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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94)화 (94/310)



〈 94화 〉테라포밍

정확히 사흘이 걸렸다.
크리스의 허락을 받아 내는 것에는.
마지막 와서는 기어코 따라오겠다는 것을 말리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럼… 부탁할게?”

“…알겠어.”

“허락해 줘서 고마워.”

“…”

“그래도 솔직히 말하고 허락받았잖아. 숨기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아?”


“개새끼…”

“큭큭. 네가 욕하는 것은 오랜만에 듣네.”


내게 마지못해 허락해준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과 후회가 가득했다.
크리스는 지금도 내게 허락을 해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잠깐 품에 끌어 안아준 뒤, 크리스를 배웅했다.
크리스가 11구역 전투직으로써 정찰을 가야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비번이었기 때문에 크리스와 같이 출발하지는 않았다.
그녀와 얘기해 둔 할 일도 있었고.

터벅터벅.


크리스가 점점 멀어진다.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던 크리스의 시선을 느끼며,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한… 30분 정도면 되겠네.”


출발하기까지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물론 반군의 본거지로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제라드를 도발하러 가는 것은 전투직들이 11구역에 모여 전투태세를 끝마친 후가 될 것이다.
오늘의 목적은 선전포고하기 위함이다.
나는 가만히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 터벅터벅!


몸이 흔들리며 겉에 걸쳐진 생가죽이 흔들린다.
크리스의 말에 따르면 놈은 곰과 비슷한 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다닌다고 했으나, 그런 것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급하게라도 비슷한 색을 띤 가죽을 기워 급조한 것이다.
물론 바느질은 크리스가 해주었다.

터벅터벅!

일부러 기척을 잔뜩 내고 걸어 다녔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마나를 사방팔방에 흩뿌려 가며 내 존재를 알렸다.
당연하게도 순찰을 하던 전투직들이 나를 감지하고는 찾아왔다.

“멈춰! 누구냐!”

경계 어린 목소리가 나를 향한다.
나는 그 방향으로 얼굴을 돌았다.
나를 향한 전투직 몇몇을 향해  얼굴의 전부를 보여주었다.

- 스윽…

“제라드…! 놈이다! 반군의 우두머리!”


“허억!”
“네?… 저,저자가?!”
“어째서 이곳에?!”

미리 약속한 대로 크리스가  얼굴을 보며 신상을 크게 읊었다.
크리스의 연기는 무척 뛰어났다.
순식간에 모든 전투직들은 내가 제라드라고 믿어버렸다.
이제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반군이 아니라, 혁명군이지. 우리는…”


“젠장! 혼자? 혼자인가?”
“혼자면 차라리 이곳에서…”


“…지금 농담하는가? 설마 내가 혼자 왔을 것이라 생각하나? 진심으로?…”

“섣부르게 행동하지 마! 상대가 숨어있을 수 있어!”
“헉! 넵!”
“꿀꺽…”


혼자인 나를 보고 덮치려던 전투직들이 나와 크리스의 합동 연기에 속아 물러났다.

가장 큰 위기를 넘겼으니 이제 크리스와 대화를 주고받으면 된다.
크리스는 정말 내게 좋은 협력자가 되어 주었다.
11구역에서 가장 강했기에 영향력이 높았고, 덕분에 지금 상황에서도 나와 대표로 이야기하기 딱 알맞았다.
크리스가 나를 향해 입을 연다.


“…어째서 이곳을 찾았지?”

“바로 본론을 물어? 좋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간단해. 우리 혁명군은, 썩어 문드러져 기생충밖에 남지 않은 네놈들을 치울 준비를 끝마쳤다.”


“…그건 선전포고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지?”


“크흐흐… 일방적인 학살을 전쟁이라고 부를  있다면.”

“미친 새끼… 꺼져.”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만 사라져주지… 어차피 곧 떨어질 목들일 텐데, 길게 이야기 나누어서 뭣할까.”

- 스윽…


나는 망설이지 않고 뒤를 돌아 숲을 걸어 나갔다.
놈들이 나를 쫓아 오는 낌세는 없었다.
아마 크리스가 유인일지도 모른다며 말렸기 때문이겠지.


이제 목적은 끝마쳤다.
기척을 죽이며 걷다, 전투직과 상당히 멀어지자 얼굴에 건 디시빙(Deceiving)을 풀었다.

‘이제 쉘터가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면 되겠군.’

계획은 순조로웠다.



*



“흐…아! 으… 어떻, 어떻게 하죠?! 어떻…”

- 덜덜덜!!

미인이었던 얼굴이 패닉으로 질려 떨린다.
이대로면 큰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은 얼굴이다.
누가 보아도 심각한 불안을 겪고 있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군대였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관심병사로 등극 되어 최대한 총기류와 떨어뜨렸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흉기가  신체인 초인 세계다.
최대한 그녀를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진정해! 카야!”

처음 보는 얼굴의 전투직들이 카야를 달랜다.
카야가 근무하던 12구역의 전투직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야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저는…! 저는  전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매번 고블린이나 오크 밖에…”

“너는 이미 당당한  인분을 하는 전투직이라고!”

“아뇨! 아니에요!  빼주시면 안 될까요? 자, 자신 없어요. 제발…!”


다가올 대규모 전투에 겁에 질려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전투직과 전투직의 싸움이다.
사상자가 꽤나 나올 것은 보지 않아도  수 있겠지.
카야는 그 사상자가 자신이 될까 봐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카야와의  만남, 그녀가 북부 훈련소를 지원 왔을 때도 상당히 당황해하고 있었지?’


이젠 과거에 크리스와 카야 둘이 나눈 대화를 이해할  있었다.
전투 상황이 완전히 종료된 것을 알았음에도 카야는 상당히 당황했다.
나라는 훈련생이 주변에 있었음에도, 크리스가 ‘광년이’를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버릴 뻔했을 정도로.
분명 크리스가 카야의 옆구리를 때리지 않았다면 큰 실수를 했으리라.

‘용케 백원후의 손길에서 나를 구해줬네…’

심성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리라.


아니면 그때의 행동은 그냥 사람을 구하려는 븐능의 영역이었던가.
종종 있지 않던가?
차에 치이려는 모르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밀쳐버려서 대신 치이곤 하는 사건이.
고작 주삿바늘을 아직까지 무서워하던 카야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물론 나만은 그녀를 욕해선 안 된다.
그것이 카야가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나는 카야에게 한번 크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열! 저 아직 독감의 열이 완전히 내리지 않았어요…! 아,아픈데 싸울 수는 없잖아요?”

“…그런 건 상관없어. 하지만 일단 뒤로 가서 쉬자. 정신부터 진정시키자고.”


“흐윽…”

전투직에게 둘러싸인 카야가 뒤쪽을 향해 움직였다.
전선이 되리라 예측되던 장소와 멀어지자, 그제야 카야는 조금씩 안정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카야도 걱정되지만 그녀를 계속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내겐 해야  일이 있으니까.


주변을 흩어보니 이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5구역의 전투직들도 도착해 있었다.
때가 되었다.
나는 내 옆에 선 크리스의 손을 맞잡았다.
슬슬 출발하자는 신호다.
나와 크리스는 바쁘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관리소장에게 다가갔다.


“11구역 관리소장님. 경계조로 자원하고 싶습니다. 저랑 크리스 둘이서요.”

“음… 위험한 것은 알고 계시죠?”

“그래도 당장 급하게 필요한  아닙니까?”


“…맞습니다.”

“탈영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크리스는…”

“교관의 직책을 받을 정도로 신뢰가 높은 자를 의심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경계조가 너무나 급해서 그런데, 당장 출발 가능할까요?”


“알겠습니다.”

“자원에 정말 감사합니다. 음… 잠깐만요.”


- 사락! 사락!


관리소장이 손에  서류를 넘겨가며 무언가를 재빠르게 확인했다.
나와 크리스는  옆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A-02구역을 경계 부탁드립니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정리되면 사람을 보내 교대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넓디넓은 11구역 중 우리가 맡을 세세한 구역이 지정되었다.
그 위치가 놈들의 근거지와 방향이  틀렸지만, 상관없다.
마음만 먹으면 전투직은 탈영하기가 무척 쉬웠으니까.
 이후 쉘터를 제외한 인간의 터전이 없어서 그렇지…

- 터벅터벅!


우리는 곧장 A-02구역으로 이동했다.
구역에 도착한 직후.
나는 크리스를 향해 말했다.


“이제 난 가볼게.”


“…그냥  하면 안돼? 아직 모든 것을 되돌릴  있는데…”


“괜찮아. 정말로 무사할 거야. 약속해.”

“…믿을게.”


- 끄덕.


뭐지?
너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마지막 와서는 말을 바꿔서 나를 말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한두 마디로 설득되지는 않아야 정상이다.
그녀는 트라우마에 가까울 정도로 내게 위협이 오는 것을 배제하고 싶어 하니까.
나는 약간 의심의 눈초리를 담아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크리스, 몰래 내 뒤를 따라오지 않을 거지?”

“…”

“대답해.”

“…흐윽… 제발…”


크리스는 결국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수가 막힌 그녀의 눈이 걱정과 눈물로 젖어 들었다.
계속 달래 주었다.
적어도 그녀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는.
그 정도의 시간 여유는 있었다.


나는  번 그녀를 달래 준 뒤에야 그녀에게 따라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흐읍! 찬영, 진짜 다치기만 해봐. 가만 안 둘 거야. 정말로 가만 안 둘 거야. 진심이야.”

“설령 다치더라도 치료할  있어. 그때, 네 다리를 치료한 방법으로.”

“…잘났어 정말.”

- 퍽!

주먹  대 정도면 싸개 친 거다.
나는 고개 숙인 크리스에게 얼굴을 내려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반군의 본거지 방향을 향해 출발했다.


*



최대한 기척을 감춘다고 감췄지만,
세부 구역을 지나갈 때마다 경계조인 전투직들에게 몇 번 발견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내가  대응은 간단했다.


“이와타 켄토님, 욘 그로스만님 맞으시죠??”


“아, 구역 전부 돌아다니면서 확인 중이신가요??”

“넵! 수고 많으십니다. 혹시 특이 사항 있나요?”


“아직 없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경계 감사드립니다!”

멀리서 그들의 상태창을 열고 이름을 뱉어서 말하면, 그들이 알아서 오해해주었다.
물론  잘생긴 외모로는 너무 눈에 띄어서 인상이 흐릿한 얼굴로 바꾸었다.


- 탁탁탁!!


그렇게 11구역을 벗어난 뒤, 이강인이 알려준 곳을 향해 이동했다.
반군의 근거지로 향하는 길을 꽤나 자세하게 알고 있었는지 외우는 것에만 시간을 조금 잡아먹었다.
덕분에 헤매지 않고 길을 찾고 있었다.


- 탁탁탁!!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이동했다.
시간이 흘러 구보하는 속도로 뛴다면 1시간은 걸릴 거리를 이동했을 때.

“…저건가?”

저 멀리 나뭇가지 사이로 길게 늘어진 목책이 보였다.


*



제라드는 부하의 말에 밖으로 서둘러 뛰쳐나왔다.
원래의 그라면 방금의 보고 따윈 헛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거지 근방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제라드의 귀까지 닿은 목소리가 그의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게 했다.
제라드가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 탁탁탁!

제라드는 서둘러 목책 위로 올라갔다.
부하의 보고에 의하면 목소리의 주인은 혁명군 기지의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목책 위에 올라선 제라드가 아래를 확인했을 때는, 부하의 보고가 틀리지 않았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 자신이 제라드라고 주장하는 자가 왔습니다.’라는 멍청한 보고가.

“무슨…? 살아, 살아 계셨습니까?”

제라드의 시야에 들어온 그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굳센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또한 올곧았다.
늙지도, 젊어지지도 않았다.
마치 과거에서 되살아난 것만 같은 모습이다.
분명 제라드 그 스스로가 장례식에 화장까지 마쳤는데도 불구하고.

“왕 자건. 내가 돌아왔다.”

“!!…”


제라드의 머리가 팽팽히 돌아간다.
자신의 우상을 다시 만난 기쁨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이대로면 그는 우두머리에  쫓긴다.
진짜 제라드에게 후계자를 지목받았다는 거짓이 들통난다.
하지만 다행이다.

‘이제 ‘진짜’ 제라드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게다가 모두 내 수족이지… 즉, 지금 처리하면 탈이 없…’

“푸하하하!!”


제라드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억눌러지지 않은 웃음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그가 알던 제라드라면 절대 하지 않을 천박한 웃음이었다.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진짜 제라드를 내려다보던 그때,
갑자기 제라드의 얼굴이 바뀌기 시작했다.
제라드는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잊기에는 너무나 잘생긴 얼굴이었기에.

- 위잉…


“박찬…영? 뭐, 뭔…? 넌 죽지 않았… 어째서?”


“보면 모르냐? 살아있다 이 개자식아. 제라드? 네 이름이 제라드라고? 푸흐흐흐! 웃기긴 웃기네. 하긴, 제라드라는 이름이 멋있긴 해. 적어도  자건이라는 병신같은 이름보다는.”


“이건… 도대체 무슨…”

“정작  얼굴이 박살 났는데 이름만 멋있으면 어떡하냐? 네게는 ‘제라드’ 보다 ‘훔바훔바’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걸?”

“…”


“상상 이상으로 멍청하네. 아직도 모르겠어? 난 널 기만한 거야. 이 머저리 새끼야.”


뿌드득.

제라드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주 거하게 놀림을 받았다고.
자신이 이끌어야 하는 수많은 부하 앞에서 조롱당했다고.

어째서 박찬영이 살아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꼭꼭 숨겨져 있던 혁명군의 본거지를 찾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죽여야 하는 것은 명백했다.

제라드 내면에 있던 마나가 일렁인다.
온몸에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다.


“놈을 죽여!!”

소란을 구경하러 나온 그의 부하들에게 일괄적으로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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