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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79)화 (79/310)



〈 79화 〉테라포밍 *

왕 자건의 겪은 삶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의 나이는 고작 20대 초반이었으니까.
하지만 스스로는 뒷골목 생활을 하며 온갖 더러운 경험은  해봤다고 자부했다.

싸우고, 하루를 버티고.
다시 싸우고, 하루를 버티는 삶은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그에겐 싸움의 재능이 있었기에 굶지는 않았다.
오히려 넓지 않은 구역을 그의 주먹 아래에 평정하며 배부르게 지냈다.
하지만,
그는 늘 가슴속 공허한 무언가에 시달리고 있었다.


배를 채워도, 재화를 늘려도, 수많은 사람을 발아래에 두어도…
그 부족한 것은 전혀 채워지지 않았다.
왕 자건 스스로도 그 빈자리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이곳에서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건의 인생은 제라드를 만나고 변했다.
흑백과 같던 칙칙한 무색의 세상이, 눈을 뜨듯 색이 덧입혀졌다.
그는 드디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내게는… 삶의 의미가 없었어. 목적도, 뜻도, 그 무엇도. 내가 그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강한 무력을 가지고도 그 무엇하나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의 현실에 만족하며 계획 없이 살던 그였다.
100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무력의 재능을 가진 왕 자건이었지만, 50년 후에는 다른 99명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이름이 잊혔으리라.
무미건조하게.


그런 그를 제라드는 일깨워 주었다.


인류에게 닥친 위기!
인간의 내부를 곪게 만드는 기생충들!
혁명, 그리고 새로운 터전!

숭고했다.
삶의 목표로 정하기 더없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지구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하던 왕 자건의 손을 ‘필요하다’라고 말해주었다.
왕 자건의 눈에는 그런 제라드가 무척이나, 무척이나 빛나 보였다.
제라드는 자신의 길을 열어주었다.


삶이 뒤바뀌었다.
그날 밤. 제라드가 왕 자건과 둘이서 대화를 했을 때.
그는 자신의 남은 삶을 제라드의 의지에 투신하기로 마음 먹었다.

‘젠장, 박찬영 그 새끼는 도대체  이렇게  오는 거야?’

박찬영은 왕 자건에게 아직 훈련장으로 오지 않은 크리스 베넷과 브랙을 찾으러 간다고 했다.
하지만 15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왕 자건은 훈련장에 모인 모든 훈련생을 이끌고 집결지로 향했다.
제라드에게 전달받기로는, 브랙이라는 훈련생을 제외한 모두가 이미 자신의 동료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한번 제라드의 위대함에 작게 전율한 그는, 곧 집결지로 도착했다.

그리고는…


등이 칼에 꿰뚫린 채 싸늘하게 죽어있는 제라드의 시신을 마주쳤다.

“제…제라드님?”
“교관님이… 죽었어!…”
“누가? 혹시 중앙 지휘소에서 눈치챘나?”
“우…우린 어떻게 하지?…”


“…”


 자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뒤에 선 훈련생이었다.
하지만 그가 훈련생들의 소란을 진정시켜주기에는 그의 안에서 하나의 감정이 너무 커다랗게 소용돌이쳤다.


 자건은 지인의 죽음에 익숙했다.
그렇기에 우상의 시신을 보고 당황하기보다는, 분노했다.
그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 격렬한 적이 없을 정도로 뜨겁게.


“박찬여어어어엉!!!…”

제라드의 등에서 뽑히지 않은 칼은 훈련생이 보급 받은 칼로, 왕 자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칼과 같았다.
이곳은 전투직 훈련소.
훈련생의 칼이 남아돌 리가 없으니 범인은 단숨에 셋으로 좁혀졌다.
하지만, 왕 자건은 범인이 누구인지 확신했다.


그밖에 없다.
자신의 우상을 완벽히 속이고 뒤를 찌를 만큼 영악한 놈은.
훈련생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이겨내지 못할 만큼 강한 교관을 망설이지 않고 찌를 담력을 가진 놈은.


스윽.

왕 자건이 바닥을 흐르는 피에 손에 대었다.
굳은살이 잡힌 손바닥에 제라드의 붉은 피가 묻어 나온다.
그리고 왕 자건은 자신이 박찬영을 찾지 못하리란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식은 지 한참 됐어… 놈은 이미 도망쳤다…!”

왕 자건의 머릿속에 수백의 생각이 뒤흔든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의 미래를 열어준 자는 죽었다.
그럼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자신의 인생에서  세운 목표를?
평생의 공허를 메워 준 목적을 이루려는 의지를?
…아니,
아니다.
나는 시작조차 못 했다.
실패를 인정하지 못한다.
아직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아직 제라드님은 실패하지 않았다.
이제 시신이 되어버린 그분의 목표는…


‘…내가 이어받겠다.’


- 퍼억!!

“크흑…!”


그때, 누군가가 왕 자건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제압했다.
왕 자건은 누군가가 다가오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습격자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그가 바닥에 완전히 짓눌려 제압되었을 때였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짓누른 존재를 확인한다.

“총통님이 죽었다. 네놈의 짓인가 훈련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지닌 무력을 봤을  그가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왕 자건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왕 자건을 제압한 10명이 안 되는 인물들은 제라드의 명을 받고 이곳으로 집결한 전투직이었다.
막 도착한 11구역이 아닌 다른 구역의 전투직들.

“…놔.”

“대답해라!!”

9명의 전투직들은 전부 분노한 얼굴로 칼을 빼 들고는 훈련생들을 위협했다.
왕 자건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놓아라. 내가 아니다.”

“그럼 범인이 누구인지, 목적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전부를 샅샅이 말해야…!”

“마지막으로 말하지. 손 놔.”

- 움찔!


“…”

스으윽…


 자건의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며 스킬이 발동된다.
그를 제압한 전투직은  자건에게 위압되며 저절로 몸이 그를 풀어주었다.
왕 자건은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일어선다.


혁명을 약속한 12구역 전투직 남자는 당황 했다.
그는 이런 위압감을 과거에 여러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존경하는 총통님이 가진 카리스마와 무척이나 비슷한 종류의 것이다.


당황한 전투직을 한번 내려본 왕 자건은 곧 입을 열었다.
박찬영이 제라드를 배신했다는 것은 단순히 왕 자건의 감이었다.
하지만 왕 자건은 자신의 육감을 신봉하는 타입이었다.
거친 삶을 살아오며 육감의 덕을 크게 봤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어계셨다.”

“……”

“범인은 박찬영이라는 훈련생, 그가 총통님을 배신하고 도주했다. …이미 멀리 도망친  같더군.”

“젠장! 지금이라도 쫓아야…”

“잠깐, 나는 총통님께서 직접 지목하신 후계자다.”

“뭐라고?…”


“그분의 목표는 내가 이어갈 것이다. 혁명은 중단하지 않아. 계속 진행한다.”

“…하! 건방진. 감히 제 주제도…”


“다물어.”


- 움찔.


외각에서 입을 연 전투직을 향해 다시 한번 왕 자건의 스킬이 발동된다.
고작 두 번의 사용으로 왕 자건에게 마나는 전부 떨어졌다.
하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방금 전투직이 말 한마디로 제압당하면서 분위기 흐름이 왕 자건의 손안으로 완벽히 넘어갔다.
이제 이 자리 그 누구도 왕 자건의 말을 허투루 듣지 못했다.
그것으로 만족했다.


“지금 당장의 내 무력은 너희들보다 부족하다. 하지만, 나는 총통님께 직접 지목을 받은 후계자이지.”

“…그에 대한 증거는?”


“없다. 그러니 직접 보여주도록 하지. 너희들은 나를 보며 느긋하게 판단하면 된다. 따를만한 인물인지, 그렇지 않은지.”


“…”

“내 개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겠다. 왜곡하지 않고 총통님의  그대로를 실현하겠다.”

당연히 왕 자건이 제라드에게 후계자로 지목을 받은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제라드의 뜻을 이어갈 수만 있다면, 수단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건의 숭상은 어딘가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지구에서 조직을 이어받을 때도 이런 식으로 거짓을 뱉은 적이 있다.

효과적이었다.
거짓이라 치부한 사람도 많았지만, 사실이라 생각한 자도 많았으니까.
이미 죽어버린 자는 말이 없다.
그것은 그가 존경하는 인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맹세의 증명, 그  단계로써. 나는 나의 이름을 버리겠다.”


그가 태어나며 받은 이름은 왕 자건이 아니었다.
조직을 이어받을 때 같이 이어받은 이름이었다.
지금의 상황과 똑같이.


이번에도 왕 자건은 자신의 이름을 내버렸다.
조직을 조금이라도  온전히 흡수하기 위하여.


“이 순간부터 내 이름은 제라드. 오직 인류를 위해 내 삶의 전부를 바치겠다!”


*






작은 손끝이 떨린다.
크리스 베넷은 불안에 몸을 떨고 있었다.


본인이 심문을 받고 있는 상황 때문도,
3일 전 본인과 브랙을 제외한 훈련생의 탈주 때문도,
전투직들의 대규모 배반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가 불안을 떠는 원인은  하나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3일이 지났음에도 연인인 박찬영의 소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완벽히 의심을 받던 그녀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배신의 의혹을 약간 벗은 그녀다.
이제는 방에 갇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도를 거닐 정도의 자유를 얻었지만…

길을 가는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물어봐도 고개를 흔들 뿐, 박찬영의 정보는 한 티끌도 얻을 수 없었다.


- 똑똑똑!

끼이익… 쿵!

“…아마도 이걸 보면 …라고 추정이…”
“으음…”

방에 들어서자 여성과 남성이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려 온다.
크리스 베넷이 문을 열고 들어간 장소는 그녀의 담당자가 있는 사무실이었다.
담당자를 먼저 찾아온 선객이 있었다.
그녀와 함께 도망치지 않은 브랙이다.


브랙과 담당자는 언뜻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은 문을 열고 들어온 크리스를 발견했다.
그 둘은 크리스를 발견했음에도 굳힌 얼굴을 풀지 않고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를 이어갔다.


“음… 역시  이야기는 친분이 있는 제가 하는 것이…”

“아니, 내가 하도록 하지. 일이니까. 그만 나가 봐.”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 터벅터벅.

브랙이 크리스가  있는 문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크리스의 옆을 지나치기 직전.

“…베넷양, 음… …후우. 아닙니다.”


- 터벅터벅. 끼익… 쿵!


브랙이 크리스를 보곤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깊은 한숨만을 내쉰 다음 방을 나섰다.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이다.
그런 브랙의 반응이 크리스에겐 원인 모를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

“크리스. 크리스 베넷. 잠깐 앉지.”

크리스는 담당자의 말에 말없이 그녀의 앞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얌전히 눈앞의 담당자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자네의 애인. 그러니까… 박찬영 훈련생의 소식이 정리되었어.”


“…! 정말인가요?!”


“그래. 후우… …정말 듣고 싶어?”

“당연하죠!”

담당자의 입에서 기나긴 설명이 시작되었다.
크리스는 자신의 귀에 들려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알기로 자신의 애인은 ‘작은 볼일’을 보러 사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정말 찬영이?…”

“그래. 그가 주동자인 제라드를 살해했다 추정 중이야. 제라드의 시신은 놈들이 수습하며 가져간  같지만, 제라드를 찌른 칼은 남아 있었지. 훈련생용 칼이었어. 그 칼이 비는 곳을 추적해 보니 그것밖에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더군.”

“그럼 지금 찬영은 어디 있나요?! 무…무사한가요? 그리고…! 그리고…!”

“그만. 일단 계속 들어 봐. 그는 쉘터를 배신한 11구역 전투직들에게 추적을 당한 모양이야.”

“추…추적…?!”

벌떡!


크리스는 사색이 되어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훈련생인 그가 전투직에게 쫓긴다니!
 좋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설마… 설마…

“…흔적을 추적해 보니 박찬영 훈련생은 전투직에게 따라잡히지 않은 듯해. 생각보다 그가 가진 무력이 뛰어났나 보더군.”

“하아…!”

털썩…

담당자의 말에 크리스는 다리의 힘이 풀어지며 의자에 쓰러졌다.
어떻게 자신의 애인이 전투직을 따돌렸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주…죽지는 않은 거죠? 그러면 돼요… 그거면…”

“…죽지 않았다라…”

크리스는 찬영이 추적자에게 죽지 않았다는 것에 신께 감사드렸다.
어떤 후유증이 그에게 남았더라도 그녀는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그녀의 애인이 자신의 곁에 있어만 준다면.



“…잘 들어. 네 연인인 박찬영 훈련생은…”

담당자는 말을 하려다가 망설이듯 옆의 빈 허공을 살짝 흘겼다.
크리스의 눈을 마주하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담당자의 반응에 안도하던 크리스의 마음에 금이 갔다.
괜히 불안한 생각이 든다.

크리스는 왠지 다음 이어질 담당자의 말이 듣기가 싫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담당자의 입을 타고 귀를 의심하고 싶어지는 말이 나왔다.

“…이미 사망했을 확률이 높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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