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테라포밍
크리스, 이강인과 함께 11구역에서 근무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났다.
드디어 전투직 수습 기간이 끝난 것이다.
오늘부로 내 동기들은 월급과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11구역에 근무하는 동안 회귀자의 표정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도저히 짧은 시간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만 같은 표정.
그래서 나도 부담 없이 첫 휴가를 나올 수 있었다.
1박 2일이나 되는 휴가를.
‘오랜만에 빈민가에 오네.’
구역에서 구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숲을 가로지르는 것이 훨씬 빠르다.
하지만 11구역 관리소장이 제정신이라면 그걸 허락할 리가 없다.
그러다 휴가 나간 전투직이 탈주하면 잡지도 못할 테니.
‘훈련소 습격’ 같은 비상사태가 아닌 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 터벅터벅.
나는 정식 휴가 신청 절차를 밟아서 쉘터 내부를 통해 다른 구역의 전투직 합숙소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내 쪽을 향한 수많은 시선이 느껴진다.
기억나는가?
이 세계에서 전투직은 최고위급 대우를 받는다.
월급 또한 당연히 어마무시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겐 포상금이 있어 쉘터에서 평생 먹고살 돈이 있지만.’
보통의 일차원적인 직업 종사자와 전투직의 월급 차이는 매우 극심하다.
우리가 제대로 된 음식점에서 외식 몇 번 하는 돈이 하층 주민들의 월급과 맞먹는다.
전투직에게 성 상납 몇 번만 해주면 그들의 한 달 월급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을 턱턱 받으니, 성 상납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물론 나는 그런 것 안 한다.
아니, 못한다.
크리스에게 걸리면 진짜 농담으로 안 끝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론은 이렇다.
전투직을 애인 삼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낮은 계급의 사람이라도 한순간에 인생을 역전 할 수 있다.
아무리 못생겼어도 전투직인 이상 구애에 시달리는 인기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투직들이 휴가를 나가고 싶다며 종일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이유다.
하지만…
아무리 잘생겼어도, 아무리 높은 계급을 지녔어도,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들이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전투직을 애인으로 두고 있는 내게 들이댔다가 크리스의 눈 밖에 나면… 인생이 끝나겠지.’
이렇게 최고급 애인감인 내가 길을 걷고 있는데도 아무 여자도 말을 걸지 않는 이유다.
벽 뒤에 숨어서 나를 지켜만 보고 있는 수백 개의 눈동자들이 보인다.
…어찌 생각해 보면 다행이기도 했다.
저 백 명을 넘는 여성들이 눈이 돌아가서 내게 구애를 했을 거라 생각하면 아무리 여자를 좋아하는 나라도 식은땀이 흐른다.
저 여자들이 전부 이쁘면 또 모른다.
하지만 예쁜 여자들은 선배 전투직들이 다 채간 후다.
남은 여자들은 대부분이…
‘으… 제발 가까이 오지 마라…’
전체 타일 중 지뢰의 점유율이 75% 이상인 지뢰 찾기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뚱뚱한 사람은 없지만, 저건 못 먹어서 저절로 살이 빠진 것이다.
인스타○램의 건강하고 매끈한 미녀를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광대가 툭 튀어나온… 으음…
그녀들의 명예를 위해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다.
나는 발걸음 속도를 높여 빈민가를 빠르게 지나가기로 했다.
- 저,저 사람이 그 소문의…
- 원주민의 흔적을 발견한?
- 응… 엄청나게 잘생긴 걸 보니 틀림없어… 박찬영이야…!
- 애인이 전투직이라고 했지?
- 절대 건드리지 마. 눈으로만 보자고.
- 그,그래도 저 정도 얼굴이면 인생을 걸어볼 만 하지 않아?
- …확실히.
예민한 청각은 귓속말까지도 전부 잡아챌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뛰어가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이동했다.
*
“으으… 훌쩍!”
“가까이 붙지 마. 콧물 묻는다.”
“아픈 사람에게 너무하네요. 크흥! 저를 보려고 이곳까지 찾아와 놓고!”
“누가 너 보자고 온 줄 알아? 가는 길에 잠깐 들린 거지.”
브랙의 얼굴이나 잠깐 보려고 북부 훈련소를 찾았더니, 나오는 길에 의외의 얼굴을 만났다.
카야였다.
그녀는 새로 온 교관이 완전히 이 훈련소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를 보조해 줄 조교로서 12구역에 복귀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지금은 아파서 제 역할을 못 해내고 있지만.
“감기?”
“독…독감이요… 걱정 마세요. 며칠 푹 쉬면 저절로 낫는다던데요?”
“독감? 이 세계에서? 누구한테 옮은 거야?”
“새로 온 훈련생들에게 옮았나 봐요. 킁!”
“아하… 슬슬 새로운 신입이 들어올 때가 되었나 보네.”
“사실 이 독감은 예방 주사를 어렸을 때 맞으면 안 걸리는 종류의 것인데, 제가 어렸을 때 바늘을 무서워해서… 안 맞았더니… 크흥!”
“…너 사실 지금도 바늘 무서워하지.”
“…”
카야는 내 눈을 피했다.
나는 살짝 한심한 눈으로 카야를 쳐다보았다.
자업자득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선 훌쩍거리는 카야를 내버려 두고 북부 훈련소를 나왔다.
말 그대로 북부 훈련소에 더는 볼일이 없었기에.
북부 훈련소랑 가까운 12구역에 들려 리 샤오린과 점심을 먹은 후, 내 목적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리 샤오린은 내가 찾아오자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을 도저히 막지 못했다.
먹는 도중에 몇 번이고 히죽대었으니까.
구경하면서 먹는 맛이 났다.
아무튼 내가 굳이 휴가를 사용하며 나온 목적은 6구역에 있다.
이강인이나 카야는 6구역에 있는 내 친구인 블랑을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건 내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한 것이지.’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안 가볼 수가 없었다.
이강인이 회귀의 구슬을 주운 것이라 예상되는 구역에.
이강인과 같이 11구역을 정찰하며 자연스럽게 물어봤었다.
도대체 어느 구역으로 배정받을 거라 감이 왔길래 11구역을 배정받은 것에 그리 당황했냐고.
이강인의 입에서 6구역이 나왔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었어.’
그러기에 이강인은 나를 꽤 믿고 있었고, 표정 연기에 재능이 없었으니까.
높은 확률로 이강인은 회귀 전에 6구역에 배정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강인이 6구역에 배정받았다는 것은 100% 확실한 사실이 아니다.
그가 전투를 벌이고 죽기 직전에 구슬을 주운 곳이 6구역이라는 확신도 없다.
하지만 나는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회귀의 구슬이란 대단한 물건이 여럿 있지는 않을 것 같지만…
‘회귀의 구슬이 보통 비범한 물건이어야지. 혹시나 또 다른 회귀의 구슬을 다른 사람이 줍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최대한 확인을 할 수 있는데 까지 확인해야 옳은 판단이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휴가 한두 개쯤은 웃으며 날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단서 없이 무작정 찾아가고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프롤로그에 짤막하게 적힌 한 줄이 내게 힌트가 되어주었다.
‘반군의 협공을 받고 몸이 날아간 이강인은 ‘절벽’에 몸이 부딪힌 뒤, 튕겨 나왔다.’
즉, 이강인이 사망한 곳 주변은 절벽 주변이다.
꽤 커다란 힌트가 되어 주었다.
절벽은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지형이니까.
6구역에 블랑이 배정받은 것 또한 이용하기 딱 좋은 우연이었다.
이제 6구역, 혹은 그 주변에서 절벽이 있는지만 찾으면 된다.
어서 확인하고 싶어 저절로 걸음이 빨라진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6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 찬영? 벌써 휴가를 그렇게 막 쓰는 거야?”
“당장 쓸 수 있는 휴가가 있는데 어떻게 참아? 그나저나 6구역은 어때? 별일 없어?”
“완전 평범해. 가끔 전투가 일어나긴 하는데… 위험한 놈은 없었어.”
“다행이네.”
내가 전투직인 것이 다행이었다.
블랑이 근무시간이 되어 구역 순찰을 나갈 때, 나 또한 6구역을 구경하겠다는 명목으로 그와 함께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블랑과 그 밖의 선배 전투직들과 같이 움직였지만…
허락받은 것에 감사해야겠지.
원래라면 숲에 들어가는 것조차 허가받지 못할 테니까.
“넌 진짜 특이하네. 굳이 휴가 나와서 일을 하려고 드냐?”
“하하! 그냥 다른 구역은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하잖아?”
“으음… 그런가? 난 잘 모르겠다.”
빈민가의 주민조차 내 이름을 알았다.
그런데 같은 동료 직종인 전투직이 나를 못 알아볼 리 없다.
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꽤나 유명 인사가 되었으니까.
‘원주민의 흔적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으로써 처음 보는 6구역 전투직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 웅성웅성.
나와 전투직들의 잡담은 순찰하는 와중에도 계속되었다.
그들 모두 초인이니, 백원후 같은 괴물이 아닌 이상에야 고블린이나 오크의 기척 정도는 대화하면서도 충분히 감지해 낼 수 있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나와의 대화가 즐거웠기 때문도 있을 테고.
구역의 절반을 순찰했을 때다.
나는 더이상 그들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저 멀리서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수십 미터 정도 위로 솟은 절벽이.
- 꿀꺽.
난 직감을 신봉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를 가진 초인의 직감이라면 믿을 만 하지 않을까?
내 직감은 저곳이 바로 내가 찾던 장소라고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들은 저 절벽의 근처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전투직들과 가까이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 웅성웅성!
1분이 1시간 같이 느껴진다.
이렇게 느긋하게 걸어가는 것이 아닌, 최대한 빠르게 절벽을 향해 뛰어가고 싶어진다.
나는 그러한 나의 마음을 차분하게 억눌렀다.
그리고 우리가 절벽의 근처를 스쳐 지나가려는 그때.
“윽… 저기 죄송한데요…”
“응? 왜 그래? 안색이 어둡네. 어디 아파?”
“아하하… 그… 배가 조금… 으윽…”
“…어후. 여기서 6구역 합숙소는 좀 멀 텐데…”
“바…밖에서라도 괜찮습니다. 죄송한데 잠깐, 아주 잠깐만 볼일 좀 보고와도 되겠습니까?”
“상관없어. 그리고… 그, 이런 말 하긴 뭐한데… 우리도 초인이라 청각이 좋거든? …말 안 해도 알지? 조금 멀리 떨어져서 해줘라.”
“하하하. 알겠습니다. 곧 저녁 시간인데,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그래. 그럼 천천히 일 보고 와. 우린 여기서 기다리지 뭐.”
“죄,죄송합…”
“괜찮아. 괜찮아. 생리 현상인데 뭘. 참기 힘들 텐데 가봐.”
“감사합니다. 그럼…”
- 스으윽…
나는 수풀 사이로 사라지며 급하다는 듯 뛰어갔다.
뒤쪽 전투직이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처피 6구역 전투직들을 두 번 볼 것도 아닌데 내 이미지를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거리가 멀어지니 망설이지 않고 기척을 죽인 채 뛰었다.
근방에 보이는 절벽을 향해.
- 탁탁탁탁… 탁!
“음…”
이것 또한 절벽이라는 단어에 포함을 시켜야 할까?
흔히 말하는 암석 덩어리의 절벽과는 달랐다.
과거 커다란 지진이 있었는지, 지층이 크게 어긋나 있었다.
절벽이라기보다는 지면으로 아주 높게 솟아오른 지층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색이 다른 토양이 층층이 겹쳐있는 것이 지구의 교과서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젠장… 이곳이 아닌가?”
이강인이 사용한 회귀의 구슬은 하얀색이다.
나는 이 근처의 바닥을 샅샅이 흩어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하얀색 구슬이 떨어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하지만…
어마어마한 시력과 반사신경으로 빠짐없이 근방을 흩어보아도 하얀색 구슬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곳이 아닌 건가? 아니면… 이강인이 사용한 하얀색 구슬이 마지막 하얀색 구슬?”
바닥에서 단서를 찾지 못한 나는 좀 더 시야를 넓게 가져 찾아보기 시작했다.
땅뿐만이 아니라 이강인이 회귀 전에 몸을 부딪혔을 것이라 추정되는 절벽까지.
‘이건…’
돌출된 지층에서 뼈로 보이는 무언가가 드러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전에도 생명체는 있었을 테니까.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라면 침을 흘리며 달려들겠지만, 나는 아니다.
하지만 그 뼈로 보이는 무언가가 인골의 형태를 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진다.
적어도 이 뼈의 주인은…
이족보행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고블린? 오크? 아니면 설마…”
나는 그 뼈를 향해 아이템 정보 확인 창을 불러왔다.
시간의 신전 같은 지형지물에게 사용은 되지 않았지만, 이런 뼈 같은 종류라면 시스템 창이 나올 확률이 무척 높다.
어쩌면 힌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엘프의 유골
종류: 기타
레벨: -
효과: -
상세:
측정할 수 없는 오랜 시간 전에 사망한 엘프의 유골입니다.
=
내 눈앞에 나온 상태창은 매우 간단한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꽤나 충격적인 정보를 담고 있었다.
“엘프…!”
이 세상에 엘프는 실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