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테라포밍
나를 보는 동그란 눈이 보인다.
몇 달 전만 해도 이 눈매가 그리도 사나워 보였는데, 지금은 순박하고 귀엽게만 느껴질 뿐이다.
어떻게 이 눈을 보고 사납다는 생각을 했을까?
입 또한 마찬가지다.
조그마한 입으로 조잘조잘대고 있는 것을 보면 검지와 엄지로 입술을 한번 꼬집어 보고 싶다.
특히 지금처럼 약간씩 부끄럼을 타고 있을 때면 더더욱.
“…해서 그랬던 거야. 찬영…? 듣고 있어?”
“물론이지. 음… 내 행동을 크리스 너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려나?”
“엇? 그럼 찬영은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거야?”
“조금 다른데…”
반란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실제로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크리스가 보는 나였다.
대충 그렇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크리스의 눈에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자기희생적으로 비췄나 보다.
“…그래서 내 꿈을 이뤄주고자 조금이라도 더 사람을 살리려고 교관을 한 거고?”
- …끄덕.
크리스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일그러진다.
고개가 내려가며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죽은 애인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7년의 세월을 노력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이 살아 돌아왔다.
심지어 그 7년간을 연인에게 설명을 해야 한다니…
당사자가 되면 부끄러운 마음이 충분히 들 만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것과 달리 그 누구도 크리스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없으리라.
특히 나는.
“너… 나를 엄청 좋아하는구나?”
“이익!”
이유가 있는 기쁨에 입꼬리가 당겨지며 크리스에게 말을 했더니, 단번에 숙인 고개를 치켜든 크리스가 나에게 덤벼 들어왔다.
내가 웃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크리스는 도를 넘는 부끄러움을 억지로 분노로 돌렸다.
“악! 놀리는 게 아니라, 좋아서 그래 좋아서!”
“이이익!!”
허벅지와 허리를 꼬집히는 와중에도 실실 웃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말하자, 크리스는 더욱 격렬히 나를 괴롭혔다.
사실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그녀가 전력으로 꼬집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나는 지금 너에게 화가 났다!’라는 귀여운 의사 표시기 때문이다.
놀리는 것이 아니라는 나의 말을 믿지 않은 것 또한 아니다.
그냥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할 뿐인 투정이다.
이 정도의 투정도 못 받아주면 그녀의 연인이라 하지 못한다.
그렇게 잠깐 애정이 어린 투닥거림을 하며 시간을 보내길 몇 분.
크리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 주고 나서야 진정된 채 대화를 이어 할 수 있었다.
“그럼 교관직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찬영은 곧 전투직으로 발령받지?”
“응. 11구역으로.”
“아, 찬영은 정할 수 있구나. 아무튼… 나는 최대한 찬영의 곁에 있고 싶어.”
그녀도 11구역으로 오고 싶다는 뜻이었다.
나를 기리기 위해 하던 교관인데, 내가 돌아오면 계속할 이유가 사라지리라.
“그런데 넌 마음대로 전입을 할 수 있는 거야?”
“응. 교관급 실력자는 어디서도 대우받거든. 교관직도 강제되는 것 하나 없고.”
“네가 빠지면 그 빈자리는?”
“큭큭. 교관직은 지원자가 엄청나게 많아. 왜냐하면 전선에서 몬스터와 싸우는 것과 사망률이 천지 차이니까.”
“…누구든 위험한 일은 하고 싶지 않겠네.”
“그리고 위험하지 않은 일 중 제일 대우가 좋은 게 교관이지.”
인수인계만 제대로 마친다면 사실상 교관의 공백은 바로 메꿔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발령지가 확정 난 이상, 크리스도 망설이지 않고 당장 퇴직서를 제출하리라.
다행인 이야기였다.
원래대로 뺑뺑이를 돌려 내 발령지가 발탁되면 크리스가 인수인계하는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나랑 같이 11구역으로 가자.”
“…응!”
크리스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허어…”
브랙이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브랙의 모습을 보며 크리스는 킥킥 웃으면서 즐기고 있었다.
자기만 당황을 겪기는 억울했나 보다.
설명 한마디도 없이 그를 내가 있는 곳으로 끌고 온 것을 보면.
“아니, 그, 음…”
- 꼬집!
“푸하하핫!!”
침음을 흘리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는 브랙의 행동에 크리스는 그만 빵 터져 웃고 말았다.
저 흔들리는 동공을 보고 있으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뻔하게 읽혔다.
나는 그런 그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주변에는 우리를 제외한 사람이 없었기에.
“브랙? 오랜만이네. 다시 봐서 반가워.”
“…”
브랙은 내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그저 나와 크리스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악수를 건네는 나의 손을 무시하기에는 브랙의 성격이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브랙은 내 손을 맞잡았다.
- 척.
“이야기 들었어. 나 대신에 크리스를 봐주었다며? 고마워.”
“…정말 박찬영이 맞는가?”
“응.”
브랙에게도 내가 과거에 다녀온 것을 이야기해 줄생각이었다.
크리스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교관이 되기로 한 이유가 나와의 약속에 있었다고 했다.
단순히 그날 하루만 봐달라고 한 가벼운 약속을 7년이나 지킬 정도로 신의가 깊다니…
물론 나와 약속을 하지 않은 원작 속에서도 브랙은 교관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7년간 내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게다가 7년 동안 나와 관련된 일을 단 한 번도 크리스에게묻지 않았고.
이 남자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다.
조금은 믿을 수 있다.
내 치명적인 약점도 아니고, 단순히 알려지더라도 상관없는 비밀을 말해주는 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했다.
아직까지 반신반의한 브랙에게 내가 겪은 일을 간단히 요약해서설명했다.
“허어… 기, 기묘하군…”
“뭘. 숲에 오크나 고블린도 돌아다니는데.”
“흐음… 무사하단 것을 알았으니 별말안 하겠지만… 조언 하나 하자면, 자네는 베넷 교관에게 잘해주는 것이 좋을 거야.”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 스윽.
나는 크리스와 손을 맞잡으며 브랙에게 그리 말했다.
친구인 크리스 베넷이 7년간 마음을 썩이고 있었으니 지켜보는 그로서도 상당히 괴로웠으리라.
“허허… 여전하군. 정말 과거로 돌아온 기분이야.”
“내게는 얼마 지나지 않은 일로 느껴지니까.”
“그러고 보면 박찬영 자네를 내가 훈련시킨 게 되는 건가? 크하하! 이거 참, 7년 전에 목표로 삼았던 남자가 내가 가르친 학생이라니!!”
“내가 네 목표였어?”
“그때는 그러지 않은 남자 훈련생이 없었지. 지금은 모두 제라드 그자의 밑에 가 있거나, 죽었지만.”
“…그렇겠네.”
브랙과 나는 교관과 학생이다.
아무리 준 전투직이라고 한들 나는 브랙에게 존대를 해야 옳으리라.
실제로 현장에서 활약하는 전투직들도 교관들을 전부 존경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크리스는 나랑 같이 11구역에 갈 거야. 교관직을 그만두고.”
“그런가. 그게 옳지.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진심으로 한시름 놓았어.”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는 북부 훈련소에 남을 것 같군. 교관 일이란 것이 생각보다 적성에 맞아서.”
“…그래. 아무리 봐도 넌 교관 천직이긴 하다.”
잡담은 조금 더 이어졌다.
브랙은 웬일로 텐션이 무척 높아져서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나를 훈련시킬 때 비상한 것을 알아봤다는 둥, 내가 쉽게 죽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둥…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는 대화가 대부분이었지만,
크리스, 브랙과 하는 7년 만에 만난 팀원들끼리의 대화는 은근 재밌었다.
*
“상태창.”
띠링!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23 → 25 [민첩] 23 → 25
[체력] 22 → 24 [지능] 9 → 11
[기교] 21 → 23 [매력] 31 → 42
[마나] 184 → 201
[특성] 『자연치유』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버프, 매력 제외 모든 스텟 +6 (00:00:04)
프룸의 버프, 힘·민첩·체력 스텟 성장률 증가 33% (02:51:23)
마나 각성, 힘·민첩·체력·지능·기교 스텟 성장률 증가 50% · 마나 흡수 小
현재 진입 중인 소설, ‘테라포밍’의 완성도 - 72% [열린 결말. 떡밥이 어느 정도 회수됨.]
보유 카르마: 32,125
=
“요즘 스텟이 엄청 빠르게 늘어나네.”
스텟들의 십의 자리가 2로 바뀐 이후 오르는 속도가 굉장히 느려졌었다.
하지만 마나 각성을 한 뒤, 기존의 속도보다는 못해도 어느 정도 속도를 되찾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이 무척 기분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쑥쑥 늘어나는 것이 크리스의 스텟을 따라잡는 것에도 얼마 머지않은 것 같다.
이미 마나의 경우는 진작에 따라잡기도 했고.
“마나는 이 세계 어디서도 나만큼 보유한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다른 스텟과 다르게 고정된 속도로 늘어나다 보니 무려 200을 넘겼다.
마나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고, 이 세계에서만 7년을 보낸 크리스의 마나 보유량이 170 정도다.
새삼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대단함을 다시금 체감했다.
상태창을 연 이유는 스텟의 증가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소설의 완성도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다.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온 뒤, 빅터를 잡고 나니 테라포밍의 완성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후 72%에서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고 몇 주를 유지하고 있었다.
“회수되지 않은 떡밥이라… 이건 그걸 의미하는 것이겠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테라포밍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바로 이강인이다.
나는 아무리 잘 쳐줘 봐야 서브 주인공, 또는 주연이다.
“즉… 이강인과 한번 시비가 붙은 제라드 무리를 말끔히 처리해야 완성도가 오른다는 것이겠지.”
11구역에서 다음 에피소드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눈치채긴 했다.
11구역은 반군의 구역과 가장 근접해 있으니까.
높은 확률로 제라드와 마찰할 일이 남았으리라.
‘놈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지.’
자신의 연인을 죽인 빅터를 보고 크리스가 눈이 돌아갔다.
그렇다면 자신의 우상을 죽인 나를 보고 놈은 어떤 반응을 할까?
분명 놈과의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놈의 힘은 강하다.
적어도 크리스나 브랙과 동급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띠링!
=
[힘]
25 → 26
[필요 카르마] 2,500
=
[취소되었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나의 스텟을 끌어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스텟을 올릴 때 십의 자릿수가 1일 때 가격에 비교해서 8배의 카르마가 들었지만, 지금 내가 보유하고 있는 카르마가 많았다.
무려 32,000 카르마다.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버프까지 생각한다면, 당장이라도 크리스의 기본 스텟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39나 되는 크리스의 민첩을 제외하고.
이대로 훈련으로 스텟을 올리면서 급할 때 카르마를 사용하면 되리라.
겁을 먹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 또한 신전 관련 조사에서 벗어나고 슬슬 전투직 실습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실습이란 것도 별것 없었다.
혹시나 인간의 영역으로 흘러들어온 떠돌이 고블린이나 오크를 해치우는 일만 했다.
이미 이 근처는 인간의 영역인 것이 몇십 년에 걸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실습 시간의 대부분이 넓디넓은 구역을 몇 번이고 순찰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기존이라면 정찰 구역을 점차 넓혀가며 몬스터들과 많은 전투가 있어야 하지만, 실습 기간에는 잠시 그것이 중단되었다.
불행한 사고라도 일어나면 피해가 돌이킬 수 없이 커져 버릴 테니까.
그러한 이유로 11구역 전투직들은 오랜만에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백원후나 백원후급의 몬스터가 침입하는 즉시 무더기로 죽어 나가겠지만…’
빅터가 있었기에 11구역은 가장 사망률이 높았던 구역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
빅터는 내 손에 죽었기 때문에 11구역에서 피를 보는 날 보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간 날이 훨씬 많았다.
얼마나 갈 평화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평화로웠다.
그렇게 지나간 하루, 이틀이 쌓이고 쌓여…
곧 훈련생이 전투직이 될 시간이 찾아왔다.
오늘은 수료식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