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테라포밍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스템 창이 나를 반겼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시스템 창이다.
띠링!
=
*HARD MODE*
[퀘스트]
내용: 강적과의 전투 경험
상세:
마침내 반군과의 전면전이 벌어졌습니다!
다행히 전황은 아군이 무척이나 유리합니다!
이대로라면 개입하지 않아도 손쉽게 승리하겠지만, 강자를 상대하는 경험을 쌓을 기회입니다!
반군의 우두머리를 손수 처치하세요!
(단, 타인에게 일정 이상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보상: 아이템 정보 확인 Lv2
제한 시간: 06시간 00분 00초.
실패 조건: 반군의 우두머리 ‘제라드[혁명가]’가 무사히 탈출. 혹은 살해 지분율 65% 이하 달성.
실패 패널티: 24시간 동안 모든 숙련도(스텟·스킬) 획득 수치 33% 감소.
포기 패널티: 12시간 동안 모든 숙련도(스텟·스킬) 획득 수치 20% 감소.
=
[’강적과의 전투 경험’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역시!”
제라드에게 가까워지자 하드모드 퀘스트 창이 떴다.
나는 빠르게 그 퀘스트창을 읽어 내려갔다.
보상은 50,000 카르마 상당의 기능.
가능하면 빨리 개방하려고 했던 기능인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보상이었다.
패널티 또한 단순한 숙련도 감소라면 그리 크지 않다.
패널티 시간 동안 느긋하게 지구에서 시간을 보내면 될 테니까.
하지만…
‘성공 조건이 좀 까다롭네. 놈을 처리할 때 지분율을 66% 이상으로 달성해야 한다니… 역시 하드모드 퀘스트는 거저 주지는 않는다는 건가.’
- 탁탁탁!!
다행히 이곳으로 유인하며 놈의 마나를 뺀 공로는 내가 차지할 확률이 높았다.
나는 서둘러 전투직 셋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놈을 향해 달려갔다.
놈이 지치면 지칠수록 내가 얻게 될 지분율은 떨어질 테니까.
나는 오히려 제라드가 다치지 않았기를 강하게 빌었다.
‘놈을 끌어들여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겠어.’
이곳에서는 타인의 개입을 받을 확률이 너무나 높았다.
적군과 아군이 뒤섞여서 난전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적이 개입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였고,
아군이 개입하면 나의 지분율이 떨어질 것이다.
지분율을 높이기 위해선 놈과 일대일의 환경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녀석을 단독으로 상대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띠링!
=
[스킬 이름] 세뇌
[레벨] -
[속성] 지능
[타입] Buff
[상세]
아주아주 가벼운 암시를 겁니다.
이질감이 느껴지면 세뇌는 해제됩니다.
보유한 지능 수치에 따라 성공률이 달라집니다.
대상의 지능 수치가 높을수록 저항합니다.
중첩 가능합니다.
* 마나 소모량이 상당히 높습니다.
[세뇌 유지시간] 00:30:00
[재사용 대기시간] -
=
‘내 특성으로 놈의 스킬을 충분히 무효화 할 수 있을 거야.’
무려 ‘아주아주 가벼운’이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로 약한 스킬이다.
놈은 내가 근거지에서 쉘터로 도망가는 와중에 내게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에서 나의 발걸음을 막을 정도로 강하지 않은 스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멀리서 보이는 놈은 합공을 당하는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스킬을 사용하는 낌세는 없었다.
전투 도중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스킬이란 뜻이다.
띠링!
[*HARD MODE* 퀘스트가 수락되었습니다!]
거리낄 것은 없었다.
내가 빠르게 놈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그때.
- 덥썩!
달리던 나의 팔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차,찬영씨!”
“누구… 카야?”
*
나탈리야 카야.
그녀는 스스로를 무척이나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베풀 줄 아는.
실상은 카야의 생각과 조금 다를지라도…
일단 그녀는 자신을 그리 평가한다.
카야에게 이타적인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의식적이라곤 하나, 박찬영이 위험했을 때 대신 당한 것이 그녀였으니까.
- 채앵! 챙!!
대다수는 그 어떤 재화·명예·권력보다 자신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긴다.
당연하다.
죽은 이후에 물질적인 것을 얻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카야는 그런 구분이 조금. 아니, 상당히 분명하게 했다.
가령 누군가가 수백의 목숨을 살리는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거래를 제안했다고 하자.
과연 받아들일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대다수는 선택을 미룬 채, 우선 질문 할 것이다.
선택으로 인해 생사가 갈리는 수백의 사람 중 지인이 섞여 있는지.
자신이 거절한다더라도 이 거래를 타인은 알지 못한 채 비밀로 묻히는지.
선택의 제한 시간과, 혹여 있을 작별 전에 마지막으로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있는지.
그런 짧고 긴 고민이 지나며, 결국 백 중 구십은 고개를 저으리라.
처음 보는 수백의 사람보다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그리고 카야는 그 100명 중 가장 먼저 거래를 거절할 것이다.
위의 고민이 담긴 질문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반대 저울에 무엇이 올라가든, 그녀의 생명이 우선이다.
그 정도로 카야는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 챙! 채앵!
“조심해!! 배신자 새끼들 하나하나가 꽤 강하다!”
“젠장, 매일같이 몬스터랑 굴러서 그런가? 뒤지게 잘 싸우네!”
“개새끼들! 밥도 제대로 못 먹어 비쩍 마른 주제에!”
- 촤악!! 까앙!!
“씹! 놈들의 머릿수가 너무…!”
“몰아붙여! 포위되면 끝장이야!! 이 악물고 뚫어야 해!!”
“뭉쳐서 사각을 줄여!”
철과 철이 부딪히며 불똥이 피어난다.
날카롭게 벼려진 냉병기는 인간의 살을 쉽사리 갈랐고,
초인의 근력은 동일 무게의 쇠보다 더 단단한 인간의 뼈를 어렵지 않게 부수었다.
사방에는 주인을 잃은 칼이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마찬가지로 주인을 잃은 팔과 다리 역시.
초인과 초인의 대규모 싸움이다.
지구의 그 어떤 역사를 뒤져도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광경일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허억…!”
최전선에서 한걸음 떨어진 장소.
그곳에서 안면을 튼 인물이 픽픽 죽어 나가는 전투를 마치 남의 일처럼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카야였다.
그녀는 누가 보아도 패닉에 빠져 있었다.
“어떻, 어떻게 해야…”
솔직히 말하자면, 카야는 평생을 노력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그녀 또한 그 사실을 내심 인정하고 있다.
몇몇 전투직이 그렇듯, 그녀도 지구에서 별 볼 일 없는 패자의 인생을 살았다.
포기는 더이상 양심을 찌르지 않았고, 안주는 몸에 박혀 빠지지 않았다.
마치 지구 어딘가에 존재하는 용사의 아들처럼.
카야가 백하민과 다른 점은 적어도 자신의 추함을 누군가의 앞에 내비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부끄러운 면을 아는 것.
또한 성공적으로 숨기는 것.
그것으로 타인과 무난한 친교를 쌓기에는 충분했다.
그 조차 어느정도 크리스에게 꿰뚫려 보인 듯 했지만.
그런 그녀도 훈련소에서 크리스에게 교육을 받으며 그런 기질이 교정되는 듯했으나…
그조차 오래가지 않고 다시 나태함을 되찾았다.
카야는 변하지 못했다.
아니,
변하지 않기를 ‘선택’했다는 것이 옳으리라.
‘파이어볼! 파이어볼이 있으니 난 무사할 거야…!! 여태까지 몬스터에게 이것만 써도 모두 칭찬해줬으니까!!’
전투직 중에서도 극소수에게만 찾아오는 기적.
이능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그것도 쉘터 역사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파괴력에 치중된 이능이.
훈련소에서 처음 손바닥 위에 불을 피운 이후.
그녀의 전투직 삶은 달라졌다.
모든 전투직이 이를 악물고 훈련할 때, 그녀 혼자 땀 흘리지 않아도 이미 강했다.
저들이 목숨을 거는 전투가 그녀에겐 손짓 한 번으로 해결되었다.
몬스터는 그녀에게 접근하지도 못한 채 잿더미가 되었다.
그것을 깨달은 카야는…
힘든 훈련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선택은 마냥 틀린 것은 아닌 것이 증명되었다.
전혀 의욕을 내보이지 않았음에도 실적은 손쉽게 쌓였으니까.
모두 몬스터를 상대로 너무나 큰 효과를 보이는 ‘파이어볼’의 덕이었다.
오늘의 반역자를 상대로 하는 대규모 전투.
그 광경이 너무 잔혹하여 잠시 당황했을 뿐, 여태까지 그렇듯 이능은 카야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살리고, 전쟁의 영웅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 생각 한 카야가 내면에 존재하는 마나를 움직이던 중.
“흡…!!”
카야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깜짝 놀라며 몸을 굳혔다.
손바닥 위에 떠오른 불씨는 그 크기를 불리지 못한 채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마나 운용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이능 시전은 성공적으로 취소 되었다.
패닉에 빠져 판단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민감하기 그지없는 생존 본능이 그녀를 살렸다.
‘적들은 지성이 없는 몬스터가 아니야…!! 내가 파이어볼을 쓰는 걸 보면, 분명 나를 우선시해서 노릴 게 분명해!!’
너무 위협적이기에 도리어 목표가 된다.
그 정도로 카야가 가진 화력은 범상치 않았다.
마치 현대 화기가 허용되지 않은 이 세계에서 홀로 폭격이 가능한 것처럼.
적들 역시 현대인이다.
카야가 얼마나 승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지 어렵지 않게 눈치챌 것이다.
희생을 감수하고 죽이려 하리라.
카야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파이어볼을 사용했다면…
카야는 이 전투의 수많은 사망자 중 한 명이 되었을 것이다.
‘왜! 나를 지켜 줄 인물을 남기지 않은 거야! 지켜만 주면 엄청 활약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녀 본인에게 있었다.
평소 그녀는 몬스터와의 전투를 은근슬쩍 다른 전투직들에게 미뤘다.
소음이 크기에 다른 몬스터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변명을 대면서.
물론 실상은 마나를 쓸 때마다 오는 탈력감과 피로가 싫었기 때문이다.
‘별로 위험한 상황도 아닌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지 않나?’라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가진 무력에 비해서 전혀 유명하지 않았다.
그녀가 활동하던 구역을 제외하곤 카야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어떻게든 교관이 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몬스터를 찾아 죽여 실적을 쌓던 크리스와 상반된 행동 방식이었다.
‘지,지금이라도 요청을… 하지만 다들 전투에 한창이고, 어떻게 해야…!!’
구보를 제외하고, 제대로 된 훈련을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그녀가 가진 근접 전투력으론 단 한 명도 상대하지 못한다.
상대의 공격 범위에 카야의 몸이 닿은 순간이 곧 목숨을 잃는 순간이리라.
다른 방법.
살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은 너무나 두렵다.
하지만 이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채 멍하니 방관,
즉… 항명에 더불어 탈영을 하는 것은 더욱 안된다.
전시 상황에서 전투직의 탈영이 얼마나 무거운 중죄냐고?
훈련소 시절, 크리스에게 받은 교육 덕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전투가 끝난 이후 재판에서 처형까지 갈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프래깅(Fragging, 군대 내부에서 발생한 상관 살해.)을 의식해 즉결 처분은 안 되겠지만.
못해도 전투직에서 평생을 노역을 해야 하리라.
전투직의 온갖 혜택과 봉급은 박탈당한 채,
그리 강해 보였던 사람들이 픽픽 죽어 나가는 일자리에서,
늙어 죽거나 몬스터에게 죽을 때까지!
바짝 돈을 번 뒤, 위험한 일과 영원히 안녕을 고할 예정이었던 카야로서는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카야가 파이어볼을 쓰는 동안 달려드는 반군들을 막아 줄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반군의 수는 그리 많지는 않았다.
열댓 명의 적을 상대로 몇 초 버텨 줄 아군 두세 명.
그 정도면 승기를 굳히는 것에 충분하다.
다른 말로 고기 방패가 필요하다.
당연하지만, 아군에겐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게임 같은 편리한 기능이 파이어볼에 있을 리 없다.
파이어볼이 활약을 하려면 반군을 앞에서 틀어막고 있는 아군 또한 피격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지켜줘야 할 동료가 아닌,
눈이 돌아간 채 달려드는 열댓 명의 반군과 함께 파이어볼의 폭발에 삼켜져 산화해 줄 허수아비니까.
- 탁탁탁.
그때.
누군가가 굳은 표정으로 카야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제라드가 날뛰며, 가장 치열한 전선이 된 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나가는 잘생긴 남자.
박찬영이다.
“아! 맞아!”
카야는 자신이 박찬영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과연 포션과 『자연재생』이 있는 그의 목숨을 구했다고 해도 좋을진 모르겠지만,
카야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또한 박찬영을 대신하여 백원후의 일격을 맞아준 것은 사실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바보 같은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 됐어! 이걸 이용하자!’
초기엔 지금과 다른 외모로 많은 차별을 받았다고 하는 박찬영.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을 웃는 얼굴로 대한다.
그가 하고 있는 외모의 인상대로, 순하고 사교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러니 목숨을 구한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리라.
‘…괜찮아. 파이어볼의 범위에 휩쓸려도 안 죽을 수도 있고, 오히려 전신 화상 정도로 전투직에서 은퇴하면 이득 아니겠어? 그리고 나 아니었으면 죽었을 목숨인데 뭘!’
자기 합리화를 했다.
잠깐 친해진 사람의 인생보다는, 그녀의 생명이 더욱 중요했다.
애초에 저울질할 거리가 못 되었다.
적어도 카야에게는.
카야는 그의 무력을 직접 본 적이 있다.
백원후를 처치한 것을 증명하고, 준 전투직의 직위를 받을 때.
그는 스스로가 가진 무력을 모두의 앞에서 입증했다.
분명히 어지간한 전투직은 훌쩍 뛰어넘을 무력을 지녔다.
이 성장 속도면 몇 달 뒤엔 교관까지 노려볼 수 있을 정도로.
그녀에게 진 빚에, 손을 꼽을 수준으로 강한 무력까지.
그러니…
혼자서도 고기 방패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해 내리라.
자신은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리 생각을 마친 카야는 박찬영을 향해 달려갔다.
- 탁탁탁!
“차,찬영씨!”
박찬영의 팔을 붙잡은 카야는 살짝 놀랐다.
앞으로 있을 전투의 흥분 때문일까?
평소 부드러운 표정과 달리 날카롭기 그지없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평소의 웃는 얼굴은 ‘백하민’으로 살며 숨 쉬듯 몸에 익은 이미지 관리였고,
지금의 표정이 박찬영의 진실 된 얼굴이지만…
마찬가지로 카야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누구… 카야?”
냉기 서린 박찬영의 표정은 카야를 확인하곤 의문스러운 얼굴로 바뀌었다.
그 사실에 카야는 안도했다.
“왜요? 저 지금 급한데.”
“저를, 절 도와주세요!”
카야는 겁먹은 척을 연기했다.
스스로도 본인이 꽤 예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이 동정심을 더 불러일으키기 쉽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박찬영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카야는 그것을 봤지만, 우연이라 치부한 채 넘겼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난전 중에서 그녀의 연기를 뚫어 볼 정도로 눈썰미가 그에게 있을 리 없다.
“무슨 소리입니까? 어떤 도움이 필요하신데요?”
“저를… 지켜주세요!… 제게 이능이 하나 있는데, 지켜만 주시면 엄청 활약할 수 있어요! 승리를 굳힐 수 있을 정도로!”
“…죄송합니다. 지금 급하게 볼 일이 있어요. 정확히는 반군의 우두머리를 잡으려 합니다.”
반군의 우두머리를 잡는다?
아군 서넛이 달라붙어도 압도를 하는 저 괴물을?
카야는 박찬영의 발언을 제대로 믿지 못했다.
동시에, 그의 결심 어린 표정을 보니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이런 건 전혀 고려할 거리가 못 되었다.
제라드를 빨리 죽여 아군의 희생을 줄이는 건 관심 없고,
자신의 앞에 놓인 벽을 치우는 것이 더 급했기에.
중요한 사실은 박찬영이 제안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카야는 내심 그 사실이 기분 나빴다.
그가 자신에게 진 빚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야씨를 지키는 것보단 제라드를 죽이는 것이 더 승패에 영향을 끼칠 것 같네요. 부탁은 다른 분께…”
“다른 사람은 전부 싸우고 있잖아요! 절 도와줄 사람은 찬영 씨밖에 없어요!”
“그리 말씀하셔도 제 생각을 돌리긴 힘들 겁니다. 그럼 전 전투에 합류…”
어쩔 수 없다.
직접 이런 말을 하면 추하기 그지없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다.
“기억 안 나세요?! 전 찬영 씨를 한번 구해줬잖아요! 그걸 지금 갚으란 거에요…!”
노골적인 말에 박찬영의 눈썹이 다시 한 번 움찔거린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완전한 부정에서, 이야기는 들어 보겠다는 태도로 바뀌었으니.
“…정 그러시다면 우선순위를 정하죠. 제가 제라드를 잡고, 그 이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혹시 제가 적의 리더를 쓰러뜨리는 것을 도와드려야 하는…”
“아니요. 도움은 됐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주시면 곤란하거든요.”
“아. 절 그렇게까지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네. 뭐… 그런 거로 하시죠.”
카야는 자신이 저리 강한 적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이리 그녀를 생각해 주는 박찬영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음에 양심이 찔렸지만,
그조차 곧 잠잠해졌다.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심적 고통은 이미 지구에서 수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익숙해졌다.
“출발 전에 들어보죠. 카야씨가 가진 이능이 뭡니까?”
“아! 폭발하는 화염구를 쓸 수 있어요. 너무 강하고 화려해서, 적의 시선을 끌고 말 거에요. 그러니 절 지켜주세요!”
오래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항명하지 않고 싸웠다는 증거만 남기면 충분하다.
그러니 파이어볼을 한 번만 적중시키면 된다.
‘게다가 딱 한 번만 써도 영웅 대접을 받을 확률이 높고!’
단 한발.
마나를 최대한 담아서 터뜨리면, 박찬영에게 발이 묶여 뭉쳐있던 적 대부분을 전투 불능 내지 사망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러면 눈에 보이는 손실을 입은 적군은 패배가 확정된다.
그녀는 열댓 명의 적을 일격에 해치운 영웅이 되는 것이고.
물론 그렇게 강한 일격을 사용하면 그 중심에 있던 박찬영은 육편도 찾을 수 없겠지만…
카야는 그 사실을 머리에 담아두지 않고 도망쳤다.
“폭발… 이라. 그렇다면 그들을 묶는 제게도 영향이 있겠군요.”
“…네?”
“틀렸습니까?”
카야는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게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는 박찬영은 이미 의심하는 낌새였다.
뒤에서 그의 안위가 보장되지 않은 공격을 한다는 걸 허락해 줄 리 없었다.
박찬영은 그녀가 가진 이능의 상세한 정보를 전혀 모른다.
백원후와 싸울 때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카야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속이자.
“…그. 괘,괜찮아요! 제가 이 세계에서 지낸 날이 얼마인데요! 이능의 컨트롤 정도는 이미 마스터 했다고요?”
“……”
“찬영씨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조절이 가능한 능력이에요! 찬영씨가 할 일은… 그저 앞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붙잡아 주시기만 하면 돼요!”
“……”
“그럼 제가 적들만 골라서 공격을…”
- 후우…
카야의 말을 끊고 박찬영이 미간을 짚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깊은 인내와 분노가 담긴 한숨이었다.
“한 번. 한 번 용서해드리죠. 대신, 이걸로 빚은 사라졌습니다.”
“…방금 뭐라고?”
“이야기는 이걸로 끝입니다.”
- 터벅터벅.
박찬영은 망설이지 않고 돌아섰다.
멍하니 서 있는 카야를 뒤로한 채.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박찬영은 화가 났으며, 카야의 제안은 완벽히 거절당했다.
‘뭐,뭐야. 뭔데?…’
목소리가 너무나 차가워졌다.
날이 서다 못해, 그녀를 마치 적대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 느낀 카야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당황했다.
그가 가버려서야 부탁할 인물이 없다.
어중간한 무력을 가진 전투직을 고기 방패로 써먹으려면 두셋은 필요한데,
이런 난전 중에 가능할 리 없다.
카야에게 박찬영이란 놓쳐서 안 될 기회였다.
- 탁탁탁!
“잠깐만요! 왜 화를 내세요! 잠깐 버텨달라는 건데! 고작 그것도 못 해줘요?”
오히려 화를 내었다.
실제로 카야는 분노했다.
박찬영이 그녀의 뜻대로 조종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심지어 목숨의 빚을 무시하는 태도 아닌가?
그는 그러면 안 되었다.
카야의 뜻대로 숭고한 구원자가 되어 주어야 했다.
그녀는 그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릴 자신도 있었다.
새로 생긴 연인을 잃은 크리스를 달래 줄 자신 역시 있었다.
그러니…
박찬영이 퇴장하기 알맞은 장소, 알맞은 때는 바로 지금이리라.
“찬영씨! 왜 대답도 없…”
- 스윽.
구겨진 미간.
박찬영은 짜증이 섞인 눈으로 카야를 바라보며 손을 올렸다.
펴진 하나의 손가락은 어느 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쪽을 보라는 의미다.
카야는 손이 향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는 치열하게 전투하고 있는 전장이 있었다.
“써 봐.”
“네? 갑자기 무슨…”
“네 이능, 당장 써보라고. 최전선을 향해서. 하지만… 만약 네 말과 달리 아군이 피해를 당한다면, 넌 내 칼날에 죽어.”
“…”
- 스릉…
박찬영이 허리에 매단 칼을 빼 들었다.
동시에 카야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잔꾀는 전부 들켰다.
타인의 이능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이렇게 멀리서는…”
“지랄하지 말고. 나를 방패로 세워서 영웅 행세 할 생각 아니야?”
“!!…”
- 움찔!
표정에 경악이 떠올랐다.
전부, 들켰다.
그녀의 추악한 계획이.
- 피식.
그런 카야의 표정을 한번 비웃어 준 박찬영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멈춰 선 다리를 놀려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여전히 한결같았다.
제라드가 있는 곳.
“…”
홀로 남은 카야는 멍하니 땅을 바라보았다.
그를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이 들켰음에서 오는 수치나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기에 카야는 이성적이지 못했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하나.
얼토당토않게도, 분노였다.
‘내가…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요?’
이성이 점점 지워지는 걸 느낀 카야는…
고개를 들어 제라드와 대치하고 있는 박찬영의 등을 바라보았다.
*
‘쌍년이었네. 허, 스킬 효과를 읽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뒤질 뻔했잖아?’
아군에게는 위력이 조절된다?
그런 능력 따위 스킬 설명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앞으로도 만나는 사람의 스킬을 읽는 버릇은 꼭 유지해야겠다.
더러운 기억을 털어낸다.
이렇게 감정이 흔들린 상태면 성공할 것도 실패한다.
두뇌만큼은 어느 상황에서도 냉철하게 유지해야 한다.
『자연치유』의 덕인지, 들끓던 분노는 금세 가라앉았다.
- 탁탁탁!!
뒤돌지 않고 제라드만을 바라보며 다리를 움직였다.
제라드를 도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냥 열심히 칼을 쳐내고 있는 놈의 근처로 다가가 반갑게 손을 흔들면 되었으니까.
- 챙! 챙챙!!
“야, 훔바훔바. 너 나랑 선약 잡아놓고 왜 다른 애들이랑 놀고 있냐?”
“…개자시익!! 제 발로 사지를 걸어 들어왔구나아아!!”
놈은 내 얼굴을 보고선 표정을 악귀처럼 구겼다.
참 그리운 표정이다.
7년 전에는 저 표정을 했을 때, 배에 주먹을 먹여줬는데.
- 까앙!!
“큭…!”
“으헛!… 이놈, 왜 이렇게 힘이…!”
- 타악!
“박찬영!! 네놈의 목덜미를 이로 씹어주마!!”
폭발적인 힘으로 합공을 하던 전투직들의 칼날을 쳐낸 제라드가 내게 달려들었다.
괜히 반군의 우두머리가 아니라는 듯, 그 기세는 무척이나 강맹했다.
- 탁탁탁!!
“놈!! 도망치지 마라!!”
“다른 사람들 떼어 놓고 둘이서 놀자고. 그게 너도 좋잖아?”
“크흐흐!! 오만한 새끼!”
너무 멀리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적에게 둘러싸이면 낭패니까.
적당히 근처에 서서…
- 덥썩!
“이대로 못 가!!”
“억?!”
“내가 찬영씨 목숨 구했잖아! 그럼 갚으라고!! 똑같이 목숨으로오오!!”
“이런 씹?!”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난 절대 혼자 안죽어. 죽어도 같이 죽어!!”
전선에서 멀어지던 나를 붙잡은 것은 카야였다.
나는 카야의 눈을 보고 깨달았다.
눈이 완전히 뒤집혔다.
도저히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카야가 고통에 의해 정신을 차리도록 그녀의 뺨을 강하게 쳤다.
손바닥으로?
아니, 주먹으로.
- 빡!
“끄,윽!”
“젠장! 정신 차려! 지금은 이럴 때가… 큭!!”
- 까앙!!
“크하하!! 한눈팔지 마라!!”
칼에 담긴 힘은 상당히 강했다.
철로 된 칼의 울림이 칼자루를 타고 손 가죽을 강하게 찢으려 들었다.
미리 확인했던 놈의 힘 스텟은 무려 40.
브랙을 포함한 내가 본 누구보다도 높은 힘 스텟이었다.
십의 자릿수가 바뀔 때마다 차원이 높아지는 스텟의 특성상, 절대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안 되는 힘이다.
“손 놔! 개자식아!!”
- 퍼억!
“싫어어억!!”
주먹으로 카야를 강하게 내려쳐도 내 허리에 감긴 손이 풀리지 않았다.
정말 눈이 돌아가서 같이 죽자는 생각이었다.
생각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카야 때문에 속도가 느려져서 제라드의 칼날이 가끔 날아왔으니까.
- 까아앙!
“…큭!!”
“크흐흐! 죽을 때까지 함께라니! 낭만 있군.”
“…”
‘썅년이. 한 번 참아줬더니, 이걸 이리 뒤통수를 쳐?’
카야를 향해 강렬한 살심이 솟구친다.
참을 필요는 없다.
치우면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안 된다.
아직 보는 눈이 많았다.
죽이더라도 아군 전투직이 못 보는 숲으로 가야 한다.
단순히 전선의 근방으로 가려던 예정을 바꿔야 했다.
전투직 답게 쓸데없이 강한 카야의 근력은 제라드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면서 풀만 한 놈이 못되었다.
보는 눈이 사라질 때까지는 카야를 달고서 움직여야 할 것이다.
- 탁탁탁!!
제라드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면서 계속 움직인다.
그리고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깊숙한 정찰 구역에 도착한 그때.
- 휘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