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테라포밍
카야의 민첩 스텟은 고작 22.
내 민첩 스텟이 버프까지 합쳐 38이니 어렵지 않게 따라잡아야 정상이리라.
십의 자릿수마다 단계가 달라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2배 이상의 속도 차이가 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제라드는 카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나를 죽이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채앵!!
“젠장! 일단 쟤부터 죽이자고! 아까부터 자꾸 마법을 날리잖아!”
“크흐흐! 네놈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그러기 싫은걸?”
“개 같은 훔바훔바!”
“…자꾸 날 훔바훔바라고 부르지 마라!! 우리 혁명군에게는, ‘제라드’라는 이름에 큰 의미가 담겨 있단 말이다!!”
“네놈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그러기 싫은걸?”
- 와락!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받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못생긴 얼굴을 와락 구기는 제라드.
이것이 그 유명한 내로남불 이라는 것일까.
잡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사이 쿨타임이 지났는지 파이어볼이 이쪽을 향해 날라왔기 때문이다.
- 콰아앙!
“크흑!!”
마나와 기척에 민감한 초인이라면 파이어볼의 이동 경로를 예측하는 것은 상당히 손쉬운 일이었다.
이능으로 만들어진 불덩이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존재를 과시했으니까.
하지만 그 위력은 무시하지 못했다.
두각을 보이는 지능 스텟의 덕이겠지.
‘도대체 마나를 얼마나 적게 잡아먹기에 열 번을 넘는 횟수의 화염구를 사용할 수 있는 거지? 개사기 스킬이네 진짜.’
카야의 마나 스텟은 130을 넘기지 못했다.
많은 마나를 필요로 하는 스킬이라면 이렇게 많이 쓰지 못하리라.
- 탁탁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술래잡기가 계속되었다.
카야의 등에 칼날을 꽂아 넣기 위해 속도를 줄이면,
제라드가 내게 칼을 휘둘러 왔다.
그렇게 벌어진 시간 동안 카야는 계속 도망쳤다.
‘젠장… 이 방향은!’
지금 그녀는 시간의 신전으로 가고 있었다.
어째서 그쪽으로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시간의 신전으로 가고 있는 것이 맞다면…
그곳은 밀폐된 건물 안이라 더는 도망치지 못할 텐데?
사실 카야에게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하기엔 어려웠다.
기본적으로 전투직은 무식했고, 카야는 상당히 이성을 잃은 상태니까.
- 까아앙!!
제라드의 강한 근력을 정면으로 몇 번이나 상대했다.
덕분에 손바닥은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지 오래다.
최대한 피해야 하는데, 카야의 뒤를 쫓고 있다 보니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힘 스텟을 40까지 높이고 싶지는 않았다.
상황이 특수해서 그렇지, 제대로 맞상대를 한다면 지금의 스텟으로도 충분히 제라드를 이길 수 있었기에.
고작 손바닥 찢기는 것이 아프다고 만 단위의 카르마를 성급하게 사용하기엔 싫었다.
- 탁탁탁!!
바위로 이루어진 언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카야는 시간의 신전으로 가는 바위의 틈을 향해 이동했다.
나와 제라드 역시 카야의 뒤를 쫓듯이 들어갔다.
“이건… 뭐지?”
제라드가 신전을 보고 당황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카야를 쫓는 것에 집중했다.
곧 있으면 그녀를 죽일 수 있다.
“…”
카야는 신전 내부에서 멈춰 서있었다.
지금까지처럼 등을 돌려 달아나는 것이 아닌, 나를 정면으로 향해 있었다.
물론 나는 그런 그녀와 대화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담담히 그녀의 실수를 지적하며, 다리를 한순간도 멈추지 않은 채 쏘아질 뿐이다.
저 가냘픈 목에 칼을 박아 넣기 위해서.
- 타악!
“쫓기고 있는데 알아서 막다른 길로 가주다니. 드디어 삶을 포기한 거야?”
“흐읍!”
- 타악!
카야가 달려드는 나를 향해 마주 달려왔다.
그러고선 내 옆을 구르듯이 몸을 날려 칼날을 피하려고 했다.
그녀 나름대로 내 공격의 사각을 노리려던 것이 분명하리라.
지금껏 겁먹은 모습을 보여준 허점을 찌르듯, 용기 있는 회피 기동을 보인 것이다.
나도 살짝 놀라긴 했다.
하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는 기본적인 반사 신경의 차이와 민첩의 차이가 극도로 벌어져 있었다.
- 퍼억!!
“꺼허억…!!”
- 쿠당탕!!
옆구리에 일정권(一正拳)이 박혀 들어가며 날아가는 카야.
칼을 휘두르던 도중이라 그리 안정적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일정권의 위력은 강력했다.
주먹의 감각이 익숙했다.
갈비뼈 네다섯 개는 부러졌으리라.
“꺼흑… 큽… 프흐…! 콜록…!”
“뭐야, 네게 그런 용기도 있었어? 그런 용기는 진작에 보였어야지. 대략 한 시간 전에.”
회심의 움직임이 간파되어 신전의 벽에 부딪힌 채 숨을 몰아쉬려는 카야.
나는 그런 카야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 칼을 들고 빠르게 다가갔다.
곧 제라드가 돌아올 테니까.
“크하하! 나를 놔두고 누구랑 놀 생각인 거냐!”
하지만 제라드의 등장은 내 생각보다 한 박자 빨랐다.
젠장,
조금 더 시간의 신전을 보고 넋 놓으리라고 예상했는데…
- 휘익!
나는 제라드의 칼날을 간단하게 피했다.
방해물이 없는 지금, 그의 칼날은 나에게 닿지 못한다.
“콜,록…! 끄흡…!”
카야는 운신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들이쉬지 못하고 있었다.
파이어볼을 쓰더라도 괜찮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감각으로 마나의 흐름을 느낄 테니.
그녀가 방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구애를 하는데, 도저히 안 볼 수가 없네. 너부터 죽여줄게. 훔바훔바.”
“…과연 언제까지 네놈의 입이 살아 있나 지켜보겠다…!”
- 타악!!
사념각(邪念脚).
“무슨…?!”
나는 칼을 든 것보다 주먹을 사용하는 것이 더 강하다.
하지만 제라드를 상대로 주먹을 사용하진 않을 것이다.
오늘 주먹에 맞을 주인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칼을 들어도 약하지 않다.
- 스걱!
“끄아악?!…”
마나를 잔뜩 머금어 강화된 팔의 근력을 받은 칼날이 제라드의 왼팔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뼈가 닿지 않은 것이 아쉽다.
분명 인간의 뼈쯤은 부드럽게 잘라내었을 텐데.
“개…새끼가…!!”
“7년 전을 추억 삼아 배에 주먹을 먹여주고 싶긴 한데, 오늘은 너 말고 다른 사람을 때리고 싶은 기분이라서.”
“흐으읍!!”
- 타악!!
제라드가 나를 향해 다시 한번 도약했다.
나 또한 다시 사념각을 사용해 간단하게 피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훤히 드러난 제라드의 옆구리.
그 상태로 칼을 내질렀다.
- 까앙!!
“오? 이번에는 막았네?”
“두 번은 안당… 크헉!”
- 빠악!!
높이 올라간 발 뒤꿈치가 놈의 관자놀이를 부술 기세로 짓이겼다.
몸을 돌리며, 접어 올린 무릎을 강하게 내 뻗어 발바닥과 뒤꿈치로 얼굴을 가격하는…
후려차기라 불리는 기술이다.
우월한 신체 능력과 기다란 팔다리는 단순히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지구의 무술들을 보기 좋게 재현시켰다.
하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내 목표는 단순히 놈의 급소를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 두개골을 부수려고 한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마나가 담긴 하체 근력에 기술이 완벽하게 어우러지면 충분히 가능했었으리라.
내가 미숙했던 덕에 제라드는 살아남았다.
비록 뇌가 흔들려 주저앉은 자세에서 일어나길 몇 번이나 실패하고 있었지만.
“발은 안 쓴다고 안 했으니까. 그치?”
- 스윽… 털썩! 스으윽… 털썩!
“끄으… 으…”
결국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 온 방향을 쳐다본 제라드.
그 눈은 핏줄이 죄다 터져 새하얗던 결막이 붉게 물들여져 있었다.
“쿨,럭…! 끅…! 박,찬…!!”
- 탁탁탁!!
제라드는 나를 죽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발로 설 수 없으니, 짐승처럼 손과 발로 바닥을 밀며 내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곰 비슷한 몬스터의 가죽을 쓰고 있었기에 정말로 짐승처럼 보였다.
최후를 직감한 채 달려드는 제라드의 기세는 어느 때보다 사나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 움직임을 읽기 쉬웠다.
“끄으…! 박,찬…! 여어엉!!!”
- 탁탁탁탁!! …서걱!
“끄아아아아악!!”
제라드의 잘린 왼팔이 나뒹군다.
두 팔과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던 놈이었기에 한쪽 팔이 사라지면 쓰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만 제라드에게 최후를 내려주기로 했다.
“끅…! 크윽…! 젠,장…!”
팔이 잘려나간 왼쪽 어깨로 바닥을 밀어내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는 놈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몸부림치는 놈의 허리를 발로 밟아 짓누른다.
제라드는 내 발을 밀어내지 못했다.
- 푸욱.
“억… 끄…흛…”
망설임은 없었다.
유언을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의 유언을 전달받을 반군은 곧 전부 그의 뒤를 따라갈 테니.
제라드의 최후는 초대 제라드와 같았다.
등에 칼이 꿰였다.
척추를 뚫고 심장이 잘렸다.
허리를 밟고 있던 내 발바닥을 밀어내려던 반항이 1초가 지날수록 잦아든다.
용사의 아들 백하민, 교관 제라드를 이은…
인생 세번째 살인이다.
반군의 우두머리, 혁명가 제라드는 죽었다.
띠링!
[*HARD MODE* 퀘스트, ‘강적과의 전투 경험’ 클리어!]
“…그럼 다음 차례야. 카야. 세상에 되돌릴 수 없다는 게 뭔지 알려줄게. 마지막 작별 인사로.”
칼은 제라드의 등에 꽂아 둔 채였다.
카야는 칼로 상대할 것이 아니었으니.
- 터벅. 터벅.
“쿨,럭… 원래는… 이곳으로 올 때… 나는…”
- 터벅. 터벅.
“나는 살 생각이었지만… 이젠 살기는 그른 것 같으니…”
“유언이라도 남기게?”
“프흐흐… 아뇨.”
- 절레절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표정의 카야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일까?
그 표정을 보니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다.
내 초인의 육감이 경고했다.
그녀에게 다가가던 속도를 빠르게 높였다.
“…도대체 뭔데?”
- 탁탁탁!!
“찬영씨. 같이 죽죠. 제 길동무가 되어주세요.”
- 우우웅!!
“이건, 미친!”
허공에 농구공만한 불덩이가 생겨났다.
많이 본 크기였다.
시간의 신전까지 그녀를 쫓으며 피한 불덩이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이 파이어볼은 내가 경험한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직감이 들었다.
‘젠장! 저 안에 담긴 마나가…!’
전혀 심상치 않은 마나였다.
지금도 파이어볼에 집중된 마나가 늘어나고 있었다.
카야가 집중하며 마나를 흘려 넣고 있음이 분명했다.
지난번 읽었던 파이어볼 스킬에 대한 설명은…
소모한 마나에 따라 구체의 지속시간과 파괴력이 달라진다고 적혀 있었다.
설마, 그 ‘소모한 마나’에 한계가 없었나?
쏟아 부으면 쏟아붓는 대로 화염구가 강해진다고?
‘밀폐된 공간…! 그래서 유적으로 온 건가! 내가 피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럼 설마 위력이 신전 전체를 뒤덮을 정도?…’
그녀가 파이어볼을 쓴 것은 전부 동일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파이어볼 스킬의 한계 파괴력인 줄 알았다.
일단 카야의 집중을 끊어야 한다.
여기서 더 파이어볼의 위력이 강해지면 정말 손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 퍼억!
“끄헉…! 쿨,럭…! 켁…”
카야의 집중이 끊기며 파이어볼로 흐르던 마나가 멈추었다.
나는 최대한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했다.
폭발의 영향에서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나,
찾았다.
- 타악!
“어딜 가! 같이 죽어요! 흫! 하나도 안 아플 거니까!”
- 꽈아아악!!
카야가 달라붙었지만 그딴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파이어볼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카야는 천천히 죽여도 된다.
지금 당장은 내가 사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매달린 카야를 떼어 놓을 새도 없이 몸을 날린다.
신전 중앙에 있던 제단을 향해.
오른손은 이미 인벤토리에서 나왔다.
펜던트는 손에 쥐어져 있다.
“흐읍!!”
- 휘이익!!!
“같이 죽어!!”
직감이 계속 경종을 울린다.
손을 최대한 뻗어 제단에 새겨진 문양에 펜던트를 가져다 대었고,
- !
나는 살 수 있었다.
“허억… 허억…”
- 쿠당탕!
“끄흙… 켁… 여,여긴?… 뭐죠? 무슨 일이… 일어난…?”
카야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내가 펜던트를 가져다 대기 위해 몸을 날려서 튕겨 나간 것이다.
어째선지 밑에서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을 텐데 이곳에는 소음 하나 들리지 않았다.
명색이 신전의 2층인데도.
“전 실패한 건가요?”
“…”
- 탁탁탁!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달려간다.
저 질긴 목숨을 끊기 위해서.
“…감기 때문인지 머리가 안 돌아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마지막 마나를 쥐어 짜낸 파이어볼이에요. 제발, 제발 이걸 맞고 죽어주세요.”
- 화륵!
최대한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중.
불덩이 하나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카야!! 젠장!!”
파이어볼을 피하는 것은 지금 당장도 무척 쉬웠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 등 뒤에는…
수천 개의 하얀 구슬이 있었다.
저 구슬들이 파이어볼에 맞으면 어떻게 될까?
…그 누구도 결과를 알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파이어볼을 맞고 죽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날려 파이어볼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 퍼어엉!!
뒤쪽에서 거대한 마나의 울림이 느껴진다.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수천 개의 구슬을 흩었다.
- 후우욱!!!
이건, 상당히 안좋은 소식이었다.
빛 한 줌 없던 신전의 2층에 거대한 빛이 가득 채우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구슬을 사용하며 겪었던 것보다 몇십 배나 밝게.
- 웅! 우웅!! 웅웅!!
“꺅?! 이 빛은?!”
“서,설마? 하얀 구슬이 전부?!…”
동공을 눈꺼풀이 덮고 있음에도 앞이 새하얗게 보일 정도였다.
동시에 진득한 마나가 콧속과 입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영향으로 마나가 1 늘어납니다.]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영향으로 마나가 1 늘어납니다.]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영향으로 마나가 1 늘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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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알림음이 내 귀를 간지럽힌다.
잠자고 빛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
…
사방이 고요하다.
재빠르게 눈을 떠서 주변을 살폈다.
- 두리번. 두리번.
“카야?…”
카야는 사라졌다.
수천 개의 하얀 구슬도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신전에 2층에는 수천 개의 엘프 유골과 나밖에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