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지구
“한번 먹어봐.”
내가 크리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다음날 해가 뜨고 나서야 가능했다.
지구에 오자마자 나와 질펀하게 뒹군 크리스가 저녁도 먹지 않고 잤기 때문이다.
나 역시 크리스와 같이 먹기 위해서 안젤리와 아기천사의 저녁만 챙겨준 다음 끼니를 걸렀다.
덕분에 지금의 식탁은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호화로웠다.
- 덥썩. 오물오물.
양념이 밴 고기를 맛본 크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표정만 보아도 맛있어하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갈비찜은 동양 서양 가리지 않고 호평을 얻나 보다.
일부로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 음식을 준비한 것이 컸다.
“입에는 좀 맞아?”
- 꿀꺽!
“마,맛있어!”
“그래? 다행이네. 천천히 먹어.”
“아니 정말로 맛있어! 표,표현 하자면… 어… 그러니까,”
내 말에 대답하기 위해 갈비찜을 급하게 삼킨 크리스가 허겁지겁 말했다.
잘 조려낸 갈비찜이 정말로 취향이었나보다.
눈을 빛내며 비유할 단어를 찾아 헤매는 것을 보면.
“칭찬은 됐으니까 밥부터 먹자. 지금 배고프지?”
“…응.”
나는 그런 크리스를 말렸다.
내가 그렇듯 크리스 역시 상당히 배가 고플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길게 대화를 하는 것은 고문이다.
메인이 되는 갈비찜을 제외하고도 접시에 담긴 음식은 많았다.
혹시나 쌀이나 동양풍 음식이 크리스의 입에 맞지 않을까 봐 준비해 둔 스크램블 에그와 일본식 계란말이.
그리고 다양한 밑반찬들.
‘밑반찬들은… 전부 안젤리 덕에 맵지 않은 것으로 바꿨으니 괜찮으려나?’
한동안 우리 집안에 매운 음식은 금지될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완벽한 서양인인 크리스가 매운 음식을 잘 먹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매운 음식’의 기준은 한국인의 기준이다.
“혹시 물어보는데, 매운 건 먹을 수 있어?”
“음… 평범할 걸? 너무 맵지만 않으면 잘 먹어.”
“…충분히 알겠어.”
매운 걸 전혀 못 먹는다는 뜻이다.
맨 처음, 안젤리도 크리스와 똑같은 말을 했다.
자신은 딱히 매운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고.
그 말을 믿은 결과 안젤리는 매운 제육볶음 때문에 눈가에 눈물이 맺혔었다.
한국인과 외국인이 생각하는 매운 음식의 기준은 꽤나 차이가 있었다.
- 덜컹! 끼이익…
“엇?”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밥을 절반쯤 먹었을 때, 부엌과 거실 사이의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가벼운 발소리를 내며 부엌으로 들어왔다.
발소리의 주인은 안젤리였다.
- 힐끗.
나는 안젤리가 들어 온 것을 보고는 크리스를 살짝 흘겨봤다.
크리스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듯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까지도.
“밥… 먹고 있어?”
- …끄덕.
안젤리는 슬쩍슬쩍 내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입으로는 대답하지 못하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찾아왔지?
아무리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크리스가 이질감을 눈치채면 큰일 날 텐데…
난 살짝 의문스러운 얼굴로 안젤리를 바라보았다.
“괘,괜찮아. 이분… 크리스 베넷씨의 눈에는 내가 안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하는 행동이나 그 행동에 대한 결과도 인식이 흐려지거든.”
“…”
내 표정을 본 안젤리가 양손의 손바닥을 내게 펴 보이며 흔들었다.
걱정할 것 없다는 의미가 담긴 몸짓이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조금 안심했다.
첫날부터 폭탄이 터지는 것은 사양이다.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젤리를 쳐다보았다.
이야기할 것이 있으면 식사 후에 하면 되는데, 어째서 크리스와 있을 때 찾아왔냐는 뜻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나를 찾아올 만큼 급한 일은 없을 텐데?
“저… 그…”
- 우물쭈물.
안젤리가 살짝 망설이며 식탁에 앉은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서 내 볼에 입을 살짝 맞추었다.
- 쪽.
“허?”
“응? 찬영?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밥 먹어. 크리스.”
안젤리의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해서 말이 나와버렸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동공만 이동해 안젤리를 쳐다보니 볼이 상당히 붉어져 있었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타인의 앞에서 스킨십을, 그것도 자신이 나서서 한 것이니 당연하다.
내가 그녀의 행동에 당황과 의문을 품을 때쯤, 안젤리가 횡설수설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이건!… 베넷씨는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찬영과 스킨쉽 하는데, 나… 나만 못 하면 억울하잖아…! 그래서…!”
“…크흡… 맞네. 큭큭…”
“읏!… 우,웃지마아…! 난 나름 절박해서…”
“푸흐흡…”
“익!…”
- 탁탁탁! 끼익, 쿵!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지자 안젤리가 화를 내며 도망쳤다.
화라고 하기보다는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으려나?
그녀가 한 용기 있는 행동에 웃음을 보이면 안 되는 건 알고 있지만, 웃음을 참기에는 안젤리의 행동이 너무 귀여웠다.
입술에 했다면 몰라도 단순히 볼 키스를 하고자 저런 근사한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다니…
“차,찬영? 뭐 재밌는 일 있어?”
“음… 아직까지도 내 집에서 너와 단둘이 사는 것이 좀 믿기지 않아서?”
“…그러네 정말 비현실적이야.”
크리스는 내 변명에 깊게 공감해 주었다.
이렇게 나를 의심 하나 없이 믿어주는 것을 보면, 크리스를 속이는 것에 가끔 죄책감이 든다.
진짜 조금.
아침 식사는 거의 마무리 되었다.
밥을 전부 먹고 나면 크리스와 조금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 안젤리를 찾아가야겠다.
지금 바로 찾아가면 도저히 그녀를 덮치지 않을 거란 장담을 할 수 없었기에.
*
고다연을 만나는 것은 토요일이다.
하지만 주말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보낼 수는 없다.
나는 생산적인 일을 주기적으로 해줘야 숨이 쉬어지는 종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크리스와 함께 테라포밍으로 들어와 할 일을 마쳤다.
그 볼 일이란 당연히 중앙 지휘소에 내근직 신청을 하는 것이다.
반군의 우두머리인 제라드를 단독 사살한 공이 있는 내 요청이 거절되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포상금을 두둑하게 받기도 했고.
“…진짜 이 세계에선 남부럽지 않은 부자네. 이 정도면 평생 일을 안 해도 되겠는데?”
“평생 놀 거야?”
“아니. 일하지 않는 것과 놀기만 하는 건 다르지.”
나는 크리스의 물음을 부정했다.
내 개인적인 시간 동안 천권일각을 수련하는 것은 노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일도 할 거야. 조건만 맞으면.”
당연하지만 내가 테라포밍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목적은 일하고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이능을 가진 사람을 만나, 상점창의 스킬 항목에 해금이 되는지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방을 돌아다니기 위한 최적의 방법은 일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누가 종일 노는 백수에게 유흥 거리를 제공하고자 자신의 이능을 서슴없이 보여주겠어?’
비상 상황에서는 목숨줄이 되어 줄 이능을 순순히 보여 줄 사람은 적으리라.
돈이 많은 전투직들에겐 금전을 이용한 회유도 안 통한다.
이능을 각성한 사람이 거의 없는 지금, 10명 중 한 명에게라도 거절당하면 큰 손해다.
다행히 내 이름값은 좀 높다.
유적을 발견한 인물이자 반군의 총통을 사살한 인물로, 아직까지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꽤 있다.
완전히 일을 그만두며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지만 않으면 웬만해서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리라.
물론 이러더라도 안 보여 줄 사람은 보여주지 않겠지만…
최대한 보여 줄 확률을 높여야 했다.
“조건이라면… 네가 중앙 지휘소에게 요구한 그 업무??”
“응. 그 업무가 아니면 일을 하는 것을 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
“아마 되지 않을까? 그건 내근직 중에서도 하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업무니까.”
“그래? 그럼 좀 기대가 되네.”
내가 요구한 업무는 간단했다.
쉘터 내부를 주기적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업무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정확히 내가 원하던 일을 하고 있는 ‘전투직 합숙소 정기 감찰 부서’에 넣어달라고.
전투직 감찰부는 1구역부터 12구역까지 주기적으로 돌아다녀야 한다.
‘이 부서로 발령을 받으면, 모든 구역에 있는 전투직들을 골고루 만나볼 수 있어!’
심지어 ‘감찰 부서’라는 직책 특성상, 전투직에게 발현된 이능을 물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이대로 이 업무를 맡게만 된다면 모든 것이 딱딱 들어맞으리라.
나의 보직 변경 요청은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다.
크리스의 말대로 우리는 이 부서로 발령받을 확률이 무척 높았다.
보통의 전투직들은 돈과 명예를 포기하고 꿀을 빨기 위해 내근직을 선택한다.
하지만 내가 요청한 이 업무는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한다.
그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기피 업무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피곤한 일을 하겠다고 한 거야?”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것 재밌잖아? 여행하는 기분으로.”
“…별로 여유롭지도 않을 것 같고, 쉘터가 평생을 구경할 만큼 넓은 것도 아닌데…”
“그때가 되면 일을 그만두고 쉬면 되지. 나 돈 많다?”
“나도 교관을 하면서 엄청 벌었거든? 뭐, 어떤 일을 선택하든 상관없이 나는 찬영을 따라 똑같은 일을 할 거지만.”
크리스는 지구에선 이미 동거를 하고 있음에도 나와 조금이라도 더 붙어있고 싶어 했다.
부서 내부에서 항상 같이 행동하는 것은 힘들더라도, 이런 식으로 같은 일을 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사실상 11구역 전투직에서 내근직으로 보직 변경이 확정된 지금.
나는 지금까지 친해졌던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과 친했던 터라 인사를 전부 하는 것에 꽤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어? 그럼 가는 거야? 아, 하긴 넌 거친 일을 할 필요가 없겠네. 그 포상금이면 평생 먹고 살 테니.”
“아쉽네.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래도 너 가면 나 여자친구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너 때문에 11구역 여성 전투직들이 전부 눈이 높아졌다고.”
“하하, 그래도 완전히 헤어지는 건 아니에요. 언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업무의 일환으로 이곳에 들를 수 있거든요.”
“그래? 그건 좀 괜찮네.”
“일이 아니더라도 가끔 놀러 와. 내가 밥 사줄게.”
“얘가 너보다 몇 배나 돈 많을걸?”
“…그런가?”
건물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누길 몇십분.
크리스와 함께 인사를 나누다 보니 결혼으로 인한 은퇴로 오해한 사람이 많았다.
덕분에 오해에 비롯한 축하 인사를 몇 번이나 받았다.
결국 전부 해명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크리스 너 기분 좋아 보이네.”
“으,응?! 아니야!”
- 절레절레!
크리스가 손사래를 치며 내 말을 부정했다.
몸짓과 하는 말에 비해 크리스의 얼굴은 밝아져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결혼 했다는 오해를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우리를 둘러싼 오해가 내심 마음에 든 것이 티가 났다.
사실상 동거를 하는 중이면 절반쯤은 결혼한 것이나 다름 없을 텐데.
음…
각방을 쓰고 있으니 또 그건 아닌가?
“난 그럼 이강인에게 인사하고 올게.”
“아, 난 안 가도 돼?”
“잠깐 친구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으응. 알겠어.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크리스의 이마에 키스를 살짝 남겨준 뒤, 이강인이 있는 곳을 향했다.
녀석은 지금 비번이다.
분명 건물 내부에 있으리라.
- 두리번두리번.
“아, 저기 있네.”
예상대로 이강인은 합숙소 내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얘는 눈에 띌 정도로 잘생겼으니까.
- 터벅터벅터벅.
“소식 들었어. 간다면서?”
나를 발견한 이강인이 먼저 내게 물어왔다.
다행히 설명은 크게 생략해도 될 것 같다.
“응.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이걸로 네가 본 미래 예지는 막은 거지? 다른 위협은 없고?”
“그럴 거야.”
“그리고 다른 미래를 본 건 없어?”
“이미 봤던 것 중 특이사항은 없어. 그리고… 왤까? 요즘 이능이 잘 발동 안 하는 것도 같고…”
“…그래?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겠지.”
“흐음… 그러려나? 잘 감이 안 잡히네.”
이강인의 연기는 나름 능숙했다.
적어도 회귀자 티가 안 날 정도는 되었다.
‘네 덕분에 『팔방미인』을 얻었지? 특성을 두 개 달고 있어 줘서 고맙다.’
나는 속으로 녀석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이강인 덕에 내 스킬이 두 배나 빠르게 성장 할 테니까.
“그럼, 다음에 보자.”
“수고했어. 아, 결혼 진심으로 축하하고. 결혼식에 꼭 갈게!”
“…”
나는 마지막으로 이강인의 오해를 풀어 준 뒤,
다시 크리스에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