게 해주었다.
토끼의 숨은 끊어졌다.
저 병에 담긴 끈적한 액체를 마시고.


- 철퍽철퍽!


“효과 확실하지?”


- 타악! 턱.

물병에 남은 액체를 과시하듯 흔들던 단장은, 내게 그 물병을 던졌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 물병을 잡아챌 수 있었다.

“…무슨 뜻이죠?”

병의 안을 슬쩍 보니 검붉은 액체가 절반 이상 남아 있었다.
떨어진 거리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마치 사극에서 나오는 사약을 연상케 하는 액체였다.
방금의 토끼를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건강에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마셔. 그걸 마시면,  합격이야. 우리에게 해독약이 있을지는, 그리고 그걸 네게 줄지는… 알아서 판단하고.”

용병 단장이 싸늘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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