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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91)화 (91/310)



〈 91화 〉테라포밍

내가 다음으로 해야  행동은 정해져 있다.
파묻힌 엘프의 유골을 최대한 조심스레 발굴해 보는 것이었다.
엘프의 유골은 드러난 부분보다 파묻힌 부분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혹시라도 땅에 묻혀 있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

- 스윽… 스으윽… 퍼석!…


“젠장… 뼈의 강도가 너무 약해져 있어.”

도대체 죽은 지 얼마나 지났기에 엄지손가락으로 누르기만 했는데 뼈가 스펀지처럼 바스러질까?
나는 온 집중을 다 해서 지층에 박힌 엘프의 뼈를 파내었다.

- 스윽… 스윽…

뼈가 반쯤 모습을 드러났을 때, 나는 엘프가 가진 비석을 발견할  있었다.
이 비석이 ‘엘프가 가진’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간단했다.
엘프가 비석을 품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조심스레 비석을 꺼내어 그 위에 묻은 흙을 치웠다.
흙이 묻지 않은 비석의 일부분에 규칙적인 높이로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무리 봐도 문자였다.
내가 배운  없지만, 사용할 수 있는 문자다.


지구의 사람들은 이 세계로 오며 한가지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말뿐만이 아니라 글자까지도.
서류에서 많이 보던 그 글자가 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 것을 눈치챘다.


글이 파인 곳에 들어찬 흙을 전부 치우고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복원하고자 했다.
지층이 드러날 정도의 지진에도 부서지지 않은 비석은 어렵지 않게 복원할 수 있었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짧았다.


=
미안해요, *!%…
약속을 어겨버렸네요.
당신을 남기고 먼저 안식에 들어버렸습니다.

이 구슬이 마지막 하나입니다.
가장 높은 산에 있는 신전에 가지고 가세요.
당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서둘러서.

- 세상을 뜨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는 $&^가.
=


“유언장?…”

어째서 유언장이 비석에 적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이런 돌덩이에 정교한 글씨를 새길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고작 이 정도 단서 가지고 상황을 추측하면 그건 오만이다.


사실,
추측할 필요가 없다.
내게 중요한 건 이 비석의 내용이니.
 줄 안되는 글귀 중 눈에 밟히는 단어가 여럿 보였다.

“신전… 그리고 구슬… 구슬이라면 설마…!”


나는 혹시나 해서 이 비석의 정보를 시스템으로 확인해 보았지만, 추가된 정보는 없었다.
그저 이 비석이 유언장이라는 것만 확정할 수 있었을 뿐이다.
구슬하면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회귀의 구슬…?”

유서를 보면 원래 이곳에 구슬을 가지고 가기로 약속한 엘프가  명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엘프는 오지 않았나 보다.

그대로 죽어버린 이 엘프는 오랜 세월 동안 구슬을 가지고 있었고…
땅에 묻혔다가 지각 변동으로 인해 지상으로 돌출되며 구슬이 바닥에 굴렀다?
그것을 우연히 이강인이 발견해 사용한 것이 이강인이고?

젠장,
이건 너무 영화나 ‘소설’ 같은 우연…

…테라포밍은 소설이 맞았다.

“아직은 확정하면 안 돼.”

단순한 유서로 상황을 확신하면  된다.
가볍게 가정만을 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마음을 걸리게 하는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

“’마지막 하나’… 그렇다면 과거에는 회귀의 구슬이 여럿 있었다는 뜻인가?… 우선, 이 유서에 적힌 신전으로 가봐야겠어.”


‘가장 높은 산’에 있는 신전.
허나 이 주변 어디에도 산은 없다.
전부 평지뿐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충분히 납득할  있었다.


“이 신전이라는 단어는… 시간의 신전을 말하는 것이겠지. 돌출된 지층을 보면 이 엘프가 원래 죽은 곳은 내가 서 있는 이곳보다 한참 낮은 곳일 거야. 그렇다면 내가 발견한 신전은…”


까마득한 옛날,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산꼭대기였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시간의 신전은 이미 내가 구석구석까지 뒤져 보았다.
더이상 새로 발견할만한 무언가는 없을 텐데?

…그래도  단서를 보고 무시할 수도 없다.
일단 가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좋으리라.
내게 주어진 휴가의 시간은 지금도 줄어들고 있으니까.


나는 시간의 신전을 향해 출발 직전에 이 엘프를 묻어주고 가기로 했다.
괜히 이렇게 유골을 널브러뜨린 채 가는 것도 꺼림직하니까.
6구역의 전투직 중 누군가 발견할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그건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


“…이건?”


흙이 들어찬 엘프의 갈비뼈 사이에 어떠한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비석을 들어내기 전까지는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물건이다.
방금 비석을 꺼낼 때는 비석이 부서지지 않게끔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나 보다.
나는 서둘러 그 물건을 꺼내어 보기 시작했다.

- 스윽!

재질이 짐작이 가지 않는 주먹 크기만 한 문양이었다.
엘프의 가슴에 위치해 있던 것을 짐작해 보면…
아마 줄이 삭아 사라져버린, 목에 거는 펜던트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 가능했다.
이 문양 위쪽에 줄을 끼우라는 것처럼 작은 구멍도 나 있었고.


나는 그 문양을 향해 아이템 정보 확인 창을 열었다.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 ■의 고위 사제 자격증.
종류: 기타
레벨: -
효과: ■■■ ■■의 2층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상세:
■■■ ■■의 2층으로 가는 것이 허가된 자에게 주어지는 자격증입니다.
=

아이템 정보 확인의 레벨이 낮아서인지 온전하게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완전히 내용이 보이지 않던 ‘구슬 시리즈’ 정도의 정보 검열은 당하지 않고, 일부분 드러났다.
그렇기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시간의 신전에서 내가 발견하지 못한 장소로 가는 열쇠,
그것을 발견했다고.




*


누군가 오밤중에 유적을 침입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침입한다고 하더라도 안쪽에서 얻어 갈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한들 경계병을 세워 놓지 않을 수는 없었다.
쉘터에게 유적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한 이유로 11구역의 전투직 한센은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계속 나오는 하품으로 밀려오는 졸음을 쫓아내던 한센은, 다가오는 방문자를 발견하고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유적 조사의 중간 책임자  한 명인 브라이언트 교수가 다가왔으니까.


물론 한센이 그를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유적 조사의 책임자 초상화를 필수적으로 외워야 했기에 똑똑히 알고 있었다.


“엇? 브라이언트 교수님? 이 야밤에 이곳은 무슨 일로…”


“한센씨, 맞나요? 반갑습니다.”

“하하. 얼굴을 마주칠 일 없는  이름까지 외우시는 건가요? 성실하시네요.”


“무얼요. 그보다, 잠깐 유적에 볼일이 있어 들렸습니다.”


“볼일이요? 왜 낮에 찾아오지 않고 늦은 밤에…”

“연구자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떠오른 것을 확인하지 못하면 도저히 잠에 들지 못하는.”


“…그런 건가요? 전 배운 게 없어서… 하하!”


대부분의 전투직들이 그러하듯, 한센 역시 고등 교육을 우수하게 수료하지는 않았다.
지구라면 한센이 브라이언트 교수 같은 이름이 알려진 학자와 이렇게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일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한센은 전투직이다.
무려 눈앞의 수십 년을 공부에 매진한 학자와 동등한 위치인 것이다.
그것을 아는지 브라이언트 교수는 한센을 띄워주는 말을 했다.

“한센씨의 희생 덕에 쉘터가 무사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 자책하는 말은 말아주세요. 당신이 지켜낸 생명만 여럿입니다.”


“듣기 좋은 말씀을 해주시네요. 그럼  방명록에 교수님의 이름을 적을 테니 안으로…”

“잠깐, 한센?”

“네?”


“그 방명록에 제 이름을 적지 않아  수 있습니까?”


“예에? 어째서요?”

“이번 방문에서 무언가를 알아낼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아무래도 동료 교수의 눈치가 보여서요. 혼자 이곳에 왔다는 것을 들켜서야 비난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으음… 아무리 교수님이라고 할지라도… 이건  일이고…”


“하하, 전투직들은 가진 무력으로 그 서열이 정해진다지요? 이건 제 약소한 선물인데, 부담 가지지 마시고 받으시죠.”

- 스윽.


한센은 브라이언트 교수의 팔 움직임에 집중했다.
흥미가 일었다.
전투직이 평범한 주민에게 대가를 받고 뒤를 봐주는 일은 무척 흔했으니까.
이미 한센을 포함한 일부 전투직들은 뇌물에 익숙해져 있었다.


품에 들어갔다 나온 브라이언트 교수의 손에는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가죽 주머니 한 개가 들려 있었다.
한센은 모르는  그 주머니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주머니 안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이게 도대체 몇 개야.”

“…구하기 무척 힘들었습니다.”


주머니 안에는 프룸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센은 교수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 프룸은 몇몇 엘리트에게만 공급이 몰리는 정말로 귀중한 자원  하나였으니까.

하나, 둘, 셋…
프룸의 개수는 무려 10개에 달했다.
특출난  없고 나태한 한센으로서는 한 달에 한  보기도 힘든 프룸이 주머니째 있는 것이다.
이 정도의 프룸이라면 분명 유의미한 변화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센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낮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브라이언트 교수가 단순히 밤에 들어가겠다고 한센에게 뇌물을 건넸다.
별로 좋지 않은 한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브라이언트 교수로서는 학구열에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나섰다.
내일 아침이 되어 당당히 들어가더라도 아무런 문제 없을 텐데.
즉, 오늘 밤이 아니면 이런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

‘내가 이 프룸을 받는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지! 내일 아침 유적을 방문 하나, 오늘  방문 하나 똑같잖아? 어차피 교수님이야 알아서 입을 조심하실 테고…’

고민은 짧았다.
유혹을 이겨내기에는 한센에게 프룸의 가치가 너무나 높았다.
한센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먹 쥔 손으로 숨기며 교수에게 말했다.


“큼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나올 때 작게 신호 주시면 제가 주변에 누군가 있는지 봐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센, 당신은 무척 마음이 여린 사람이네요.”


“원하시는 결과 얻기를 바라겠습니다. 교수님.”

“고마워요.”

한센은 유적으로 들어가는 브라이언트 교수의 등을 바라보았다.
교수는 의심할 것 하나 없는 브라이언트 교수였다.
애초에 한센은 브라이언트 교수를 만난 적이 없으니 초상화로서만 그의 외모를 외우고 있었지만.


*





“후우…”

- 지이이잉.


신전 내부에 완전히 들어오자 얼굴에 걸어두었던 디시빙(Deceiving)스킬을 풀었다.
이곳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치의 흠집조차 내서는 안 되는 유적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있다?
다음날 청문회가 열려도 이상하지 않다.

너무 오래 있으면 한센이라는 멍청한 남자가 의심할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볼일을 보기로 했다.

‘그래도 시간이 착착 들어맞아서 다행이네. 이곳에 도착하니 완전 밤이었으니…’

펜던트를 발견한 뒤,
나는 블랑을 포함한 6구역 전투직들에게 복귀하고 정찰을 마저 해야만 했다.
내가 홀로 숲에서 합숙소로 복귀하는 것을 그들이 허락할  없으니.

정찰이 끝나고 복귀를 마쳤을 때는 저녁 시간대였다.
오히려 좋았다.
내가 이곳에 침입하려면 밤까지 기다려야 했으니까.
6구역에서 11구역으로 이동을 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밤이 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디, 어디지?  펜던트를 사용해야만 하는 곳이…’

나는 최대한 펜던트의 문양과 비슷한 곳을 찾아 헤매었다.
넓은 시야로 공간을 단숨에 흩는다.
이윽고, 어렵지 않게 발견할  있었다.
문양은 구슬이 놓여져 있던 제단의 하단에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제단 주변에 수제 가림막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사용한 구슬은 사용  전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즉,  펜던트를 사용할 때도 빛이 나올 확률이 있었다.
이런 조잡한 차단막을 치더라도 밖에 있는 한센이 눈치를  수도 있겠지만,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이 펜던트…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차단막이 설치된 이후,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나는 우선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문양에 문양을 가져다 대보기로 했다.

- !

그러자 내 몸이 이동했다.

“허억?”

예상했던 빛은 없었다.
전이에 필요한 시간도, 소리도 없었다.
눈을 뜨자 방금과 완전히 다른 장소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는 천개에 달하는 유골을 발견했다.

“이런 씹!”


하얀 물결이었다.
한두 명의 시체가 아니라 수천 명이나 되었다.
재빨리 상태창을 열어 유골의 정보를 확인했다.


띠링!

“엘프? 이 전부가 엘프의 유골이라고?”


도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수백의 유골이  곳에 모아져 있을  있을까?
찾아오는 혼란은 자연치유의 덕에 억눌려졌다.
침착하게 주변을  더 둘러봤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하얀 물결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과 같은 수백 개의 유골이 아니었다.

“하, 하얀 구슬?…”

석재로 만들어 놓은 풀장 안에 하얀색 구슬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붉은 구슬, 파란 구슬, 노란 구슬과 같은 크기의 하얀 구슬이.



그 수가 무려 천을 가뿐히 넘겼다.

“이것들 전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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