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테라포밍 *
머엉…
머엉…
“…우리야 그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어. 제라드가 지내던 방에서 발견된 ‘혁명 계획서’에는 중앙 지휘소의 습격이 예정되었었으니까. 그가 살해하지 않았다면, 모인 100명의 전투직들이 얌전히 탈주만 하지 않았겠지…”
머엉…
“피해가 걷잡을 수 없었을 거야. 많은 사람이 죽었겠지. 너의 애인은 그것을 막은 영웅이나 다름없어.”
크리스에게는 영웅 따윈 필요 없었다.
그녀는 죽어버린 영웅보단, 당장 옆에 있어 줄 박찬영이 필요했다.
“…이 세계에는 백원후라는 몬스터가 있어.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맞붙기보다는 우회하도록 권고하는 아주아주 위험한 몬스터지. 적어도 10명의 전투직이 모여야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는…”
“백원후…”
“우리는 도망친 박찬영 훈련생을 추적하는 배신자들의 흔적을 따라갔지. 그리고 그 끝에 있었던 것은… 눈을 잃고 발광하는 백원후 한 마리였어.”
“…서…설마!”
“…”
크리스의 앞에 물건 한가지가 놓인다.
담당자가 책상 아래에 내려져 있던 물건을 꺼낸 것이다.
그것은…
갈기갈기 찢어진 가죽 갑옷이었다.
“…뭔지 알아보겠어?”
“훈련생들이 보급받는 가…가죽 갑옷…”
가죽 갑옷은 피에 절여져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 갑옷 주인의 최후를 말해주듯…
이 피는 안면의 피부 1/4가 터지며 사방으로 흩어진 백원후의 피였지만, 그것을 크리스가 알 리는 없었다.
이곳에는 피의 주인을 찾을 만한 현대 기술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의 시체는 없었어. 하지만… 박찬영 훈련생은 가지고 있는 무기도 없었지. 그의 칼은 제라드를 찌른 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으니까.”
“…”
“안타깝지만… 전투직도 백원후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해. 어마어마하게 빠르거든. 놈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어… 그래서 한쪽 눈을 잃고 도망치는 놈을 놓친 것이고. …아마도 네 연인은…”
“…”
“후우…”
크리스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기 싫었다.
싫었다.
전부 싫었다.
백원후라는 몬스터도,
쉘터를 배신한 배신자들도,
눈앞의 가죽 갑옷도,
자신에게 이해 못 할 말을 하는 담당자도,
모든 것이다.
“시체… 시체는 없다고 했죠?”
“…그래.”
“그렇다면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수색…! 주변을 수색해 주세…!”
“…이미 최대한 할 수 있는 전부를 했어. 그리고… 백원후는… 으음… 육식을 해.”
“…”
저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
설마 찬영이 괴물에게 잡아 먹혔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저 담당자는 오해하고 있다.
그야 찬영은 강한걸.
항상 훈련소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고,
지옥 같은 훈련을 끝낸 직후에도 빌빌거리는 나를 챙겨줄 정도로 여유로웠고,
찬영이 지휘했던 우리 팀은 그 어느 팀보다 선두를 달렸고,
전투직들에게 따라잡히지 않을 만큼 빨랐고,
분명 내게 금방 돌아온다고 했고,
곧 다시 볼 거라고도 했고,
찬영은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도 엄청 많았고,
여자들이 쳐다볼 때면 약간 불안했지만, 은근히 자랑스러웠고,
그리고,
그리고,
- 덜컹.
“…생각 좀 하다가 나와. 문 앞에서 기다릴게.”
“…”
“…이 방은 방음이 잘되니까.”
방음이 잘 된다는 것은 자신보고 목놓아 울더라도 밖까지 들리지 않는다는 뜻일까.
담당자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자신은 울지 않을 것이다.
찬영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분명히 아직 찬영은 죽지 않았다.
생각했다.
생각하고 생각했다.
찬영이 살아있을 이유를, 만들어 낸다.
그 경우의 수를 찾아내었다.
3일간 흔적을 찾지 못한 이유…
‘그건… 그건…’
그래!
분명히 다리를 조금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서…
수색대가 자신을 발견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찬영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니 분명히…
…그러면 왜 가죽 갑옷은 이렇게 찢어져 있었지?
이 피는 누구의 피지?
‘그건… 어… 그… 그건…’
- 터벅터벅. 끼이익… 쿵.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담당자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그녀를 방해했다.
크리스는 생각이 끊어진 것에 안도했다.
계속 찬영이 살아 있을 경우의 수를 만들어 내기에는…
언젠가 반박하지 못할 벽에 부딪힐 것 같았기에.
이제 크리스는 혼자 남았다.
좁고, 조잡하게 만들어진 전등이 애매한 밝기로 방을 밝히는 방 안에 홀로.
“…”
고개를 책상으로 돌렸다.
그녀의 눈에 피의 범벅이 된 찢어진 가죽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 갑옷이라 부르기 어려운 것을 매만졌다.
‘아… 이거 찬영이 다시 써야 하는데…’
괜찮다.
찬영의 것이 아닌 게 분명한 피는 씻어내면 그만이었고,
찢어진 가죽은 그녀가 보상으로 받은 자수 세트로 열심히 꿰매면 될 것이다.
그렇게 멀쩡해진 가죽 갑옷을, 수색대에게 발견된 찬영에게 돌려주면…
그는 여태 그래왔듯이 그녀의 머리를 상냥히 쓰다듬으며 칭찬하리라.
툭.
“…?”
바지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고개를 내려 확인 해 보니, 천으로 된 바지에 작고 동그란 얼룩이 하나 놓여 있었다.
얼룩을 매만져 본다.
갑옷에서 묻어 나온, 딱딱하게 굳어 가루가 된 피가 달라붙은 손으로.
얼룩은 축축했다.
툭.
아, 또 하나 더 생겼다.
얼른 그 얼룩을 매만지니…
따뜻했다.
툭. 투둑.
얼룩이 점점 더 많아진다.
이제는 그녀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 얼룩은 눈물이었다.
자신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흑… 흐윽…”
더는 외면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크리스는 멍청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찬영은 죽었다.
쉘터 안의 얼굴 모르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배신을 막을 수는 없으니, 그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흐윽… 흐으윽… 왜… 왜애… 왜…”
양손을 들어 심장 부위를 내리누른다.
누르지 않기에는 가슴이 너무나 아파져 와 참을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흐으윽… 왜애애애!!! 왜!!”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숨이 가쁘게 쉬어지고,
자신의 곁을 떠나간 찬영을 원망한다.
“왜애애!!…”
왜, 왜 그랬나요, 왜 당신이 희생했나요.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왜 당신이… 나와 함께 살아갈 미래보다 수십 수백의 목숨이 중요했나요? 나는, 나는 그렇지 않아요. 다른 수백의 사람보다 당신이 더 소중해요. 이기적이지만,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보단 당신이 훨씬 중요해요. 어째서 나를 놔둔 건가요.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당신의 마지막을 곁에서 보고 싶었어요. 나는 그때의 헤어짐 마지막인 줄 몰랐어요… 다시… 다시…
“흐윽… 흐윽… 본다며… 다시 본다면서…!”
나중에 다시 만날 거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요?
내가 죽고 난 뒤, 천국이 있다면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뜻이었나요?
…알아요…
나를 남기고 갈 생각은 없었겠죠.
분명 찬영은 내게 돌아오려고 했을 것이에요.
찬영은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찬영이 죽은 것은 사고였죠?
우연히 마주친 강력한 괴물에 의한 사고.
하지만…
그래도…
왜…
“그거였어…? 찬영이 하고 싶었던 것은… 사람을 구하고 싶었어?… 사람이 죽는 것이 싫었어?…”
너무나도 상냥한 사람.
동시에 이보다 더 없을 정도로 매정한 사람.
목숨이 위험한 것을 알아도, 기다리는 연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기어코 나서는 질 나쁜 사람.
…그렇다면 나도 그들을 위해 내 남은 삶을 살겠어요.
그것을 당신이 바래왔다면, 목숨까지 바쳐가며 바래왔다면, 당신을 사랑하는 나 또한, 내가 마지막으로 찬영에게 해줄 수 있는, 더는 볼 수 없는 사랑을 위한, 나의 마지막 배려.
- 벌떡!
당신은 내게 연기의 자질이 있다고 했죠. 나는 무엇이든 할게요. 미친 사람의 연기든, 피도 눈물도 없는 교육자의 연기든, 그렇게 보이도록 할게요. 그래야만 당신이 나를 버려두고 먼저 가버린 곳에,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덜 갈 수 있다면, 그걸 당신이 원하고 있다면… 교관이 될게요. 누구보다 강해져서, 노력해서, 죽지 않고, 한 명의 목숨이라도 구할게요.
찬영은 저와 당신이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라 했죠? 만약 원래는 죽었어야 할 사람이… 내 덕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그 수가 십을 넘고 백을 넘었을 때. 하늘에서 기다리다가, 제가 찬영에게 올라가면, 아직 못다 한 칭찬을 제게 해주세요.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상냥히 웃으면서. 꽉 끌어 안아주면서…
- 탁탁탁!! 덜컹!
“담당자님!!”
“어…?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얼굴이 엉망이잖아. 좀 더 있어도 되는데.”
“그보다! 교관, 교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교관? 전투직 훈련생 교관을 말 하는 거지? 그건 갑자기 왜?”
“어떻게… 흐윽…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답해 주세요… 제발…”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너는 좀 많이 어려울 거야… 아직 너는 배신자라는 의혹을 완전히 벗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 꼬리표는 평생 따라다닐 테니… 교관은 실력보다 신뢰가 더 중요해. 특히 이번 사건 때문에 더더욱 그걸 중요하게 볼 테고…”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냥 엄청나게 어려운 것일 뿐이죠?”
“…”
“그렇다면 상관없어요.”
어렵더라도 해낼 것이다.
어떻게든 교관이 될 것이다.
자신의 연인이 못다 이루고 죽은 그 꿈을, 자신이 대신해서라도 이루어 주고 싶었다.
“…내가 말릴 수는 없겠지만…”
“…담당자님. 저도 도전하겠습니다. 교관.”
“브랙 훈련생? 너 안 가고 옆에 숨어 있었어? 아니, 그보다 너는 왜?”
“약속… 한 것이 있어서요. 베넷 양과 그녀의 연인이랑 관련된.”
“힘들 텐데…”
“감수하겠습니다.”
- 후우…
“…좋아! 해보자. 난 너희를 응원하고 있다고. 일단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제대로 교관의 자격에 관해 설명 해줄 테니까.”
“가…감사합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
붉은 구슬에 마나를 불어 넣고 의식을 잃기 직전.
나는 몇 가지 의문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7년 후, 크리스가 빅터를 미친 듯이 증오하던 이유.
그것은 내가 빅터에게 죽은 줄 알고 있는 그녀의 오해에서 비롯되었겠지.
백원후 빅터도 집착이 대단했다.
11구역에 자리 잡으며 놓친 사냥감인 나를 7년이나 찾아 헤맸으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추가로 한 가지 더 의문이 해소된다.
미래에 그녀의 방에 놓여 있던 ‘11구역 관리소장 발행 / 동부 훈련소 출신 사망자 명단’ 서류와,
크리스가 이 서류를 보며 술을 마시던 이유가.
‘사망자도 사망자인데, 11구역의 빅터가 생각나서 술을 마신 것이구나.’
나를 찾아 헤매는 빅터가 11구역을 돌아다니는 전투직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습격이 자주 있었겠지.
빅터라는 네임드로 불릴 정도로.
‘큭큭… 눈 하나를 날려버렸다고 증오심에 미쳐, 나의 냄새가 나자마자 정신없이 달려 오셨구만.’
7년간 찾아 헤맨 나의, 눈을 잃게 만든 나의 냄새가 근처에서 난다?
원래라면 오는 것에 넉넉히 하루가 걸릴 거리를 미친 듯이 달려와도 이상하지 않다.
이것이 원작과 달리 하루 더 빠르게 빅터가 우리를 습격한 이유이리라.
고작 놓친 사냥감의 추적과 복수할 대상의 추적에 대한 차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도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곧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
띠링!
[*경고* 예경(豫經)의 구슬 사용 효과 ‘원래의 시간대로 귀환’이, 보다 상위 아이템인 몽환(夢幻)의 구슬 효과 ‘■■■ ■■’에 중첩되어 사라졌습니다.]
알림 소리에 눈을 뜨니 숲이었다.
시스템 문구를 읽고 나서는 붉은 구슬의 사용이 제대로 되지 않은 줄 알았지만, 완전히 변한 주위의 풍경을 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방금까지만 해도 해가 가장 높은 곳에 뜬 한낮이었는데, 곧 해가 지기 직전인 저녁으로 바뀌었으니까.
“상태창.”
띠링!
=
[이름] 박찬영
[직업] -
[힘] 20 → 23 [민첩] 20 → 23
[체력] 20 → 22 [지능] 8 → 9
[기교] 19 → 21 [매력] 31
[마나] 151 → 184
[특성] 『자연치유』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버프, 매력 제외 모든 스텟 +6 (00:00:02)
프룸의 버프, 힘·민첩·체력 스텟 성장률 증가 33% (01:31:23)
몽환(夢幻)의 구슬 사용 효과, ■■■ ■■까지 남은 시간 4시간 21분 32초. (4:21:32)
마나 각성, 힘·민첩·체력·지능·기교 스텟 성장률 증가 50% · 마나 흡수 小
현재 진입 중인 소설, ‘테라포밍’의 완성도 - 32% [열린 결말. 연재 중단과 다를 바 없음.]
보유 카르마: 15,275
=
상태창의 버프에는 예경의 구슬 사용 효과가 없었다.
그나저나 시스템의 자잘한 버그가 하나 더 발견되었다.
원래라면 예경의 구슬 사용 효과인 ‘원래의 시간대로 귀환’도 ‘■■■ ■■’처럼 가려져야 하지만, 가려지지 않았다.
덕분에 확신했다.
“원래의 시간대로 귀환 효과가 ‘중첩’ 됐다라… 즉, 몽환의 구슬 사용 효과도 ‘원래의 시간대로 귀환’이라는 뜻이겠네.”
7년 후로 돌아가기까지 남은 시간이 4시간이라…
그냥 이곳에 가만히 서서 보낼 수도 있었지만,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붉은 구슬의 사용 효과도 내심 궁금했으니까.
예상 가는 것도 하나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