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지구
내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로 안젤리에게 버그를 말한 뒤, 보상을 받는 것.
두 번째로 몰래 이 버그를 이용하는 것.
‘…간단하네. 인벤토리 공유 기능을 해금하기 전까지는 악용하다가, 해금해서 더이상 버그가 쓸모없어지면 말해야지.’
나는 둘 다 챙기는 것을 선택했다.
그 전에 내가 아공간에 사람을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면, 영원히 비밀을 유지할 수도 있다.
안젤리에게 한번 말한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만큼 신중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확인하면 된다.
“크리스? 네가 도와줘야 할 것이 있어.”
“응?”
나는 크리스를 데리고 테라포밍으로 접속했다.
내가 맨 처음에 그랬듯이 크리스 역시 차원을 이동할 때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앞으로 자주 겪게 될 테니 익숙해지겠지.
누군가 우리를 봤다면 크리스의 옷이 갑작스럽게 현대인스럽게 변하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이곳은 크리스의 개인 방 안이다.
아무런 문제 없었다.
- 스윽.
허공에서 사라졌다 나타난 나의 손에는 하나의 물건이 들려 있었다.
인벤토리는 크리스의 아공간과 달랐다.
그녀가 원하면 손안에 자연스럽게 물건이 나타나는 아공간과 달리, 나는 인벤토리를 이미지하고 허공에 손을 넣은 후 직접 꺼내와야 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물건을 크리스에게 넘겨주었다.
“엇? 차,찬영도 아공간같은 이능이 있었어?”
“좀 다른 거야. 내건 허공에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주머니 느낌? 그보다 이걸 네 아공간에 넣어줘.”
“찬영은 도대체 능력이 몇 개나 있는 거야…?”
“앗 잠깐! 혹시 무언가를 아공간에 넣을 때, 그 대상에 마나를 불어 넣어야 하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이능의 적용 대상이 아닌 내 손바닥에 마나를 집중시키는 느낌이라.”
“좋아. 그럼 괜찮아.”
“음… 알겠어.”
크리스는 나의 손에서 물건을 받아 자신의 아공간에 넣었다.
내가 이해 못할 짓을 하는 것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라는 듯, 잠자코 내 말을 들어주었다.
나 또한 크리스에게 설명하자면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어야 했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했다.
크리스에 손에 들린 물건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크리스와 함께 지구로 귀환했다.
“이제 내가 준 물건을 여기서 꺼내 봐.”
- 끄덕.
크리스의 손에 내가 테라포밍에서 건네준 물건이 나타났다.
한 손으로 어렵지 않게 들 수 있는 크기의 하얀 구슬이.
성공…인가?
그때, 내 눈앞에 알림음이 나타났다.
띠링!
[세계관 귀속 아이템의 반출이 감지되었습니다!]
[판정 중…]
[결과 - 삭제해도 ‘테라포밍’ 세계관에 영향 없음.]
[’역천(逆天)의 구슬’ 아이템 삭제 및 시스템 주인에게 보상을 지급합니다!]
크리스의 손에 들려있던 역천의 구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위에서부터 먼지가 되어 주변으로 흩날렸다.
- 스르르륵…
먼지는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도중, 공기에 녹아들었다.
방의 바닥을 보아도 쌓인 먼지는 없었다.
말 그대로 역천의 구슬은 흔적조차 없이 소멸했다.
[30,000 카르마가 지급되었습니다!]
역천의 구슬이 내 손이 아닌 크리스의 손에 들렸었어도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세계관 귀속 아이템을 밖으로 빼내는 원인까지는 전부 생각하지 못했어도, 반출 자체는 막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엇? 사라졌어! 찬영? 원래 이런 거야?”
“…예상은 했어.”
이 시스템이란 것도 지구의 프로그래밍과 비슷하나보다.
‘결과만 막아두면 큰 버그는 터지지 않는다.’라는 개발자의 의도가 보인다.
진짜 중소기업이 만든 게임이랑 비슷한 수준이네…
“그래도 잃고 나니 약간 아깝긴 하다…”
다시 얻을 확률이 거의 없는 아이템이 사라졌다.
밝혀진 하얀 구슬의 부작용은 정신만을 과거로 보내는 것이다.
즉, 내가 만약 하얀 구슬을 사용하게 된다면…
‘최악에는 테라포밍 초기, 뚱뚱하고 못생겼을 때로 돌아갈 수도 있어.’
있어서 나쁠 것 없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계륵 같은 녀석이다.
더는 테라포밍 속에서 죽으면 되돌릴 수 없는 만큼, 최대한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웬만해선 구슬을 사용할 정도의 위기는 없으리라.
‘훈련소 교관은 내 경력이 부족할 테고… 중앙 통제소 경계직이면 적당하려나?’
초인이 필요한 곳은 전투를 할 때만이 아니다.
월급이 정말 많이 깎이고, 위상이 줄어들긴 하더라도 안전한 내근직을 할 수도 있다.
특히 나와 크리스처럼 강하고 능력 있다면 선택권은 더욱 넓어진다.
그렇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카르마를 얻은 것이 더 이득일 수 있다.
오히려 역천의 구슬을 시스템의 상점에 30,000 카르마를 받고 팔 수 있었다면 팔았으리라.
게다가 보상이 들어온 게 어딘가?
최악의 경우는 내게 떨어지는 것도 없이 사라지기만 하거나, 버그를 들켜서 천계에 불려가는 것까지 상상했다.
“찬영? 괜…찮은거야?”
크리스가 불안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구슬이 사라진 것에 자기 책임도 있는지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살짝 웃으며 크리스를 안심시켜주었다.
결과가 지금보다 최악이었어도 그녀의 탓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응. 상관없어. 그보다 저쪽 세상은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 오랜만에 휴가 왔다고 생각하고 푹 쉬어.”
“…그럴까?”
희색을 띠는 크리스의 앞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도 세계관 귀속 아이템을 얻는 일은 자주 있을 것이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 곁에서 스토리를 따라갈 테니.
내게 전혀 필요가 없는 세계관 귀속 아이템은 이런식으로 카르마와 교환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템 삭제 전에 무언가 검사를 한 것을 보니… 삭제 시 세계관에 영향이 있는 아이템은 좀 다르게 처리되려나? 애초에 그런 중요한 물건은 밖으로 꺼낼 시도를 하지 않을 거지만.’
- 툭툭.
“응?”
나의 집중은 팔뚝을 건드리는 손가락에 의해 깨졌다.
작고 얇은 손가락을 눈으로 흩으며 따라가니…
시선의 끝에 약간 상기 된 얼굴의 크리스가 있었다.
2초 정도 어리둥절했던 나지만, 곧 그녀가 나를 건드린 이유를 찾았다.
“아! 미안, 여기 네 방이었지? 자리 비켜줄게. 편히 쉬어.”
- 덥썩!
“엇? 크리스?”
방문을 나서려는 나의 팔은 크리스에게 붙잡혔다.
그것도 꽤 강하게.
다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온 나는 크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 그…”
“…아하.”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기어가듯 말하는 그녀를 보니 나를 잡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렇게 내 시선을 못 맞출 때, 그녀가 바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호선을 그리려 하는 입꼬리를 억누르지 않은 채 크리스를 향해 나지막이 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전투의 열기인가? 그것 때문에 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 그건…!”
- 휙!
크리스 특유의 정곡을 찔린 당황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바닥을 내려다보다 빠르게 치켜든 크리스의 고개는, 실실 웃는 내 얼굴을 보고는 다시금 푹 숙여졌다.
- …끄덕.
그리고 작게 끄덕였다.
이제 보니 크리스가 목욕하고 온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나는 크리스의 어깨를 팔로 두르며, 함께 그녀의 방 안에 있는 침대로 향했다.
“아…”
*
“알아? 내가 다 들었다면, 후배도 전부 들었을 거야.”
평소 내게 상냥하기만 하던 안젤리의 시선이 아프다.
그 눈매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웃고 있었지만, 눈꺼풀에 가려진 시선은 싸늘할 것이 분명하다.
안젤리가 이렇게 나올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렇겠지?”
크리스와 몸을 섞으며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집은 다른 집보다 약간 방음이 좋을 뿐이었고, 집 안에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크리스는 전혀 소리를 죽이지 않았으니까.
동거인으로서 듣지 못하기가 더 힘들었으리라.
“하지만 걔는 나랑 크리스가 연인인 걸 알고 있잖아.”
“…그렇지.”
연인 사이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천사가 인간의 번식 활동을 부정하면 그것만큼 웃긴 일도 없으리라.
물론 안젤리는 아기천사에게 나와 사랑을 나누는 것을 절대 들키기 싫어했다.
‘천사’가 인간을 보는 입장에서 성교를 눈치채는 것과, ‘직장 동료’가 지인의 성교를 눈치채는 것의 차이다.
충분히 꺼릴 만 하다.
‘나야 뭐 들키든 말든 전혀 상관없지만.’
누구의 탓이라 말하기 힘든 일이다.
내 탓이 아니란 것 역시 그녀도 알 것이다.
그러나 안젤리로써는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이어트하는 사람 앞에서 치킨을 시켜 먹으면 화내는 것은 분명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그 다이어트는 본인의 의지가 절대 아닌데.
나는 연인으로서 마땅히 그녀의 분노를 받아주기로 미리 결정 내렸다.
원래
하지만 안젤리는 내 예상을 살짝 벗어난 행동을 했다.
- 포옥!
“엇?”
안젤리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내 얼굴이 그녀의 큼지막한 가슴에 묻혔다.
부드러운 살이 내 얼굴을 간질였고, 기분 좋은 상큼한 향기가 코에 흘러들어 왔다.
“…찬영이 다른 여자와 만나는 것도, 그 여자와 몸을 섞는 것도 어쩔 수 없어… 내가 ‘두 번째’인걸… 오히려 나를 받아준 찬영에게 감사 해야겠지…”
나는 안면 전부가 안젤리의 품에 닿아 입을 열 수 없었다.
발음이 뭉개지는 건 물론이고 성대의 떨림을 느낀 안젤리가 간지러워하며 포옹을 풀 수도 있으니까.
이러고 있는 것은 상당히 기분 좋았기에,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럽다. 그분이 찬영에게 첫 번째인 것도 부럽지만, 언제 어디서든 찬영에게 애정을 확인받을 수 있다는 게 부러워…”
“…”
“사실 찬영도 참고 있지? 미안해… 내,내가 용기만 내면 될 텐데…”
- 꼬옥!…
나를 껴안은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그녀는 화를 내기보다는 내게 사과를 해왔다.
나와의 잡담을 무척 좋아하는 안젤리다.
그래서 깊은 스킨십이 없더라도 크게 조급해하지 않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나와 몸을 섞는다는 것은 좀 더 중대한 의미였나보다.
무의식적으로 ‘애정을 확인받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니까.
그녀에게도 타의에 의한 섹스 리스의 삶은 버거웠음을 깨달았다.
한창 뜨거울 때이기에 더욱.
- 스윽. 스윽…
뒷머리에 굳은살이 박히지 않은 부드러운 손이 닿는다.
슬픈 것은 안젤리인데, 달래지는 것은 나였다.
손길을 막아서지는 않았다.
거부하기에는 꽤나 힐링이 되었기 때문이다.
눈까지 감으니 너무나 편안해 잠들 것만 같은 기분이다.
“찬영. …그냥 우리 둘이서 외출할래? 그,그으… 한국에는 모텔이란 것도 있고…”
“둘이 같이 외출하면 네 후배가 눈치챌 수도 있잖아.”
“햣!… 가,간지러워!”
- 스으윽… 탁!
예상대로 가슴골에 입술을 댄 채 말하자 안젤리가 간지러워하면서 포옹을 풀려고 했다.
나는 그런 안젤리의 팔을 막아선 채 포옹을 유지했다.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내가 말을 하더라도 그녀가 간지럽지 않게끔 했다.
누군가 봤더라면 커다란 남정네가 여자에게 어리광부리는 끔찍한 광경을 맞닥뜨렸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아무도 없는데.
내가 이러고 싶으니 이럴 것이다.
안젤리의 품 안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 스윽. 스윽…
그런 나를 본 안젤리가 다시 상냥하게 머리를 쓸어주기 시작했다.
숨소리를 들어보니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나의 행동이 퍽 그녀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러니까 찬영이 고양이 같아…”
“185cm의 근육이 들어찬 탄탄한 몸을 가진?”
“푸흐흐!”
“…처음 우리가 연인이 될 때, 의심할 거리는 안 만들기로 한 것 아니었어?”
“후배는 눈치가 별로 안 빠르고… 하,한두번 쯤은… 괜찮지 않을까?…”
“나야 좋지.”
“그럼… 오,오늘 당장?…”
지금까지 잘 참아오던 안젤리가 크리스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한계에 부딪혔다.
‘왜 이렇게 상황이 내게 좋게 흘러가지? 당황스럽네.’
언제까지고 안젤리에게 숨길 수는 없으니 크리스가 내는 신음을 막지 않은 것도 있지만,
솔직히 안젤리가 위기감을 느끼길 기대하며 소리를 막지 않은 것도 있었다.
입술을 입술로 막으면…
신음소리는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으니까.
크리스는 지금 지쳐서 자고 있다.
나와 안젤리의 외출을 방해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갈까?”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던 안젤리는, 나의 말에 이번에야말로 포옹을 풀었다.
마주 본 안젤리의 얼굴은 오랜만에 엄청나게 붉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