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테라포밍 *
띠링!
[*HARD MODE* 퀘스트, ‘반란군 주동자 살해’ 클리어!]
안타깝지만 한가롭게 스킬 설명을 읽어볼 시간은 없었다.
나는 지금 다섯 명의 전투직에게 쫓기고 있었으니까.
역시 내 생각대로, 그들과 나의 속도는 비슷했다.
그들은 나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익…! 훈련생 새끼가 왜 이리 빨라!!”
“괜찮아! 놈의 마나는 곧 떨어진다! 지구전으로 가면 잡을 수밖에 없어!”
“잡히면 사지를 찢어주마 개자식!!”
안타깝지만 내가 보유한 마나는 숲을 달리고 있는 여섯 명 중 가장 높았다.
이들은 왜 나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약하기 때문이다.
제라드나 7년 후의 크리스, 브랙과 같은 교관의 스텟이라면 나의 속도는 금방 따라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전투직이다.
‘7년 후 미래에서 만난 카야, 실습에서 우리를 인솔한 인도 출신 전투직 마할의 덕에 알 수 있었지.’
평범한 전투직은 교관보다 훨씬 약했다.
아니, 그 반대다.
교관이 전투직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기에 교관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
지금은 해가 하늘에 한창 뜬 한낮.
선령일일 만요월월(仙令日日 灣謠月月)의 버프로 모든 스텟에 +6의 버프를 받는 나는 이들 개개인의 스텟과 비슷했다.
‘마나는 내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들이 나를 따라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그저 그들이 마나가 떨어질 때까지 이렇게 숲을 빙글빙글 돌다가, 그들이 지쳐 떨어져 나갈 때 쯤 몸을 숨겨서 반란이 진압되길 가만히 기다리면 그만인 이야기다.
이것이 나의 계획이었고, 아직까지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완벽히 들어맞았다.
“이익…! 어째서! 어째서 아직까지 놈의 마나가!”
“젠장!”
- 탁탁탁!!
- 탁탁탁!!
나를 쫓던 놈들의 마나가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는 듯했다.
슬슬 나도 몸을 숨길만 한 장소를 찾아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쯤.
- 쿠우웅!!
…내가 염두에 두었어야 해야 했지만, 제라드의 살해에 집중해 잊고 있던 재앙 하나가 우리 여섯 명을 덮쳤다.
“얽…?”
- 뿌드드득!
“끄륽…”
나를 쫓던 전투직이 다섯 명에서 네 명으로 줄었다.
한 명이 허리가 뒤로 접힌 채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씨발… 이 새끼를 잊고 있었네…’
- 끼이이이익————!!
아직 완전히 늙기 전.
한창 전성기의 백원후,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빅터가 우리를 찾아왔다.
“배…백원후?”
“어째서 이렇게 인간의 영역에 가까이?”
“노…놈이 달려든다!”
- 끼이이익 ! 끼익———!!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마나를 사용할 줄 아는 놈은 가진 스텟 이상의 속도로 달려들었다.
“뭉쳐! 틈을 주지 마!”
“일이 왜 이렇게 꼬인 거지? 왜?”
어째선지 빅터는 내게 관심을 두기 보다는 뭉쳐서 저항하는 전투직들에게 먼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내가 도망치려고 조금만 몸을 틀면…
- 끼이이익————!!
콰앙!
“큭!”
놈이 나를 향해 도약했으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빅터가전투직에게 달려들 때까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당장 저 전투직들과 협력해도 놈을 완전히 이기기는 어려우리라.
왜냐하면 저 4명 남은 전투직들은 사실상 전력에 도움이 전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움직임에 방해만 되면 되었지.
“제…젠장! 마나가… 거의 없어…!”
“크윽… 끄아아아악!!”
- 뿌드드득!
- 끼익 ! 끽-!! 끼이익—!
놈들은 긴 거리를 달려오느라 마나를 거의 다 소모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다시 한 명의 목숨이 백원후의 손에 사라졌다.
별로 아깝지는 않았다.
내 적들의 목숨을 던져줘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달아날 수 있다면 몇 명이고 던져주리라.
타악!
나는 백원후와 전투직이 맞붙는 것을 보자마자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도망쳤다.
인벤토리에서 훈련생용 가죽 갑옷을 꺼내 입으면서.
- 쾅! 콰앙!
“찔러어어엇!!”
“끄아아앗!”
뒤쪽에서 격한 전투 음이 들려온다.
앞으로 달리면 달릴수록 뒤에서 들리는 인간의 비명은 하나씩 줄어갔다.
셋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그리고 다시 정적.
- 끼이이이익———!
놈이 멀리서 승리의 포효를 내지른다.
…당연하지만, 놈은 나보다 더 빠르다.
나는 머지않아 따라 잡힐 것이다.
결국 맞붙을 수밖에 없는 건가?
‘젠장, 결국 이 새끼한테 구슬 3개를 다 꼬라박아야 하는 건가?’
노란 구슬과 파란 구슬에 이어 붉은 구슬까지.
전부 저 빅터 때문에 사용하게 생겼다.
‘하지만 적어도… 눈알 하나는 날린다는 건가.’
원작과 달리 7년 뒤 놈의 눈 애꾸눈이었다.
내가 적어도 놈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준다는 것이겠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제라드에게 회수하지 못한 그 칼이 아닌, 7년 후 미래에서 받은 그 훈련소 칼을.
쿵쿵쿵쿵!!
아무리 마나가 거의 없다고 한들 5명의 전투직을 홀로 상대한 놈은, 지친 곳 하나 없다는 듯 멀쩡하게 내 뒤를 쫓고 있었다.
이대로 뒤를 잡히기보다는 정면에서 자세를 잡는 것이 나으리라.
나는 뒤를 돌아서 내게 달려오는 놈을 마주 보며 자세를 잡았다.
놈의 돌진을 피할 준비를.
- 끼이이이익———!!
“흐읍!”
휘익!
쿠구구구궁—!
놈이 내게 양팔을 거세게 휘두르며 내가 있던 땅을 긁었다.
어지간한 기둥만 한 팔의 경로에 걸리는 나무들은 모두 박살이나 부서졌다.
저 휘둘러 치기를 정면으로 맞는다면 전신의 뼈마디가 2배쯤 늘어나리라.
겨우 몸을 날려 놈의 팔을 피한 나는, 어마어마한 도약의 후유증으로 자세가 완전히 흐트러진 놈의 허벅지를 칼로 베었다.
- 끼이이이익———!
“크윽… 왜 이렇게 질겨?”
놈의 가죽은 너무나 질겼다.
마나를 잔뜩 머금은 팔의 근력으로도 손쉽게 찢지 못할 만큼.
훈련용으로 주는 조잡한 칼이라 그런가?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몰래 전투직 합숙소에서 칼 하나를 인벤토리에 담아 오는 건데…!
- 끼이이익—!
퍼억-!
“커헉…!”
나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충격에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놈의 사지의 움직임은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에 손으로 맞은 것은 아니었다.
원숭이니까 발로도 공격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기에 손과 발 모두 빠짐없이 신경 썼지만…
꼬리를 이용해서 이렇게 묵직한 공격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 끼끼끼끼끽!!
“…시발놈이. 웃고 있네. 퉷.”
입가에서 흐르는 침… 아니, 피를 뱉으며 말했다.
놈은 나를 가지고 놀고 있다.
방금까지 내가 쓰러져 덮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바로 달려들지 않고 나의 추태를 비웃고 있었다.
진짜 괴물답지 않은 영악함이다.
땅에 강하게 긁히며 찢긴 것인지 상의 위에 걸친 가죽 갑옷이 걸레짝이 되었다.
이래서야 움직임에 방해만 된다.
나는 얌전히 내 모습을 구경하는 놈의 앞에서 당당히 가죽 갑옷을 벗어 땅에 던졌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7년 후에 받은 백원후의 가죽 갑옷을 꺼내…
백원후의 가죽 갑옷…
…어?
띠링!
=
[아이템 정보 확인]
이름: 백원후(白猿 ) 가죽 갑옷
종류: 장비
레벨: -
효과: 도검 내성 30%
상세:
강력한 마수, 백원후(白猿 )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입니다.
날이 서 있는 무기에 대한 저항력이 30% 증가합니다.
약간의 방한 효과도 있습니다.
=
“…이런 시발. 진짜 전투 경험의 부족함이 절실하게 느껴지네.”
일단 그 가죽 갑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 칼을 집어넣었다.
이제 내 손은 빈손이다.
누군가 보면 삶을 포기한 거냐고 물을 테지만, 실제론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프하하… 백원후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에 도검 내성 30%가 달려 있다라… 그런데도 멍청하게 칼질을 하고 있었잖아? 나는.”
백원후로 만든 가죽 갑옷이 칼날을 막는 것에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백원후가 칼날에 큰 저항을 가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닌가?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정말 다행이다.
나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천권일각(千拳一脚)의 기본형, 일정권(一正拳)의 자세를 취한다.
내가 ‘하얀 고래의 발자취’ 세계에서 밤낮은 물론이고 휴식과 식사, 수면 전부 없이 2주, 14일, 336시간가량을 연습한 그 자세를.
이제야 좀 자신감이 생긴다.
방금전과 달리, 지금부터 내 공격은 좀 아플 것이다.
바뀐 나의 분위기를 알아챈 것일까?
자신에게 겁먹지 않은 내 모습에 녀석이 불만을 느낀 모양이다.
콧김을 씩씩 뿜으며 내게 달려들 준비를 했으니까.
“들어와 개자식아.”
나는 자세를 잡았다.
맨 처음 백원후의 도약에서는 절대 이 기술을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놈의 첫 휘둘러 치기 공격은 몇백 미터부터 가속도를 얻어와서 온몸을 부닥쳐 온 정신 나간 물리력을 가진 공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거리에서 놈은 큰 가속도를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용할 수 있어. 이론상!’
이 기술을 얻은 이후 첫 사용이다.
하지만 무술 스킬은 그 특성상 습득 시 완벽한 이론 지식이 내 머릿속 박혀 든다.
이미 나는 이 기술을 펼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당황하지 않고 펼치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쿵쿵쿵쿵!!
- 끼이이익————!!
녀석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기까지에는 단 네 걸음으로 충분했다.
어마어마한 각력, 기다란 팔다리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하얗고 거대한 덩치가 나를 짓이기려든다.
나는 일정권의 자세를 유지한 채, 다리를 움직였다.
펼친다.
천권일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각법을.
‘사념각(邪念脚)!’
나를 덮치던 놈의 손바닥이 허공을 휘젓는다.
내 몸이 돌진하던 놈의 옆으로 물 흐르듯 움직였기 때문이다.
놈이 당황한 얼굴로 내 쪽을 흘겨봤다.
- 끽?!
무식하게 달려들던 백원후의 빈틈이 훤하게 드러났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일정권을 놈의 갈비뼈에 꽂아 넣었다.
이 짧은 순간 담을 수 있는 최대의 마나를 담아서!
우드드드득—!!
- 께에에엙…?!
콰당탕!!
백원후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저 거대한 덩치가,
고작 어린아이 머리통보다도 작은 내 주먹을 맞고서.
그것은 섹스와는 다른 종류의…
카타르시스가 온몸을 더듬는 듯한 쾌감이었다.
“후우… 후우…”
그 짧은 시간내에 주먹에 담을 수 있었던 마나는 고작 남은 마나의 1/5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도 놈의 갈비뼈를 부수기에는 충분했다.
제대로 옆구리에 들어갔다.
장기가 밀집된 급소이니만큼, 놈은 겉보기보다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
‘성공…했다!’
처음 써보는 사념각을 성공적으로 사용했다.
사념각(邪念脚)은 발차기 기술이 아니었고, 몸을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기술은 더더욱 아니다.
상대의 공격에 담긴 뜻(念)을 읽고 그 흐름이 흐트러지는 곳을 찾아내어 찌른다.
그것이 사념각이었다.
즉, 상대가 없으면 연습조차 불가능한 카운터 기술이다.
내가 지금까지 사념각을 사용하지 못한 이유다.
- 께렉… 끼릭… 끽…
“허억… 허억…”
놈이 전혀 예상치 못한 내장을 뒤흔드는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엎드린 자세로 내게 맞은 옆구리를 감싸 쥐며 고통을 죽이고 있는 백원후.
정말 얄궂게도, 놈의 얼굴은 내 바로 코앞까지 내려와 있었다.
“크하핫! 이래서 네놈의 눈알 한 짝이 없었던 거냐!”
급소가 눈앞에 있었다.
공격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일격을 놈에게 처박으면 된다.
천권일각이 0Lv에서 1Lv로 오르며 추가로 개방된 쌍요궁(雙搖躬).
나는 왼손과 오른손으로 쌍요궁의 묘리를 펼쳤다.
‘마나를 박아넣고…!’
퍼억-!
- 끼이익-?!
감긴 눈꺼풀 위에 주먹을 맞은 백원후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들려고 한다.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놈이 고개를 드는 속도보다, 내 오른손이 놈의 부릅떠진 동공을 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뒤흔든다…!’
빠아악!
오른 주먹이 부딪힘과 동시에, 놈의 눈알에 고여있던 나의 마나가 미친 듯이 진동을 시작했다.
여리디 연한 눈알은 그 충격을 단 1초도 버티지 못했다.
퍼엉-!!
- 끠에에에엙!! 끄엙!! 껡!!!
놈의 붉은 피가 사방팔방으로 튀며 잔디를 적신다.
백원후의 오른쪽 눈이었던 잔해들은 산산이 찢겨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흩어졌다.
심지어 눈알뿐만이 아니라 그 근처 1/4 넓이의 피부가 갈려 나갔다.
남아있던 마나의 대부분을 박아넣은 내 최선의 일격이었다.
이 정도의 위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섭섭하지.
- 파악!
“끄윽?!”
크고 우악스러운 두 손이 내 몸을 움켜쥐었다.
놈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얌전히 놈에게 잡힌 나를 노려본다.
고통과 분노로 어우러져 실핏줄이 터진 눈이다.
이대로 있으면 나는 놈의 손에 짓뭉개질 것이다.
하지만…
“큭큭큭… 야. 원숭이 새끼야.”
- 께에에에에엙——!!!
“7년 후에 보자.”
- 께에에엙—!!!
놈의 손에 잡히지 않은 팔로 인벤토리에서 붉은 구슬을 꺼낸 뒤, 망설임 없이 마지막 한 줌의 마나를 흘려보냈다.
익숙한 밝기가 주변을 채우기 시작했으며, 마나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그 현상을 받아들인다.
곧,
나는 정신을 잃었다.