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82)화 (82/310)



〈 82화 〉테라포밍

“…1분 남았네.”


숲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스킬을 해제했기에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몰래 훔쳐 입은 상의를 벗어 바닥에 버리고, 내 상의를 인벤토리에서 꺼내어 입는다.


볼일은 방금 끝마쳤다.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이제 곧 ‘박찬영’으로서 크리스를 만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옷에 붙은 먼지도 좀 털고, 머리도 정리하며 최대한 깔끔하게 하고 싶지만…
어차피 의미 없어질 것이다.
돌아가면 흙먼지를 쓸 것이 분명하니까.


가볍게 손발을 풀어낸다.
마나는 이미 전부 회복되었다.
컨디션은 최고로 좋았다.


- 우우웅…


곧, 주변을 빛과 마나가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현상을 받아들였다.





*





‘참 현실 같은 꿈이야…’

언제부터가 꿈이었을까?
그녀의 연인이 나왔던 꿈을 수로 헤아리자면 천을 넘길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이처럼 생생한 꿈은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금이 간 다리는 욱신거리고, 귓가에는 백원후의 단말마가 맴돌았으며, 그녀의 손에는 아직까지 그의 얼굴을 만지던 감각이 선명히 남아 있다.
하지만 정신은 몽롱했다.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말도  되지 않은가?
동명이인이었던 훈련생이 빛에 감싸이더니 죽어버렸던 그녀의 연인으로 변했고,
그런 그가 수많은 전투직들이 7년간 시도한 사냥에서도 살아남은 백원후 빅터를 단숨에 해치워버렸고,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니?


‘말도  되지… 꿈이야… 꿈…’


그를 그리워하던 크리스.
그와 이름이 같던 훈련생.
그의 원수인 백원후.


이 모든 것이 섞여 그녀가 만들어낸 공상이다.
환각, 환상, 환청, 환영.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무언가다.


“크리스? 으음…  들려?”


‘와아…’

크리스는 눈을 치켜뜨고 감탄했다.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꿈의 퀄리티에.
정말로 그녀가 기억하는  연인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7년이 지났음에도 어디 하나 바뀌지 않고.


“…혹시 꿈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거 꿈 아닌데?”

“응… 그러면 좋겠네…”

크리스는 멍하니 대답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꿈이  더 길게 유지되는 것.

아침이 되어 꿈에서 깨어난다면 무척 아프겠지만,
평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져서 꾹 참아왔던 눈물을 흘릴 것이 분명하겠지만,
그녀는 이 꿈이 조금이라도 더 이어졌으면 했다.

크리스는 차마 방금처럼 그의 얼굴에 직접 손을 대지는 못하였다.
손이 닿는 순간 현실이 아님을 깨닫게 되어 꿈에서 깨어날까 봐.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니, 사실 하나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결정했다.
욕심을 부리다간 바라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역시 안 믿네. …하긴. 7년은 너무 길었지.”


“응… 길었어… 너무…”


“그럼… …뺨 맞을 각오는 할게.”


- 스윽…

그녀의 연인이 크리스에게 다가왔다.
크리스는 아직도 현실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죽은 줄 알았던 옛 연인이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을 때다.


*


예상대로 지금의 시간대로 돌아오자마자 나를 반겨준 것은 빠르게 달려드는 백원후 빅터였다.
전성기에서 7년이 지나 늙고, 한쪽 눈을 잃었으며, 크리스에게 다리를 난도질당해 민첩을 봉인 당한 백원후를 처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놈을 처치하느라 먼지를 조금 뒤집어 썼다.
지금 시간대로 돌아오기 전, 몸을 깔끔하게 단장했더라도 소용이 없었으리라.


녀석을 처치한 후 크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아마 꿈인지 현실이지 구분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았다.


‘…당연한가.’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크리스를 일깨워 주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 스윽…

“읍…?”

고생을 한 탓일까?
크리스의 입술은 7년 전과 달리 조금 부르터 있었다.
그것이 나의 가슴을 약간 아리게 만들었다.


키스는 짧았다.
그녀와 내가 처음 했었던 가벼운 키스처럼.
망가지기 쉬운 생크림을 만지듯 부드럽게 쥐었던 볼을 손에서 놓는다.

크리스는 나를 밀쳐내지 않았다.
다만, 입술에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인해 이것이 현실인 것을 깨달은 눈치다.
갑작스러운 키스로 인해 뺨 정도는 맞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어?… 어라?…”

크리스는 본격적으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옆을 슬쩍 보니, 경악한 표정으로 크리스에게 키스한 나를 바라보는 마할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끼어들 틈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는 그녀와 나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도 부족하다.
다행히 눈치는 있는지 소리를 내지는 않고 있었다.
그의 존재를 무시했다.


“꿈? 꿈 아니야? 꿈이 아니었어?”


“꿈 아니야.”


“어… 차…찬영이야? 정말로 찬영 맞아?”

크리스가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마치 내 입에서 ‘사실 이건 꿈이야’라는 말이 나온다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얼굴이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크리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 스으윽… 스윽…

흐트러진 주홍빛 머리를 정리해 준다.
7년 전 내가 그녀에게 자주 해주었던 애정표현이다.
크리스 또한 그것을 느꼈나 보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면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아…”

“의심 가면 증거를 보여줄까?”


“어…?”

아직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런 크리스에게 쐐기를 박는다.
나는 몸에 걸친 백원후의 가죽 갑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자. 내 옷에 자수. 보이지?”


옷에 새겨진 크리스를 본뜬 꽃을 보여주었다.
꽃잎의 뿌리는 주홍빛에,  끝은 노란색.
 세상에는 둘 없는 아름다운 꽃이다.


“흐읍…?!”

“기억나? 팀 훈련 마지막 날.”

“아아…! 아아아…!!”


- 타악!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크리스를 붙잡는다.
그리고 살며시 그녀를 내 품에 끌어안았다.
그녀가 나의 온기를 생생하게 느낄  있게끔.


2년 전 브랙으로 변장할 때는 이 상의의 자수 때문에 훈련소에서 옷을 훔쳐야만 했다.
크리스가 자수를 본 순간 단박에 이상함을 눈치챌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애초에 내가 크리스에게 미래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숨긴 이유는 그녀가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미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다.
크리스에게 위험한 일이 다가온다고 한들 내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시간 여행을 숨겨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7년간 가슴이 타들어  그녀에게 많이 혼나겠지만…

‘…그건 크리스의 연인이 되기로 한 이상 감수해야지.’

“…머리카락. 이제는 완전히 주홍빛이네.”

- 와락!


“흐으으으…! 흐윽…! 흐아아아!!”


크리스는 내가 왜 살아있는지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냥 나를 마주 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는 격렬하게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축축해진다.
나는 그런 그녀를 달래듯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흐으으!! 흐아아아! 차… 찬…! 흐으!!”


꽈아악!!


점점 더 나를 끌어안는 힘이 강해진다.
마나를 더하지만 않았을 뿐, 크리스의 근력이 전력을 다해서 나를 감싼다.
물론 충분히 예상 할 수 있었던 일이기에 미리 마나를 둘러 몸을 강화해 놓았다.


“응.”

“차…흐으!! 찬영!… 찬영!! 흐아아아!!”


“응…”

“보고… 흐윽…! 보고, 싶었…!! 흐으으으!! 흐아아아!!”

“응… 미안해.”

- 스으윽. 스윽.


나는 이대로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가 원하는 만큼 나를 끌어안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7년간 그녀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그 정도의 보상은 충분히 줄  있었다.

“너무, 너무, 보고, 흐으으아!! 흐윽…!! 싶었, 흐으아윽…!!”


한참을 울었다.


한참을 내  안의 냄새를 되새기려는 듯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지 확인 했고,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매만졌다.


입술.

귀와 코, 눈.


심지어는 이빨과 눈썹까지 손가락 끝으로 만져가며 확인했다.

이미 눈물을 오래도록 흘리며 퉁퉁 부은 눈으로 다시금 눈물을 쏟아 내면서.


나는 그런 크리스의 손길을 부드럽게 웃으며 받아들였다.

가끔은 소매를 쥐어서 볼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다.


“찬영?… 찬영?…”


“그래.”

“…어떻게?…”

“…둘이 있을 때 얘기하자. 지금은… 우리 둘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고 눈을 크게 치켜뜬 마할을 보고 말했다.
다른 이들에게 내가 과거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밝혀야 할지는 좀 더 고민해야겠다.
나는 교관을 죽인 과거의 내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니까.
혹시 왕 자건… 아니, 제라드와 같은 반역자 취급을 받고 있다면 곤란해질 수 있다.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결정했다.

훌쩍!… 훌쩍!…

크리스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았다.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에 코는 훌쩍였지만, 눈물은 그쳤으니까.
신전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이제 11구역 전투직 합숙소로 복귀하고자 크리스와의 포옹을 풀려고 했다.

스윽…


꽈악!


하지만 그 행동은 크리스에게 저지당했다.
내게 떨어지는 것이 너무나 무서운지, 겁이 먹은 표정으로 포옹을 풀지 않으려 들었다.

- 절레절레!…


…심지어는 겨우 그친 울음이 터지기 직전인 얼굴로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이대로 있고 싶다는 강력한 의사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걸을 수가 없다.
표정을 보니 하루종일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 신전에서 하루를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손잡을래?”


“손?…”


“응. 자.”


나는 손을 뻗어 크리스의 손을 쥐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넣으며, 힘을  주어 깍지를 꼈다.
7년 전 보드라웠던 손바닥과 달리 굳은살이 만져진다.


…하지만 전혀 싫지 않았다.


“…”

“계속 이러고 있을게. 약속해. 대신에 포옹은 풀게?”

- …끄덕.


크리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와 떨어졌다.
손은 마주  채로.

“마할?”

“세상에  주홍빛 학살자가 눈물을… 예? 네? 저 부르셨나요?”


“네. 슬슬 상황이 마무리된 것 같으니 복귀하시죠. 백원후 빅터도 사살 했고.”


“…허허… 네. 그래야죠. 복귀. 예. 해야죠…”

마할 또한 상황이 어벙벙한지 나를 보며 연신 헛웃음을 흘렸다.
아마 나와 크리스가 상당히 애틋한 관계인 것을 눈치챈 듯하다.
우리 셋은 합숙소를 향해 출발하려고 했다.
첫걸음을  순간 크리스의 입에서 나온 고통 어린 신음이 아니었다면.


“아앗…”


“크리스?  그래! 다리? 다리가 아픈 거야?”


“아… 으응… 조금…”

크리스의 다리를 보니 발목 바로 위쪽의 종아리 부분이 크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금이 갔거나, 그와 준하는 수준의 부상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발을 땅에 딛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다친 채로  신전이 있는 곳까지 걸어  건가?…’


분명 엄청난 고통을 참고 이곳으로 왔을 것이 분명하다.
더는 그녀의 다리에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손을 잡을 필요가 없었네. 자. 좀 더 몸을 내게 기대어봐.”

“어?… 어어? 괘…괜찮…”


“하나. 둘…”


- 번쩍!

“꺄?!…”


나는 그녀를 들어 올려 안았다.
쉽게 말해서 공주님 들기 자세다.
크리스를 등에 업은 상태에서 걸으면 종아리 부분이 심하게 흔들리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 근력은 초인이었고, 크리스의 몸은 가벼웠다.
그녀를 들어 올리지 않을 만한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안아 들면 안 아파?”

“으…으응…!”

“한번 걸어볼게. 아프면 바로 얘기해.”


- 터벅터벅.

나는 그녀를 든 상태에서 시험 삼아 몇 걸음을 떼어 봤다.
다행히 크리스의 표정을 보니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파?”

- 도리도리.

크리스의 고개가 작게 도리질 쳐졌다.
고개를 빠르게 젓는 와중에도 동공은 내 얼굴에 고정이 되어 있는 것이  재밌었다.


“마할? 이제 된 것 같네요. 정말로 출발하죠.”


“아… 네… 그러죠.”


마할은 내가 백원후를 잡은 이후부터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이 세계는 사람 개개인의 필요도, 전투직인 우리에겐 무력으로 계급이 나누어 지는 특수한 사회라서 그런 걸까?
괜찮은 눈치를 가진 사람이다.


우리 셋은 합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크리스는 궁금한 것이 많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엇도 묻지 않았다.
크리스는 당장은 내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넘치도록 만족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크리스는 가는 도중 내게 안긴 채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계속 그러고 있으면 분명 목에 담이  것이 분명할 텐데도.

“너무 그러지 말고 편하게 내 쇄골에 머리를 기대. 부상자인데 무리하지 마. 눈물을 많이 흘려서 피곤  텐데, 조금 불편하지만 잠을 자도 되고.”


“…자고 일어나면 안 사라져?”

“큭큭. 안 사라져. 일어날 때까지 옆에 있을게.”


“정말?”

“약속할게.”


“약속… 한번 어겼잖아.”


“…이번에는  어길게.”


“믿어도 돼?…”

“응.”


……끄덕.


“…알겠어. 믿을게.”

투욱.

크리스는 믿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지만, 여전히 나만은 쉽게 믿어주었다.
정말로 피곤했나 보다.
내 쇄골에 머리를 기댄지  분 만에 눈을 감고 곤히 잠에 빠져든 것을 보니.

새액… 새액…


나는 그런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으며 합숙소로 향했다.
손이 남지 않아 크리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