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지구
귀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젠 내게 상당히 익숙해진 넓은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에는 크리스가 있었다.
…나와 달리 신발을 신은 채로.
“어? 어? 여,여긴…?”
크리스는 내 방을 두리번거리면서 확인했다.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크리스의 주의를 끌었다.
“…신발부터 벗을래?”
그제야 나를 돌아보는 크리스.
이 현상의 원인이 나에게 있으리라 생각이 닿은 모양이다.
내 말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신발을 벗기에는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방 안의 의자를 끌어와 크리스를 앉혀 손수 신발을 벗겨 주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으니 어째선지 청혼을 하는 것만 같다.
- 스윽.
“여긴 지구야.”
“지구? 지구라고? 어,어떻게? 그게 찬영의 이능인 거야?”
“음… 이건 이능과 달라. 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
“…”
“이해가 잘 안 되더라도 그냥 넘어가.”
“그럼… 이곳은 찬영의 방? 한국의?”
“응. 그런데… 여긴 네가 아는 지구와 틀릴 거야. 혹시 평행세계라고 알아?”
“자,잘은 모르는데… 대충은 알아.”
“그것과 비슷해. 같은 지구지만, 세세하게 보면 틀린 부분이 많은?”
내 손에 들린 크리스의 신발 한 짝을 티슈를 깐 책상 위에 올렸다.
신발을 전부 벗겨준 후에도 나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나는 차원을 이동할 수 있다는 것.
내 능력은 한가지가 아니며 앞으로 추가로 각성할 수 있다는 것.
그녀가 아는 지구와 이곳이 완전히 다른 곳이라는 것.
방금 전, 단 한 명을 차원 여행의 동반자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네게 사용 했다는 것.
기나긴 설명 와중에도 크리스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 챠르륵!
방안에 창문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블라인드만 젖히면 고층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지구의 풍경을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그것은 그녀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풍경이었다.
크리스가 시골에서 자랐다고 한들 단 한 번도 대도시를 본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정말이네… 지구야.”
“…크리스.”
“어?”
“나 방금 신기한 거 알아냈어.”
“여,여기서 더?… 뭔데?…”
멍하니 창밖을 구경하는 그녀의 옆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가지 이질감이 내 눈에 띄었다.
방금까지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
“너 지금 한국말 쓰고 있어.”
“어? 어라? 저,정말이네?!”
“나도 처음 써봐서 몰랐는데, 내 능력의 일종인가 봐.”
적어도 이 기능을 만든 천계가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는 뜻이겠지.
이제와서야 떠올린 부분이지만, 귀찮은 일이 발생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 믿겨?”
“안 믿기지만… 이건 믿어야지 뭐…”
크리스가 자신의 성대를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원어민과 다를 바 없는 완벽한 한국어 구사에 스스로도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럼 찬영은 사실 내 지구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음… 그런 구분이 굳이 의미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생각 안 해봤어. 너와 난, 둘 다 살아 있는 인간이잖아?”
“응. 그러네.”
- 툭. 스으윽.
크리스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볼을 더듬는다.
둘 모두 서 있었기에 크리스는 나를 올려다봐야 했다.
크리스의 타오르는 것만 같은 붉은 동공과 별 특이한 점 없는 나의 검은 동공이 마주쳤다.
“…찬영은 확실히 살아 있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크리스는 내가 그녀의 곁에 살아서 있어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 만족하곤 하는 그녀를 볼 때면, 가끔 가슴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욕심내더라도 좋은데.
“그럼… 다시 그 세계로는 못 돌아 가는 거야?”
“아니, 언제든 갈 수 있어. 그쪽은 지금 시간이 멈춰있거든.”
“…그래? 정말 말도 안 되는 능력이네.”
“내가 동반자로 너를 선택한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 끄덕.
“앞으로 다른 차원에 갈 수도 있는데, 네 도움이 필요해.”
“찬영의 곁에 있고 싶어.”
“…응. 그러자.”
계속 내 방에 있을 수는 없다.
이제 크리스도 내 집에 머물 테니, 그녀의 방으로 안내해 줘야겠지.
나는 크리스의 손을 잡아 이끌며 방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이제 네 방을 안내해 줄게. 내가 급한 대로 필요한 건 채워 넣어서 크게 불편할 것은 없을 거야.”
“내 방?”
“응. 난 혼자 살고, 내 집은 빈방이 많거든.”
“나,나 앞으로 찬영이랑 사는 거야? 둘이서만?”
“지구에 있는 동안은… 그렇지?”
“그,그렇구나아…”
크리스는 상당히 기뻐 보이는 얼굴로 내 손길에 따라서 얌전히 다리를 움직였다.
자신의 방이 궁금한가 보다.
안젤리와 아기천사는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평생 숨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밝히기에는 좋지 않다.
- 터벅터벅. 끼익…
“으헉!”
“찬영? 왜 그래?”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문의 바로 앞에 안젤리가 새초롬한 얼굴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
안젤리는 어리둥절해 하는 크리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얼굴, 발끝, 다리와 허리를 거쳐서 가슴에 3초 정도 머물다가, 조금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얼굴을 향했다.
“흐음… 찬영은 이런 여자가 취향이야?”
“…”
안젤리의 말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옆에 버젓이 크리스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안젤리에게 눈짓으로 ‘어쩌자고 내게 말을 건 거야?’라는 신호를 보내었다.
“찬영 같으면 안보고 배기겠어? 내,내가 먼저 …을 좋아했단 말이야…”
안젤리가 살짝 가슴 아파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 안젤리는 내게 이미 연인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나와 연인 사이가 되었다.
암묵적으로 양다리를 걸치겠다고 선언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당사자를 직접 보니 또 다르게 와닿았는지 풀 죽었다.
크리스를 향한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뒤섞인 얼굴이다.
‘안젤리와 둘이서 시간을 보내야겠네. 하긴, 요즘 테라포밍 완결에 정신 팔려서 제대로 신경을 못 써줬지…’
- 스윽.
나는 손을 들어 안젤리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나중에 시간을 내겠다는 신호였다.
안젤리는 그것으로 알아들었는지,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찬영? 왜 멈춰 서 있어??”
“…잠깐 생각을 좀. 자. 방으로 가보자.”
내 등에 가려져 내가 무슨 행동을 한 지 제대로 보지 못한 크리스는, 의심하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
정말 우습게도, 크리스가 지구에 오며 가장 먼저 한 일은 목욕이었다.
영미권에서도 스파(SPA)라는 대중목욕탕 문화가 있었지만,
살아오며 개인 목욕을 훨씬 많이 했던 크리스인 만큼 혼자서 느긋하게 즐기는 목욕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훈련소든 전투직 합숙소든 목욕탕은 모두 공용이었으니까.
거실에 달린 가장 큰 욕실에는 욕조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자극적인 MSG에 절여진 현대 음식보다 목욕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 만지작만지작.
“머리는 왜 자꾸 만지작거려? 음… 괜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찬영이 단발이 마음에 든다면… 나도 단발로 자를까?”
“아니, 넌 지금이 제일 예뻐.”
“…나 머리 자르면 못생겨져?… …읏! 미안. 귀찮은 여자는 별로일 텐…”
“네가 무슨 머리를 하든 예쁜 건 마찬가지지. 그냥 너보고 예쁘단 소리가 하고 싶어서 깊은 뜻 없이 말한 거야.”
“…그,그래?”
- 꼬옥.
대답 대신 안젤리를 품에 끌어 안아주었다.
나의 나름 센스있는 답변에 기분이 풀렸는지 편안히 내 가슴에 몸을 기대어 왔다.
크리스를 껴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기분 좋음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안젤리는 부드러웠다.
그리고…
마음이 무척 넓었다.
“네 후배는?”
“인터넷 중.”
“…질리지도 않나 보네. 아니, 사실 네 후배도 눈치채고 있는 것 아니야?”
“후배가? 뭘 눈치채?”
“우리 사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오래도록 연인 사이인 것을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지금도 분위기를 읽고 자리를 비켜준 것이 아니야?”
“음… 일단 후배는 우리 사이를 알아챌 만한 눈치가 없고, 설령 눈치를 챈다고 해도… 분위기를 읽지는 못할걸…?”
“신랄한 평가네.”
“선배로서의 객관적인 평가지.”
안젤리는 스킨십 또한 좋아했지만, 나와의 잡담도 상당히 좋아했다.
그녀를 위한 가벼운 스킨십과 대화는 크리스가 목욕을 끝마치기까지 계속되었다.
*
목욕을 마치고 정말 개운해진 표정으로 나온 크리스의 옷은 평상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옷을 직접 고른 것들이다.
다행히 나의 안목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는지, 크리스는 상당히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크리스의 손은 빈손이었다.
갈아입기 전의 옷은 어디 갔지?
“네가 저쪽 세계에서 원래 입고 있던 옷은?”
“당연히 아공간에 넣어 놨지.”
“아하. 그렇겠네. …잠깐, 아공간?”
무언가 번뜩였다.
내가 왜 이걸 지금까지 생각해 내지 못했지?
“응? 왜 그래?”
“크리스. 혹시 저쪽 세계에서 아공간에 넣어 둔 물건을 여기서도 꺼낼 수 있어?”
“…다,당연하지?”
- 스윽.
크리스의 손에서 가죽 갑옷이 솟아났다.
그녀가 원래 입던 노출이 높은 옷이 아니라, 전투직들에게 기본적으로 보급되는 가죽 갑옷이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이 가죽 갑옷을 크리스가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물건이다.
즉…
이 가죽 갑옷은 그녀가 테라포밍에서 아공간에 넣은 물건이 분명하다.
‘이,이러면 인벤토리 통합 기능은 급하게 해금할 필요가 없지 않나…?’
뜻밖의 어마어마한 이득이다.
[인벤토리 통합]의 가격이 무려 50,000 카르마였으니.
언제까지고 해금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순위가 밀리는 것 자체가 이득이다.
50,000 카르마를 다른 곳에 쓰게 되면 상당한 기회비용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잠깐… 설마…’
“크리스? 혹시 지금 아공간에 들어 있는 생명체도 있어?”
“으음… 딱 하나 있어.”
- 푸드덕! 푸드덕!
크리스의 손에서 가죽 갑옷이 사라지고 큼지막한 생명체가 자연스럽게 솟아났다.
그것은 내게 익숙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 께엑! 께에에엑-!
“치킨…”
완벽히 제압된 치킨이었다.
지구의 닭을 말하는 것이 아닌, 테라포밍 속 고기 요리의 주재료가 되는 케틀…어쩌고저쩌고.
일단 크리스에게 치킨을 집어넣게 했다.
이놈이 이 집 밖으로 새어 나갔다가는, 기다란 이름을 알파벳 4~5개로 압축한 정체불명의 기관에서 마구 연락이 올지도 몰랐다.
난 이미 백하민 때문에 충분히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다.
더이상의 골치 아픈 일은 질색이다.
- 벌떡!
아니, 이런 사소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생명체를 아공간에서 꺼낼 수 있다고?
그렇다면…
‘…버그 찾았다.’
시스템의 버그를 한 개 더 찾았다.
살아있는 치킨을 데려오는 것이 가능하면,
아공간 스킬을 사용해서 사람도 데려올 수 있다.
시간만 들인다면 100명이든 1,000명이든 한계 없이.
파티원 등록의 인원수 제한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크리스. 네 아공간에는 치킨은 물론이고 고블린이나 오크도 들어갔지? 혹시 사람도 넣을 수 있어?”
“음… 일단 내가 아공간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론상 가능은 한데, 무척 힘들어.”
“힘들다고?”
“응. 생명체를 아공간에 넣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더라고. 첫 번째가 완전히 제압되어 있을 것. 두 번째가 내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것.”
크리스가 손가락 두 개를 뻗으며 내게 설명을 해주었다.
나 또한 언젠가 아공간 스킬을 얻을 테니 경청하며 들었다.
“그런데 이 ‘파악한다’라는 놈이 단순히 외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거든.”
“설마… 그 생명체의 성격이나 성향 같은 것도 포함이다? 즉, 생명체의 지성이 높을수록 아공간에 넣기 힘들다는 뜻이야?”
“그렇지. 나야 뭐 내 스스로가 가장 잘 아니 부담 없이 아공간에 넣을 수 있고, 치킨이나 고블린, 오크는 지능이 낮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기 쉬워서 넣을 수 있지만…”
“음… 그럼 인간을 아공간에 넣는 것은 성공한 적이 없는 거야?”
“맞아. 갓난아이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시험해 본 적은 없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
완전히 불가능하지 않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다.
나는 크리스와 달리 ‘아공간’스킬만을 사용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약 사람의 생각이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스킬을 익히게 된다면, 아공간에 사람도 넣게 될 수 있으리라.
그날이 바로 파티원 인원수 제약에서 벗어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