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81)화 (81/310)



〈 81화 〉테라포밍 *

“역시… 내 예상이 맞는 것 같네.”

애초에 예경의 구슬 사용 효과가 ‘원래의 시간대로 귀환’이라고 나왔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 같은가?
당연히 시간대에 변경이 있다는 말이다.
몽환의 구슬을 사용해 과거로 온 것처럼.


내가 있던 장소는 변하지 않았다.
이곳은 여전히 11구역의 정찰 구역 내부였다.
혹시나 해서 11구역 전투직 합숙소의 방향으로 가니, 어렵지 않게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물의 겉을 거니는 사람 중 아는 얼굴은 없었다.
더 가까이 가면 무척이나 수상쩍게 보일 테니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 탁탁탁!!

“…일단 북부 훈련소로 가봐야겠어. 그래야 지금이 어느 때쯤인지 추측이 가능할 테니…”


내 스텟은 스킬의 버프를 받으며 이미 나탈리야 카야의 스텟을 뛰어넘었다.
물론 그녀가 가진 유독 높은 지능 스텟을 제외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마나를 담아서 뛰면 11구역에서 훈련소로 가는 것에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 탁탁탁!!




“…있다.”


저 멀리서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한창 훈련생에게 윽박지르고 있는 완전한 주황색 머리를 가진 그녀를.
어째선지 그리움이 몰려든다.
그녀가 죽은 줄만 알았던 나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차피 3시간 후면 돌아갈 테고… 굳이 지금  모습을 보여줘 혼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


그녀를 보자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
빨간색 구슬, 예경의 구슬은 미래를 겪도록 하는 구슬이다.


직접 미래(豫)를 경험(經)하고 오기에.
예지(知)도 아니고, 예시(視)도 아니고, 예경이라니…
참 재미없는 말장난이다.


“…”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보고 있기에 그녀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상태창을 열었다.

=
[이름] 크리스 베넷
[직업] 교관
[힘] 27 [민첩] 34
[체력] 26 [지능] 20
[기교] 29  [매력] 49
[마나] 142

[특성] 『자애』
=


“아직… 원래 시간대의 과거구나.”


그렇게 판단한 첫 번째 근거는 크리스의 스텟에 있다.
지금 그녀의 스텟은, 내가 원래 있던 미래의 수준까지 아직 닿지 않았으니까.
멀리 보이는 크리스의 외견을 보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스텟이 깎인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스텟 성장률을 생각해 보면… 대략 2년 전쯤?”


두 번째 근거는 모인 훈련생의 숫자다.
훈련생들은 30~40명 정도로 보였다.
크리스가 훈련생일 때는 20명이었는데, 2배로 불어난 것이다.
이 정도면 2년 전이라고 해도 딱 들어맞았다.
구슬을 사용하면  5년 뒤로 보내주나 보다.


이왕 이 시간대로 온 것,
확인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생겼다.

원작에서도 ‘혁명을 일으킨 주동자 교관’은 살해가 되었다고 했다.
내가 직접 겪었다시피 그 인물은 제라드였다.
아마 원작에서도 제라드는 살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가슴 한구석을 찜찜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원래의 시간대에서 제라드가 살아 있었어… 그건 왜 그랬지?’


원작과 똑같이 제라드는 살해되었다.
하지만 훈련소를 습격한 인물의 이름은 제라드였다.
물론 내가 과거로 가지 않았다면 제라드는 살아 있는 것이 맞았으리라.
그렇다면 원래 시간대로 돌아갔을 때, 훈련소를 습격  ‘제라드’라는 인물은 다른 인물로 대체 되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다.
눈을 잃은 백원후, 이강인과 마찰한 크리스를 보면 내가 겪은 시간대는 이미 7년 전 나의 행동을 영향받은 미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제라드는 살아 있는 것이지?
난 분명 그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11구역의 전투직들이 그의 사망 선고까지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망 선고가 나를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혹시 제라드가 죽지 않았으면, 그를 방치하고 한 명도 빠짐없이 나를 쫓아올 리가 없었으니까.


‘둘 중 하나겠지.  세계관에는 죽은 사람을 되살릴 방법이 있거나, 훈련소를 습격한 제라드가 내가 아는 제라드가 아니거나.’


후자는 훈련소가 습격받았을 때, 내가 제라드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아무리 판타지 세계관이라곤 해도 사람을 쉽게 살리긴 어려울 테니 후자에 힘이 실렸다.

사건의 경위는 3시간 뒤 현실로 가 파악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나는 훈련소로 가보기로 결정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었기에.

나는…
크리스의 안위를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외적인 상처가 아닌, 내면의 상처를.

“…크리스는 나를 원망하고 있으려나?”

5년가량이 흘렀지만 나를 잊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건 확신할  있다.
인간은 첫사랑조차 쉽게 잊지 못한다.

반면에 우리는?
싸우다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전날까지 서로의 애정을 확인했다.
크리스의 첫 사랑, 첫 키스, 첫 경험 모두 내가 가져갔다.
그녀 내면에 있던 트라우마를 이겨낼 발판이 되어 주었다.
이 세계에 소환되고 훈련에 따라가지 못해 지쳐있을 때, 유일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내가 죽은 줄 알고 있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길 유도 했으니까.”


이별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크리스는 한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을 것이다.
내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힌트를 좀  던져 주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몰랐겠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 미래에 관한 설명을 해주는 순간 원작과 너무나 틀어져 버린다.
안타깝지만 그런 상황은 경계해야 한다.
내게는 나의 죽음을 위장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함부로 행동했다가는… 크리스가 죽어버리는 미래가 되어버릴 수도 있어.’

미래를 바꾸려 들어서는 절대, 절대 안 된다.
이 세계는 전투직이 픽픽 죽어 나가는 세계다.
전투직으로써 7년간 사지 멀쩡히 살아있는 사례는 결코 흔하지 않으리라.


심지어 지나갈 7년 동안 내가 간섭도 못 한다.
시간이 흐르던 중간에 크게 잘못되더라도 수를 쓸 수 없다.
7년이란 기다란 시간을 예상이 불가능한 변수 속에 크리스를 놔두는 것은…
정신 나간 도박이다.

그녀가 살아 있는 확실한 미래를 버리기 싫었다.
원래의 시간대에서 크리스는  박찬영이 죽은  알고 있다.
내가 과거로 오기 직전에  얼굴을 붙잡고 했던 말을 기억하면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크리스는 크게 다친 곳 하나 없이 잘 살아 있었지.’


그렇다면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리라.

이제 결정을 내렸으니 훈련소에 잠입하면 된다.
하드모드 퀘스트의 보상으로 받은 스킬을 사용해서.

띠링!

=
[스킬 이름] 디시빙(Deceiving)
[레벨] 1Lv
[속성] 마법
[타입] Active
[상세]
마나를 소모하여 자신의 외형을 바꿉니다.
인간의 형태만이 가능합니다.
키는 늘이고 줄일  없습니다.
유지에 마나가 듭니다.
오래 유지할수록 점점 더 소모 마나량이 많아집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00:05:00
=


나는 이미 훈련소를 달려오며 하드모드 퀘스트의 보상을 확인했다.
마나각성의 효과는 물론, 새로 얻은 스킬까지도.
잠입에 최적화된 이 스킬을 보았기에 잠입을 염두에 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얻어야   두 가지.
제라드의 정보와, 나를 향한 크리스의 감정을 확인 하는 것이다.

‘크리스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동시에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겠지.’

두 정보 모두 훈련생이 물어보면 어디서 들은 이야기냐며 심문을 당할법한 이야기다.
그렇기에 내가 위장할 인물은 정해져 있다.


그녀와 친분이 있는 브랙이다.

브랙과 나의 키는 비슷하다.
게다가 조금만 지나면 브랙이 잠에들 시간이다.
그와 함께 지옥 훈련을 하며 브랙이 잠을 자는 시간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즉, 내가 브랙으로 변장하더라도 알리바이가 겹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문제는 나와 브랙의 덩치가 좀 차이가 난다는 건데…

“디시빙(Deceiving).”


- 우웅.


스킬이 발동되며 마나가  신체를 뒤덮었다.
변한 나의 모습을 잘 살펴보았다.

“…좋아.”

다행히 근육의 크기 같은 외견은 스킬로 모방이 가능했다.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나는 브랙이 잠자리에 들 시간까지 조금 기다린 다음, 훈련소로 향했다.




*


- 똑똑.

크리스는 자신의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브랙이 서 있었다.
크리스로서는 상당히 의외의 방문이다.
브랙에게 지금 시각은 ‘규칙적인 생활 습관 역시 훈련의 일부’라고 하면서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으니까.

“브랙?”

“…잠깐 이야기를 조금. 회의실로 가는 것이 어떤가.”


“업무 관련? 알겠어.”


여성이 지내는 방 안에 들어가기보다는, 회의실로 그녀를 불러낸다는 선택은 크리스가 알던 브랙이 할법한 선택이 맞았다.
브랙은 그 언행에서 예상이 가능한 것처럼 고지식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크리스는 의심 하나 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걸치고 나왔다.

“가자고.”

- 터벅터벅.

둘은 회의실 안에서 적당히 자리 잡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확히는 크리스가 브랙이 용건을 꺼내길 기다렸다는 것이 옳으리라.

“제라드는… 꽤나 반군의 총통을 오래도록 맡고 있군.”

“아, 그녀석? 그래도 처음에 말 많았잖아. 내부 분열도 몇 번 있었던 것 같던데.”

“으음… 내부분열이라…”


“쳇. 그때 완전히 박살 냈어야 하는데… 하필 우리가 11구역과 제일 먼 5구역에 배정을 받아서.”

“…그때 우리는 교관이 아니었지?”


“그렇지? 한창 전투직으로 죽어라 구르던… 큼! 교관직을 맡기 위해 경험을 쌓던 시절이었지.”

브랙의 앞에서는 일부러 말을 천박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 생각한 크리스는 이제는 입에 달라붙은 말투를 고쳐 말했다.

브랙은 크리스의 말에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크리스를 향해 작게 뱉었다.

“왕 자건…”

확신에 차지 않은 작은 목소리었지만, 크리스는 알아들었다.
5년 만에 듣는 이름이다.
이제는  자건보다는 제라드 쪽이 그녀에게 익숙했다.

“왕 자건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제라드의 전 이름이었지 그게?”

“…그렇군.”

- 끄덕.


브랙은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크리스의 말에 동의했다.
크리스는 아직 브랙의 용건을 듣지 못했다.
뜬금없이 자신에게 와서 과거 이야기를 하자고 불렀을 리도 없고…
그런 의문 어린 시선이 브랙을 향했을 때,
브랙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털지 못했나?”


“응? 무슨 이야기?”

“그… 5년 전 이야기다.”

크리스는 브랙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브랙의 곤란해 보이는 표정이 어떤 화제를 말하고자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으니까.

“…그러네. 너도 슬슬 걱정될 때가 됐나…”


지금까지 브랙은 크리스에게 이 화제를 꺼낸 적은 없었다.
성실한 그가 그녀에게 해주는 작은 배려이리라.
크리스는 그제야 브랙이  잠도  자고 찾아왔는지 알았다.
이 이야기는 낮에 하기엔 너무 어두운 이야기였으니까.

“5년이야 브랙. 5년하고도 75일이 지났어. 당연히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잊었지. 날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때 이후로 날짜를 전부 세고 있었군.”


움찔.

“아직 잊지 못했나?”


브랙은 크리스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5년 전, 그녀의 연인과 함께했던 2개월을 잊지 못했다.
그때 이후로 날짜를 하나하나 셀 만큼이나.


“…덥네. 창문  열까?”

“그만두지. 혹시 이야기가 밖으로 세어나갈 수 있으니.”


“응… 그래야겠다.”

5구역의 주홍빛 학살자라 불리던 여인은 이곳에 없었다.
애초에 평소의 강인하던 모습은 전부 만들어낸 것이었다.
입이 험해지고, 겉모습만이 완벽히 변해 모두를 속이고 있었을 뿐.
그녀는 여전히 속이 여린 여인이었다.


- 털썩.


크리스는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 앉았다.
들킨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차라리 속 시원하게 이야기라도 하고 싶어졌다.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잊고 싶은데 못 잊겠더라. 그거 알아? 찬영은 가끔 내 꿈에 나온다?”


“…”

“…가끔이란 것은 거짓말. 사실 이틀에 한 번꼴로 나와.”


“후우…”

“그런데 웃긴 게 뭔  알아? 난 아직도 찬영이 꿈에 나오는 것이 악몽인지, 아니면 좋은 꿈인지 구분을 못 하겠는 거야. 꿈을 꾸기 시작한 지 5년이 지났는데도.”

만나지 못하는 연인의 꿈을 꾼 것에 아파해야 할까? 아니면 꿈에서라도 만난 것을 기뻐해야 할까?
꿈을 깨는 순간은 끔찍했다.
거대한 쓰라림이 그녀의 가슴을 덮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을 꾸는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그렇기에 크리스는 다칠 것을 알면서도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다.
무서워하면서, 기대하면서.

“…너무 깊었군.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는 것이 어떤가?”

“응… 그래. 고마워. 안 그래도  이야기 조금 더 했으면 눈물이 나올 뻔했거든.”


“오늘 들은 이야기는 기억에서 지우도록 하지.”


“…그래 주면 고맙고.”


“먼저 돌아가겠네. 자네는  앉아서 쉬다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 …끄덕.


끼익… 쿵!

브랙이 회의실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한 탓일까?
크리스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잠깐의 시간 동안 마음을 다스린 크리스는 방 내부의 답답한 공기를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열었다.
몇 분  브랙도 떠나갔고, 대화가 새어나갈 리 없으니 망설이지 않았다.

- 덜컹!

“후우…”


밤공기를 들이마시자 들썩이던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그때, 크리스의 예민한 청각에 아주 미약한 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브랙이 코 고는 소리? …나랑 대화를 끝내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잠들었나 보네.”

심각한 대화가 오갔지만, 브랙의 생활 패턴 상  시간에 일어나 있는 것은 피곤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크리스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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