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테라포밍 [完]
“카야가 역천의 구슬을 전부 사용한 건가?…”
상황을 설명하려면 그것밖에 없었다.
마나를 흘려 넣으면 발동되는 구슬 시리즈의 특성상, 강렬한 마나 울림을 일으키는 화염구에 직격되어 발동된다고 한들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 마나의 주인은 어찌 되었든 카야였으니까.
“하지만 역천의 구슬은 분명 회귀를 시켜주는 구슬일 텐데…?”
카야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로 돌아갔다고 한다면 미래가 바뀌어야 한다.
지금처럼 카야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내게는 이 의문을 해결해줄 방법이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단 하나 남은 역천의 구슬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하드모드 퀘스트로 2Lv로 오른 ‘아이템 정보 확인’을 사용했다.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역천(逆天)의 구슬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과거로 이동합니다.
상세:
■■의 구슬, ■■의 구슬, ■■의 구슬을 엘프의 사라진 기술로 합쳐 만든 ‘완벽한’ 구슬입니다.
기존의 세 가지 구슬은 시간제한이 끝나면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 단점을 없앤 역천의 구슬은 완전한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끔 합니다.
* 세계관 귀속 아이템입니다. 상점창에 등록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세계로 가지고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
나온 설명은 놀라웠다.
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완전한 시간 여행을 하게 해준다고? 회귀를 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크게 달랐다.
역천의 구슬을 사용한 이강인은 시간 여행이 아닌 회귀를 했으니.
또한 여전히 숨겨진 정보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이템 정보 확인 2Lv에는 24시간에 한 번,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이란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좀 더 정확한 정보를 볼 수 있으리라.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 [아이템 정보 상세 확인]
이름: 역천(逆天)의 구슬
종류: 소모품
레벨: -
효과: 과거로 이동합니다.
상세:
(예경)의 구슬, (정천)의 구슬, (몽환)의 구슬을 엘프의 사라진 기술로 합쳐 만든 ‘완벽한’ 구슬입니다.
기존의 세 가지 구슬은 시간제한이 끝나면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 단점을 없앤 역천의 구슬은 완전한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끔 합니다.
* 추가 정보
역천의 구슬 한 개에 대략 50개월 이전의 과거로 갈 수 있습니다.
중첩 사용 가능합니다.
구슬 합성 기술은 엘프의 고위 사제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구슬은 엘프에게서 만들어진, 엘프만을 위한 구슬입니다.
[경고!]
엘프와 다른 종족이 구슬을 사용하게 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구슬을 한 번에 사용한다면 부작용을 억누를 수 있습니다.
부작용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최소 2개의 역천의 구슬이 필요합니다.
* 세계관 귀속 아이템입니다. 상점창에 등록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세계로 가지고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
“부작용… 그랬던 건가…!”
역천의 구슬 사용 효과인 시간 여행은 육신과 영혼까지 전부 과거로 보내준다.
하지만 이강인이 역천의 구슬을 사용했을 때, 오로지 기억을 담은 ‘영혼’만이 과거로 보내졌다.
그의 신체 능력이 초기화된 것을 내 두 눈으로 확인했다.
이것이 바로 엘프에게 맞춰진 ‘역천의 구슬’을 인간이 사용한 부작용이다.
무언가의 반발로 육신은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이강인이 사용한 역천의 구슬이 한 개였기 때문에.
“하지만 카야는 다르지…”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녀는 수천 개의 구슬을 동시에 사용했다고 판단된다.
부작용이 억눌러진 거다.
“구슬 한 개에 대략 4년이라…”
이강인은 반군과의 전면전, 즉 자신의 사망 위기가 4년 후에 찾아온다고 했었다.
훈련소의 3개월을 생각하면 50개월 전후.
시기적으로 딱 들어맞았다.
“중첩 사용이 가능하니 천개를 쓰면 4,000년… 이천개를 쓰면 8,000년?…”
나는 석재로 만들어진 풀장에 가득 들어차 있던 역천의 구슬을 떠올렸다.
삼천개는 가뿐히 넘겨 보였었다.
“카야는… 까마득히 먼 과거로 이동한 건가?”
나는 구슬이 가득 들어차 있던 풀장으로 내려갔다.
어느 정도 깊이가 되는지, 구슬이 몇 개쯤 있었는지 대략 측정하기 위해서다.
- 타악!
“이,이건?
그리고 나는 구슬이 차 있었을 때는 가려져 있어 발견하지 못했던 글귀를 발견했다.
석재 풀장의 가장 밑바닥에 새겨진 문장을.
그 글은 내가 6구역에서 엘프의 ‘유언장’을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읽혔다.
=
(기록일. 119년 002월 21일.)
어느 날.
숲을 수호하는 우리 종족에게 한가지 병마가 퍼졌다.
전염성이 무척 높고, 걸리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아주 위험한 병마가.
그와 동시에 우리를 구원 할 귀가 짧은 엘프가 나타났다.
그녀는 우리를 좀먹는 병마에 완벽한 면역을 지니고 있었다.
감염자와 접촉을 해도 전혀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녀는 병마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으나, 우리를 치료할 기술은 가지지 못했다.
역천의 구슬을 사용해 몇 번이나 엘프를 과거로 보내도 병마가 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귀 짧은 엘프가 말하길…
그녀의 종족에는 이 병마를 치료할만한 기술을 가진 자들이 많다고 하였다.
이미 멸망이 예정된 우리 종족은 그녀가 말한 희망에 모든 것을 걸기로 결정했다.
이곳에 도착하지 못한 하나를 제외한, 도시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만들어 둔 모든 역천의 구슬을 이곳에 모아 놓는다.
만일 이 글귀를 보는 당신이 그 기술을 가졌다면…
이 구슬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찾아 와주길 간절히 읍소하겠다.
현재의 날짜는 119년 002월 21일.
구슬 한 개에 50개월을 넘을 수 있다.
한 종족의 명운이 달린 일이다.
이 글을 보는 당신에게 치료 능력이 없더라도 상관없다.
구슬이 탐나거든, 몇 개 가져가도 좋으니 부디 이 소식을 의료 기술이 있는 자에게 전달해 주길 바란다.
먼 훗날 우리 엘프를 구원할 누군가에게.
이미 멸종한 종족의 제사장이.
=
“음… 요약하자면…”
엘프에게 병마가 퍼졌고,
자기들의 기술력으론 해결할 수 없으니,
과거로 갈 수 있는 구슬을 수천 개 준비해서,
미래에 병을 고칠 기술을 가진 누군가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이래서 이곳에 역천의 구슬이 수천 개나 있었군.”
돌로 된 바닥에 새겨진 문장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옆에 새로운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
(추가. 123년 071월 00일.)
인간이란 종족은 이유 없이 감정이 뒤바뀌는가?
어째선지 이 계획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던 귀 짧은 엘프가,
‘가장 높은 산’ 위의 신전에 모아놓은 수많은 역천의 구슬을 보고서는 절망에 빠져 오열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슬퍼하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우리에게 ‘미안하다’라고 수백 수천 번 반복적으로 말했을 뿐이다.
귀 짧은 엘프의 수명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짧았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눈물을 흘리다 안식에 들었다.
우리를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해준 그녀, 나탈리야 카야를 애도하며.
=
“나탈리야 카야를… 애도하며?…”
카야다.
귀 짧은 엘프라고 적힌 인물은 카야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실타래처럼 꼬여있던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까마득히 오래전, 엘프의 마을이 멸망한 이유는…
카야가 옮긴 독감 때문이었다.
북부 훈련소에서 조교를 하며 그녀가 훈련생에게서 옮은 그 독감.
애초에 엘프에게 퍼진 병마의 원인이 카야였던 것이다.
엘프들이 구원자라고 여기던 카야는 사실…
“후우… …수많은 세대를 독감과 싸우며 항체가 생긴 지구인과 달리, 엘프들이 독감에 걸리면 치명적인 것은 당연하겠지만…”
판타지 소설에도 흔히 나오는 이야기다.
차원 이동을 한 지구인이 전염병을 옮겨 원주민들을 몰살시키는 이야기는.
끔찍한 비극이었다.
나와 크리스가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가 되어 주었듯이,
엘프와 카야 또한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가 되어 주었다.
엘프는 병마에서 살기 위해 수천의 역천의 구슬을 준비했고,
카야는 그 구슬 때문에 까마득한 과거로 이동해 엘프에게 병마를 옮겼다.
“…”
이건 나의 억측인가?
망상에 불과한 걸까?
확인할 방법은 하나 더 있었다.
추론을 사실로 확정 짓기 위해 발걸음을 떼었다.
- 터벅. 터벅.
수천개의 엘프 유골.
나는 그사이를 걸어가며 안쪽으로 점점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장 깊숙한 곳에서…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인간의 유골
종류: 기타
레벨: -
효과: -
상세:
측정할 수 없는 오랜 시간 전에 사망한 인간의 유골입니다.
=
인간의 유골 한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카야가 엘프에게 사과한 이유는 간단하다.
도무지 자신이 병마의 원인이라고 고백하지 못했던 탓이겠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녀는,
엘프에게 버려진 채 홀로 몬스터들이 거니는 숲에서 살아가는 미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평생을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을 거부했다.
그렇기에 눈을 가리고 한 종족의 멸망을 모른 척했다.
그마저도 제대로 눈 돌리지 못해 죄책감에 찌든 삶으로 마무리해야 했지만.
“…여전하구나. 너는.”
난 만족스럽다.
카야가 행복한 삶을 산 것보다는 불행한 편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수천명의 엘프?
내 알 바는 아니다.
나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이강인이 나를 돌아보았다.
“응? 나?”
“너 말고. 그보다, 넌 놈이랑 제대로 승부 봤어? 그 있잖아, 훈련소가 습격당했을 때 너랑 통성명한… 이름이 뭐였지?”
“죠셉 디스킨. 결착은 맺어졌어.”
“표정을 보니 이겼구나?”
“당연하지.”
“…좋네. 나 잠깐만 산책 좀 하다 올게.”
“응? 그건 네 마음이지 뭐. 내게 허락까지 받을 필요야?”
- 터벅터벅.
천천히 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한다.
이미 내가 개입함으로써 원작과 많이 틀어졌을까?
아마도 흔치 않은 일을 겪었던 만큼, 내가 겪은 테라포밍은 오리지널의 스토리를 새로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원작 속 이강인은 어떻게 회귀의 구슬을 얻은 것야?’
내 세계에서의 구슬은 카야가 과거로 갔기에 이강인이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원작은 어떻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 터벅터벅.
“…고민해 봐야 쓸모없지.”
사실 별로 궁금하지는 않다.
연중이 된 이상, 테라포밍의 작가도 모르는 이야기일 테니.
어쩌면 원작 속 이강인의 역할을 내가 대체한 것일 수도,
아니면 우연히 이강인이 엘프가 흘린 역천의 구슬을 주웠을 수도 있다.
원작 속 테라포밍에는 엘프들이 병마에 전멸하지 않고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
“중요한 건… 나는 끝났다는 거지. 끄으으…! 후우.”
속이 후련한 느낌에 기지개를 한번 크게 폈다.
모든 것은 끝났다.
제라드는 죽었고, 이강인은 인연의 종지부를 맺었으며, 풀리지 않았던 비밀은 모두 해소되었다.
나는 지금이 테라포밍을 완결 할 때라고 확신했다.
이대로 인간들의 영역은 계속 넓어질 것이다.
언젠가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마천루가 들어설 수도 있다.
그 와중에 병마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엘프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 세대의 역할이 아닐지도 모른다.
신전은 너무나 오래 방치되어 있었으며, 그 주위에 원주민과 관련된 힌트는 무엇 하나 발견할 수 없었기에.
나는 웹소설을 사랑하는 한 명의 독자로써 이렇게 생각한다.
소설의 완결은 박수를 받을 때 그 마무리를 맺어야 한다고.
이대로 억지로 끌어봐야 진부한 일상물이 될 뿐이다.
그래서야 독자와 창작자 모두 안타까울 뿐이다.
띠링!
=
[테라포밍]
현재 완성도 - 121%
현재 사망 횟수 - 0 (Perfect!)
Happy End.
떡밥 회수가 깔끔한 결말.
소설을 완결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
“예.”
띠링!
=
소설을 완결 맺은 후에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한 번 더 고민한 뒤 결정해 주세요!
정말로 완결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
완결은 끝이 아니다.
크리스, 그 밖에 이곳에서 쌓은 인연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직 에필로그가 남아 있다.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완결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띠링!
귀에 익은 시스템의 알림음과 함께, 소설 테라포밍은 그렇게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