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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83)화 (83/310)



〈 83화 〉테라포밍

“허억!”


- 벌떡!


크리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와 똑같은 아침인 것 같았지만, 방 구조는 달랐다.
이곳은 북부 훈련소가 아닌 11구역 전투직 합숙소였으니까.
물론 그런 사소한 변화 따위는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 두리번! 두리번!

크리스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샅샅이 흩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녀의 연인은 보이지 않았다.

“꿈? 꿈이라고? 설마? …아니지?”


꿈이었는가?
그것은 정말로 꿈이었나?

크리스는 진심으로 그것이 아니길 빌었다.
만약 그것이 꿈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오늘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그 정도로 선명한 달콤함이었다.


“아니야, 제발… 제발… 꿈이 아니라고 해줘… 그…그래! 다리! 나 다리를 다쳤었…”


크리스는 애매한 기억 속에서 자신이 다리를 크게 다쳤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만약 다리가 다쳐있다면 분명 꿈이 아니리라.
크리스는 기대를 담아서 왼손으로 이불을 들쳐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아… 아아… 안돼… 안돼…!”

다리는 멀쩡했다.
상처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괴로워서, 크리스는 자신의 기억 속에 다쳤던 다리를 몇 번이고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고통은 전혀 없었다.

“흐아… 아니야… 흐으윽… 제발… 제발…!”

“으으으…? 크리스? 일어났어?”


크리스가 한창 패닉에 빠지기 직전, 갑자기 침대 아래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너무나  알고 있는 목소리다.
7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다시 한 번만이라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크리스는 자신이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침대의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하지만, 그곳에는 박찬영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불 하나만을 차디찬 바닥에  채로.


“찬영?… 어…어째서 바닥에…”

“으응? 하암… 너 다리 다친 곳에 내가 조치를 해놓긴 했는데, 아물기 전에 같은 침대에서 잤다가 혹시 나랑 부딪히면 아프잖… 크리스? 울어?!”


- 벌떡!


박찬영이 크리스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발견하고는 상체를 빠르게 일으켰다.
그녀의 눈물을 보고 잠결이 전부 날아간 듯했다.

“아… 이…이건… 꿈인 줄 알고… 찬영이 사라진 줄 알아서…”

“음? 지금까지 계속 오른손 잡고 있었잖아?”


“어?…”

찬영의 말에 크리스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녀와 찬영은 깍지를 낀 채 손을 맞잡고 있었다.
아마 지금처럼 크리스가 먼저 일어날 때를 대비해서, 찬영이 불편한 잠 자세를 감수하고 그녀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던 것이리라.

일어나면 당황하지 말고 맞잡은 손을 보고 안심하라고.


…눈물이 핑 돌았다.

‘찬영… 맞구나… 찬영이구나… 정말…’


익숙했다.
너무나 익숙한 배려다.
크리스를 위한, 그녀의 연인의 사소하고도 가슴을 울리는 배려였다.
7년 만에 느껴보는 가슴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크리스는 어떻게 살아 있는지 물어보는 것보다,
어떻게 다리를 고쳤는지 물어보는 것보다,
당장 찬영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니 망설이지 않고 행동에 옮겼다.
그녀가 알고 있는 찬영이라면 거부할 리가 없었기에.

크리스는 두 팔을 벌리고 찬영에게 다가갔다.
찬영은 당연하다는  크리스를 향해 마주 팔을 벌리며 가슴을 열어주었다.

- 포옥.

“…아침부터 어리광 부리는 거야?”

- 끄덕끄덕.


“좋아. 전부 받아줄게.”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크리스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고향에 온 것만 같은 안도감에 크리스는 더욱더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모습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척이나 쪽팔려 했겠지만, 크리스는 잠결이라는 핑계를 대며 좀 더 어리광부리는 것을 선택했다.



*


“과거로… 갔었다고?…”

“믿기지 않지?”

“미…믿기지 않아.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어.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는걸…”

- 꼬옥.


크리스는 내게 붙어서 전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 둘은 아침 구보도, 아침 식사도 빠진 상태로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크리스의 다리는 내가 그녀가 잘  몰래 바른 포션으로 이미 나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부상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간호한다는 명목으로 빠지고 있었고.
덕분에 카야는 별 부상이 없다는 이유로, 기절에서 깨어난  하루만에 조교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크리스에게 내가 겪은 일의 대부분을 이야기했다.
시스템과 관련된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을.


하지만 시간을 멈추는 구슬, 미래로 보내주는 구슬, 회귀하게 해주는 구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크리스에게 이것까지 설명하기에는 무척 복잡했으니까.

시간과 관련되어 있어 보이던 신전과 그곳에 있던 과거로 보내주는 구슬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녀를 납득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와아… 동아시아 쪽에는 ‘운명의 붉은 실’이란 것이 있다던데, 어쩌면 그것이 실존 하나 봐…”


“그러고 보면 신기하긴 하네. 교관인 크리스가 있었기에 내가 과거의 너를 도왔고, 내가 너를 도왔기에 교관이 되어 나를 가르친 거잖아?”


“응…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건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어주었고, 서로가 서로의 결과가 되었다.
확실히 시간 여행이 얽혀 있어서 그런지 크리스와 나는 무언가 정의하기 어려운 특별한 관계가 덧씌워진 것 같았다.
단순한 연인 관계가 아닌, 끊어낼 수 없는 인연의 고리 같은 무언가가…
크리스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다리는 어떻게 고친 거야?”

“음… 그건… 나중에 자세히 말해주겠지만, 지금은 그냥 내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해 줘.”


“…남들에게는 밝힐 수 없는?”


“정확해.”

“알겠어.”

- 배시시.


내가 설명하기 곤란해하는 표정을 짓자, 크리스는 나를 향해 웃으며 신뢰의 표시를 했다.
분명 내가 자신에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지금 타이밍에 그녀가 아는 것과 다른 차원의 지구를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으니까.

크리스에겐 7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을 재회한 것이 어제다.
혼란에 혼란을 가중하기보다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알리는 것이 훨씬 좋으리라.


‘음… 그보다 슬슬 혼나야겠지?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내가 이 화제를 나서서 꺼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화제를 꺼내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리라.
게다가 문제가 될 것을 미뤄 놓는 것은 내 성미가 허락하지 않는다.
찝찝하게 마음 한구석에 쌓아놓느니 시원하게 혼나고 용서받는 것이 마음에 편했다.


“…나 너한테 혼날 것 있는데.”

“응?…”


- 쓰담쓰담.


“과거의 네게  안 했잖아. 난 미래에서 왔고, 7년 뒤에 다시 만날  있다고.”


“…그러네.  그랬어? …나 엄청 아팠다? 7년은 많이 길었고…”


“미안해…”

- 꽈악!


크리스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런 그녀를 보고 참지 못하고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어 버렸다.
좀  강하게 껴안기 위해서.


“…이유가 있었지? 찬영은 항상 생각이 깊잖아. 그러니 찬영이 그랬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나에 대한 신뢰가 너무 깊은 것 아니야?”

“맞아. 헤헤.”

혼나리라 생각 했더니 오히려 나를 믿어주며, 편하게 말하라고 배려를 받아 버렸다.
7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크리스도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 사실이 약간 뿌듯하면서도, 섭섭했다.


‘섭섭함… 이라…’

나는 크리스가 성장한 것에 대해서 약간의 섭섭함을 느껴버렸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언제나 ‘나만의 작은 크리스’가 되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걸지도 몰랐다.
나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하지만 이런 나의 욕구는 잘못된 방향이다.


‘…그건 그녀를 트로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잖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크리스의 성장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 옳으리라.
내게서 독립하길 바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과는 물과 불의 차이만큼이나 심하게 다르다.
그저 그녀의 벽을 내가 대신 넘어주는 것이 아닌 벽을 넘는 것을 도와주고 싶을 뿐이다.


“크리스는… 많이 성숙해졌네. 그렇지만… 변하지 않아 줬으면 하는 부분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

“치…칭찬이야?”


“응. 칭찬이고 말고. 내가 사랑하는 부분은 변하지 않았어.”

“그… 거언… 다…행이네…”


- 푸욱.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크리스.
나는 이렇게 부끄러움을 쉽게 타는 크리스의 모습을 좋아했다.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 일부러 말을 골라 사용 한 것이다.
몇몇 남자들은 오글거린다며 절대 말하지 못하는 ‘사랑’ 같은 단어를.

나도 직설적인 애정표현은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크리스의 붉어진 얼굴이 보고 싶어질 때면 무심코 뱉어버리곤 했다.

“…아까 하던 말을 이어 하자면, 내가 혹시나 네게 시간 여행에 대한 말을 해줘서 미래가 틀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같아서야.”

“돌이킬 수 없는 일?”

“음… 예를 들어서,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너는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아?”


 질문에 크리스가 깊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을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가정을 하기보다는, 이렇게 상상이 가능한 범주 내에서 예시를 들어주는 것이 이해하기 쉬우리라.
크리스는 몇 분을 더 고민하다가 내게 말을 했다.


“어쩌면… 어쩌면 나 교관을 하지 않았을 수도.”


“…너 교관이 된 것이 나랑 관련이 있었던 거야?”

“읏! 그…그건!!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엣!!”

“그래? 뭐… 굳이 캐묻지는 않을게. 아무튼, 네가 교관이 되지 않았더라면… 음… 생각보다 큰일 날 뻔했네.”


“응? 어째서… 아앗!”


“깨달았어? 내가 너에게 훈련을 받았다는 인연이 없었더라면… 내가 과거로 돌아갔을 때 너를 챙겨주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우리 둘은… 연인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네…”


“나는 그런 비슷한 일을 경계한 거야. 내가 어설프게 행동했다가 얼마나 미래가 틀어질지 도무지 예측이 안 되었거든.”

“확실히…”


“하지만 크리스네가 ‘박찬영은 죽었다’라고 알고 있는 미래는 내가 직접 겪었잖아? 결과적으로 우리는 문제 없이 다시 재회하게 되었고.”


“…그러니까 내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찬영이 선택할  있는 최선의 수였다고?…”

“너무 이기적인 변명이지? 미안해.”


크리스는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해 주었다.
그녀로서도 나와 연인이 되지 않는 미래로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두려운 이야기였나보다.
내 생각 이상으로 설득을 당한 모습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사과를 했다.
어찌 되었든 7년의 마음고생이란 도저히 할 짓이 못 된다.
2년 전에 그 편린을 엿봤던 나는 그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아파하고 있었는지를…

“아니야. 괜찮아. 좀 많이 힘들었고, 길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찬영이랑 다시 만났는걸.”


“…”

“이제는… 헤어질 일 없지? 계속 있어  거지?”

“응. 장애물은 없어.”


“그러면, 그러면 돼.  그거로 만족할래. 사실… 찬영이 내게 돌아온 것만으로 정말 과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응. 괴로운 과거보다는, 앞으로 많이 행복할 미래를 생각할래.”


나와 크리스의 시선이 겹쳤다.
그녀의 동공 안에 나의 동공이 비친다.
언어로 교환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것만 같은 기묘하고 충족스러운 울림을 느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다가갔다.
크리스의 눈이 살포시 감긴다.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는 기다란 속눈썹을 감상하며, 그녀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포개었다.

“음…”

1분이 지나서야 서로의 입술은 떨어졌다.
가볍지는 않지만, 애무에 목적이 있는 끈적한 키스는 아니었다.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 알맞은 묵직한 키스였다.
크리스가 당장 바라고 있을 것이 분명한 종류였다.

나는 이것을 끝으로 오늘은 크리스를 쉬게 둘 생각이었다.
전투, 부상, 재회, 시간 여행 이야기 등등 24시간 안에 휘몰아치듯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까.
그녀를 배려하려고 했었다.


…크리스가 나를 유혹하지만 않았다면.


“저… 차…찬영?”

“응?”


“그… 이…이방 근처 있잖아… 저…적어도… 점심시간까지는 전부 전투직들 근무 나가서…”

“…크리스?”

“우, 우리가 큰…소리를…내더라도… 듣, 듣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크리스는 나에게 대담한 요구를 했다.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지만, 결국에는 말끝을 확실하게 맺었다.


“지금 피곤할 텐데, 이미 알겠지만 나 한번 시작하면 잘 못 멈춘다? 후회하지 마?”


- 꿀꺽.

끄덕…


크리스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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